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흔히 기독론을 신약에서만 찾으려는 노력은 큰 의미가 없다. 이책에서는 그 가르침을 구약에서 찾으려 하는데 있다.
이 기독론은 곧 구원자론이며 구약성경이 이 구원자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신약성경에서 찾으려 한다. 따라서 구약의 인용도 신약에 인용된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는 예가 많다. 그러나 신약성경 가운데 구약성경의 예언과 성취를 자주 다루고 있다. 즉 신약의 사건은 곧 구약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마태가 강조하는 뜻에서 “이루려 함이러라”는 문구를 열번 반복한을 본다. 마가도 그리스도를 구약성경에서 찾는 방법을 알고 있다(막 15:27,28 참조). 누가도 눅 3:45에서 이사야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시기를 알고 있었음을 알았다. 요한은 매우 자주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보고 들은 바를 통해 성취 곧 구약 성경의 내용이 성취되었음을 기억하고 있었음에 대해 주지시켰다.
베드로는 자기 설교(행 4:11,12)를 그와같이 시편 118:22의 말씀으로 옷입혔다. 빌립도 이사야 53장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함을 알고 있었다(행 8:30-35).
또한 유대교의 전승 가운데서도 이미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다. 탈무드에서 베들레헴이 메시야의 탄생 예정지임을 말했으며 산헤드린 탈무드에서는 작은 수만이 메시야를 따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탈무드 다음으로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고려해야 될 대상은 유명한 ‘소하르 책’인데 여기서는 선례(先例)들을 발견하는 것이 긴요하다. 또한 이 책에서는 구약 속의 그리스도도 나온다. 이 책 소하르의 참된 의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구약성경을 그와같이 해석하려는 일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있다.
소하르는 또한 시편에서도 메시야를 발견한다. 그 한 예로, 시 51:12에서 “확신할 영”에 대해 판단을 내리되 이 영은 창세기 1;2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영, 특히 메시야의 영이라고 한다. 시편 110편도 메시아적으로 해석되었다.
이처럼 신약성경과 가장 오래된 유대 전승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구약성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일은 일찌기 시작되어 왔는데, 고대 기독교 비문에서 이러한 예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해 다시금 구약속의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는 점차 식어져 갔다. 그것은 구약을 이스라엘의 민족사로 보려는 시각이 강하게 대두된 탓이기도 하다. 또한 한편에서는 유대의 민족성이 메시야를 단순히 해방자로 본 까닭에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구약 자체를 가볍게 여긴 탓도 있다.
구약속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은 주로 메시야의 예언 부분에 촛점을 맞추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한편으로는 직접 - 메시아적 개념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화적 개념을 지니고 있는 에언을 중재하고 연결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어거스틴과 루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여러 신학자들의 해석법을 의존함으로 접근점을 찾고자 한다.
제 1 부
원복음
본 기독론은 베드로가 벧후 1;19에서 말한 바처럼 확고한 예언의 말씀의 근거 위에 서 있다. 기독론의 두 인도자로 모세와 바울을 들 수 있는데,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 이전 시대 속을 빛 곧 하나님의 영이 그의 속에 붙여 놓은 빛으로 비추고 또 모든 시대에 중요한 부분을 밝힌 모세를 분명히 본다.
모세는 영원의 심연에서 이제 막 유한의 해안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우리를 앞으로 인도하되 비스가 산에서 예루살렘과 골고다가 있는 약속의 땅 -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이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을 향하여 눈길을 던졌다. 그는 여기서 확실한 예언을 하나 남겨 주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다”(신 18:15).
두번째 인도자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과 같은 사람인데 그는 그의 지식의 빛을 4,000년을 뒤돌아 거슬러 비추게 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사명에 대해 매우 확신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모는 것에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함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 -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 위에 자기 이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부어준다. 그리고 이 소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믿음의 순종(롬 1:5)을 요구하신다. 모세와 바울은 이 소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주된 해석가들이다. 발로 이 두사람은 그리스도를 겨냥하면서 구속사와 에언의 핵심을 기록했다.
사도바울은 원시복음으로부터,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것을 그렇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경륜으로부터 출발하여 영생으로 끝을 맺는다(롬 5;12-21 참조).
우리는 창세기 1:26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읽는다.
인간은 방임하도록 되어있지 않고 하나님과 의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만물이 창조주를 중심해서 지극히 조화롭게 움직이는 그런 관계 속에 있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런 형상 속에서 하나님의 모양에 따른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다. 단지 “신의 성품”에 참여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소유한 것이 깨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약속에서부터 멀어지고 만다.
