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술어와 그 의미
성서적 술어와 그 의미
선교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언어적인 뜻과 그 목표를 함께 고찰해 보아야 한다. 대개 ‘회심’과 ‘구원’을 그 목표로 두게 되는데, 여기서는 넓은 의미에서 선교, 전도, 대화, 구원, 회심 - 이 5대 술어를 선택하여 그것에 대한 성서적 정의를 시도하는데 있다.
오늘날 세계 운동 가운데 에큐에미니칼 운동은 연합적인 면에는 최대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 같으나, 성서의 권위 아래서 사역 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에 비해 복음주의자 또한 성서 보다 문화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을 때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 최대의 관심은 ‘에큐메니칼 사상과 복음주의적 사상을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도마 위에 꼭같이 올려 놓고 성경 계시의 비판을 가하는데 있다.
성경의 용어를 연구하기 위해서 또는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문법적 구조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연구해야 한다. 결국 본문은 허쉬가 말한 바와 같이, “본문은 그 저자가 의도한 바를 의미한다.”
1. 성서적 선교관
우리가 맨 먼저 고찰해야 할 단어는 ‘선교’(mission)란 단어이다. ㅅㅇ서적 정의를 시도하기 앞서서 우선 현대의 양극단적인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두 견해
두 견해 중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견해는 선교와 전도, 선교사와 전도자, 선교 프로그램과 전도 프로그램을 동일시 해 온 견해이다. 세계 선교 및 전도 위원회까지도 그 헌장에서 ‘선교’와 ‘전도’를 구별하지 않고 그 목적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에 널리 전파하여 만인으로 그를 믿고 구원얻게 함에 있다.”
아스테르담 이후로 에큐메니칼 문서까지도 ‘선교’와 ‘증거’ 그리고 ‘전도’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해 왔다. 특히 복음전도만을 함의하는 이 전통적인 선교관의 극ㄱ단적인 형태는 구두 선포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체적으로 종래에는 선교 자체가 전도의 의미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교와 사회혁신을 동일시하려는 시도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한다면, 첫째,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또한 역사의 심판자이시라는 점이다. 둥째, ‘살롬’의 성서적 범주들과 새로운 인간성과 왕국은 사회개혁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이다.
셋째, ‘선교’란 단어가 하나님께서 세계 속에서 하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일 수 없다는 점이다. 네째, 움살라 대회가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에 몰두한 나머지 복음적 관심의 거의 혹은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서적 종합을 해 볼 때, 우리 모두 선교가 본질상 일차적으로 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나온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의 살아계신 하나님은 파송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내실 때, 자기 나라와 친척을 떠나 위대한 미지의 땅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고 그가 복종하면 그를 축복하실 것과 그를 통하여 세계를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창 12:1-3). 다음에 요셉을 보내사 자기 형들의 잔인성을 다스리게 하셨고 기근 시에 땅 위의 경건한 그루터기를 보존하게 하셨다(창 45:4-8).그후 모세를 애굽의 압박 밑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 보내실 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때가 차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이에 앞서 세례요한을 보내셨다. 그 다음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셨다.
최초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다. 왜내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들과 자기 아들과 자기의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이 선교 중에서도 아들의 선교가 핵심이다. 그리고 이제 아들은 자신이 보내심이 받은 것처럼 우리를 보내신다. 예수님은 친히 70제자를 보내시고 12사도와 다른 제자를 보내셨다. 주님의 위임령은 그의 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지상위임령
예수님의 위임령은 전도에 역점을 둔 것이다. 즉 전파하고 증거하여 제자를 삼는 것이 그 역점이었다. 이 사실로부터 추론하여 교회의 선교는 부활하신 주님의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전폭적으로 전파와 회개와 교육의 선교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이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내세워 사회적 책임을 포함해 왔다는 말은 옳지 않다. 이는 그 위임령의 결과 뿐 아니라 그 위임령 자체가 복음적 책임과 아울러 사회적 책임까지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는 그의 선교처럼 섬기는 선교가 되어야 한다. 그는 자기 지위를 비우사 종의 형태를 취하셨다. 그의 겸손한 마음은 우리 속에 품어야 할 마음이다(빌 2:5-8).
복음전도와 사회봉사 이 양자는 섬기는 사랑의 진정한 표현으로서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있어져야 한다.
로잔 언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속받은 백성을 세계 속으로 보내시되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심 같이 하시며 이것은 그와같은 깊고 희생적인 세계 속으로 침투를 요청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전도와 사회 활동의 관계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회활동을 전도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전도와 회심자 획득이 최고의 목적이 되며 사회활동은 그 보조 수단이 된다.
