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에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신성한 직분
제 4 장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 제도 이전의 정치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
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의로 교리
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제10 장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제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그것의 남용
제12 장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제13 장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제14 장 성 례
제15 장 세 례
제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제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곳이 주는 유익
제18 장 카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
살하는 모독 행위다
제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제20 장 국가통치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에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의 필요성 - 구원 얻은 사람의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약점에 대한 보조 수단을 첨가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가 활발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를 허락하셨으며, 이교 회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과 같다(갈 4:26).
교회와 신경 - 신경에서 우리가 “공회(=교회)를 믿는다”라고 하는 조항은 가견적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 죽은 사람들까지도 - 을 의미한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이며 결코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의 교통 -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교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두말할 나위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 행동해야 한다. 결국 성도는 한 소망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형제애로 연합될 뿐만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
선택받은 자의 구분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눠받게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가견적 교회는 곧 신자의 어머니로서 존재한다.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그 의무 - 하나님께서는 일순간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거룩한 회중이 성소 앞에 모이기를 원하셨으며, 거기서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얻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성직의 의미와 한도 - 구약의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을 세우신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역자들 앞에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이 온건한 멍에를 신자들에게 지우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불가견적 교회와 가견적 교회 -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다만 하나님에만 보이는 불가견적 교회는 완전하나 가견적 교회는 그 내부에 불견한 자들이 섞여 있다.
우리 판단의 한계 - 누가 참 하나님의 자녀인지 믿음의 확신을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고백과 삶의 모범 그리고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된다.
교회의 표지 - 교회의 표지에 있어서 성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인데 이 두 표지가 같는 의미가 크다.
교회 내의 불상사 - 교회 내의 불상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있으므로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교회를 떠날 사유가 되지 않는다.
갈라디아교회가 문제가 많았지만 바울은 이들은 사랑으로 타일렀다.
악인들과의 교제 - 악인들에게 성찬의 참여를 금해야 하듯이 그들과의 교제도 삼가야 한다.
완전을 자칭함은 그릇된 의견의 결과이다.
교회의 거룩성 - 지상 교회는 완전히 거룩하지 않다. 즉 하루 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언자와 사도들의 선례 - 그들은 비록 자신이 깨끗했지만 교회에서 자신을 불리하지 않았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같이 불경건한 자들이 있을 지라도 공공예배를 함께 드렸다.
죄의 용서와 교회 -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 안에 들어가는 첫 어귀는 죄의 용서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언약도 없고 하나님과의 결속도 없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하나님의 가족에 가입하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교회원들에 대한 용서는 영속한다. 베드로에게 준 열쇠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직책을 다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에 속한 자는 다음 세 가지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죽을 몸을 쓰고 사는 이상 여전히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둘째, 이 은혜는 교회에 속한 것이어서 교회와의 교통을 유지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세째, 이 은혜는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통해서 혹은 복음 선포로 혹은 성례 집행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모든 신자는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옛 언약 - 구약에서도(요셉에 대한 음해 모의, 다윗의 우리야 사건 등) 죄의 용서가 있었다. 또한 갈라디아 교회처럼 교리적으로 심각한 죄에 빠졌을 때 바울의 이해와 사랑이 있었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근본적인 구별 - 교회의 기초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교훈이며 그들은 또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경건으로 이 핵심체가 죽으면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된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로마교회와 그 주장은 모순된다. 성경의 교회를 계승한 것이 참 교회이며 자신들이 주장만 한다고 해서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이다. 더우기 우상을 두고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가 참 교회일 수 없다.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지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홀 즉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하듯이 하는 주장은 거짓이다.
오히려 로마 교회가 기독교회를 가리켜 “분파와 이단”이라고 하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믿음의 결합은 아름다운 일이나 “그리스도 안에”라는 범주를 떠나 하나가 될 수 없다.
-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이 연합의 조건이다.
- 로마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이와 같이 분리는 그들 스스로가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를 하였으나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그것은 때때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장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정하신 의식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는 끝내 망했다.
카톨릭 교회는 부패되었으며 배겨되어야 한다. 여로보암 때 예배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하나 신성 모독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한다. 그러한 교회를 경솔히 따라가면 안된다.
- 부패한 교회는 떠나야 한다. 열쇠는 말씀과 관련이 있다. 불경건한 교회는 하나님이 가증해 여기신다.
- 교황제도 하에 남아 있는 교회의 흔적 - 역사를 통해 교회에 많은 박해가 가해졌지만 세례 의식이 남아 있고 또 일부 교회가 존속해 왔다. 이는 하나님이 남겨두신 것이다.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부패한 교회가 참교회가 될 수 없다. 교황의 지배하에 있는 교회를 정당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는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로마 교회는 정당한 표지가 없다. 따라서 교회라 할 수 없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신성한 직분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그의 사자가 되게 하시며(고후 5:20참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신다. 교회는 결국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되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바울은, 사람의 봉사는 신자들을 결속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이라는 말로 사람의 봉사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 위탁하시고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통해서 선물들을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의 이 제도 안에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이심으로써 그 제도가 허망한 것이나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 지상의 교회를 유자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및 목회적 직분이 필요하다.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성직 제도를 옳게 보시며 온갖 가능한 법으로 그 위엄을 칭찬하시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고넬료에게 사자가 필요할 때, 성령을 통해 베드로를 인도하셨다. 또한 바울을 택해 사도로 임명하셨다.
에베소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둘째는 선지자, 셋째는 복음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11). 이중에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 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켰다.
칼빈은 “목사와 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점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교사들은 제자 훈련이나 성례 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임시직과 항존직 - 사도와 목사들
교회 직분 사도가 가장 권위가 있었다. 그리고 목사직 또한 이러한 사도직에 버금가는 직무이다.
사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된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집례하고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라는 것이다.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전체적인 통일성을 준수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직분: 장로
성경에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롬 12:8)라고 했는데 그 대상이 곧 ‘장로’이다. 특히 장로는 “장로회”를 이루게 되는데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집 사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겨졌다. 이 직을 세분화해 보면, 구제 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들과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
소 명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소명에는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 있는데, 무엇보다 경건하고 학식이 겸비된 자라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을 가진 자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신다.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은 두 구절에서(딛 1:7; 딤전 3:1-7) 어떤 감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충분히 논한다. 요약하면, 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딤전 3:2-3; 딛 1:7-8). 집사와 장로들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한다(딤전 3:8-13).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를 세웠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했다(행 14:23). 따라서 반드시 최고의 경의와 주의를 가지고 그 일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분별의 영을 하나님에게 구했다(참조 사 11:2).
누가 사역자를 택할 것인가.
사역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 자신의 입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선택되었다고 언명했다.
사람을 통해서 - 가룟 유다 자리를 보충할 때,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결정했다. 결국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
평신도의 투표 - 감독의 선정은 모든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을 선정하며 공중의 결정과 증언에 의해서 감독이 적임자임을 증명했다.
적당한 듯한 사람들은 일반 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특히 목사의 선거는 다른 목사들이 주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명은 주로 안수를 하나 공중 앞에 공포하는 것이 권위가 있다.
제 4 장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 제도 이전의 정치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했다.
우리는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역자가 있음을 보게 된다.
(1)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2)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를 견책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3)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제롬은 다섯 가지 교회 계급을 말했는데, 감독, 장로, 집사, 신자, 학습교인이라고 했다. 그밖의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에게는 특별한 지위가 주어지지 않았다.
감독의 지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모두 “장로”라고 불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불화를 막기 위함인 듯하다(같은 ‘장로’의 신분이어서 ).
혹 감독이 맡은 지역이 너무 넓어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곳이 있을 때에는 장로들을 배치해서 작은 일들을 대신 처리하게 했으며, 이들은 지방 전체의 감독을 대표했기 때문에 이런 장로들을 “지방감독”이라고 불렀다.
감독과 장로의 가장 중요한 직무
감독과 장로들은 말씀을 전파하며 성례를 시행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고대의 사람들은 엄격해서 사역자들은 모두 주께서 요구하신 직분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은 설교 자리가 없으면 걸어다니면서라도 설교할 의무가 있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미지근하고 잠잠한 우리는 그들을 죽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건전한 교리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은 교회의 오핸 원칙이었다.
- 각 지방에는 대감독 또 그 위에 지위나 위엄이 높은 총대감독 제도가 있었으나 이는 교황과 같은 단독권을 가지지는 않았다.
집사의 직분
당시의 집사직은 사도 시대와 성격이 같았다. 그들은 매일 신자들이 바치는 예물과 매년 교회에 들어오는 수입을 받아들여서 적당하게 쓰는 일을 맡았다. 즉 감독이 결정한 대로 사역자들과 빈민들의 생활비로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년 그 분배 상황을 감독에게 보고했다.
교회 재산의 운용 -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었다. 그리고 만일 감독들과 집사들이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 행위를 한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또 만일 교회 지도자가 빈민의 것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모독 행위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남용하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고전 11:29).
수입을 넷으로 나누었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처음에는 무보수로 또 자발적으로 맡았었다. 중도에 교회 재산을 유용하는 폐단이 생기자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게 하였다. 이 넷은 성직자들과 빈민들과 교회 건물 수리를 위해서 그리고 네 번째로는 타 지방과 본 지방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각각 한 몫을 마련했다. 만일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 감독이 있으면 즉시 동료들의 견책을 받았고, 복종치 않으면 그 지위를 빼앗겼다.
- 교회 재산을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그 때의 교회 소유는 모두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감독이 가진 것은 모두 빈민의 것이었다.
- 직분들의 준비 단계 . 직분을 임명받기 앞서 준비하는 문지기나 시제(侍祭)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일종의 훈련 과정이었다.
- 주로 바울의 지시대로:평신도들이 찬성했으며 신자들이 감독 선거에 참여했는데 주로 만장일치제였다.
- 라오디게아 회의에 이르러 선거를 군중에 맡기지 않기로 했다.
- 성직자들과 통치자들의 대립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 임지절차는 주로 거수로 결정되었으며,모든 감독 앞에서 임직했다.
- 대감독에 의한 성별은 한동안 진행됐으며 주로 안수 받는 것이었다.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감독직에 필요한 자격을 무시했다.
또 주교 권리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박탈했다.
고대에 평신도로부터 선출되던 감독을 임명직으로 한 다음에 무자격자를 성직에 임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10세된 소년이 주교가 되기도 했다.
교회가 혼란을 거듭하자 이러한 태만의 결과로 통치자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군주들이 볼 때 교회의 권리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사제와 부제를 임명할 때 일할 곳은 생각지 않고 마구 남발했다.
임명식은 고대처럼 평신도의 동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 앞에서 행해진 것도 아닌 만큼 가짜이다.
성직록은 뚜렷한 배경이 있어야 함에도 아무에게나 가리지 않고 준다. 이 성직이 어린아이의 유산으로 전래되기도 한다.
해괴한 악폐로 한 소년이 6가지 성직을 갖고 있는 등 멋대로 성직을 주면서 사도의 계승자라고 하고 있다.
“사제”가 된 수도사들이 생겨났다. 이것은 목적에 어긋난 것이다.
성직록을 받은 사제들과 고용살이를 하는 사제들이 있다.
여러 가지 성직의 겉치례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은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위험한 자들이다.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두스는 계급에 대한 모순을 지적했다.
선전과 현실이 다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더욱이 영적 지도자가 이러니 영적 혼란이 온다.
사제들의 도덕 수준은 이미 빛과 소금이 아니다. 고대 교회는 감독이나 장로를 판단하거나 책망할 수 있었는데, 그런 제도 없다.
