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지어 선 아이들
이 재 섭
25년 전, 우리 가족은 카자흐스탄으로 서북부 변방 도시로 갔다. 서울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5살, 6살, 8살이었다. 자녀들은 돌변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박해자들로 인해 6개월 만에 남쪽 도시로 이주해야 했다.
새로운 도시가 규모가 컸음에도 전기가 안 들어올 때가 많았다. 따라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연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식사 준비조차 쉽지 않았다.
자녀들을 위해 중국산 자전거를 하나 샀다. 이 나라 교사 월급과 맞먹었다. 그래서인지 거리에서 자전거 타는 아이를 볼 수가 없었다. 아직 자전거를 접해보지 못한 현지인 아이들에게 나어린 막내가 자전거 타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그 자전거 한번 타봐도 돼.”
막내는 형뻘 되는 현지인 아이에게 선뜻 양보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집 밖으로 나갔더니 동네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 아이가 내게 물었다.
“기성이 언제 나와요?”
행여나 자전거를 가지고 나올까 봐 무작정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녀가 자전거를 집 밖으로 갖고 나오면 아이들이 줄 서있는 순서대로 탔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를 기준으로 한 바퀴 도는 코스까지 정해 두었다. 한 소년은 생일이 되면 부모님에게 꼭 자전거를 사달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딸 아이가 처음 학교갔을 때 낯선 이방인이라 해서인지 선뜻 놀아주지 않았다. 러시아어도 서툰데다 친구도 없어 부담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아이들을 지켜보니 반 아이들이 학교에 올 때 조그만 인형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다음날 딸아이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똘똘이 인형을 안고 학교로 갔다. 여자아이들은 처음 보는 커다란 인형을 보고 놀라서 몰려들었다. 다음날부터 딸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학교로 가면 여학생들이 줄 서서 기다렸다. 앞에 아이가 인형을 안아보고 뒤로 건네주었다. 어떤 아이는 배를 눌러 소리가 나도록 했다.
3년 가까이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았다. 특히 동족의 아픔을 많이 겪었다. 대신 하나님의 역사를 몸소 체험했다.
우리가 먼 나라에서 찾아오자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도 했다. 여러 가지 방해를 극복하고 교회설립 허가를 받은 것이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여러 곳에 교회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방해 세력으로 인해 여권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임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큰아이와 멀리 떨어진 알마타에 있는 대사관을 찾아갔다. 영사가 여러모로 도움을 주어 감사했다.
우리 가족은 핍박자를 피해 영국 선교부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한동안 지내야 했다. 고난이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기도 시간에 내 입을 통해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내가 지금 너희 자녀들을 연단시키는 중이다.”
아무리 힘든 환경이라 할지라도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힘든 나날들이리라. 서울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열악한 나라에 와서 고생이 많았다.
“이들은 내가 앞으로 사용할 나의 종들이다. 너희는 이들을 잘 가르쳐 나의 일에 지장이 없도록 하여라. 결코 성경 교육을 등한히 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 후일 내가 이들을 필요로 할 때 아무 미련 없이 모두 내게 맡겨라.”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자녀들을 향한 주님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뜻을 그대로 따를 수 있겠느냐.”
“예,주님의 종이오니 주님의 선하신 뜻에 모두 맡기겠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떠나 주님께서 관심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어린 나이부터 이방 나라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카자흐스탄을 철수하기 전날 밤, 이날도 전기가 나가 촛불 아래에서 자녀들과 함께 가족 모임을 가졌다.
“자, 우린 이제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선교지로 돌아오라고 하시면 우리 모두 따라야 하지 않겠니. 약속할 수 있지.”
내 말에 아이들이 모두 “예!”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서약서를 받았다. 한국에 가더라도 선교지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한국으로 출발하기로 한 날은 큰아이 열한 번째 생일이었다. 르두밀라 남편인 샤샤 아저씨가 기은이 생일 축하 겸 송별회를 위해 밤낚시를 가서 메기를 산 채로 3마리나 잡아 왔다. 한 마리는 6kg, 다른 두 마리는 3kg 나가는 큰 놈들이었다. 메기를 튀겨 같이 식사를 하면서 석별의 정을 아쉬워했다.
우리 가족은 카자흐스탄 국경을 넘어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항으로 갔다.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한국에 1년 머문 후 러시아 시베리아로 갔다. 세 자녀 모두 어린 시절부터 20년 동안 러시아어권에서 살았다. 한국인을 접하기 힘든 지역에서 성장한 탓인지 모두 러시아어에 익숙한 편이다.
자전거 타기를 위해, 똘똘이 인형을 안아보기 위해 줄지어 서 있던 아이들 그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사이 카자흐스탄 경제도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시베리아 지역 선교를 위해 후원과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