둘째, 사회활동을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보지않고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복음전도의 표현 혹은 적어도 선포되고 있는 복음의 표현이라고 본다.
세째, 사회활동이 전도의 동반자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가장 복음적이다.
큰 계명
요한 복음의 지상 위임령은 교회의 선교가 성자의 선교를 본따야 할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섬끼 이하여 세계속으로 보냄을 받았다 것과 우리의 관심은 기아, 육체와 영혼의 질병, 보금활동과 사회허?동을 다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때로 주님의 지상명령이 오직 전도에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유언이라는 관점에 너무 집착한 탓이라 생각한다. 주님은 이에 앞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또한 주님의 명령이다.
따라서 ‘선교’란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을 다 함유한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선교’는 교회가 이 세계 속으로 보냄을 받아서 해야 할 모든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선교’는 ‘세사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란 교회의 이중적 봉사의 사명을 함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땅에 보내사 그 소금이 되게 하시며 그 백성을 세계 속으로 보내사 그 빛이 되게 하신다(마 5:13-16).
실질적인 의미
‘선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직업에서 고찰해 보자. 과연 선교사가 최선의 헌신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제자들을 ‘사역’, 즉 봉사에로 부르신다. 즉 우리가 기독교인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하나님과 사람을 봉사하는데 바쳐야 한다. 우리 각자의 차이점은 우리가 부름받은 봉사분야가 성질상 다르다는 것 뿐이다.
2. 성서적 복음화
‘선교’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계 속으로 보내어 하게 하시는 모든 일을 포괄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을 포함한다.
복음화의 우선권
다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로잔 언약처럼 “희생적 종사라고 하는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복음화가 제일 중요하다.”
우리의 복음의 관심은 피터 와그너가 말한 제 4세계 즉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27억 이상의 세계인들에게 대해 최대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복음화의 우선권
복음화란 좋은 소식을 전달 내지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복음화하다’란 동사 ‘유앙겔리죠마이’는 기독교적 좋은 소식에 관계된 것이 통례이다. 그러면 복음화란 말에 대해 살펴 보자.
첫째, 복음화란 수용자들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복음화의 대상이 피선교지 사람들을 국한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라면 복음을 들었던 안들었던 심지어 세례를 받았던 안받았던 불문하고 모두 ‘복음화’될 필요가 있다. 이말은 곧 복음을 전하는 자 쪽에 촛점을 맞춘 것으로 그만큼 책임이 수반된다.
둘째, 복음화의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해서도 안된다. 그 동사는 중간태로 사용되는 것이 정상이다. 이는 주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헬라어의 독특한 문법 형태로 “거기서 그들이 복음화했다” 는 뜻이다(행 14:7, 롬 15:20참조). 다시 말해 복음화란 결과에 관계없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즉 전파하는 주체에 중심을 둔 말이지 어느 지역이 복음화되었다는 식의 결과적인 표현이 아니다.
세째, 복음화는 방법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복음화란 선포 방식이 어떻든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무조전적인 전도가 복음화이다.
복음화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이는 결국 성령의 사역이다. 바울은 복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원했다(롬 1:14-16). 그 방법이 비록 죄수라는 영어의 몸일지라도 그는 황제 앞까지 이르도록 복음 전파에 충실했다.
신약의 복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복음을 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들이 예수를 어떻게 제시했는가.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복음의 사건들과 복음의 증거 이 있었다. 이는 곧 구약의 성취 또는 예수의 말이 성취된 것이었다. 또한 이말은 사도들이 복음의 확증으로 위하여 호소했던 증거를 뜻한다.
복음의 주장들이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있다.
그러면 복음의 주장들이 무엇니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주장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역사적 그리스도는 현대적 그리스도이다. 바울 사도의 복음증거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다”(행 9:20), “예수는 주님이시다”(행 9:22)로 귀결되고 있다.
복음의 약속- 복음에는 복음의 약속들이 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값없는 두 가지 선물 즉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복음의 요구들 - 복음의 요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레를 받는 것이다.
복음의 맥락 - 복음화는 타인들과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그 좋은 소식이란 예수를 가리킨다.