부제는 사실상 집사와 같은 제도로 둔 것임에도 제단에서 봉사하거나 복음서를 읽거나 노래하거나 그 밖의 사소한 일들을 시킬 뿐이다. 결국 교회 재산의 분배나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참 광채는 사라지고 성직자의 재산은 점점 증식되어 갔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카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는 성경적이 아니므로 따를 필요가 없다. 그들이 교회의 머리가 없으면 교회가 산산조각이 난다고 말하나, 하나님이 교회의 머리로 교황을 두신 적이 없다.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이미 대제사장직은 그리스도로 인해 소멸되었다.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에게서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이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도 교회를 먹이라고 권고한다(벧전 5:2).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으로 교황에게 어떤 특권을 주었다는 것은 모순이다.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에게 어떤 독특한 권력이 이양되었다는 말은 없다.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볼 때 다른 사도와 동등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두 장에 걸쳐 자기는 사도로서 베드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수령이었다고 해서 세계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로 볼 수 없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진정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 없다.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은 베드로가 로마로 옮길 때 그 권좌까지도 옮겨왔다는 논리로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로 볼 때, 왜 안디옥에 둘 째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는가. 각 교회의 영예의 정도가 과연 설립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유세비우스가 25년 다스렸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 베드로의 사역 기간 중 로마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더욱이 로마교회를 주관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가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관한 것이다. 바울의 기록에 베드로의 영접 내지 사역이 나타나지 않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은 크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인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
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니케아와 에베소의 회의에서 로마 교구가 가졌던 지위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이 고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대해서 니케아 회의의 결정보다 더 일찍 확인된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결정에서 총감독 중의 첫째 자리가 로마 감독에게 주어졌고 그에게 인근 교구를 돌보라고 명령했다.
칼케돈과 제 5 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황제의 양보로 로마 교회의 대표들이 첫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이것을 비상한 특권이라고 인정했다. 이것이 나중에 교황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후대에 로마 감독들이 지칭한 높은 칭호는 초기에 없었다.
그리고리우스 1세는 “보편적인 감독”이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처음에는 감독도 주위를 의식해 어느 한 사람이 특정된 지위를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로마 재판권의 시초는 지방 감독들이 모순된 재판을 할 때, 그 피해자들이 로마에 와서 호소하면서부터이다.
당시의 로마가 가졌던 권한의 특색은 감독의 임명과 회의 소집과 상소 수락 또는 재판권과 징계 명령 또는 견책의 넷이다.
상호 충고. 로마 감독들은 다른 감독들에게 충고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충고를 받았다. 이로 보아 지방 감독에 대한 재판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회의 소집권이 로마 감독에게 있지 않았다. 세계 회의의 소집은 황제만이 할 수 있었다. 감독은 자기 지방의 일은 지방 감독이 회의를 소집했다.
위조 문서를 이용했다. 과연 로마 교회가 상소 받는 권한이 있었는가. 아프리카에서도 자기들이 문제가 있을 때 로마 교회에 상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러한 전례가 있다고 거짓된 주장을 했다. 심지어 위조 서류를 통해 로마 감독에게 복종하는 형식의 글을 만들어 퍼뜨렸다.
콘스탄티누스와 멜키아데스 감독과 아를 종교 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만 해도 그들은 로마교회가 상소권이 없음을 드러냈다.
위조와 횡령을 통해 로마에서 점차 권한을 굳혀 갔다.
그레고리우스 1세 시대에는 이미 고대 방식이 많이 변했다. 무질서와 파멸 속에서 교회들은 로마 교회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때 로마 교구가 자연히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부상되었다. 그러나 재판권 행사와 같은 일은 황제의 동의하에서 했다.
그레고리우스 재임 중에 교황직에 가한 제한은 황제가 스스로 한 것이지 교황의 권리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수위권을 다투었다. 이것은 황제가 제국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권위 문제가 발생한 탓이다. 이노센트는 로마의 어진 것이 곧 교회의 권위에 문제를 야기시킬 것을 우려해 조바심했다. 그렇지만 제국의 세속적인 질서에 따라 대감독들을 배치하는 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인정받은 것을 레오는 분개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새 로마임으로 그곳의 감독은 로마 감독 다음가는 특권을 가진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레오는 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합리적인 여론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은 둘째 총감독이 되었다.
단식자 요한의 교만과 그레고리우스의 겸손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주관한 요한이, 자기는 “보편적 총대감독”이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때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교구의 정당한 입장한 입장을 지키려고 꾸준히 반대했다. 그는 서신을 내어 이러한 모순을 지적했다. 그러나 마우리티우스 황제의 후원을 입은 요한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이를 지키고자 했다.
마침내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었다. 마침내 마우리티우스 황제가 살해된 후에 그 뒤를 이은 포카스가 그레고리우스가 원한 일이 없는 특권을 주었는데, 그것은 로마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후에 로마 교황의 덕으로 사를마뉴 대제는 교황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루두스 시대까지의 교회의 쇠퇴가 계속됐다. 교회의 부패와 로마교황청의 전제는 극도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현대(칼빈 당시)의 교황제도와 그 권력의 주장은 오히려 중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교황의 명령은 베드로의 거룩한 음성이라고 내세워 복종을 강요했다. 무엇보다 교황의 독재를 제어할 기구도 없다.
무모한 권력 주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위조 문서들. 이런 종류의 교황의 포고들에 무게를 더하기 위하여 그들은 고대 교황들의 이름을 바꿔 넣고는 맨 처음부터 일이 그렇게 확정된 것 같이 보이려고 한다. 그 예로, 아무리 먼 지방에서도 로마 감독에게 미리 문의하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소급해 적용했다. 또 교황은 무오하다는 말을 누가 믿을 것인가.
지금 교황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레고리우스는 배척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무도 자기를 “보편적”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명령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는 등급에서 당신들은 저의 형제시요 덕성에서는 저의 부모라는 말을 했다.
현재의 교황권의 부패상은 일종의 전제정치와 같은 것이다.
로마에는 교회나 감독직이 있는가. 이러한 논리는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 성경에는 많은 감독에 대한 말은 있어도 특정된 하나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배교(背敎)- 교회의 진정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교회를 끊고 그 사지를 뜯어버리며 그 몸을 갈기갈기 찢은 사람이 교회의 머리일 수 있겠는가. 옛날의 로마는 참으로 모든 교회의 어머니 같은 곳이었으나 적그리스도의 자리가 되기 시작한 후로는 과거와 달라졌다.
적그리스도의 왕국
로마 교황은 곧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 도전해 온 적그리스도이다. 더욱이 그가 하나님의 대권자란 이름을 내세우고 있음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유 권한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인간인 자신에게 부여했다.
교황권은 진정한 교회 질서에서 멀리 떠났다.
교황들의 악행과 이단 설은 그들의 권력 주장과 전연 반대된다. 결국 로마 교회는 교황 중심의 새로운 종교이다.
요한 22세의 배교 - 그는 영혼은 사멸적인 것이어서 육체와 함께 죽어 부활하는 날까지 죽은 대로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교황과 주교들의 도덕적 방종은 극에 달해 온갖 추악한 비리가 드러났다.
추기경들 -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 이름은 감독들에게만 붙었던 것이 갑자기 큰 인물로 부상되었다.
엄밀한 성경적 의미에서 볼 때, 로마 교황 자체가 잘못된 것이므로 이와 관련된 모든 제와 계급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의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교리에 대한 교회의 권위: 그 임무와 한계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권한을 허락한다면 곧 전제로 타락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이 전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리 추방해야 한다.
교리에 대한 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 하나님이 어떤 권위나 위엄을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도들의 사도나 후계자에게 주실 때에 개인에게 주시지 않고 그들이 임명되는 직분에 주셨다.
교리에 관한 사도들의 권위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며 주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곧 모든 권위나 직무는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에게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기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일성 있게 다루기 위해 성경을 표준으로 세우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드디어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 이제 보다 완연히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히 성경은 더 이상의 첨가가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한 표준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칠 권한을 사도들은 받았다. 이 말은 곧 사도의 계승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때도 성경을 전제로 한다.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더욱 없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카톨릭 교회의 주장
그들은 전체 회의가 교회의 진정한 현상이라고 하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 결정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교리를 만든다.
교회 내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말씀에 매여있다. 카톨릭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이나 사도들도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는데(빌 3:12), 완전이란 말은 모순이다.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교회의 완전한 권위는 지상교회에서 인정하기 어렵다. 진리의 보존은 교회의 과제일 따름이다.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그 받은 약속들을 전적으로 확신함으로써 신앙을 지탱하는 훌륭한 수단을 가질 수 있다. 카톨릭이 말하는 성령은 성령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또한 전승은 성경보다 낫다는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사도가 자신이 분명히 가르치지 못한 것을 후에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두 가지 서론적인 말 - 교회의 권위보다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권위이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아무와도 나누지 못한다. 따라서 어떠한 전체 회의라도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의 지배를 받을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것이 된다. 또한 회의들에 이 문제를 돌림은 고대 회의와 비교에 정통성을 비교해 보려는 것이다.
교회의 회의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교회의 모든 회의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나의 신앙을 예속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목자”가 없이도 또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는 교회 내에 자립 자존할 수 있다.
그들은 목자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진리가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짓 목자 아래에서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목자의 변절은 예언되었다. 성경에는 거짓 목자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목자는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 임명된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마땅히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해야 한다.
목자들은 잘 식별해야 한다. 목자들은 잘 식별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목자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곧 그렇게 인정해서는 안된다.
회의들도 진리에 맞설 수 없다. 아합 시대에 소집된 예언자 400명은 악한 왕에게 아첨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11:47에 있는 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인 회의는(요 11:47) 겉보기에 아무 결함도 없었던 것 같았다. 대제사장이 회의를 주관하고 제사장들이 모두 출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그의 교훈을 배척했다(마 26:57 이하).
회의들의 결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회의들은 그 구성인원과 소집 시기와 목적 그리고 진행 방법과 결정이 타당해야 한다. 그런데 로마 회의의 경우 얼마나 모순이 많은가.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권위로 사안을 결정하려 든다.
회의들이 서로 충돌했다. 레오 황제 때 열린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교회 안에 세운 형상들을 전부 끌어내어 부숴버리기로 결정했다. 곧 이어 이 회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레네 여왕이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는 형상들을 복구하도록 판결했다. 적어도 이 둘 중 하나는 잘못된 회의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두 번째 회의가 후에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무엇보다 로마 회의의 가장 문제점은 그들이 그 결정을 성경과 동등시한 것이다.
판단의 기준이 성경이라면 로마 교회의 성령은 그들에 의해 구금 상태에 있다. 결국 성경이 표준이 될 때 그 회의는 정당하다.
회의들과 인간적 결함
고대의 순수한 회의들도 결함이 있었다. 니케아 회의 때 아리우스와 싸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사소한 내분으로 정작 적과의 싸움을 놓치고 만 것이다.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맹종은 불가하다. 인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과연 미덕인가.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다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
성경 해석을 위한 회의들의 실제적 의의는 무엇인가.
교회가 교리를 만들거나 임의로 성경 해석을 할 권리가 없다. 그럼에도 성경 해석권은 회의들에 속하며 더 상소할 길이 없다고 한다.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카톨릭 교회는 그릇된 평가를 한다. 그들은 모든 결정을 “성경에 대한 해석”이라고 부름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구실로 악용한다. 결국 그들은 이러한 모순으로 성경을 벗어나고 말았다. 그 결과 외경이 성경 속에 섞여들고 새로운 전통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성경 시대 이후에도 성경과 권위가 등등하다고 믿든 여러 가지 결정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성경과 벗어난 모순들이 더욱 자리잡게 되었다.
제 10 장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
혼에 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근본문제는 양심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양심은 자유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카톨릭의 교회법은 양심을 노예로 만든다.
양심의 본성은 하나님의 판단을 마음에 의식하는 것이다.
양심의 속박과 자유에 있어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양심을 구속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곧 양심의 자유이다.
사람이 만든 법 중 양심에 짐을 지우는 법이 곧 불법이다.
교회는 양심을 속박하는 독립된 법을 정할 권리가 없다.
모든 자의적 지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침범이다. 하나님의 율법이나 성경 또는 양심의 법은 고유한 것으로 첨가할 수 없다.
인간이 만든 법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곧 불법이다.
이미 말한 원칙에 따라 카톨릭 교회의 교회법은 배격되어야 한다.
교황제도의 교회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한다. 또한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하며 무익하다. 이것은 결국 사람의 유전일 뿐이다.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한 집성에 의해서 유대교적 요소로 양심을 괴롭힌다. 그들의 법은 속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의식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것이지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패한 의식들을 속죄의 제사라고 하고 한다.
결국 카톨릭의 제도는 미신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통찰과 그 적용 - 구원은 곧 자유를 의미하는데 그들은 미신적인 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얽매어 놓고 있다.
