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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7 11:42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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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이 재 섭

 

1960년 중반,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중퇴한 채 기울어가는 가정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형이 셋이나 있었지만 아직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외가와 친가를 찾아가도 뾰쪽한 수가 보이지 않자 1964년 겨울 부모와 큰 형은 지혜를 모아 궁여지책을 택했다. 충청도 음성 생극면 외딴 들판에 뗏장으로 집을 지어놓고 남은 가족이 머물도록 했다.

1964년 성탄절 새벽.들판에 울려 퍼지는 성탄 노래에 깜짝 놀라 나가보았다. 인근에 있는 신양감리교회에서 성탄 새벽송을 온 것이다. 큰형이 이따금 그 교회를 갔던 모양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우리 집을 찾아와준 분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한자 책을 한권 주어 왔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한자 공부에 몰두했다. 하지만 집에는 글을 쓸 연필도 종이도 제대로 없었다. 그래서 아궁이에서 숯을 꺼내다가 잠시 머물던 다리로 가지고 갔다. 숯덩이로 한자를 쓰고 나서 물을 끼얹으면 다음날 다시 쓸 수가 있었다. 다리 위를 지나던 한 아저씨가 한자를 쓰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 한석봉이가 다시 나왔구나.” 하며 격려했다.

때로는 나뭇가지로 땅에다 글을 쓰고 나서 발로 비벼서 지우곤 했다.   형은 서당을 다닌 적이 있어 한자를 많이 알았는데 틈틈이 가르쳐 주었다형의 도움으로 영어도 조금씩 익혔다 .

이른 봄날 서울에 살고 있다는 둘째 형이 찾아왔다.  중학교 진학을 못한  일찍부터 일만   형이었다큰형을 보고 대뜸 나무라는 것이었다.  

,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요.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거요. 나랑 서울로 갑시다.   우리가 빨리 자리를 잡아야 다른 식구도 살 거 아니오.”

 ,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간들 대우받겠냐.  그냥 되는 대로 살아야지.” 

 형들은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내 큰형이 작은형을 따라 서울로 가기로 결정했다.  작은 형은 얼마 안 남은 돈을 모두 어머니에게 드리고 서울 갈 차비가 없어 걸어서 서울까지 가겠다며 큰형과 함께 길을 떠났다 길을 도보로 떠나는 두 아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무척 걱정스러워 보였다.

이제 부모님과 동생 둘 그리고 나 다섯 사람만 들판에 자리 잡은 외딴집에 남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순박한 이웃들이 있었다우리 가족은 마음씨 좋은 충청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연명해 나갔다.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정원 가득히 꽃이 핀 집에 살았는데 너무 변해 버린 환경으로 인해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며칠 후 형들로부터 편지가 왔다.  정확한 주소도 없이 편지가 배달되어 온 것이었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신양리 다리로부터  200m 떨어진 외딴집

  주소가 아니라 마치 약도 같이 보였는데도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잘 전해주었다. 형의 글을 어머니께 읽어 드렸다.  한양 120리 길을 꼬빡 사흘 동안 걸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형들은 서울 마포에 있는 근로자합숙소란 곳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 또한 서울이라는 곳에 대해 동경이 갔다. 한국에서 제일 큰 도시라는 서울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마 그곳은 부자만 사는 곳일 게다. 멋진 집과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살겠지. 커다란 건물들, 거리를 질주하는 차들이 우리가 살아온 곳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거야

 

봄이 다가와 들판이 점차 푸르러 갈 무렵, 개학날이 되었는지 멀리 충청도 시골 아이들이 학교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책가방을 가진 아이는 거의 없고 보자기에 책을 싼 채 허리에 메거나 등으로 비껴 맨 채 학교를 향해 뛰어가는 학생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갖은 수난을 겪던 미운오리새끼가 어느  백조들이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듯이 부러운 눈으로 시골 아이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동생 생각이 났다.

쟤가 벌써 일곱 살이라 내년이면 학교를 입학해야 될텐데....’

동생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자 4학년 다니다가 그만 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서울로 가자, 그것만이 최선책이다  

 일단 서울로 가야만 무슨 수가 생길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졸라서라도 반드시 서울로 가야만 해결책이 있을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엄마 우리 서울가입시더.” 

