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 송영찬 국장 >(기독교개혁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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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Auguestine, 354-430)의 위대한 중요성은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라는 이단자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은 어거스틴을 이 일을 위해 사용하셨다.
펠라기우스는 400년 이래로 로마에서 사역한 영국 수도사였다. 이 이단자는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실제로 이 가르침은 교회를 반박하고 위협하는 이교적 사상이다.
만일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때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이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제시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타락했다. 이 이단에 반대하여 그는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하나님 말씀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자기의 이단설을 보급하기 위하여 북 아프리카로 갔다. 그는 어거스틴을 맹렬한 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 어거스틴을 사용하여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닫히려는 교회를 방어하고 지키는 사역을 실행하셨다. 마침내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정죄를 받았다.
교회에 의한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정죄에도 불구하고,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계속해서 일종의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에 밀착되어 있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이 성경에 따라 가르쳤던 ‘자유로운 은혜’의 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벨직신앙고백 제14항과 15항).
우리는 오늘도 동일한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맡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