카톨릭 법은 교회법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카톨릭의 교회법은 “사도적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사도 시대 이후에 축적된 무익한 의식 - 예를 들면, 사도 시대의 성찬은 아무 간단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사는 화려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사도적”이라고 칭한다.
어거스틴의 말 가운데 “발 씻기는 일”이 세례와 비슷한 전통이 될 것 같아 피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수(聖水)라는 것을 만들었다.
사도행전 15:20에 있는 명령을 통해 사도가 형제의 입장과 규제에 얼마나 조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약한 형제들에게 대항 의무(고전 8:1-9 참조)에 비해 로마 카톨릭의
전통은 너무나 강하다.
교회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증거와 모순이 된다.
하나님은 패악한 예배를 미워하신다. 사람이 정한 법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요 4:24 참조).
카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반증 가운데 기드온이 만든 ‘에봇’이나 몇몇 구절을 들어 정당화시키려 들고 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제사장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구약의 제사 직무를 논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다.
교회법의 필요성 - 교회법은 구속받은 인간의 구원을 돕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규정을 세워놓고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교회법은 신자들의 성회에서는 모든 일이 적절하고 위엄 있게 행해지고 또 인간의 공동체는 인간애와 절도의 유대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즉 책임자들은 훌륭하게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하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권징에 순종하는 습성이 있어야 한다. 또 질서 정연하게 교회를 세운 후 교회는 평화와 평온을 이루어야 한다.
예배에서의 진정한 예절은 허식을 피하는 것이다.
교회법에 의한 속박과 자유 - 거짓 주교들은 교회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유로운 양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준수해야 할 사항은 적어야 하고 또 덕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그것의 남용
교회 재판권의 근거는 열쇠의 권한에 있다. 교회의 재판권은 전적으로 도덕적 권징에 관한 것이며 구원과 관련하여 다루지는 못한다.
매고 푸는 권세가 교황에게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국가의 재판권과 교회의 재판권이 유사한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강제권이 없다. 대신 성만찬의 거부와 같이 영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리 - 마 18장은 일시적인 제도나 사람에게 위임한 것이 아니라 고정적인 영구한 제도로서 고백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 재판권의 영적 성격 - 교회 재판권의 목적은 죄악을 막으며 발생한 불상사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냉정해서도 안되며 합법적인 회의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고대 교회에서는 어느 개인이 법을 집행하지 않았다. 재판권과 권징은 카톨릭 교회 내에서 타락하기에 이르렀다.
주교의 세속적 권력은 주교직의 의미와 모순된다. 심지어 주교들이 군주의 권력을 장악했다. 과거 분쟁이 생기면 덕스럽게 결정하려고 주교에게 판단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그들은 돕는 자에서 주인이 되었고 심지어 폭력과 파쟁으로 권력을 잡게 되었다.
교황이 세계의 수위권을 가지게 된 시초
마침내 로마 감독은 적당한 귀족령에 만족하지 않고, 처음에는 왕국들에 손을 대고 다음에는 제국 자체에 손을 댔다. 나아가 신이 주는 권리를 가졌다고 호언했다. 이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헌서는 어리석은 사기이다.
헨리 4세와 힐데브란드 - 교황이 군주들에게 복종하며 반드시 황제의 인정을 받아 교황이 된 지 500년만에 황제 헨리 5세의 경솔한 정치에 힘입어 드디어 힐데브란드 때에 이르러 서방 제국이 자기 것인 양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힐데브란드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자청했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저주받은 교회 재산 유용처럼 오늘날도 이런 일이 계속되어 왔다.
카톨릭 성직자들은 재판권에 자기들의 치외법권을 첨부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치외법권을 자랑하지 않고 세속 재판소에 나갔다. 또한 군주가 이런 명령을 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었다.
제 12 장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교회의 권징의 필요성과 성격 - 권징은 대개 열쇠의 권한과 영적 재판권에 의존한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사용한 시정책은 이 권징뿐이다.
교회 권징의 단계 - 사적 충고 → 두 세 증인 앞에서 충고 → 교회 재판소 → 출교 (신자 공동체에서 제거, 참조 마 18;15,17).
숨은 죄는 사적으로 나타난 죄는 공중 앞에서 엄히 책망해야 한다.
경한 죄는 충고, 중한 죄는 엄한 충고 또는 출교 등으로 다스린다.
권징의 목적
첫째,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둘째, 악한 사람들과 항상 교제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자기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권징은 경우에 따라 처리 방법이 다양하다.
고대 교회에서는 권징이 모든 위반자에게 등등하게 적용되었다.
교회 권징은 지나치게 엄격해서는 안되며 온건주의가 필요하다.
교회 권징에 따르는 인간들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출교는 교정 수단이자 저주가 아니다. 권징(출교)은 도살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 권징에 대한 완고한 과격주의를 배척한다.
환난을 일으키는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는 분리주의이다.
어거스틴은 분별력이 있는 권징을 요구한다.
죄를 공적으로 서로 고백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제도이다.
금식의 목적은 육의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며, 기도와 거룩한 명상을 위해 우리의 심신을 더욱 잘 준비하도록, 또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금식한다.
금식과 기도는 그 목적이 다르나 함께 행하면 더욱 좋다. 또한 금식과 회개를 통해 자복하는 것이 낫다. 금식은 주님이 권하신 것이다.
금식의 성격은 완전 금식과 임시적인 금식이 있다. 또한 금식을 위해 마음을 찢는 태도가 필요하며 금식이 공적이 될 수 없다.
교회사에서 금식은 타락했다. 외적인 금식을 위해 여러 가지 모양의 금식이 있었는데, 소박한 음식, 요리법을 다르게 한 금식도 있었다.
금식 기간에 사악한 방종에 빠졌다. 그들은 금식 기간에 고기를 제외한 진미를 먹기도 했다.
성직자들의 권징이 자주 쉽게 바뀌고 결국 타락으로 이어졌다.
사제의 독신제는 성경에 배치된다. 제1대 교황으로 꼽는 베드로 사도도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
독신주의는 순결을 최상으로 생각하는 일종의 미신적인 태도이다.
제 13 장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 앞에 ‘맹세’ 하므로 속박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상대로 맹세한다는 자체가 모순이 된다.
맹세는 결국 자기 자신이 결정한 것이지 하나님과의 약속이 아니다.
성경적인 삶을 위한 다짐은 장려할만 하나 헛맹세를 말아야 한다.
사악한 맹세 즉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고대 교회의 수도원 생활은 모순이 있다. 그들의 수도사 서약(일종의 맹세)이 과연 타당한가. 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신자가 세상을 등지고 유배 생활을 자청함이 옳은 일인가 생각해야 한다.
마 19:21을 내세워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경우가 있겠으나 그보다 형제 사랑이 우선이다.
독신생활에 대한 맹세는 성경적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5:12에 있는 내용
도 본래 60세 이상된 여자들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인생의 경험도 제대로 없는 어린 소녀를 수녀로 내세워 독신 서약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허용할 수 없는 맹세는 포기하여 자유를 얻는 것이 낫다.
또한 수도원을 떠나 존경할 만한 새 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제 14 장 성 례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례’라는 말은 μυστηριον(비밀 ,신비)을 번역한 것이다. 즉 신성한 일을 비밀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성례가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냄을 말해준다.
이 성례는 인장(印章)과 같다. 또한 언약의 표징이다.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은 오히려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중거이다.
성례의 의해서 믿음이 증진되기보다 성령과 말씀으로 믿음이 자라나며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사크라멘툼”(sacramentum )이란 “표징”으로 성례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돕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이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향상을 위해선 말씀과 교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성례의 진정한 의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졌다.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광의의 성례는 구약의 표징을 들 수 있는데, 노아의 무지개나 기드온에게 보여준 양털의 표시, 히스시야에게 보이신 일영표의 뒤로 물러남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의 믿음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므로 성례이다.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 이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다.
구약의 성례들(할례, 희생, 결례 등)은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것이다.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옛 성례나 새 성례나 모두 하나님이 함께 제정하신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다만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례는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며 구원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할례의 가치에 대해 바울은 내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건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세례가 이를 증거하는 것이므로 할례는 무관하다.
고대에 성례에 큰 가치를 부여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외적 표시이므로 내적 회개와 변화만큼 비중을 두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의 화려함보다 그리스도를 무시한 것이 잘못된 것처럼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한다.
성례가 그리스도를 믿는 외형적인 공로가 될 수 없다. 율법의 행위처럼 성례를 생각한다면 이는 성례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처사이다.
제 15 장 세 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세례가 가져다주는 것은,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와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 또 세례란 자신의 죄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친 문서와 같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란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세례의 효과는 말씀없이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평생 깨끗하게 살아야 할 표로서 정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세례와 회개는 개념이 다르다. 세례는 씻음 받은 것의 표시이며 회개는 이를 회상하며 그때 그때 새로와 지는 것을 말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운 진다는 표이다. 또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 그리스도의 표상인데 비해 예수님의 세례(예수 이름으로)는 실체로서 회개와 용서 즉 구원에 이르는 표시를 완연히 드러내었다.
세례는 같으나 사람은 다르다. 어디에서 받은 세례이던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 중요하며 반복해 받을 필요는 없다.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으로 노아의 구원, 홍해 사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가리우신다. 이러한 표징으로서 세례의 의미가 주는 것이 크다 하겠다.
세례와 원죄와 새로운 의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울의 내적 투쟁: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값없이 주시는 의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우리는 중생의 약속에 따라 세례를 받는다고(롬 6:3 이하) 첨부한다.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이 된다. 참으로 세레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정되고 싶다는 소원을 공포하며, 세레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한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세례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표징과 실상 -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시며 강화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므로 제정하신 분의 손에서 직접 받은 것같이 받아야 한다.
세례는 믿음을 확고히 한다. 백부장은 이미 믿음이 인정되었지만 세례에 의해 믿음을 입증받았다(행 10:48). 표징과 실체가 다르다고 해서 세례를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다(고전 12:13).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대개 믿음이 충실치 못한 상태에서 세례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 후회를 하는 예가 있다. 하지만 주님은 마음을 돌이키라고 하시지 세례를 다시 받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바울도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릇된 세례 의식과 바른 세례 의식 - 세례 받는 방법에 따라 그 권위가 다르다는 주장이다. 세례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켜 혼란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례는 본래 ‘밥티죠’라는 말은 잠근다는 뜻으로 고대에는 침례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
비상(非常)한 세례에 반대한다. 사사로운 개인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에 지장이 없다. 그러므로 비상한 세례보다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
여성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단순한 그녀의 검정의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일이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은 그릇되다. 유아세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도이다. 세례는 또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상징이 된다.
세례와 할례는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이다. 할례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으므로 유아가 어려서 세례를 못 받는다는 말은 모순된다. 이 두 표징의 차이는 외적인 것에 있다.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그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예수님과 어린이들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첨가하셨다(마 19:14).
유아세례에 대해 성경의 침묵은 성경에서 벗어난 제도라는 뜻이 아니다. 세례는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유아들에게도 합당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사도시대부터 시행된 제도이다.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 유아세례를 무익하다고 하는 논리는 곧 할례를 무익하다고 하는 논리와도 같다. 유아에게 주는 은혜가 더욱 크다.
약속은 영적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자들도 어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때묻지 않은 유아들이 받는 세례가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천하만민이 세례 받을 자격이 있다. 다만 유대인은 특별한 은혜를 입은 민족이다.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세례는 영적 전투의 첫날에 받으나,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이 끝난 8일에 속한다. 그러나 세례와 할례와의 유사점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내적 신비 즉 약속과 가치와 효력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갓난 유아기부터 거룩하게 지내셨다. 따라서 유아들을 주님을 본받도록 해야 한다.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하나 성령께서 원하신다면 작은 빛을 어린 유아들에게 비출 수 있다. 유아들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면 결국 모든 유아들이 죽음과 동시에 멸망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이 드러내지 않고 역사하시는 부분에 대해 누가 나무랄 수 있는가.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은 할례의 무위성을 논하는 것과 같다. 할례가 필요했듯이 유아세례도 필요한 것이다.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이 성례의 나머지 의미는 후에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된다.
어른들에게 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적용시키지 말라.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난 유아들은 이삭과 같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생명수인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물론 어린이가 중생의 고백을 할 수 없더라도 영적 은사가 가능하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하는 고로 어린이의 갑작스런 죽음이 단지 세례를 받지 않아 멸망당하진 않는다.
