드디어 버스가 서울 남쪽 어느 로타리 가까이에 서는 것이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영등포라 했다.시외버스 터미널이라 그런지 수많은 버스가 자기 집에 온 듯 줄 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마중 나와 줄 사람이 없었다. 멀리서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한 가족이 찾아왔는데도-
대신 우리 가족이 버스에서 보따리들을 내려 놓는 것을 보고 지게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싸게 해 들릴테니 갑시다.”
“얼마에 가실라우.”
서로 다투는 지게꾼들 틈바구니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우린 어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자 지게꾼들이 별 실없는 사람들 다보겠다는 듯이 하나, 둘 떠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지게꾼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럼 오늘밤은 어디서 주무실거유.”
“...............”.
어머니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지게꾼 아저씨가 친절히 일러 주었다.
“아주머니, 내말대로 하세요. 요 앞으로 죽 길을 따라 가면 철길이 나와요.
거기 위로 차가 다니는 굴다리 같은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다리 아래 판잣집을 하나 지으세요. 애기까지 있는데 당장 어떻게 할려구.....”
지게꾼 아저씨는 자못 걱정스러운지 찬찬히 일러 주었다.
“서울에선 아무데서나 함부로 잘 수가 없으니까 꼭 그리로 가서 내말 대로 하세요.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고 쫓아내려 들지 모르니까 아예 처음부터 루핑이나 판자를 사 갖고 가세요. 사람들이 뭐라 하든 말든 그냥 집을 지으세요. 모두 자기 땅은 아니니까 사는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꼭 집을 지으세요. 내말 알겠죠.”
“예,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 지게꾼 아저씨한테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신 것만 같았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미리 보내신 듯-
그토록 공들여 저금 한 돈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목제소를 찾아가 판자를 산 다음 지붕과 벽에 씌울 루핑과 못, 망치 등 연장까지 갖추고 지게꾼 아저씨가 말한 곳으로 갔다(지금 5호선 신길역 근처에 있는 다리).
아니나 다를까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여기다 집을 지으면 구청에서 쫓아낸다며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린 아직 어린아이들과 아기까지 있어서 그러니 좀 이해해 주세요”
어머니가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사이 아버지와 나는 무조건 집을 짓기로 하고 가지고 온 재료를 펼쳤다. 이제 서울 하늘에 임시로 살 터전을 꾸미는 거다.
“저기 다리에서 조금 떨어져 지어요.” 하고 내가 어머니께 말하자,
“왜, 비가 셀 지도 모르고 여러 가지 불편할 수가 있는데........” 하며 걱정했다.
“다리 아래 지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다리 밑에 산다 할 게 아녀요. 기껏 서울까지 와서 그렇게 보일 순 없잖아요. 그러니 다리에서 조금 떨어져 지어야 보통 집처럼 보이죠.
대신 지붕을 잘 만들면 되잖아요.” 하고 말하자 어머니도 내 청을 들어주었다.
“그럼, 그러자꾸나.” 급히 집을 지어 당장 잠잘 준비를 갖추었다.
대신 다리에서 떨어져 지은 탓에 여러 가지 불편이 많았다. 다리 위에서 담배꽁초를 던져 불이 날 뻔 하기도 하고 때론 소변을 남의 집 지붕 위에 누는 무례한 자들도 있었다. 이럴 때 나가서 위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다리 아래에는 네 가구 정도 살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이웃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또다시 고물을 주워 팔면서 생계비를 보태려 들었다. 서울은 쓰레기통만 뒤져도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게 많았다. 하루는 쓰레기 통을 뒤지고 있는데 청년 몇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자못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소리쳤다.
“야, 임마, 너 어디 살아.” 하고 묻기에,
“저기 철길 쪽에 사는 데요.” 하고 대답했다.
“너 엄마, 아빠하고 같이 살어” 하고 다시 물었다.
“예.” 하고 대답하자, “여긴 내 구역이니까 다신 얼씬도 마” 하는 것이었다.
아마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했으면 바로 잡아갈 기세였다.
충청도에서 만난 고아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난 그들보다 행복한 거야. 그런데 역시 서울은 무섭구나.’
어디를 가더라도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한 지 며칠 뒤 형들이 다녀갔다. 둘째 형은 다짜고짜 왜 왔냐고 나무랐다.
“우리가 자리잡으면 연락한다고 했는데 왜 왔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요-”
어머니께서, “우리가 너보고 온 게 아니다. 우리끼리 살아갈테니 너무 염려말아라” 고 말했다. 형은 아직 자리를 못 잡아 같이 살 수는 없다며 대신 나를 극장으로 데리고 갔다.
형과 함께 본 것은 ‘저 하늘에도 슬픔이’ 란 영화였다.
주인공이 엄마와 헤어진 것은 안타깝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학교에 다니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나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도 너무 슬픈 표정을 하고 자주 울상을 짓는 모습이 마음에 좀 걸렸다. ‘그냥 주어진 대로 열심히 적응해 살아가면 될 것을 가지고 왜 울고 짜고 할까’ 학교도 다니고 주위 사람들이 사랑해 주는데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이윤복은 40대에 그만 죽고 말았다. 슬펐던 기억이 남아서일까- 이 책을 펴낸 글벗사 사장님과 친했는데 당시 일본어로 번역되어 엄청나게 팔렸다고 한다. 저작권 협정이 안 된 탓에 자기에게는 어떤 대가도 없이- 이분은 며칠 전에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한 할머니 처럼 보이는 여자가 잠잘 데가 없다고 해서 좁고 불편한 단칸방에 재워 주었다. 착한 어머니는 비좁은 집지만 더 어렵다는 말을 듣고 선뜻 재워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데도 어머니를 향해 언니라고 불러 이상했다.
