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천지란 세상의 모든 것 즉 만물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대개 만물을 천사, 인간, 자연, 문화, 사회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그 만물은 각각의 존재목적이 있다. 그 존재목적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 혹은 의도하신 사회, 문화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온 피조물이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만물이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신 대로 창조되어 창조목적, 존재목적 대로 살아가고 또한 운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목적,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시편 19편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하늘과 궁창 등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창조 당시와는 달리 인류가 총명이 어두워져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과실나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과실을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자비하심 등의 성품을 드러내며, 새는 아름다운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성악가이신지를 그리고 평화의 하나님이신지를 나타내며, 아름다운 모든 산들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건축가요, 화가요, 조각가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 존재목적일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각 국가의 행정, 입법 그리고 사법제도는 하나님이 만물을 통치하는 왕이시라는 것과 법을 제정하는 분이심과 하나님이 심판주로서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장차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만물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존재목적일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그런 성품대로 살아가고, 사회, 문화 역시 하나님의 의도대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그 존재목적인 것이다.
시편 8편에서는 인간의 존재목적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4-9)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나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로 번역하는 성경도 많다. 그러나 피터 크레이기 교수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하는 말씀이 다소 터무니없는 말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에 또한 겸손 차원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게 창조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시인은 또한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관’이라는 단어는 왕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왕적인 영광과 권위를 부여하시고 온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대표자요, 온 피조물의 왕으로서 천사며, 자연이며, 사회, 문화 등의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 그 존재목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시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물을 사랑과 정의로 다스려나가는 것이 그 존재목적이요, 창조질서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인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이 총명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과 사명 즉 자신들의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대부분 창조목적과 창조질서를 벗어난 변질된 삶, 변질된 가정, 변질된 문화, 변질된 사회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사기 마지막장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존재목적에 합당한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성공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등을 모른 채 오로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바, 노아의 홍수심판 직전의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탐욕, 쾌락, 각종 권세 등을 얻는 일에만 매여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밟은 모든 땅을 자신의 것으로 준다는 촌장의 말을 듣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종일 뛰어다니다 정작 촌장 앞에 도착하자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마는 톨스토이 작품에 나오는 소작인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주의 백성들의 저주가 되게 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만물을 회복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알게 하시고 또한 인간의 삶의 목적,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에덴동산에서처럼 하나님의 창조목적, 창조질서 대로 살아가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모델이 되라는 말씀이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창조목적에 부합한 부모 역할, 부부역할, 자녀 역할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현장에서의 창조질서에 합당한 삶, 제도는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춰주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이며, 그리스도인의 존재목적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살아가는 목적도, 그 방식도 다르다. 세상 사람은 지혜와 총명이 어두워져 육체의 욕심과 부패한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만(엡2: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떤 성품이신지를 삶을 통해서 드러내며 또한 자신의 가정, 직장, 사업장 등에서 창조목적과 질서를 회복해나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고 또한 거기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같이 가족뿐 아니라 이웃에게까지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부, 직업, 명예, 권세 등을 통해 그 사랑을 실천하며 창조질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거기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변질된 삶, 변질된 사회를 창조목적 대로 회복하는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송남용목사(창골산 칼럼니스트)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온 피조물이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만물이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신 대로 창조되어 창조목적, 존재목적 대로 살아가고 또한 운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목적,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시편 19편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하늘과 궁창 등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창조 당시와는 달리 인류가 총명이 어두워져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과실나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과실을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자비하심 등의 성품을 드러내며, 새는 아름다운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성악가이신지를 그리고 평화의 하나님이신지를 나타내며, 아름다운 모든 산들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건축가요, 화가요, 조각가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 존재목적일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각 국가의 행정, 입법 그리고 사법제도는 하나님이 만물을 통치하는 왕이시라는 것과 법을 제정하는 분이심과 하나님이 심판주로서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장차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만물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존재목적일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그런 성품대로 살아가고, 사회, 문화 역시 하나님의 의도대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그 존재목적인 것이다.
시편 8편에서는 인간의 존재목적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4-9)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나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로 번역하는 성경도 많다. 그러나 피터 크레이기 교수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하는 말씀이 다소 터무니없는 말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에 또한 겸손 차원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게 창조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시인은 또한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관’이라는 단어는 왕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왕적인 영광과 권위를 부여하시고 온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대표자요, 온 피조물의 왕으로서 천사며, 자연이며, 사회, 문화 등의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 그 존재목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시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물을 사랑과 정의로 다스려나가는 것이 그 존재목적이요, 창조질서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인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이 총명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과 사명 즉 자신들의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대부분 창조목적과 창조질서를 벗어난 변질된 삶, 변질된 가정, 변질된 문화, 변질된 사회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사기 마지막장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존재목적에 합당한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성공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등을 모른 채 오로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바, 노아의 홍수심판 직전의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탐욕, 쾌락, 각종 권세 등을 얻는 일에만 매여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밟은 모든 땅을 자신의 것으로 준다는 촌장의 말을 듣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종일 뛰어다니다 정작 촌장 앞에 도착하자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마는 톨스토이 작품에 나오는 소작인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주의 백성들의 저주가 되게 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만물을 회복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알게 하시고 또한 인간의 삶의 목적,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에덴동산에서처럼 하나님의 창조목적, 창조질서 대로 살아가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모델이 되라는 말씀이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창조목적에 부합한 부모 역할, 부부역할, 자녀 역할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현장에서의 창조질서에 합당한 삶, 제도는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춰주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이며, 그리스도인의 존재목적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살아가는 목적도, 그 방식도 다르다. 세상 사람은 지혜와 총명이 어두워져 육체의 욕심과 부패한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만(엡2: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떤 성품이신지를 삶을 통해서 드러내며 또한 자신의 가정, 직장, 사업장 등에서 창조목적과 질서를 회복해나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고 또한 거기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같이 가족뿐 아니라 이웃에게까지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부, 직업, 명예, 권세 등을 통해 그 사랑을 실천하며 창조질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거기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변질된 삶, 변질된 사회를 창조목적 대로 회복하는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송남용목사(창골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