세례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이나 교육보다 세례가 먼저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6에는 유아세례에 대한 말씀이 없다. 여기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가르치라는 말이 나와 있다. - 예수님은 성인세례의 원형이시다.
세례와 성만찬에서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성만찬은 주의 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전 11:29).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상징들은 완전하므로 완전한 사람들 또는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인 이라 해서 어느 순간에 완전해지지 않는다. “완전성”을 전제로 한다면 어른들도 세례에 합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는 하나님을 확고히 믿지 않은 어린이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이다.
또한 그는 구약에 제물도 어린 것은 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초태생은 하나님의 구별하신 바이다. 무엇보다 말씀과 성령을 받은 자만이 세례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신앙의 부모로서 어린이에게 경건을 가르치는 것은 의무일 뿐 아니라 온 가족의 구원을 위해 어린이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의 권속 즉 교회의 일원으로 가입시키시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정당하다.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곳이 주는 유익
표징과 본체 -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 평생토록 영혼의 양식으로 먹여주신다. 또 계속되는 후의를 우리가 확신할 수 있도록 성만찬을 통해 이를 확증하게 하신다.
그 표징은 떡과 포도주다. 이 표징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한다.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또 잔을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다(눅 22:30; 고전 11:25).
성만찬의 특별한 결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경험한다. 성만찬의 보다 큰 의미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있다.
성만찬은 믿음으로 먹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 따라서 떡과 포도주 그 자체보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느끼는 감동이 다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즉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덧입는 생명체가 된다.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은 그의 본체를 직접 느낄 때 의미가 큰 것이다.
성찬의 의미를 정리하면, 첫째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둘째는 그의 본체에 참여하게 된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능력도 느끼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찬 시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하는가. 쯔윌글리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화체설’을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 그러므로 성찬 때마다 직접 강림하신다는 표현은 무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통해 역사하신다.
“반대론”은 “떡 밑에” 라는 말을 첨거하므로써 몸이 떡 밑에 숨어 있다는 뜻으로 말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내려오셔야만 그 몸과 연결될 수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대론자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적 존재를 부인한다.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들어올릴 때에 임재를 인식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이런 모양으로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거나 떡 속에 포함시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국한해서는 안된다.
성찬은 말씀으로 제정하신 것이다. 즉 언약의 말씀과 표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성찬의 목적은 곧 그리스도의 언약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고 그의 수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성찬에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끌어내리기 보다 우리가 그분께 올라가야 한다.
성찬의 대상은 모든 믿는 자들이다. 이것은 주님이 정하신 것인 만큼 모든 구원 얻은 자가 참여해 기념해야 할 것이다.
제 18 장 카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
것을 말살하는 모독 행위다
카톨릭은 그리스도를 드리는 사제와 그 봉헌에 참여하는 신도들이 미사라는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미사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며 이 제물에 의해서 하나님을 자기들과 화해시킨다고 한다.
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다. 성경에는 집례자로 인정된 신분은 평생 성례를 집례할 수 있으나 카톨릭은 예물을 드릴 제사장을 지정해야 하며 그들은 후계자와 대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를 영원한 대제사장에서 몰아내는 만행이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속제 제물이 되시므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는데, 미사는 새로운 예물로 반복한다.
그들은 미사의 근거로 말 1:11을 든다. 그러나 새 예물을 드림으로 깨끗해진다는 논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무위로 끝낸다.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또한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더욱이 미사는 성만찬과 다른 개념이므로 결국 성만찬을 폐기한다.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인데, 칼빈은 이 “미사”라는 말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적 미사는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에 정반대 되며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불경한 모독이다.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더욱이 사제직을 지지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의 사제직을 지지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은 일점 일획도 찾을 수 없다.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로 보았는가. 제사에 대해서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바치는가가 분명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미사는 제사로 분류되기도 어렵다.
어거스틴은 주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음성일 것이라고 말한다.
교부들의 책임도 있다. 그들이 율법 쪽으로 많이 기운 탓에 이러한 제도가 싹틀 기회를 준 것이다.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은 차이가 뚜렷하다. 구약은 울법을 따랐으나 주의 만찬은 주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희생 또한 뚜렷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미사는 그 어디에도 근거를 찾기 어렵다. 더욱이 미사를 판매까지 한다. 미사 때 헌물을 바치도록 한 것은 결국 미사를 판매하는 것이다.
미사는 더럽혀졌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성경에서 유일한 성례는 세례와 주의 성만찬 만이다. 성경에 근거가 없이 성례를 축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
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
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
을 밝힌다.
성경에 성례는 두 가지(세례와 성찬)만 나오는데 일곱 가지 성사라는 관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나머지 5 가지를 문제삼고자 한다.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하실 수 있다. 그런데도 성례가 일곱 가지란 주장은 억지이며 고대 교회에도 없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가 가르치는 견진례의 의미 - 그 선언에 성령의 임재는 없다.
즉 사람에게서 견진 선언을 받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또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실제로 카톨릭교회는 견진례보다 세례를 중요시한다. 이 견지례는 고대 교회의 관습에서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대 교회의 참회를 이용해 만든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참회는 변형해서 성례의 하나로 보면서 참회에 따른 사면은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따라서 이를 가리켜 “고해성사”라 했으면 나을 것이다.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이 종부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임종은 자연적인 현상이며 성사로 꼽을 수 없다.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그들이 근거로 꼽는 야고보서(약 5:14)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했음에도 그들은 운명 직전에 있는 시체 같은 사람에게만 기름을 바른다.
신품 성사 - 이는 성직의 계급으로 수문품, 강경품, 구마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과 사제품이다. 이것을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들은 교회 여러 직책을 두지만 정작 낮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성별 의식. 특히 삭발례는 외형을 중시한 형식적인 것이다.
“사제”와 “장로”. 이들은 “사제”와 “장로”의 임무에 대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제란 신분은 결국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위치에 서 있다.
사제의 임명식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는 시늉을 한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위조를 잘하는 가 대변해 주는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또한 도유는 쇠퇴한 의식에 속한다. 그 진정한 의미는 성령의 임재이다.
부제는 ‘집사’직과 유사한 위치로 사제가 임명한다. 그러나 개인(사제)이 선임해 단독으로 임명하는 것은 모순이 있다. 그리고도 그들은 부제를 레위족이라 칭한다.
차부제는 주로 하찮은 일을 하도록 지명된 자들이다. 이들을 부리면서도 ‘성례’라는 고상한 단어를 사용한다.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른바 “혼인성사”란 것을 만들었다. 이 말이 ‘혼인성사’(婚姻成事)가 아닌 ‘혼인성사’(婚姻聖事)로 부르고 있음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을 ‘성사’(聖事)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어떤 직을 수행하는 것도 아님에도 이렇듯 다루고 있음은 인간 생활의 모든 사건을 다 ‘성사’(聖事)라 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5:28을 잘못 적용한다. 이 말은 영적 혼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결혼에 적용했다. 그렇다면 남녀의 육체적 결합이 ‘성사’(聖事)인가.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결국 폭압이며 뭇 신도들을 우롱하는 것이다.
제 20 장 국가 통치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
영적 통치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이미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시민 생활과 도덕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복음과 자유는 자칫하면 혼동하기 싶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만큼 두 가지 통치(하나님의 나라와 국가)를 모두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의 법도 필요한 만큼 지켜야하며 집권자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 대개 국가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세워진 것이다.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정권은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롭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공중집회에서 왕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충고했다. 즉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겼다.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왕을 공경하라고 말한다(잠 24:21; 벧전 2:17).
각종 정부의 형태가 있으나 우리가 사는 곳에 주께서 세우신 사람들에게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집권자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위임받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된다. 참으로 정의는 무죄한 사람을 지켜주며, 감싸주며, 보호하며, 변호하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은 담대한 악인들을 막고 그 폭행을 억압하며 그 비행을 벌하는 것이다.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 집권자는 강제력과 관용 둘 다 겸비해야 한다.
정부의 전쟁 수행권 - 왕과 국민은 공적인 보복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때로는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토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이를 방어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도 성경의 많은 중거를 통해 이런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신다. 물론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자제와 인도적인 정신을 지녀야 한다.
정부의 과세권에 대해 인정해야 한다.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과세는 있을 수 있으나 군주의 사욕을 위해 백성들의 비난을 사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있듯이 각국의 법이 있다. 국가 권력의 공정한 집행을 위해 미리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법에는 공정성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식한 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소송은 사랑과 성의를 전제로 대한 다음 결정해야 한다.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필요시 우리는 법의 절차를 따를 수 있다.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 이익을 수호한다. 무엇보다 서로 공경하며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특히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이다. 성경은 악한 왕에게도 복종하라고 요구하신다.
예레미야 27자:5-8,17에 “너희는 .....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을 수록하고 있다.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잘못된 관례가 있을 때 개입하시기도 한다(애굽의 열 재앙).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가령 우상숭배는 국가의 명이라도 따를 수 없다. 또한 양심의 자유나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에서 어긋날 때 따르기 어려운 예가 있다(세례요한과 헤롯, 다니엘과 느브갓네살 왕 등).
결 론
칼빈의 까 쓴 불후의 명작인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론’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론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하겠다.
교회는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와 같은 곳으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연결짓는 정류장이자 지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처소이다.
칼빈의 교회론을 읽고 느낀 점은 먼저 카톨릭 교회의 모순된 제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흔히 카톨릭 교회를 기독교와 한동안 비슷한 노선(중세기의 예를 들어)을 걸어왔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찬찬히 읽는 동안 아예 다른 종교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는 결국 인간이 만든 종교로서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신앙의 대상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같아 보는 이에 따라 비슷한 종교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더라도 그 방법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아야 한다. 카톨릭교회의 경우, 하나님이 인정하신 적이 없는 미사와 성사(聖事)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등 인간적인 외형과 전통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요소가 많다.
더욱이 교황이나 사제의 태도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보기 어렵다. 성경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변행해 마치 성경에 근거한 양 제도화시켜 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모독이다.
무엇보다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고대 교회와 일맥 상통해야 함에 카톨릭 교회 곳곳에 그러한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칼빈이 지적해 온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 중 사제의 자질이나 타락한 생활, 임지 없는 사제의 남발 등은 많이 해소된 셈이다.
오히려 신학교의 난립으로 목회자의 자질이 저으기 염려되며, 일부에서는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는 예가 있다. 더욱이 뚜렷한 임지가 없는 목회자가 수없이 속출하고 있어 오늘날의 한국 교회상이 외형적으로는 카톨릭 교회보다 심각한 일면이 있다. 사람들은 이미 제도화된 내부적 교리나 예배의 형식에 큰 문제를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도 사회 윤리적 문제나 질적 수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칼빈의 목사직에 대해 그토록 강조한 것은 루터의 “만인제사장” 논리와 다소 어긋나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칼빈이 염려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확실한 지도자가 없을 경우 입게 될 혼란을 먼저 염두에 둔 듯하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이른바 신학 수업을 받지 않은 ‘평신도 지도자’에 해당되는 것이 사실이다.
사도 외에 초대교회 감독 가운데에도 지명을 통해 임명되는 예가 있었다.
물론 이들은 그 덕망에나 신앙적인 수준에 있어서 존경받는 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이전에 카톨릭 교회의 무자격 사제의 등장과 무분별한 삶이 가져 온 모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칼빈은 목사직이 사도의 계승자라고 단호히 말한다.
특히 칼빈은 성례와 유아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제도는 하나님 앞에서 보다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로 보았다. 한편에서는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에 비해 교회에 필요한 성례만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성경에 부합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카톨릭 교회는 오랜 역사 동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인간들의 손에서 제멋대로 형태를 탈바꿈해 왔다. 그 결과 남미와 같이 카톨릭 교회가 영향을 미치고 있던 나라들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 나머지 점차 카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다.