며칠 후 그 여자가 사라져버려 집안을 살펴 보았더니 그릇이 잔뜩 담긴 상자가 없어진 것이었다. 정말 서울사람은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더니 우리 같은 집에서도 훔쳐갈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더 큰 거 안 잃어버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하셨다. ‘그 동안 잠까지 재워줬는데도- 역시 서울은 무서운 곳인가 보다.’
하루는 꽃다발을 목에 건 군인들을 태운 차가 수없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여의도 비행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비행기를 타러 가는 군인들이었다.
“아느냐 그 이름 백마부대 용사들-”
“그 이름도 찬란해 맹호부대 용사들-
맹호부대, 청룡부대, 비둘기 부대-
차에는 부대 깃발이 꽂혀 있고 군인들마다 모두 자기 부대를 상징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월남으로 파병 가는 군인들이라고 했다.
월남이란 나라는 아직도 전쟁을 하고 있어 한국 군인들이 도우러 간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구청 직원이 ‘철거명령서’란 종이를 가지고 왔다. 빨리 집을 철거하라며 종이를 주고 갔는데도 옆 집 사람들이 그런 말에 놀랄 필요가 없다며 그냥 지내도 된다고 했다.
무언가 서울 생활이 쉽지만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옆집에 살고 있는 젊은 아저씨는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기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가 구두닦이 두목인데 가끔 싸움을 걸어오는 놈들이 있어 평소 운동을 해 두어야 한다고 말하기에 살아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 생각되었다.
며칠 후 구청 사람들이 ‘입주증’이라고 쓴 종이를 가져 왔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이었다. 내가 자세히 물어보자 이제 나라에서 우리가 살 곳으로 옮겨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너무 놀랐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땅을 주겠다니-’ 더욱이 ‘나라’ 라는 말에 다시금 숙연해졌다. 그냥 제각기 주어진 대로 각자 알아서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라에서 우리 같이 집 없는 사람들이 살 곳을 만들어 준다는 말에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집이 없어 방황한 적이 얼마였던가.
‘나라에서 우리에게 땅을 준다니- 이제 새 집을 지을 수 있겠구나-’ 그저 꿈만 같았다.
며칠이 지나자 나라에서 보낸 트럭이 와서 짐을 모두 싣고 가족들도 모두 타라고 했다.
리어카를 끌고 고생스럽게 다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처럼 차로 데리러 까지 오다니 정말 감개무량했다. 차는 노량진에 이르러 우측으로 돌아 한강변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강이 유난히 푸르고 넓어 보였다. 저만치 남산에선 가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국립묘지를 지나자 작은 산들이 자주 보였다. 기나긴 트럭 행렬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우리 차 외에도 수없는 차들이 사방에서 몰려와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사당동이라 했다. 일단 아무데서나 살고 있으면 나중에 10평씩 땅을 준다는 말에 너무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난 날들의 아픈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이곳으로 부르셨나 보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 처럼 삼각형으로 조그맣게 집을 지어 놓고 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물을 길으러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지만 마냥 즐거웠다. 이따금 구청에서 물차를 보내 주었다.
‘이제 서울에 내 집에 생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동안 고생하던 일들을 말끔히 잊을 것만 같았다. 역시 서울가자고 어머니를 조른 일은 잘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동생도 내년이면 학교에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형들도 와보고는 너무 잘 됐다며 기뻐했다. 그동안 자신들이 이룩하지(?) 못했던 보금자리가 이렇듯 선뜻 주어진 것이 너무 놀라웠던 모양이다.
철거민을 실은 차량들은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고 점점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땅을 배당하는 추첨 날이 되었다. 둘째 형은 어머니와 같이 추첨하는 곳을 갔다.
“어머니가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했으니 직접 추첨하세요.” 하고 형이 권하자, 상자 속에 들어있던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종이를 펴 보니 “1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장 좋은 땅이 배당되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산꼭대기 쯤 지정될 수도 있었는데 우리 땅은 아래쪽으로 배당되어 훨씬 가치가 있어 보였다. 이제 내 땅이라 아무렇게나 꾸미고 살아도 되었다.
다시 겨울에 접어들기 시작한데다 집을 지을 돈이 없어 일단 땅을 깊이 파고 위를 소나무 등으로 덮어 움집처럼 꾸몄다. 뒷산에는 아직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우리 집을 보고 ‘땅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당동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유난히도 추운 겨울밤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안동에 있던 셋째 형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마 서울에 보금자리를 잡게 되자 어떻게 연락을 했던 것 같다. 불과 열 다섯 살에 중학교를 중퇴한 채 부모님으로부터 떨어져 지나야 했던 셋째 형이 2년이 지나서야 가족의 품에 안기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몇 년 만에 여섯 형제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자 축제 분위기 같았다.
집이 주는 의미가 이토록 큰 것이었다. 단지 동생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 이젠 형들까지 함께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형들 가운데 일 때문에 나가서 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자리에 모일 보금자리가 생겨 기뻤다.
형들은 이일 저일 하다가 모두 건축 분야 쪽으로 기울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중에 나름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나갈 수 있었다.
이제 둥지가 없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채 거리를 방황하던 철새 가족이 아니다. 온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새로운 꿈을 펼쳐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설명>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소년이 자라나 목사가 되고 가족과 함께 시베리아 선교사로 12년 이상 사역했다. 사라 선교사가 준비한 한국 음식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는 우솔스카야교회 성도들-기성이와 찬미도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