저녁 식사 후 어머니에게 말하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얘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서울에서 누가 우릴 오라던

동생이 내년에 학교에 입학할 나이 아닝기요.  올해 꼭 서울로 가야 내년에 동생을 학교에 보낼 수 있심더.  그러니 우리 서울 가입시더

 하지만 얘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거란다. 우리 같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불쑥 서울로 가면 큰 일 난데이.  형들로부터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꾸나.”

어머니는 딱 잘라 거절했다.  나는 동생의 장래를 위해 서울로 꼭 가야 한다며 며칠을 두고 졸랐다. 얼마 전 어머니가 한글을 전혀 모르는 것을 알게 되어 지난 2개월 동안 한글을 가르쳤다. 그 사이 글자에 많이 익숙해졌다. 한글을 가르쳐드린 탓인지 더욱 내게 사랑을 베푸시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독촉에 못이기는 듯 길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하셨다.

그래 가자꾸나. 어딜 간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어렵게 뗏장 집을 지은 지 넉 달이 못되어 모처럼 터를 잡고 살아가던 고장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주인 아저씨께 인사드리고 이사  차비를 챙겼다

 부산서부터 가지고 온 비교적 큰 리어카에 살림을 싣고 큰 동생을 그 위에 태웠다. 나는 희망에 찬 손으로 리어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제 서울로 가는 거다. 걸어서라도

  살 소년이 끄는 리어카는 서울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는  같았다. 꿈과 희망이 실린 리어카는 비록 느리지만 조금씩 서울 쪽으로 향했다내가 힘들어 보이면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었다. 교대로 뒤에서 밀기도 했다.

  30리 떨어진 장호원 가까이 이르자 저녁이 되었다.  일행 중 아직 두 살배기 갓난아기 막내 동생까지 있었던 만큼 하룻밤을 자기 위해서라도 임시로 살 집을 지어야 밤을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강 집이 만들어지자 부모님은 그 자리에 안주하려 들었다. 더 이상 서울로 가자고 우길 수도 없어 한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서울로 가는 것을 피하려 드는 부모님에겐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맞아, 돈이 없기 때문이다.  돈 한  없이 서울로 가서는 우리 모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돈을 벌어 몰래 저금을 하자.   만이 최선책이다 

나는 아버지 도장을 몰래 가져다가 장호원 우체국을 찾아가서 아버지 이름으로 저금통장을 만들었다. 통장을 받아들고 서울 가는 일 이외에는 절대로 돈을 찾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먼저 고물을 주워 파는 일을 시작했다.  고물상을 자주 드나드는 동안 고물 시세에도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강변에서 모래를  내어 쇠붙이를 찾기도 했다

여름이 다가오자 아이스케키를 파는 일도 좋은 수입원이 될  같았다. 하지만 이 무렵 시골 아이들은 거의 돈이 없는 경우가 많아 자연히 장사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물을 받고 아이스케키를 주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마침 고물 시세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고무신이나 병, 심지어 긴 머리카락을 가져와도 적당히 값을 계산해 아이스케키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수익을 더 많이 올리기 위해서는 장호원 읍내보다 아예 아이스케키 파는 곳을 근처에서 볼 수 없는 아주 시골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시외버스를 타고 먼 동네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얼마후 차장 누나들도 내 얼굴을 알아보고 선뜻 무임승차를 시켜 주었다. 차비 대신 아이스케키를 주면 굳이 안 받겠다며 돈을 내고 사먹는 누나도 있었다.

 매일같이 우체국을 드나드는 동안 자연히 우체국 사람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우체국 직원들은 거의 매일같이 저금하러 오는 소년에 대해 흥미가 많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우체국 아저씨가 통장에 적힌 이름을 보고 상동아하고 크게 부르는 것이었다.

아니 아저씨그건 우리 아버지 이름임니더하고 대답하자, “어이쿠 큰 실례를 했군 그래.  미안하다그런데 왜 너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지 않았니하고 물었다.

아저씨 도장 만들 돈 있으면 그 돈도 저금해야 되는기라요.” 하자,  그것도 참,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럼 너 진짜 이름은 뭐냐?”  