인류를 죄악 가운데로 몰아넣은 뱀은 결국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창 3:15 참조). 여기서 후손을 의미하는 “씨”는 곧 그리스도이다.
빛의 자녀들에게는 뱀에 대한 승리가 약속되었고 반면에 뱀의 씨는 그 뱀을 통해 운명지어진 악인들이 될 것이라고 말하여진다. 이 뱀에 대한 승리는 그리스도가 심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일어났다.
우리는 이제 이 원복음과 연관성을 가지는 예언자료(성경구절)들을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우리는 원복음으로부터 본 구약 속의 기독론의 다양한 자료를 분해하여 분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초두에, 말하자면 아브라함 시대에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윗의 치하에서 번영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 원복음을 특별히 재생되도록 돌보셨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은 이 원복음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양상을 띤다. 말하자면 원복음은 신적인 표시와 인간적인 표시를 지니고 있다. 즉 원복음은 하늘적인 면과 지상적인 면을 지닌다.
여자의 씨와 여호와는 두 명칭인데 우리는 처음부터 그 구원자를 이 두 이름을 통해 이해했다. 그 구원자는 참 인간으로서 우리의 혈육 속에 동시에 참 신으로서 그 첫 믿는 잘(앋마 하와)에게 원복음을 통해 임재하셨다. 그리고 나중 시기에 살던 신자들로 이 구원자의 임재를 통해 바로 설 수 있었다.
원복음의 재생 가운데 첫 부류의 성격을 그 구원자의 개별적인 예표 내용 곧 “오실 자의 표상”(롬 5:14)을 포함한다. 이 재생 내용은 땅에서 출발하여 구속사의 범위 내에서 그 형체를 갖춘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담의 시대와 비슷하게 건재했다.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소위 참 가르침, 좋은 전승이 대를 잇게 되어 나중에는 다윗 시대에, 그 다음은 스룹바벨 시대에 반복되더니 그리스도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와는 반대로 원복음의 두번째 부류의 성격은 역 이 지상에는 예표가 없고 단순히 여호와만 의지하고 말하자면 원복음이 신적인 표시를 나타내는 말씀예언을 포함한다. 여기의 원복음 재생은 하늘로부터 그 길을 놓고 말씀을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이른다. 그 구원자가 참 하나님이라는 진리는 여기서 나타난다.
이 두 부류의 내용은(신성,인성) 한 구원자에 대한 약속 곧 원복음을 실현시킨 약속의 이중적인 표시를 명백하게 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새로운 것을 이 세상에 가지고 오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해묵은 과업을 이루시기 원하셨고 인간에게 하신 약속 속에 보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고 인정하시는 일을 하시기 원하셨다.
제 2 부
족장 시대의 원복음 재생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우리는 먼저 노아 시대를 통해 원복음 재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먼저 당시 사람들이 신 수명을 지녔던 만큼 몇 대의 역사가 쉽게 연결되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노아는 아담의 아들 셋이 죽었을 때 24세였고 또 아담의 사망 후 136년 지났을 때였다. 노아는 셋의 아들인 에노스와 함께 50년을 살았다 말하자면 산 조상으로부터 이 약속을 직접 전달받았다. 노아가 대홍수를 겪고 나서 자기 가정으로부터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이 원복음이 성취되는가를 살펴보았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마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승천이후 해마다 그의 재림을 소망했듯이 말이다.
노아는 비록 자기 자식이긴 하나 가나안으로부터 시작될 땅의 강포를 내다 보았다. 그래서 가나안을 저주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족장 아브람의 시대에 강력한 부흥을 나타냈다. 아브라함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의 이름은 이 땅에서 사라져도 의인은 땅에서 계속 기억됨을 받는다. 이 약속은 낙원에서 주어진 약속의 재생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너를 통하여”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결국 복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사실상 원복음을 재생산하거나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을 증명할 수 있다.
야곱의 유대에 대한 축복(창 49:8-12)
이 약속의 연줄은 유다에게 매어졌다. 야곱의 첫 세 아들은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품행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장자권은 네째 아들인 유다로 결정되었다. 야곱은 오히려 요셉을 장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유다를 들어 계승하셨다.
유다는 아브라함의 축복과 약속이 그 기대하는 씨 곧 모든 민족이 굴복할 그 분 자신이 올 때 까지(갈 3:19) 이스라엘 가운데서 머무를 것이 대한 보증이 된다. 구원의 약속은 곧 유다와 그의 형제들 가운데 취하게 되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야곱과 유다를 통해 원시복음의 재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다 역시 창 38장에서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 나타난다.