복음선포에는 선행되는 것이 있고 후해되는 것이 있는데, 선행되는 것은 ‘제시’라 할 수 있고 후행되는 것은 ‘설득’이라 함이 적합하다. 이 제시와 설득은 조용히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되어야 ..복음화 자체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리스도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 하나님에게 화목되도록 할 목적으로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화의 결과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 그의 교회에 가입 및 세계 안에서의 책임있게 봉사 등이 포함된다.
3. 성서적 대화관
이제까지의 논증은 ‘선교’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계 속으로 보내어 행하게 하신 자기 희생적인 봉사적 봉사를 가리킨다는 것과 선교에는 복음화와 사회, 정치적 활동이 포함된다는 것, 이 넓은 의미 선교 중에 하나의 긴박성이 복음화에 부과되며 복음화에 우선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복음화란 예수의 좋은 소식을 공포 또는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견해들
이 논쟁의 쌍방은 극단적인 입장들을 입장들을 취하여 왔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항상 복음전파의 필요불가능성을 강조해 왔다. 이와 같은 강조는 옳은 것이라는 본인은 판단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옳은 것이라고 본인은 판단한다.
복음은 선포하기에 적합한 것이지 상냥한 토론에 접합한 것이 아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에 비판이나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복음은 무조건 받아져야 한다.
그러나 더 참가할 필요가 있는 것은, ‘대화’와 ‘토론’은 바로 이해할 때 서로 다른 두 개의 것이 된다.
흔히 선포는 극단적이거나 거만하게 보일 수 있으므로 거부감 내지 혐오감을 줄 수 있는 만큼 겸손한 전달 방식은 대화의 방식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기독교적 전파가 대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선포가 반드시 거만은 아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자는 자기의 주장이 아닌 단지 위탁받은 것을 말할 뿐이다. 물론 가능한 복음선포자도 대화의 접근을 시도할 수 있으나 무턱대고 자신을 개방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의 대화는 바울의 예를 볼 때, 교훈적인 것이 많다. 바울의 경우 유대인들과 논쟁할 때 사용한 방법으로 논증, 설명, 증명, 선포 및 설득 등 다섯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대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여 대화를 반대한다. 실제로 복음은 선언적 즉 선포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 예수님은 상대방과 대화하기 보다 자신이 필요한 말만 하셨다.
비교독교인들과 상호 교체적인 방법을 통해 복음이 전파될 수는 없는 것이다. 베드로, 바울, 요한의 증거는 단일한 것인데, 그 증거는 비기독교 세계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선언한다.
책망학은 본질적으로 성경과 일맥 상통한다. ‘책망학’의 목적은 ‘이교계의 모순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로 죄를 확신ㅅ켜 폭ㄹ하며 책임감을 촉구하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
대화찬성론
첫째 참된 대화는 진정성의 표시이다. 웁살라의 진술에 따르면, 기독교인과 타인의 대화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의 상실을 내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적이요 인격적이요 적합하고 겸손한 것을 의미한다.
둘째, 참된 대화는 겸손의 표시이다.
세째, 참된 대화는 정직의 표시이다.
네째, 참된 대화는 민감성의 표시이다.
실제로 힌두교, 모슬렘과 같은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했던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위해선 대화가 필요하다. 다만 이때 인내를 가지고 실망에 싸이지 말아야 하며 늘 ‘그리스도’가 전달될 수 있도록 사랑안에서 힘써야 한다.
4. 성서적 구원관
‘선교’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계 속으로 보내사 수행하도록 하신 일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란 하나의 희생적인 봉사인데 이런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화’이다. 복음화란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희소식을 남들과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원활한 선교 사역을 위한 한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선교의 중점 사역은 곧 ‘구원’에 촛점을 모아야 한다. 따라서 대화 도중 구원이란 말을 사용해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고 구원에의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
이 구원은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원은 또한 사허ㅣ적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그럼에도 소위 해방신학이라는 운동을 통해 사회구원을 부르짖는 사례도 있다.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세상에 제공하시는 구원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제시된 구원은 구조보다는 인간과 더 관계가 있다.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압제와 구별되는 다른 종류의 멍에로부터의 구출이다.
그렇다면 구원이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자유이다. 물론 구원이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고, 사회적 안정 및 경제적 부요에 이를 수 있으나 그것이 구원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추악한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새로운 봉사생활로의 해방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심판으로부터의 자유-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그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즉 의롭지 못한 자들을 위해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방법이 그 속에 계시되어 있다.