재섭이라고 함니더.”

 재섭이라. 그런데 집은 어디냐?”   
저기 사는데   할랍니더

그래, 그런데 학교는 안 다니는가 보구나”.

  ...”

 어린 나이에 애써 저금하러 드나드는 모습이 대견해 보인 듯 자꾸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은 다리 아래 임시로 지은 판잣집이라 주소조차 모르고, 학교를 다니려 해도 사는 곳이 분명치 않았던 만큼 학교조차 갈 수 없는 형편에 대해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오직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온 동네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아이스케키를 팔고 고물이 보이면 주웠다.

 

이렇게 살아갈 수만은 없지 않나이런 삶의 방식은 말도 안 돼.’  나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한다며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엄마, 우리 모두 일하기로 하입시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는기라요.  이렇게 살아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거지로 봐요

 얘는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자기 부모를 그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케도 남들이 그렇게 보는걸 어떡합니꺼 

 사람이 살아가려면 일을 해야 됩니더. 그리고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심더.” 하고 말했다

얘는.... 누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준다던....”

혹시 지나 다니시다가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해 보이소.”

누군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지 압니꺼.” 하고 말했다.

며칠 후 어머니는 어느 부잣집에서 파출부로 와달라는 말에 자주 가서 집안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산을 깎아내리는 사방공사장에 나가 일하기로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따금 편찮을 때가 있고 집에 돈이 없을 때가 많았다. 때론 일이 없어 전혀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아보였다

 그래서 대개 내가 구해 오는 양식으로  식구가 연명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저금하기 위해 나는 그날 벌어온 돈으론 약간의 식량만 구해 죽을 끓일 때가 많았다.

나중에는 쌀가게 주인도 단골손님이 된 듯 나와 친해졌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사거리 옆에 있는  가게를 들리자

어이쿠 단골손님 오셨네...  오늘은 뭐로 사갈 거지.”

아저씨 오늘은 쌀로   주이소.  맨날 좁쌀죽만 먹었더니 입이 까칠까칠 함니더.”

 ,   되라   아저씨는 됫박에 수북이 담는 것이었다

 아저씨, 장사를 그렇게 하면 뭐가 남아요 하고 묻자

 ,  한테 남겨서  하겠니.  됐다. 가져  하시는 것이었다

 고맙심더, 아저씨대신 많이 파이소나는 평소보다 더 꾸뻑 인사했다.

가을에 접어들자 점점 마음이 조급해져 왔다. 장호원에서 그만 너무 지체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향해 다시 서울로 떠나자고 말했다.

엄마우리 이제 그만 서울로 가입시더.  이번 추석은 꼭 서울에서 보내고 싶습니더.” 하고 말했다.

그래 아버지가 그동안 일한 돈을 빨리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것만 받으면 서울로 가마.”

고맙심다. 엄마.” 그날부터 나는 시간이 되는 대로 읍사무소로 가서 아버지가 사방공사한 품삯을 받기 위해 찾아갔다.  군청에서 밀가루가  아직 안 오고 있다며 자꾸 미루는 것이었다나중에는 담당아저씨가 내가 자꾸 찾아오는 것이 보기가 안됐던지  방안을 제시했다

 본래 밀가루로 주기로 되어 있지만 대신 보리쌀로 주면 어떻겠니?” 하기에그래요고맙심더하고 아버지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가서 보리쌀 자루를 싣고 집으로 가져왔다.

 

드디어 저금을 찾는 거다.’ 비장의 결심을 하고 살그머니 도장과 통장을 챙긴 후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고 집을 나섰다. 우체국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우체국으로 뛰어 들어가 소리쳤다.

아저씨 저금 찾으러 왔심더.”  모든 직원들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저금을 찾는다고- 얼마큼이나 담당 아저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전부다 주이소.” 내가 숨이 찬 채 대답하자,

뭐 전부....  어디다 쓰려고....  담당 아저씨는 무척 놀란 듯 아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 아저씨, 우리 서울갑니더. 그래서 저금한 거 모두 찾으러 왔심더.”

우체국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안돼하고 거절했다.

아니, 왜 안는기요. 내 돈 내가 찾는데....”.