유다의 복된 위치. 그 형제들 가운데 특권은 - 비록 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했지만 - 역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유다는 광야의 진 가운데 첫번째 그리고 탁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민 2:3-9). 유다 지파로부터 갈렙이 나왔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있어 가나안 복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두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또한 인구조사 때 유다 지파가 첫번째로 모든 지파 가운데 수가 제일 많았다(민 1:27).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행진 때 맨 앞에 섰다(민 10:14). 이 지파는 모든 지파보다 먼저 가나안 복지 기업을 차지했다. 말하자면 맨 먼저 안식에 들어갔다(수 15).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도 그의 아들들도 죽었으나 이 약속의 주인공은 그들과 함께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발람의 신탁발언
발람은 아람인이었는데 야곱도 신명기 26:5에 의하면 아람인이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을 걷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모왑왕에게 고용되었다. 발람이 아람인이었다면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알며 이스라엘 왕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야곱과 동 시대 사람인 라반이 이삭을 믿었던 하나님을 믿었고, 멜기세덱, 미디안 이드로 등도 이방인이었음을 볼 때 발람이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발람의 말은 주로 창 49장 내용과 같다.
모세 같은 선지자
신명기 18:5이하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 네 형제 중에서 나와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라고 주어진 말씀은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보다는 다른 류의 보증 말씀인데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온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그 구원자의 직계 열조들과 바로 연결되는 그런 약속의 계열 바깥에 서 있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발람의 예언과 동일하며 또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내용에 대한 선지자들의 주석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모세가 선지자의 대표이거나 구원자의 모형은 아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 속하지 유다 지파 곧 모든 형제들 보다 더 축복을 받은 유다 지파의 출신이 아니다. 모세는 유다가 그 목표에 달하도록 도우는 일에 봉사했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같이 복의 근원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봉사하는 것이었다.
제 3 부
다윗과 솔로몬 아래에서 재생된 낙원의 그 약속
발람이 야곱으로부터 한 왕 곧 모든 민족을 다스릴 왕이 나올 것을 예언을 통해 인정한 이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더욱 단지 한 왕을 소망했다. 거기에다 유다 지파는 매우 생명력으로 가득찰 것이라는 전제가 주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메시아의 대리자가 그당시에는 아직 이스라엘에 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한나의 아들 즉 사무엘이 그런 왕의 사신으로 부름을 받았다.
백성들이 사무엘 앞에 나아와 자기들에게 왕을 줄 것을 강요하자 하나님은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왕으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 왕은 하나님이 정하신 왕이 아니었다. 분명코 이스라엘의 왕은 유다 지파여야 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
사울의 화려함 저만치 목동 다윗이 자라나고 있었다. 오히려 사울은 하나님의 정하신 기름부음받은 자에게 가시가 될 때가 많았다.
다윗의 고난의 시
다윗의 고난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자기 시대의 죄 때문에 당한 것이었다. 한왕의 간구하는 기도 속에는 죄와 그 당시 혼돈이 밝히 드러난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을 근심시키는 인간의 한 근성이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하나님이 재가하여 세운 왕은 이런 근성에 따른 왕이었다.
다윗이 당하는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당하게 되는 고난과 흡사한 일면이 있다. 특히 시 22편은 그의 고난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 22:18의 내용은 요 19:23 이하에서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 손발이 찔리는 모양은 바로 다윗 시대로부터 따온 표현이다. 고난은 곧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 체험으로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인상깊게 만들기 위해 또 그런 심오한 내용을 천명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다윗은 그에게 주목하는 믿는 자들을 위해 그 약속된 고난을 당하나 또한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는 진리를 주장한다.
시 22편과 비슷한 내용을 시 44 편에서 다루게 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종을 대하게 된다.
시 22편과 40편 사이의 가장 내적인 연관성은 시 69편에 나타난 있다.
또한 고난 그리고 후에 영광, 이 두가지 복음의 중요 사실은 시 16편도 재생시킨다.
다윗의 영화
다윗이 사울의 핍박 당시에 받은 고난은 -이것에 대해서는 시 22,40,69 그리고 16편이 다룸 - 그가 왕으로 인정함을 받음을 통해 제거되었다. 그는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모든 지파의 사람들의 마음이 그에게 쏠렷다(삼하 2:4).
다윗은 원수들이 자기를 대적할 때에 자기는 여호와를 통해 왕으로 세움을 받았음을 증거로 끄집어 댄다.
“하나님의 아들”은 다윗의 법적 명칭이다. 이 명칭에 따라서 여기 이 시편에 있는 땅 위의 모든 왕들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이다.