참된 신앙은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한다. 또한 이웃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 사회를 밝힌다. 이에 비해 교권적인 교회는 이기심과 정욕에 이끌려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칼빈의 교회론은 오늘날 목회자가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되는지 좋은 지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목회자의 자격과 삶에 대해서도 새삼 느끼게 한다.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에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신성한 직분
제 4 장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 제도 이전의 정치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
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의로 교리
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제10 장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제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그것의 남용
제12 장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제13 장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제14 장 성 례
제15 장 세 례
제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제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곳이 주는 유익
제18 장 카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
살하는 모독 행위다
제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제20 장 국가통치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에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의 필요성 - 구원 얻은 사람의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약점에 대한 보조 수단을 첨가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가 활발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를 허락하셨으며, 이교 회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과 같다(갈 4:26).
교회와 신경 - 신경에서 우리가 “공회(=교회)를 믿는다”라고 하는 조항은 가견적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 죽은 사람들까지도 - 을 의미한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이며 결코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의 교통 -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교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두말할 나위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 행동해야 한다. 결국 성도는 한 소망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형제애로 연합될 뿐만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
선택받은 자의 구분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눠받게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가견적 교회는 곧 신자의 어머니로서 존재한다.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그 의무 - 하나님께서는 일순간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거룩한 회중이 성소 앞에 모이기를 원하셨으며, 거기서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얻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성직의 의미와 한도 - 구약의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을 세우신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역자들 앞에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이 온건한 멍에를 신자들에게 지우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불가견적 교회와 가견적 교회 -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다만 하나님에만 보이는 불가견적 교회는 완전하나 가견적 교회는 그 내부에 불견한 자들이 섞여 있다.
우리 판단의 한계 - 누가 참 하나님의 자녀인지 믿음의 확신을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고백과 삶의 모범 그리고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된다.
교회의 표지 - 교회의 표지에 있어서 성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인데 이 두 표지가 같는 의미가 크다.
교회 내의 불상사 - 교회 내의 불상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있으므로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교회를 떠날 사유가 되지 않는다.
갈라디아교회가 문제가 많았지만 바울은 이들은 사랑으로 타일렀다.
악인들과의 교제 - 악인들에게 성찬의 참여를 금해야 하듯이 그들과의 교제도 삼가야 한다.
완전을 자칭함은 그릇된 의견의 결과이다.
교회의 거룩성 - 지상 교회는 완전히 거룩하지 않다. 즉 하루 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언자와 사도들의 선례 - 그들은 비록 자신이 깨끗했지만 교회에서 자신을 불리하지 않았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같이 불경건한 자들이 있을 지라도 공공예배를 함께 드렸다.
죄의 용서와 교회 -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 안에 들어가는 첫 어귀는 죄의 용서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언약도 없고 하나님과의 결속도 없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하나님의 가족에 가입하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교회원들에 대한 용서는 영속한다. 베드로에게 준 열쇠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직책을 다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에 속한 자는 다음 세 가지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죽을 몸을 쓰고 사는 이상 여전히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둘째, 이 은혜는 교회에 속한 것이어서 교회와의 교통을 유지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세째, 이 은혜는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통해서 혹은 복음 선포로 혹은 성례 집행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모든 신자는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옛 언약 - 구약에서도(요셉에 대한 음해 모의, 다윗의 우리야 사건 등) 죄의 용서가 있었다. 또한 갈라디아 교회처럼 교리적으로 심각한 죄에 빠졌을 때 바울의 이해와 사랑이 있었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근본적인 구별 - 교회의 기초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교훈이며 그들은 또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경건으로 이 핵심체가 죽으면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된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로마교회와 그 주장은 모순된다. 성경의 교회를 계승한 것이 참 교회이며 자신들이 주장만 한다고 해서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이다. 더우기 우상을 두고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가 참 교회일 수 없다.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지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홀 즉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하듯이 하는 주장은 거짓이다.
오히려 로마 교회가 기독교회를 가리켜 “분파와 이단”이라고 하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믿음의 결합은 아름다운 일이나 “그리스도 안에”라는 범주를 떠나 하나가 될 수 없다.
-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이 연합의 조건이다.
- 로마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이와 같이 분리는 그들 스스로가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를 하였으나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그것은 때때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장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정하신 의식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는 끝내 망했다.
카톨릭 교회는 부패되었으며 배겨되어야 한다. 여로보암 때 예배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하나 신성 모독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한다. 그러한 교회를 경솔히 따라가면 안된다.
- 부패한 교회는 떠나야 한다. 열쇠는 말씀과 관련이 있다. 불경건한 교회는 하나님이 가증해 여기신다.
- 교황제도 하에 남아 있는 교회의 흔적 - 역사를 통해 교회에 많은 박해가 가해졌지만 세례 의식이 남아 있고 또 일부 교회가 존속해 왔다. 이는 하나님이 남겨두신 것이다.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부패한 교회가 참교회가 될 수 없다. 교황의 지배하에 있는 교회를 정당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는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로마 교회는 정당한 표지가 없다. 따라서 교회라 할 수 없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신성한 직분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그의 사자가 되게 하시며(고후 5:20참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신다. 교회는 결국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되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바울은, 사람의 봉사는 신자들을 결속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이라는 말로 사람의 봉사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 위탁하시고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통해서 선물들을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의 이 제도 안에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이심으로써 그 제도가 허망한 것이나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 지상의 교회를 유자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및 목회적 직분이 필요하다.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성직 제도를 옳게 보시며 온갖 가능한 법으로 그 위엄을 칭찬하시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고넬료에게 사자가 필요할 때, 성령을 통해 베드로를 인도하셨다. 또한 바울을 택해 사도로 임명하셨다.
에베소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둘째는 선지자, 셋째는 복음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11). 이중에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 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켰다.
칼빈은 “목사와 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점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교사들은 제자 훈련이나 성례 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임시직과 항존직 - 사도와 목사들
교회 직분 사도가 가장 권위가 있었다. 그리고 목사직 또한 이러한 사도직에 버금가는 직무이다.
사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된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집례하고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라는 것이다.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전체적인 통일성을 준수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직분: 장로
성경에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롬 12:8)라고 했는데 그 대상이 곧 ‘장로’이다. 특히 장로는 “장로회”를 이루게 되는데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집 사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겨졌다. 이 직을 세분화해 보면, 구제 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들과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
소 명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소명에는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 있는데, 무엇보다 경건하고 학식이 겸비된 자라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을 가진 자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신다.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은 두 구절에서(딛 1:7; 딤전 3:1-7) 어떤 감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충분히 논한다. 요약하면, 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딤전 3:2-3; 딛 1:7-8). 집사와 장로들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한다(딤전 3:8-13).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를 세웠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했다(행 14:23). 따라서 반드시 최고의 경의와 주의를 가지고 그 일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분별의 영을 하나님에게 구했다(참조 사 11:2).
누가 사역자를 택할 것인가.
사역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 자신의 입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선택되었다고 언명했다.
사람을 통해서 - 가룟 유다 자리를 보충할 때,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결정했다. 결국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
평신도의 투표 - 감독의 선정은 모든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을 선정하며 공중의 결정과 증언에 의해서 감독이 적임자임을 증명했다.
적당한 듯한 사람들은 일반 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특히 목사의 선거는 다른 목사들이 주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명은 주로 안수를 하나 공중 앞에 공포하는 것이 권위가 있다.
제 4 장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 제도 이전의 정치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했다.
우리는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역자가 있음을 보게 된다.
(1)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2)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를 견책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3)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제롬은 다섯 가지 교회 계급을 말했는데, 감독, 장로, 집사, 신자, 학습교인이라고 했다. 그밖의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에게는 특별한 지위가 주어지지 않았다.
감독의 지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모두 “장로”라고 불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불화를 막기 위함인 듯하다(같은 ‘장로’의 신분이어서 ).
혹 감독이 맡은 지역이 너무 넓어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곳이 있을 때에는 장로들을 배치해서 작은 일들을 대신 처리하게 했으며, 이들은 지방 전체의 감독을 대표했기 때문에 이런 장로들을 “지방감독”이라고 불렀다.
감독과 장로의 가장 중요한 직무
감독과 장로들은 말씀을 전파하며 성례를 시행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고대의 사람들은 엄격해서 사역자들은 모두 주께서 요구하신 직분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은 설교 자리가 없으면 걸어다니면서라도 설교할 의무가 있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미지근하고 잠잠한 우리는 그들을 죽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건전한 교리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은 교회의 오핸 원칙이었다.
- 각 지방에는 대감독 또 그 위에 지위나 위엄이 높은 총대감독 제도가 있었으나 이는 교황과 같은 단독권을 가지지는 않았다.
집사의 직분
당시의 집사직은 사도 시대와 성격이 같았다. 그들은 매일 신자들이 바치는 예물과 매년 교회에 들어오는 수입을 받아들여서 적당하게 쓰는 일을 맡았다. 즉 감독이 결정한 대로 사역자들과 빈민들의 생활비로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년 그 분배 상황을 감독에게 보고했다.
교회 재산의 운용 -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었다. 그리고 만일 감독들과 집사들이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 행위를 한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또 만일 교회 지도자가 빈민의 것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모독 행위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남용하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고전 11:29).
수입을 넷으로 나누었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처음에는 무보수로 또 자발적으로 맡았었다. 중도에 교회 재산을 유용하는 폐단이 생기자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게 하였다. 이 넷은 성직자들과 빈민들과 교회 건물 수리를 위해서 그리고 네 번째로는 타 지방과 본 지방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각각 한 몫을 마련했다. 만일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 감독이 있으면 즉시 동료들의 견책을 받았고, 복종치 않으면 그 지위를 빼앗겼다.
- 교회 재산을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그 때의 교회 소유는 모두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감독이 가진 것은 모두 빈민의 것이었다.
- 직분들의 준비 단계 . 직분을 임명받기 앞서 준비하는 문지기나 시제(侍祭)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일종의 훈련 과정이었다.
- 주로 바울의 지시대로:평신도들이 찬성했으며 신자들이 감독 선거에 참여했는데 주로 만장일치제였다.
- 라오디게아 회의에 이르러 선거를 군중에 맡기지 않기로 했다.
- 성직자들과 통치자들의 대립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 임지절차는 주로 거수로 결정되었으며,모든 감독 앞에서 임직했다.
- 대감독에 의한 성별은 한동안 진행됐으며 주로 안수 받는 것이었다.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감독직에 필요한 자격을 무시했다.
또 주교 권리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박탈했다.
고대에 평신도로부터 선출되던 감독을 임명직으로 한 다음에 무자격자를 성직에 임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10세된 소년이 주교가 되기도 했다.
교회가 혼란을 거듭하자 이러한 태만의 결과로 통치자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군주들이 볼 때 교회의 권리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사제와 부제를 임명할 때 일할 곳은 생각지 않고 마구 남발했다.
임명식은 고대처럼 평신도의 동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 앞에서 행해진 것도 아닌 만큼 가짜이다.
성직록은 뚜렷한 배경이 있어야 함에도 아무에게나 가리지 않고 준다. 이 성직이 어린아이의 유산으로 전래되기도 한다.
해괴한 악폐로 한 소년이 6가지 성직을 갖고 있는 등 멋대로 성직을 주면서 사도의 계승자라고 하고 있다.
“사제”가 된 수도사들이 생겨났다. 이것은 목적에 어긋난 것이다.
성직록을 받은 사제들과 고용살이를 하는 사제들이 있다.
여러 가지 성직의 겉치례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은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위험한 자들이다.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두스는 계급에 대한 모순을 지적했다.
선전과 현실이 다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더욱이 영적 지도자가 이러니 영적 혼란이 온다.
사제들의 도덕 수준은 이미 빛과 소금이 아니다. 고대 교회는 감독이나 장로를 판단하거나 책망할 수 있었는데, 그런 제도 없다.