그래도 안돼.”

지금 서울간단 말이예요. 이 돈이 꼭 필요합니더.”

야 이놈아, 그동안 이 돈을 어떻게 모은 건데 그렇게 불쑥 와서 다 찾는단 말이냐,”

 안돼, 절대  내준다 담당아저씨는 팔짱을   고개를 흔들었다

 와그라십니까, 아저씨, 내꺼 잖아요. 아저씨, 서울   쓸려구 모은 거란 말입니더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울어 버렸다.

그럼 가서 네 엄마 불러와.”

나는 힘없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울먹였다.

엄마, 우체국에서 저금 한 거 안 준다캅니더.”

아니, 왠 저금을...”.  어머니는 영문을 모르는 일이라 물었다

서울 갈 때 쓸려고 몰래 모아 둔 게 있단 말입니더.  엄마랑 같이 오라캅니더.”

어머니와 함께 장호원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담당아저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 이 아이 어머니 되십니까.  제발 부탁인데 저금만은 찾지 말아 주십시오.”

  아저씨는 말이   나오는  같았다

어머니께선 얘가 이 돈을 어떻게 모은 건 지 아십니까어머니는 할 말이 없으신 듯 계속 듣고만 있었다.

대신 서울로 가시게 되면 그쪽 우체국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린 주소도 없이 그냥 길을 떠나는 거라... 얘도 아마 이때 쓸려구 저금한 모양인데...”

, 그러세요. 그럼 드려야죠.  저축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건데 그만 갑자기 와서....”

  아저씨는 내가 그동안 저금한 돈을 내주었다. 우체국 직원들이 마당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서울가면 꼭 편지해.”  우체국 급사 누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부디 잘 살아야 해.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담당 아저씨도 눈시울을 붉혔다.

학교도 다시 가고....”

,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누나 잘 있어요.”

  돈을 모두 어머니께 드리고 다시 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중간에 머물지 않고 서울까지 곧장 가는 거다’. 동생을 리어카 위에 태우고 손잡이를 힘주어 붙잡으면서 다짐했다.

  가자. 서울로

  코스모스가 길가를 수놓은 가을 길을 가는 동안 간혹 차들이 먼지를 피우며 지나갔다.   아버지와 교대로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오르막을 만나면 남은 식구가 뒤에서 밀었다.   동생은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리어카 위에 올라탔다. 

  우린 그저 서울 쪽으로만 향했다.  비포장 길이어서인지 흙냄새가 풍겨 났다

다시 삼십  길을 더 가자 이태리란 곳에 다다랐다.  농업협동조합 창고 추녀 밑에서 밤을 맞기로 했다. 어머니는 흰 천으로 둘러쳐 임시로 잘 곳을 만들고 아기를 내려놓았다.

결국 추석을 그만 길가에서 맞게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추석 아침에 여학생 두 명이 도시락을 들고 찾아왔다.  도시락을 열자 금방  것인지 송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었다.

어저께 밤에 여기서 주무시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직접 송편을 만들어 가지고 왔으니 드세요.”  여학생들이 어머니께 공손히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어느 학교를 다니지.”  하고 어머니가 묻자

 이태리 국민학교 5학년이어요 라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며 여학생들에게 말했다. “얘도 학교에 다니면 5학년이 됐을텐데... 학교 다닐 땐 공부도 열심히 잘 했는데...”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돌아간 다음에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너는 왜 이름도 안 물어보니?”  하시기에 마음속으로 답했다.

어머니는 모르실거예요. 저도 학교에 다니고 싶고 쟤네들처럼 잘 지내고 싶은 것을.....’

이 무렵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이 내게는 왕자와 공주처럼 보였다하지만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듣기 곤란한 말은 않기로 했다.  결코 누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 만큼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인까지 이르자 잠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짐을 모두 정리하고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시외버스 종점은 영등포 로타리였다. 한 지게꾼 아저씨의 소개로 가까운 철길 가에 판잣집을 지었다. 불과 한 달만에 철거가 되어 사당동 철거민 단지에 입주할 수 있었다.