또한 시 118편 그리고 68편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옮기는 행사와 그 법궤가 시온산으로 가는 동안 다윗의 감정을 묘사해 준다.
삼하 7장의 약속
이 약속의 말씀은 지금까지 상고한 여러 시편들 가운데서는 항상 다윗에게 실현되었다. 다윗과 그의 운명은 이 약속이 바로 그러한 형태를 취하도록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일련의 시편 속에 나타난 그 기다리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에 대한 기념비적 존재인 솔로몬에게서 엿보인다. 솔로몬의 탄생은 이삭의 출생만큼이나 경이적인 것이었는데, 그의 탄생은 그 아버지를 위한 평화와 죄 사함의 상징이었다.
솔로몬에 대한 시편
다윗은 솔로몬의 탄생 때 이미 한 구원자에 대한 약속 곧 이 아들을 통해 다시 새로이 분명해질 그 약속을 들여다 보았다.
시 8편은 이 아들이 태어남을 계기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이 시편은 약속 곧 우리가 하나님의 옛 백성들과 더불어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을 만끽하는 그런 약속을 지니고 있다.
시 45편은 시 8편의 뒷 부분에서 나타나는 미래의 그 왕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다룬다. 시 45편은 혼인을 통해 메시아적 암시를 다룬다.
시 72편은 솔로몬의 앞날을 바라보는 가운데 오실 메시야를 노래하고 있다.
시 110편도 솔로몬에 대해 다루는데, 아도냐가 뱀의 후손이라면 솔로몬은 여자의 씨(곧 그리스도)이다.
시 51편은 다윗의 고난 시기에 쓰여진 대표적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시 109편과 시 49편인데 특히 시 41:9에서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고 노래한 것은 요 13:18에서 그리스도가 자기 제자 가룟유다와 연관한 표현으로 한 말과 유사하다.
다윗의 마지막 말과 이 시기의 결과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다윗은 솔로몬에게 자기의 소명을 넘겨 주었다. 그는 이 아들에게서 기쁨을 가졌고 시 8;45;72;110편에서 그를 노래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성전짓는 후계자로 세워진 자기 아들을 노래한다.
이 솔로몬을 통해 안식과 평화가 시작된다.
제 4 부
선지자 시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이미 지니고 있는 유업을 보전하고 또 항상 새로이 이 구원의 진리에 대한 이해를 이 백성의 마음속에 새기는 사역을 위해 세워진 사람들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죄악에 빠질 때 선지자들은 이 구제불능의 상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가지고 대항해 나섰던 그 비극적인 상황에 이르렀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호세아
호세아는 배도하는 백성 특히 열 지파의 나라인 북쪽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이다.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이스라엘에 관여했으며 남쪽 유다는 부수적으로 다루었다.
호세아는 한 인격 속에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심정을 가진 북쪽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심정을 몸소 보여준 선지자였다.
하나님이 매일 자기 백성들에 대해 참아야 했던 것, 말하자면 이들이 다른 신들과 영적으로 교접하고 이와 더불어 간음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야 하며 동시에 지붕 위에서 외쳐져야 한다.
호세아는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당시 유명한 창녀를 아내로 삼고 그녀의 아들을 입양시켰다. 그의 아내인 고멜은 이스라엘 열 지파를 상징했다.
아모스
우리는 호세아와 더불어 열 지파에게 예언했던 아모스 선지자를 볼 수 있다. 이 아모스에게는 다윗 왕국의 재건을 다루는 메시야 선포 가운데 두번째 계급에 속하는 내용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된다.
아모스는 9장에서 환상 중에 제던 곁에 서신 주님을 보았다. 그 주님은 아모스에게 기둥머리를 쳐서 우상숭배자에게 일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나왔다. 주님이 진노하신다면 어디로 피하던지 결국 화를 당하게 된다. 땅위에 의지하던 것들도 마침내 무너질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오바댜
오바다의 예언은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그 시대 상황의 복장으로 옷입은 채 시온산과 또 거기서 시작되는 에돔의 굴복과 정복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그 주위를 싸고 있던 열방 민족 특히 에돔에게 시온산을 한동안 정복하도록 곧 몇 나라가 이 시온산을 점령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고 때가 이르면 자기 백성이 다시금 시온산에 올라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남은 자 자신들은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 시온산은 신성불가침의 거룩한 곳이 될 것이며 열방들은 이 산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요엘
요엘 선지자는 오바댜보다 조금 늦게 예언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기록은 오바댜의 기록과 비슷하다. 다만 그 양이 오바댜보다 더 많으며 새로운 것이 첨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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