부제는 사실상 집사와 같은 제도로 둔 것임에도 제단에서 봉사하거나 복음서를 읽거나 노래하거나 그 밖의 사소한 일들을 시킬 뿐이다. 결국 교회 재산의 분배나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참 광채는 사라지고 성직자의 재산은 점점 증식되어 갔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카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는 성경적이 아니므로 따를 필요가 없다. 그들이 교회의 머리가 없으면 교회가 산산조각이 난다고 말하나, 하나님이 교회의 머리로 교황을 두신 적이 없다.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이미 대제사장직은 그리스도로 인해 소멸되었다.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에게서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이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도 교회를 먹이라고 권고한다(벧전 5:2).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으로 교황에게 어떤 특권을 주었다는 것은 모순이다.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에게 어떤 독특한 권력이 이양되었다는 말은 없다.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볼 때 다른 사도와 동등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두 장에 걸쳐 자기는 사도로서 베드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수령이었다고 해서 세계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로 볼 수 없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진정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 없다.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은 베드로가 로마로 옮길 때 그 권좌까지도 옮겨왔다는 논리로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로 볼 때, 왜 안디옥에 둘 째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는가. 각 교회의 영예의 정도가 과연 설립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유세비우스가 25년 다스렸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 베드로의 사역 기간 중 로마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더욱이 로마교회를 주관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가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관한 것이다. 바울의 기록에 베드로의 영접 내지 사역이 나타나지 않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은 크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인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
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니케아와 에베소의 회의에서 로마 교구가 가졌던 지위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이 고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대해서 니케아 회의의 결정보다 더 일찍 확인된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결정에서 총감독 중의 첫째 자리가 로마 감독에게 주어졌고 그에게 인근 교구를 돌보라고 명령했다.
칼케돈과 제 5 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황제의 양보로 로마 교회의 대표들이 첫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이것을 비상한 특권이라고 인정했다. 이것이 나중에 교황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후대에 로마 감독들이 지칭한 높은 칭호는 초기에 없었다.
그리고리우스 1세는 “보편적인 감독”이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처음에는 감독도 주위를 의식해 어느 한 사람이 특정된 지위를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로마 재판권의 시초는 지방 감독들이 모순된 재판을 할 때, 그 피해자들이 로마에 와서 호소하면서부터이다.
당시의 로마가 가졌던 권한의 특색은 감독의 임명과 회의 소집과 상소 수락 또는 재판권과 징계 명령 또는 견책의 넷이다.
상호 충고. 로마 감독들은 다른 감독들에게 충고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충고를 받았다. 이로 보아 지방 감독에 대한 재판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회의 소집권이 로마 감독에게 있지 않았다. 세계 회의의 소집은 황제만이 할 수 있었다. 감독은 자기 지방의 일은 지방 감독이 회의를 소집했다.
위조 문서를 이용했다. 과연 로마 교회가 상소 받는 권한이 있었는가. 아프리카에서도 자기들이 문제가 있을 때 로마 교회에 상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러한 전례가 있다고 거짓된 주장을 했다. 심지어 위조 서류를 통해 로마 감독에게 복종하는 형식의 글을 만들어 퍼뜨렸다.
콘스탄티누스와 멜키아데스 감독과 아를 종교 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만 해도 그들은 로마교회가 상소권이 없음을 드러냈다.
위조와 횡령을 통해 로마에서 점차 권한을 굳혀 갔다.
그레고리우스 1세 시대에는 이미 고대 방식이 많이 변했다. 무질서와 파멸 속에서 교회들은 로마 교회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때 로마 교구가 자연히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부상되었다. 그러나 재판권 행사와 같은 일은 황제의 동의하에서 했다.
그레고리우스 재임 중에 교황직에 가한 제한은 황제가 스스로 한 것이지 교황의 권리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수위권을 다투었다. 이것은 황제가 제국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권위 문제가 발생한 탓이다. 이노센트는 로마의 어진 것이 곧 교회의 권위에 문제를 야기시킬 것을 우려해 조바심했다. 그렇지만 제국의 세속적인 질서에 따라 대감독들을 배치하는 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제도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인정받은 것을 레오는 분개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새 로마임으로 그곳의 감독은 로마 감독 다음가는 특권을 가진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레오는 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합리적인 여론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은 둘째 총감독이 되었다.
단식자 요한의 교만과 그레고리우스의 겸손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주관한 요한이, 자기는 “보편적 총대감독”이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때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교구의 정당한 입장한 입장을 지키려고 꾸준히 반대했다. 그는 서신을 내어 이러한 모순을 지적했다. 그러나 마우리티우스 황제의 후원을 입은 요한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이를 지키고자 했다.
마침내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었다. 마침내 마우리티우스 황제가 살해된 후에 그 뒤를 이은 포카스가 그레고리우스가 원한 일이 없는 특권을 주었는데, 그것은 로마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후에 로마 교황의 덕으로 사를마뉴 대제는 교황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루두스 시대까지의 교회의 쇠퇴가 계속됐다. 교회의 부패와 로마교황청의 전제는 극도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현대(칼빈 당시)의 교황제도와 그 권력의 주장은 오히려 중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교황의 명령은 베드로의 거룩한 음성이라고 내세워 복종을 강요했다. 무엇보다 교황의 독재를 제어할 기구도 없다.
무모한 권력 주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위조 문서들. 이런 종류의 교황의 포고들에 무게를 더하기 위하여 그들은 고대 교황들의 이름을 바꿔 넣고는 맨 처음부터 일이 그렇게 확정된 것 같이 보이려고 한다. 그 예로, 아무리 먼 지방에서도 로마 감독에게 미리 문의하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소급해 적용했다. 또 교황은 무오하다는 말을 누가 믿을 것인가.
지금 교황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레고리우스는 배척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무도 자기를 “보편적”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명령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는 등급에서 당신들은 저의 형제시요 덕성에서는 저의 부모라는 말을 했다.
현재의 교황권의 부패상은 일종의 전제정치와 같은 것이다.
로마에는 교회나 감독직이 있는가. 이러한 논리는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 성경에는 많은 감독에 대한 말은 있어도 특정된 하나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배교(背敎)- 교회의 진정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교회를 끊고 그 사지를 뜯어버리며 그 몸을 갈기갈기 찢은 사람이 교회의 머리일 수 있겠는가. 옛날의 로마는 참으로 모든 교회의 어머니 같은 곳이었으나 적그리스도의 자리가 되기 시작한 후로는 과거와 달라졌다.
적그리스도의 왕국
로마 교황은 곧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 도전해 온 적그리스도이다. 더욱이 그가 하나님의 대권자란 이름을 내세우고 있음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유 권한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인간인 자신에게 부여했다.
교황권은 진정한 교회 질서에서 멀리 떠났다.
교황들의 악행과 이단 설은 그들의 권력 주장과 전연 반대된다. 결국 로마 교회는 교황 중심의 새로운 종교이다.
요한 22세의 배교 - 그는 영혼은 사멸적인 것이어서 육체와 함께 죽어 부활하는 날까지 죽은 대로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교황과 주교들의 도덕적 방종은 극에 달해 온갖 추악한 비리가 드러났다.
추기경들 -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 이름은 감독들에게만 붙었던 것이 갑자기 큰 인물로 부상되었다.
엄밀한 성경적 의미에서 볼 때, 로마 교황 자체가 잘못된 것이므로 이와 관련된 모든 제와 계급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의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교리에 대한 교회의 권위: 그 임무와 한계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권한을 허락한다면 곧 전제로 타락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이 전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리 추방해야 한다.
교리에 대한 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 하나님이 어떤 권위나 위엄을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도들의 사도나 후계자에게 주실 때에 개인에게 주시지 않고 그들이 임명되는 직분에 주셨다.
교리에 관한 사도들의 권위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며 주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곧 모든 권위나 직무는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에게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기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일성 있게 다루기 위해 성경을 표준으로 세우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드디어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 이제 보다 완연히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특히 성경은 더 이상의 첨가가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한 표준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칠 권한을 사도들은 받았다. 이 말은 곧 사도의 계승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때도 성경을 전제로 한다.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더욱 없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카톨릭 교회의 주장
그들은 전체 회의가 교회의 진정한 현상이라고 하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 결정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교리를 만든다.
교회 내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말씀에 매여있다. 카톨릭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이나 사도들도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는데(빌 3:12), 완전이란 말은 모순이다.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교회의 완전한 권위는 지상교회에서 인정하기 어렵다. 진리의 보존은 교회의 과제일 따름이다.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그 받은 약속들을 전적으로 확신함으로써 신앙을 지탱하는 훌륭한 수단을 가질 수 있다. 카톨릭이 말하는 성령은 성령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또한 전승은 성경보다 낫다는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사도가 자신이 분명히 가르치지 못한 것을 후에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두 가지 서론적인 말 - 교회의 권위보다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권위이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아무와도 나누지 못한다. 따라서 어떠한 전체 회의라도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의 지배를 받을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것이 된다. 또한 회의들에 이 문제를 돌림은 고대 회의와 비교에 정통성을 비교해 보려는 것이다.
교회의 회의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교회의 모든 회의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나의 신앙을 예속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목자”가 없이도 또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는 교회 내에 자립 자존할 수 있다.
그들은 목자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진리가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짓 목자 아래에서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목자의 변절은 예언되었다. 성경에는 거짓 목자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목자는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 임명된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마땅히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해야 한다.
목자들은 잘 식별해야 한다. 목자들은 잘 식별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목자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곧 그렇게 인정해서는 안된다.
회의들도 진리에 맞설 수 없다. 아합 시대에 소집된 예언자 400명은 악한 왕에게 아첨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11:47에 있는 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인 회의는(요 11:47) 겉보기에 아무 결함도 없었던 것 같았다. 대제사장이 회의를 주관하고 제사장들이 모두 출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그의 교훈을 배척했다(마 26:57 이하).
회의들의 결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회의들은 그 구성인원과 소집 시기와 목적 그리고 진행 방법과 결정이 타당해야 한다. 그런데 로마 회의의 경우 얼마나 모순이 많은가.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권위로 사안을 결정하려 든다.
회의들이 서로 충돌했다. 레오 황제 때 열린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교회 안에 세운 형상들을 전부 끌어내어 부숴버리기로 결정했다. 곧 이어 이 회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레네 여왕이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는 형상들을 복구하도록 판결했다. 적어도 이 둘 중 하나는 잘못된 회의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두 번째 회의가 후에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무엇보다 로마 회의의 가장 문제점은 그들이 그 결정을 성경과 동등시한 것이다.
판단의 기준이 성경이라면 로마 교회의 성령은 그들에 의해 구금 상태에 있다. 결국 성경이 표준이 될 때 그 회의는 정당하다.
회의들과 인간적 결함
고대의 순수한 회의들도 결함이 있었다. 니케아 회의 때 아리우스와 싸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사소한 내분으로 정작 적과의 싸움을 놓치고 만 것이다.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맹종은 불가하다. 인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과연 미덕인가.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다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
성경 해석을 위한 회의들의 실제적 의의는 무엇인가.
교회가 교리를 만들거나 임의로 성경 해석을 할 권리가 없다. 그럼에도 성경 해석권은 회의들에 속하며 더 상소할 길이 없다고 한다.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카톨릭 교회는 그릇된 평가를 한다. 그들은 모든 결정을 “성경에 대한 해석”이라고 부름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구실로 악용한다. 결국 그들은 이러한 모순으로 성경을 벗어나고 말았다. 그 결과 외경이 성경 속에 섞여들고 새로운 전통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성경 시대 이후에도 성경과 권위가 등등하다고 믿든 여러 가지 결정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성경과 벗어난 모순들이 더욱 자리잡게 되었다.
제 10 장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
혼에 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근본문제는 양심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양심은 자유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카톨릭의 교회법은 양심을 노예로 만든다.
양심의 본성은 하나님의 판단을 마음에 의식하는 것이다.
양심의 속박과 자유에 있어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양심을 구속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곧 양심의 자유이다.
사람이 만든 법 중 양심에 짐을 지우는 법이 곧 불법이다.
교회는 양심을 속박하는 독립된 법을 정할 권리가 없다.
모든 자의적 지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침범이다. 하나님의 율법이나 성경 또는 양심의 법은 고유한 것으로 첨가할 수 없다.
인간이 만든 법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곧 불법이다.
이미 말한 원칙에 따라 카톨릭 교회의 교회법은 배격되어야 한다.
교황제도의 교회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한다. 또한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하며 무익하다. 이것은 결국 사람의 유전일 뿐이다.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한 집성에 의해서 유대교적 요소로 양심을 괴롭힌다. 그들의 법은 속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의식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것이지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패한 의식들을 속죄의 제사라고 하고 한다.
결국 카톨릭의 제도는 미신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통찰과 그 적용 - 구원은 곧 자유를 의미하는데 그들은 미신적인 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얽매어 놓고 있다.