이듬해 교회 천막학교가 생겨 동생을 데리고 찾아갔다. 내게도 학업의 기회가 주어져 천막학교에서 수업을 했다. 천막학교는 남성성경구락부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매일같이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는 사이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얼마후 우리는 모두 정규학교에 편입해 나와 동생 모두 우등생이 되었다. 후일 동생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스무 살에 신학교에 입학해 오랜 수업을 거쳐 목사가 되었다. 십 수 년 동안 해외 선교사로 사역했다. 21녀의 자녀들이 20년 간 러시아에서 수학한 후 국내로 돌아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선교 종합신문 <아름다운 동행>에서 큰 아이를 장학생으로 선발해 주어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이론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형의 도움에 힘입어 동생 또한 생체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국내로 돌아와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두 아들이 힘을 모아 장학금을 지원해 주어 나또한 박사 과정을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십여 년 전 러시아를 오가는 비행기에서 울산대 천 교수님을 만났다.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러시아에서 살아왔다고 말하자, “목사님, 자녀 하나를 꼭 법대로 보내세요. 한국 큰일 났습니다. 앞으로 러시아와 재판할 일이 많을텐데 러시아에 능통한 변호사가 꼭 필요합니다.” 강대국에 조금만 약점이 잡혀도 재판에 이기기 어려운 현실을 예측한 말이라 생각됐다. 딸에게 법학을 전공할 것을 당부했더니 내말에 따라주었다, 어린 나이부터 주로 설교 통역을 담당해 수고가 많았다. 시베리아 순회선교 자주 갔는데 딸이 늘 동행해 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큰 아이는 창조과학회 대전 지부 회원이 되어 틈틈이 활동하고 있다. 주님께서 세 자녀를 훈련시키시고 적절히 인도해 주시고 있음을 깊이 느끼고 있다.

자식은 부모의 헌신을 징검다리 삼아 자라난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징검다리 역할을 감내해 주신 모든 어버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고인이 되신 부모님의 헌신적인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프로필

195476일 부산 출생, 196510월부터 서울 거주

19851015일 목사 임직, 러시아 선교사

총신대학교, 서울성경대학원대학교, 칼빈대학교 대학원(박사과정 수료예정)

에세이스트 신인상(2016). 크리스챤문학가협회 회원

이메일: mrussia@naver.com

전화: 010-2220-0091

 

<징검다리>는 에세이스트 2017 대표작가(44) 선정 작품입니다.

분량이 너무 많으면 줄여주시던가 알려주시면 제가 줄여보겠습니다.

프로필은 필요한 부분만 사용하시도록 참고로 보냅니다.

 

이 재 섭

 

 떠내려 간 집

 

내 나이 열한 살 때, 우리 가족은 충청도 농촌의 외딴집에 살았다. 극한 가난으로 인해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해야 했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의 초등학교 입학조차 불투명했다.

나는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님을 설득해 동생의 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동 중에 금방 집을 짓기 어려워 다리 밑을 전전해야 했다.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잇는 장호원 다리 아래 이르자 부모님은 이곳에 안주하려 들었다. 나는 앞날을 위해 저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도장을 몰래 가져다가 장호원 우체국을 찾아가서 저금통장을 만들었다. 고물을 주어 판 돈으로 저금했다. 여름이 다가오자 아이스케키를 파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장호원 읍내보다 시골로 가는 편이 유리해 보여 시외버스에 타고 먼 동네를 찾아다녔다. 시골 아이들을 대상으로 고물을 받고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헌신이나 병, 심지어 긴 머리카락을 가져와도 적당히 값을 계산해 아이스케키를 줄 수 있었다.

선뜻 서울로 가지 않으려는 부모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제안하기로 했다. 통금 시간이 되기까지 종일 차가 오가는 다리 아래에서 부모님께 말했다.

 우리 모두 일하기로 합시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는기라요. 이렇게 살아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거지로 봅니더

 얘는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자기 부모를 그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어머니가 나무랐다.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 해도 남들이 그렇게 보는기라요. 사람이 살아가려면 일을 해야 됩니더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읍니더하고 말했다

얘는 누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준다던.”

어머니가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혹시 지나다니시다가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일자리 있는지 부탁해 보이소. 여기저기 알아보면 사람이 필요한 곳이 있을 겁니더.”