자아로부터의 봉사에로의 자유 - ‘구언하다’라는 동사는 신약에서 부정과거와 완료시제로 사용될 뿐 아니라 현재 시제로도 때때로 사용된다. 이것은 완성된 구원이란 의미 외에도 완성되어져 가는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신학에서 보여주는 ‘성화’의 과정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궁극적인 구원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 또는 개인의 종말을 통해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 완전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화하여 가게 되는 점진적 변화의 과정이 개입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기 마련이다.
부패로부터 영광에로의 자유 - ‘구원의 소망’은 기독교인들이 써야할 투구이다. 궁극적 구원은 장차로부터 올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며, ‘우리 몸의 구속’을 포한할 것이다. 구원을 받은 자는 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구원의 좋은 소식’을 담대히 전해야 한다.
5. 성서적 회심관
‘선교’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계 소으로 보내사 행하신 사랑의 봉사이다. 선교는 복음화와 사회 활동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 양자는 각기 그 자체로서 사랑의 참된 표현이다. 구원 선포에 뒤따르는 중요한 단어가 ‘회심’이다.
‘회심’은 바로 복음에 때한 반응이다. 복음이 무지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인데 비해, ‘회심’은 인간이 자기 정체를 인식하고 새로운 어떤 종류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중생의 결과들은 확신, 해방감, 하나님과의 교제, 사랑,기쁨, 평화 등으로 의식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회심과 회개는 계속적으로 수반돠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고 회심에 접어들더라도 확고한 회개로 이어지지 않을 때 구원에 접근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신다.
‘회심’의 결과에 따른 첫 반응이 회개라면 그 다음 반응은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활동을 거부한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출석은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이루게 되며, 또한 세례로 이어지게 되고 교회 내 봉사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
‘회심’은 이어 사회적 책임을 지니게 된다. 예수님은 중생한 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했다. ‘회심’은 신앙인의 착한 행실을 낳게 된다.
‘회심’은 기독교의 문화를 이루게 된다. 중생 전에 지니고 있던 세상 문화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그리스도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회심’에는 성령의 역사가 따르게 되는데, 사도들 또한 성령의 능력을 겸손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뛰어나게 의존했다. 이 성령은 오용해서는 안 된다. 성령을 거스리거나 소멸하는 것은 큰 죄이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제한하지 않으며 직접 우리의 능력을 제압하고 사역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은 주로 말씀이나 건전한 훈련 속에 잘 나타나신다. 경건 서적을 읽는 동안 성령이 내제하심을 느낄 수도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겸손과 인간성의 적절한 결합의 필요성이다. 이는 오늘날 선교에서 요구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6. 균형 잡힌 기독교
오늘날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이다. 한 성경을 통해, 하나되신 하나님과, 한 성령을 믿는 기독교가 내부적으로는 양극적 대립을 보이고 있음은 아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갈라설 뿐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갈라선다. 한국의 경우 수많은 교단이 갈라진 만큼 수많은 신학교, 선교 단체들의 난립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가장 큰 이유는 분열을 조장하는 사탄의 공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성전을 향한 열심이 자기 주장에 집착하게 되고 오히려 사탄의 일을 도운 결과를 낳는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일치와 자유와 사랑>이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지녀야 할 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기질이나 입장을 전제로 해서는 안된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갈 때,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게 될 것이다.
사탄의 균형 파괴 공작으로 인해 나누어진 모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균형진작 작업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불균형>이란 양극단에서 안주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면 불균형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로, 지성과 감정이다. 기독교인들 중에 너무 쌀쌀맞을 정도로 지성에 싸여 있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따뜻한 피가 흐르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자들은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싫어 한다.
두번째로, 보수파와 급진파의 양극 현상이다.
교회의 임무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복음, 새로운 시학, 새로운 도덕과 새로운 기독교를 창안하는데 있지 않고 단 하나의 유일한 영원한 복음을 충실히 수호하는데 있다.
-자료가 완성본이 아니어서 아쉽게 생각된다. 선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 교회 선교의 문제점 중 하나는 상호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한 나라의 군대 조직도 결국 하나의 지휘 체계 아래서 움직이므로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급급한 자들이 선교지에서 부조화를 이루기 쉽다.
자칫하면 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선교지에 그대로 전가될 수 있다. 교단이나 선교 단체, 또는 파송하는 교회에 지나치게 매인 선교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서로 존중하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 의식이 있어야 선교지에서도 효과적인 사역이 가능하다.
이르쿠츠크에서부터 모범적인 선교지 정착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사진설명- 중국 성도들과 부활절 만찬을 가졌다. 사라 선교사의 요리솜씨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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