카톨릭 법은 교회법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카톨릭의 교회법은 “사도적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사도 시대 이후에 축적된 무익한 의식 - 예를 들면, 사도 시대의 성찬은 아무 간단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사는 화려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사도적”이라고 칭한다.
어거스틴의 말 가운데 “발 씻기는 일”이 세례와 비슷한 전통이 될 것 같아 피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수(聖水)라는 것을 만들었다.
사도행전 15:20에 있는 명령을 통해 사도가 형제의 입장과 규제에 얼마나 조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약한 형제들에게 대항 의무(고전 8:1-9 참조)에 비해 로마 카톨릭의
전통은 너무나 강하다.
교회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증거와 모순이 된다.
하나님은 패악한 예배를 미워하신다. 사람이 정한 법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요 4:24 참조).
카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반증 가운데 기드온이 만든 ‘에봇’이나 몇몇 구절을 들어 정당화시키려 들고 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제사장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구약의 제사 직무를 논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다.
교회법의 필요성 - 교회법은 구속받은 인간의 구원을 돕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규정을 세워놓고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교회법은 신자들의 성회에서는 모든 일이 적절하고 위엄 있게 행해지고 또 인간의 공동체는 인간애와 절도의 유대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즉 책임자들은 훌륭하게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하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권징에 순종하는 습성이 있어야 한다. 또 질서 정연하게 교회를 세운 후 교회는 평화와 평온을 이루어야 한다.
예배에서의 진정한 예절은 허식을 피하는 것이다.
교회법에 의한 속박과 자유 - 거짓 주교들은 교회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유로운 양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준수해야 할 사항은 적어야 하고 또 덕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그것의 남용
교회 재판권의 근거는 열쇠의 권한에 있다. 교회의 재판권은 전적으로 도덕적 권징에 관한 것이며 구원과 관련하여 다루지는 못한다.
매고 푸는 권세가 교황에게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국가의 재판권과 교회의 재판권이 유사한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강제권이 없다. 대신 성만찬의 거부와 같이 영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리 - 마 18장은 일시적인 제도나 사람에게 위임한 것이 아니라 고정적인 영구한 제도로서 고백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 재판권의 영적 성격 - 교회 재판권의 목적은 죄악을 막으며 발생한 불상사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냉정해서도 안되며 합법적인 회의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고대 교회에서는 어느 개인이 법을 집행하지 않았다. 재판권과 권징은 카톨릭 교회 내에서 타락하기에 이르렀다.
주교의 세속적 권력은 주교직의 의미와 모순된다. 심지어 주교들이 군주의 권력을 장악했다. 과거 분쟁이 생기면 덕스럽게 결정하려고 주교에게 판단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그들은 돕는 자에서 주인이 되었고 심지어 폭력과 파쟁으로 권력을 잡게 되었다.
교황이 세계의 수위권을 가지게 된 시초
마침내 로마 감독은 적당한 귀족령에 만족하지 않고, 처음에는 왕국들에 손을 대고 다음에는 제국 자체에 손을 댔다. 나아가 신이 주는 권리를 가졌다고 호언했다. 이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헌서는 어리석은 사기이다.
헨리 4세와 힐데브란드 - 교황이 군주들에게 복종하며 반드시 황제의 인정을 받아 교황이 된 지 500년만에 황제 헨리 5세의 경솔한 정치에 힘입어 드디어 힐데브란드 때에 이르러 서방 제국이 자기 것인 양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힐데브란드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자청했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저주받은 교회 재산 유용처럼 오늘날도 이런 일이 계속되어 왔다.
카톨릭 성직자들은 재판권에 자기들의 치외법권을 첨부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치외법권을 자랑하지 않고 세속 재판소에 나갔다. 또한 군주가 이런 명령을 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었다.
제 12 장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교회의 권징의 필요성과 성격 - 권징은 대개 열쇠의 권한과 영적 재판권에 의존한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사용한 시정책은 이 권징뿐이다.
교회 권징의 단계 - 사적 충고 → 두 세 증인 앞에서 충고 → 교회 재판소 → 출교 (신자 공동체에서 제거, 참조 마 18;15,17).
숨은 죄는 사적으로 나타난 죄는 공중 앞에서 엄히 책망해야 한다.
경한 죄는 충고, 중한 죄는 엄한 충고 또는 출교 등으로 다스린다.
권징의 목적
첫째,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둘째, 악한 사람들과 항상 교제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자기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권징은 경우에 따라 처리 방법이 다양하다.
고대 교회에서는 권징이 모든 위반자에게 등등하게 적용되었다.
교회 권징은 지나치게 엄격해서는 안되며 온건주의가 필요하다.
교회 권징에 따르는 인간들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출교는 교정 수단이자 저주가 아니다. 권징(출교)은 도살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 권징에 대한 완고한 과격주의를 배척한다.
환난을 일으키는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는 분리주의이다.
어거스틴은 분별력이 있는 권징을 요구한다.
죄를 공적으로 서로 고백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제도이다.
금식의 목적은 육의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며, 기도와 거룩한 명상을 위해 우리의 심신을 더욱 잘 준비하도록, 또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금식한다.
금식과 기도는 그 목적이 다르나 함께 행하면 더욱 좋다. 또한 금식과 회개를 통해 자복하는 것이 낫다. 금식은 주님이 권하신 것이다.
금식의 성격은 완전 금식과 임시적인 금식이 있다. 또한 금식을 위해 마음을 찢는 태도가 필요하며 금식이 공적이 될 수 없다.
교회사에서 금식은 타락했다. 외적인 금식을 위해 여러 가지 모양의 금식이 있었는데, 소박한 음식, 요리법을 다르게 한 금식도 있었다.
금식 기간에 사악한 방종에 빠졌다. 그들은 금식 기간에 고기를 제외한 진미를 먹기도 했다.
성직자들의 권징이 자주 쉽게 바뀌고 결국 타락으로 이어졌다.
사제의 독신제는 성경에 배치된다. 제1대 교황으로 꼽는 베드로 사도도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
독신주의는 순결을 최상으로 생각하는 일종의 미신적인 태도이다.
제 13 장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 앞에 ‘맹세’ 하므로 속박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상대로 맹세한다는 자체가 모순이 된다.
맹세는 결국 자기 자신이 결정한 것이지 하나님과의 약속이 아니다.
성경적인 삶을 위한 다짐은 장려할만 하나 헛맹세를 말아야 한다.
사악한 맹세 즉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고대 교회의 수도원 생활은 모순이 있다. 그들의 수도사 서약(일종의 맹세)이 과연 타당한가. 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신자가 세상을 등지고 유배 생활을 자청함이 옳은 일인가 생각해야 한다.
마 19:21을 내세워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경우가 있겠으나 그보다 형제 사랑이 우선이다.
독신생활에 대한 맹세는 성경적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5:12에 있는 내용
도 본래 60세 이상된 여자들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인생의 경험도 제대로 없는 어린 소녀를 수녀로 내세워 독신 서약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허용할 수 없는 맹세는 포기하여 자유를 얻는 것이 낫다.
또한 수도원을 떠나 존경할 만한 새 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제 14 장 성 례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례’라는 말은 μυστηριον(비밀 ,신비)을 번역한 것이다. 즉 신성한 일을 비밀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성례가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냄을 말해준다.
이 성례는 인장(印章)과 같다. 또한 언약의 표징이다.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은 오히려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중거이다.
성례의 의해서 믿음이 증진되기보다 성령과 말씀으로 믿음이 자라나며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사크라멘툼”(sacramentum )이란 “표징”으로 성례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돕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이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향상을 위해선 말씀과 교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성례의 진정한 의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졌다.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광의의 성례는 구약의 표징을 들 수 있는데, 노아의 무지개나 기드온에게 보여준 양털의 표시, 히스시야에게 보이신 일영표의 뒤로 물러남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의 믿음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므로 성례이다.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 이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다.
구약의 성례들(할례, 희생, 결례 등)은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것이다.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옛 성례나 새 성례나 모두 하나님이 함께 제정하신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다만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례는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며 구원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할례의 가치에 대해 바울은 내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건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세례가 이를 증거하는 것이므로 할례는 무관하다.
고대에 성례에 큰 가치를 부여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외적 표시이므로 내적 회개와 변화만큼 비중을 두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의 화려함보다 그리스도를 무시한 것이 잘못된 것처럼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한다.
성례가 그리스도를 믿는 외형적인 공로가 될 수 없다. 율법의 행위처럼 성례를 생각한다면 이는 성례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처사이다.
제 15 장 세 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세례가 가져다주는 것은,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와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 또 세례란 자신의 죄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친 문서와 같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란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세례의 효과는 말씀없이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평생 깨끗하게 살아야 할 표로서 정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세례와 회개는 개념이 다르다. 세례는 씻음 받은 것의 표시이며 회개는 이를 회상하며 그때 그때 새로와 지는 것을 말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운 진다는 표이다. 또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 그리스도의 표상인데 비해 예수님의 세례(예수 이름으로)는 실체로서 회개와 용서 즉 구원에 이르는 표시를 완연히 드러내었다.
세례는 같으나 사람은 다르다. 어디에서 받은 세례이던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 중요하며 반복해 받을 필요는 없다.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으로 노아의 구원, 홍해 사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가리우신다. 이러한 표징으로서 세례의 의미가 주는 것이 크다 하겠다.
세례와 원죄와 새로운 의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울의 내적 투쟁: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값없이 주시는 의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우리는 중생의 약속에 따라 세례를 받는다고(롬 6:3 이하) 첨부한다.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이 된다. 참으로 세레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정되고 싶다는 소원을 공포하며, 세레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한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세례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표징과 실상 -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시며 강화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므로 제정하신 분의 손에서 직접 받은 것같이 받아야 한다.
세례는 믿음을 확고히 한다. 백부장은 이미 믿음이 인정되었지만 세례에 의해 믿음을 입증받았다(행 10:48). 표징과 실체가 다르다고 해서 세례를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다(고전 12:13).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대개 믿음이 충실치 못한 상태에서 세례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 후회를 하는 예가 있다. 하지만 주님은 마음을 돌이키라고 하시지 세례를 다시 받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바울도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릇된 세례 의식과 바른 세례 의식 - 세례 받는 방법에 따라 그 권위가 다르다는 주장이다. 세례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켜 혼란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례는 본래 ‘밥티죠’라는 말은 잠근다는 뜻으로 고대에는 침례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
비상(非常)한 세례에 반대한다. 사사로운 개인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에 지장이 없다. 그러므로 비상한 세례보다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
여성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단순한 그녀의 검정의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일이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은 그릇되다. 유아세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도이다. 세례는 또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상징이 된다.
세례와 할례는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이다. 할례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으므로 유아가 어려서 세례를 못 받는다는 말은 모순된다. 이 두 표징의 차이는 외적인 것에 있다.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그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예수님과 어린이들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첨가하셨다(마 19:14).
유아세례에 대해 성경의 침묵은 성경에서 벗어난 제도라는 뜻이 아니다. 세례는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유아들에게도 합당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사도시대부터 시행된 제도이다.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 유아세례를 무익하다고 하는 논리는 곧 할례를 무익하다고 하는 논리와도 같다. 유아에게 주는 은혜가 더욱 크다.
약속은 영적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자들도 어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때묻지 않은 유아들이 받는 세례가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천하만민이 세례 받을 자격이 있다. 다만 유대인은 특별한 은혜를 입은 민족이다.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세례는 영적 전투의 첫날에 받으나,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이 끝난 8일에 속한다. 그러나 세례와 할례와의 유사점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내적 신비 즉 약속과 가치와 효력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갓난 유아기부터 거룩하게 지내셨다. 따라서 유아들을 주님을 본받도록 해야 한다.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하나 성령께서 원하신다면 작은 빛을 어린 유아들에게 비출 수 있다. 유아들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면 결국 모든 유아들이 죽음과 동시에 멸망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이 드러내지 않고 역사하시는 부분에 대해 누가 나무랄 수 있는가.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은 할례의 무위성을 논하는 것과 같다. 할례가 필요했듯이 유아세례도 필요한 것이다.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이 성례의 나머지 의미는 후에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된다.
어른들에게 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적용시키지 말라.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난 유아들은 이삭과 같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생명수인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물론 어린이가 중생의 고백을 할 수 없더라도 영적 은사가 가능하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하는 고로 어린이의 갑작스런 죽음이 단지 세례를 받지 않아 멸망당하진 않는다.