이제부터 동냥은 그만두이소. 제가 양식을 조금씩 구해오겠심더하고 말했다.

며칠 후 어머니는 어느 부잣집에서 파출부로 와달라고 해서 집안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면에서 주도하는 사방공사장에 나가 산을 깎아내리는 일을 하기로 했다.

일을 시작해도 당장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사오는 양식으로  식구가 연명해야 했다나는 조금이라도 더 저금하기 위해 약간의 식량을 구입해 어머니에게 죽을 끓여 달라고 말했다. 부모님 몰래 꾸준히 저금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과수원집에 다른 아주머니도 있었다. 아주머니 아들이 내 또래여서 이따금 만났다. 어느날 그 아이가 우리 과수원에 놀러 갈래하고 물었다. 멀리 떨어진 과수원을 찾아가자 아저씨가 맛있는 복숭아를 따서 소쿠리에 담아 주셨다.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점차 늘어났다. 외딴집 근처를 지나려는데 어른들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얘들아, 이리 오렴. 이럴 때 산을 내려가면 큰일난다.”

나는 가족이 걱정되어 못 들은 척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려 했다. 한 아저씨가 달려나와 내 팔을 잡았다.

아저씨 놓아주이소. 우리 가족이 위험합니더,”

안 된다. 내 말 들으렴.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아저씨는 강제로 나를 끌고 외딴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주머니들은 수제비를 만들어 비를 피해 모인 사람들을 위해 저녁 준비를 했다.

나는 불안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집으로 향했다. 강둑을 다다르자 거친 물살을 따라 여러 가지 떠내려왔다. 이 정도 강물 높이면 우리 집이 물에 잠겼을 것 같았다. 집이 있는 다리 가까이 달려가자 이미 물이 다리까지 차올랐다. 사전에 대피하지 않았다면 가족이 몰살당했을 것 같았다. 내가 서울로 가자고 우긴 탓에 가족 모두 희생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다.

다리에 도착해 엄마!” 하고 울면서 소리질렀다.

우리 여기 있다. 걱정하지 마렴.”

다리 근처 건물 추녀 아래 가족이 모여 있었다. 나는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겼다.

미안합니더. 엄마, 제가 집을 지켰어야 하는데-”

괴안타. 울지마렴 경찰 아저씨가 내려와 피하라고 알려주고 짐도 날라주셨다.”

다리 위 검문소 경찰이 홍수가 날 걸 우려해 미리 대피시켜 주어 감사했다.

훗날 이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1965년 여름, 대한민국은 태풍 베티(Betty)가 몰고 온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인해 전국적인 대홍수를 겪었다. 특히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하며, 한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재해로 기록되었다.

태풍이 부른 재앙, 중부권을 강타하다. 특히 한강 유역의 피해가 극심했다. 남한강 상류 지역인 충청북도 제천군 일대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지역에서만 55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비극적인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우리 가족 또한 희생될 뻔했다. 홍수 사건으로 인해 불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해 가을 우리 가족은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저금한 돈을 찾아 어머니께 드리고 아버지와 교대로 손수레를 끌며 서울 쪽으로 이동했다. 용인에 이르러 짐을 정리하고 시외버스를 탔다.

마침내 우리 가족은 서울 영등포에 도착해 판잣집을 지었다. 저금한 돈이 요긴하사용됐다. 한 달 후 사당동 철거단지 입주 자격이 주어졌다. 철거민 마을에 세워진 성경구락부를 통해 나의 학업 또한 이어졌다. 나중에 인근에 설립된 초등학교에 편입했다. 나와 동생 모두 우등생이 되었다. 후일 동생은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대학 강의도 하고 있다.

나는 세 자녀를 두었는데 십수 년 선교사로 지냈다. 자녀들은 20년간 선교지에서 성장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두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딸은 변호사 격인 러시아 법률가 자격을 취득했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선교지를 돌보고 있다.

자칫 홍수에 가족을 잃을뻔한 추억이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녀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아시고 인생길을 인도하신다.

 

이재섭 목사, 선교사, 에세이스트 등단(2016), 칼빈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서울신학교 외 강사, 총신문학회 회원, 대한기독교문인회 회원, 중구문인회 우수상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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