세례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이나 교육보다 세례가 먼저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6에는 유아세례에 대한 말씀이 없다. 여기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가르치라는 말이 나와 있다. - 예수님은 성인세례의 원형이시다.
세례와 성만찬에서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성만찬은 주의 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전 11:29).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상징들은 완전하므로 완전한 사람들 또는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인 이라 해서 어느 순간에 완전해지지 않는다. “완전성”을 전제로 한다면 어른들도 세례에 합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는 하나님을 확고히 믿지 않은 어린이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이다.
또한 그는 구약에 제물도 어린 것은 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초태생은 하나님의 구별하신 바이다. 무엇보다 말씀과 성령을 받은 자만이 세례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신앙의 부모로서 어린이에게 경건을 가르치는 것은 의무일 뿐 아니라 온 가족의 구원을 위해 어린이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의 권속 즉 교회의 일원으로 가입시키시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정당하다.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곳이 주는 유익
표징과 본체 -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 평생토록 영혼의 양식으로 먹여주신다. 또 계속되는 후의를 우리가 확신할 수 있도록 성만찬을 통해 이를 확증하게 하신다.
그 표징은 떡과 포도주다. 이 표징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한다.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또 잔을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다(눅 22:30; 고전 11:25).
성만찬의 특별한 결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경험한다. 성만찬의 보다 큰 의미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있다.
성만찬은 믿음으로 먹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 따라서 떡과 포도주 그 자체보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느끼는 감동이 다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즉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덧입는 생명체가 된다.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은 그의 본체를 직접 느낄 때 의미가 큰 것이다.
성찬의 의미를 정리하면, 첫째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둘째는 그의 본체에 참여하게 된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능력도 느끼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찬 시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하는가. 쯔윌글리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화체설’을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 그러므로 성찬 때마다 직접 강림하신다는 표현은 무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통해 역사하신다.
“반대론”은 “떡 밑에” 라는 말을 첨거하므로써 몸이 떡 밑에 숨어 있다는 뜻으로 말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내려오셔야만 그 몸과 연결될 수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대론자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적 존재를 부인한다.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들어올릴 때에 임재를 인식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이런 모양으로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거나 떡 속에 포함시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국한해서는 안된다.
성찬은 말씀으로 제정하신 것이다. 즉 언약의 말씀과 표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성찬의 목적은 곧 그리스도의 언약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고 그의 수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성찬에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끌어내리기 보다 우리가 그분께 올라가야 한다.
성찬의 대상은 모든 믿는 자들이다. 이것은 주님이 정하신 것인 만큼 모든 구원 얻은 자가 참여해 기념해야 할 것이다.
제 18 장 카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
것을 말살하는 모독 행위다
카톨릭은 그리스도를 드리는 사제와 그 봉헌에 참여하는 신도들이 미사라는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미사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며 이 제물에 의해서 하나님을 자기들과 화해시킨다고 한다.
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다. 성경에는 집례자로 인정된 신분은 평생 성례를 집례할 수 있으나 카톨릭은 예물을 드릴 제사장을 지정해야 하며 그들은 후계자와 대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를 영원한 대제사장에서 몰아내는 만행이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속제 제물이 되시므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는데, 미사는 새로운 예물로 반복한다.
그들은 미사의 근거로 말 1:11을 든다. 그러나 새 예물을 드림으로 깨끗해진다는 논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무위로 끝낸다.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또한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더욱이 미사는 성만찬과 다른 개념이므로 결국 성만찬을 폐기한다.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인데, 칼빈은 이 “미사”라는 말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적 미사는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에 정반대 되며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불경한 모독이다.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더욱이 사제직을 지지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의 사제직을 지지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은 일점 일획도 찾을 수 없다.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로 보았는가. 제사에 대해서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바치는가가 분명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미사는 제사로 분류되기도 어렵다.
어거스틴은 주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음성일 것이라고 말한다.
교부들의 책임도 있다. 그들이 율법 쪽으로 많이 기운 탓에 이러한 제도가 싹틀 기회를 준 것이다.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은 차이가 뚜렷하다. 구약은 울법을 따랐으나 주의 만찬은 주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희생 또한 뚜렷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미사는 그 어디에도 근거를 찾기 어렵다. 더욱이 미사를 판매까지 한다. 미사 때 헌물을 바치도록 한 것은 결국 미사를 판매하는 것이다.
미사는 더럽혀졌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성경에서 유일한 성례는 세례와 주의 성만찬 만이다. 성경에 근거가 없이 성례를 축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
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
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
을 밝힌다.
성경에 성례는 두 가지(세례와 성찬)만 나오는데 일곱 가지 성사라는 관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나머지 5 가지를 문제삼고자 한다.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하실 수 있다. 그런데도 성례가 일곱 가지란 주장은 억지이며 고대 교회에도 없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가 가르치는 견진례의 의미 - 그 선언에 성령의 임재는 없다.
즉 사람에게서 견진 선언을 받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또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실제로 카톨릭교회는 견진례보다 세례를 중요시한다. 이 견지례는 고대 교회의 관습에서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대 교회의 참회를 이용해 만든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참회는 변형해서 성례의 하나로 보면서 참회에 따른 사면은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따라서 이를 가리켜 “고해성사”라 했으면 나을 것이다.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이 종부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임종은 자연적인 현상이며 성사로 꼽을 수 없다.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그들이 근거로 꼽는 야고보서(약 5:14)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했음에도 그들은 운명 직전에 있는 시체 같은 사람에게만 기름을 바른다.
신품 성사 - 이는 성직의 계급으로 수문품, 강경품, 구마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과 사제품이다. 이것을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들은 교회 여러 직책을 두지만 정작 낮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성별 의식. 특히 삭발례는 외형을 중시한 형식적인 것이다.
“사제”와 “장로”. 이들은 “사제”와 “장로”의 임무에 대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제란 신분은 결국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위치에 서 있다.
사제의 임명식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는 시늉을 한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위조를 잘하는 가 대변해 주는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또한 도유는 쇠퇴한 의식에 속한다. 그 진정한 의미는 성령의 임재이다.
부제는 ‘집사’직과 유사한 위치로 사제가 임명한다. 그러나 개인(사제)이 선임해 단독으로 임명하는 것은 모순이 있다. 그리고도 그들은 부제를 레위족이라 칭한다.
차부제는 주로 하찮은 일을 하도록 지명된 자들이다. 이들을 부리면서도 ‘성례’라는 고상한 단어를 사용한다.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른바 “혼인성사”란 것을 만들었다. 이 말이 ‘혼인성사’(婚姻成事)가 아닌 ‘혼인성사’(婚姻聖事)로 부르고 있음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을 ‘성사’(聖事)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어떤 직을 수행하는 것도 아님에도 이렇듯 다루고 있음은 인간 생활의 모든 사건을 다 ‘성사’(聖事)라 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5:28을 잘못 적용한다. 이 말은 영적 혼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결혼에 적용했다. 그렇다면 남녀의 육체적 결합이 ‘성사’(聖事)인가.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결국 폭압이며 뭇 신도들을 우롱하는 것이다.
제 20 장 국가 통치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
영적 통치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이미 살펴 보았다. 여기서는 시민 생활과 도덕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복음과 자유는 자칫하면 혼동하기 싶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만큼 두 가지 통치(하나님의 나라와 국가)를 모두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의 법도 필요한 만큼 지켜야하며 집권자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 대개 국가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세워진 것이다.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정권은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롭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공중집회에서 왕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충고했다. 즉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겼다.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왕을 공경하라고 말한다(잠 24:21; 벧전 2:17).
각종 정부의 형태가 있으나 우리가 사는 곳에 주께서 세우신 사람들에게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집권자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위임받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된다. 참으로 정의는 무죄한 사람을 지켜주며, 감싸주며, 보호하며, 변호하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은 담대한 악인들을 막고 그 폭행을 억압하며 그 비행을 벌하는 것이다.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 집권자는 강제력과 관용 둘 다 겸비해야 한다.
정부의 전쟁 수행권 - 왕과 국민은 공적인 보복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때로는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토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이를 방어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도 성경의 많은 중거를 통해 이런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신다. 물론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자제와 인도적인 정신을 지녀야 한다.
정부의 과세권에 대해 인정해야 한다.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과세는 있을 수 있으나 군주의 사욕을 위해 백성들의 비난을 사서는 안된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있듯이 각국의 법이 있다. 국가 권력의 공정한 집행을 위해 미리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법에는 공정성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식한 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소송은 사랑과 성의를 전제로 대한 다음 결정해야 한다.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필요시 우리는 법의 절차를 따를 수 있다.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 이익을 수호한다. 무엇보다 서로 공경하며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특히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이다. 성경은 악한 왕에게도 복종하라고 요구하신다.
예레미야 27자:5-8,17에 “너희는 .....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을 수록하고 있다.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잘못된 관례가 있을 때 개입하시기도 한다(애굽의 열 재앙).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가령 우상숭배는 국가의 명이라도 따를 수 없다. 또한 양심의 자유나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에서 어긋날 때 따르기 어려운 예가 있다(세례요한과 헤롯, 다니엘과 느브갓네살 왕 등).
결 론
칼빈의 까 쓴 불후의 명작인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론’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론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하겠다.
교회는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와 같은 곳으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연결짓는 정류장이자 지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처소이다.
칼빈의 교회론을 읽고 느낀 점은 먼저 카톨릭 교회의 모순된 제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흔히 카톨릭 교회를 기독교와 한동안 비슷한 노선(중세기의 예를 들어)을 걸어왔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찬찬히 읽는 동안 아예 다른 종교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는 결국 인간이 만든 종교로서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신앙의 대상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같아 보는 이에 따라 비슷한 종교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더라도 그 방법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아야 한다. 카톨릭교회의 경우, 하나님이 인정하신 적이 없는 미사와 성사(聖事)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등 인간적인 외형과 전통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요소가 많다.
더욱이 교황이나 사제의 태도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보기 어렵다. 성경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변행해 마치 성경에 근거한 양 제도화시켜 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모독이다.
무엇보다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고대 교회와 일맥 상통해야 함에 카톨릭 교회 곳곳에 그러한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칼빈이 지적해 온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 중 사제의 자질이나 타락한 생활, 임지 없는 사제의 남발 등은 많이 해소된 셈이다.
오히려 신학교의 난립으로 목회자의 자질이 저으기 염려되며, 일부에서는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는 예가 있다. 더욱이 뚜렷한 임지가 없는 목회자가 수없이 속출하고 있어 오늘날의 한국 교회상이 외형적으로는 카톨릭 교회보다 심각한 일면이 있다. 사람들은 이미 제도화된 내부적 교리나 예배의 형식에 큰 문제를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도 사회 윤리적 문제나 질적 수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칼빈의 목사직에 대해 그토록 강조한 것은 루터의 “만인제사장” 논리와 다소 어긋나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칼빈이 염려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확실한 지도자가 없을 경우 입게 될 혼란을 먼저 염두에 둔 듯하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이른바 신학 수업을 받지 않은 ‘평신도 지도자’에 해당되는 것이 사실이다.
사도 외에 초대교회 감독 가운데에도 지명을 통해 임명되는 예가 있었다.
물론 이들은 그 덕망에나 신앙적인 수준에 있어서 존경받는 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이전에 카톨릭 교회의 무자격 사제의 등장과 무분별한 삶이 가져 온 모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칼빈은 목사직이 사도의 계승자라고 단호히 말한다.
특히 칼빈은 성례와 유아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제도는 하나님 앞에서 보다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로 보았다. 한편에서는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에 비해 교회에 필요한 성례만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성경에 부합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카톨릭 교회는 오랜 역사 동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인간들의 손에서 제멋대로 형태를 탈바꿈해 왔다. 그 결과 남미와 같이 카톨릭 교회가 영향을 미치고 있던 나라들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 나머지 점차 카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다.
참된 신앙은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한다. 또한 이웃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 사회를 밝힌다. 이에 비해 교권적인 교회는 이기심과 정욕에 이끌려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칼빈의 교회론은 오늘날 목회자가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되는지 좋은 지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목회자의 자격과 삶에 대해서도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