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나에게 주어진 주제는“한국선교의 미래와 선교사의 역할”이다. 한국선교의 미래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선교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와 선교구조가 건강하여야 한다. 한국선교와 선교사들이 바른 역할 감당을 위하여 우리는 먼저 21세기의 한국인 선교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한국교회의 선교구조를 점검하여야 한다.
1. 한국선교의 미래와 선교사
선교사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세상’에 보냄 받기 위하여 선택받은 사람이다. 선교사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이며 선교사의 일터는‘세상’이다.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세상’을 사랑해야 하며 그리스도가 본이 되신 것 같이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의 영성, 지성, 심성을 포함한 그 선교사의 Life Style, Working Style 표출되는 지도자 상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선교사’가 되기 전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이 있다. 한국선교는 그동안 보다 많은 선교사 파송이라는 수적인 노력과 그들의 영성 키우기에는 힘을 써 왔으나 오늘 세계선교를 선도해야 할 선교사들의 ’삶의 자세‘와 인간성을 길러내는 일에는 등한히 해온 결과 한국 선교사들의 수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선교지에서의 영향력은 그리 늘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선교사’란 칭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복음의 증인’에 대한 올바른 칭호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영광과 욕됨을 함께 지닌 이‘선교사’란 칭호는 20세기 중반 이후 엄청난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이슬람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을 볼 때 3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공격주의(십자군), 지배세력(식민주의), 세속주의로 서구국가를 기독교 세력과 동일시하기 때문에‘선교사’란 말은 그들에게 식민통치의 나쁜 기억을 상기시키는 상징적인 단어가 되었다. 선교 역사가 오래 된 동인도 지역사람들은 영어로 싸움을 시작한다. 자기가 상대방보다 유식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언쟁이 격해 지면 모국어를 사용한다. 그러다 싸움이 격정에 이르면 상대를 향해 에이 Missionary 같은 놈아!(악의 축 또는 매국노)라고 욕을 한다. 그 순간부터 주먹이 오가는 본 싸움이 시작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이‘선교사’란 이름은 비서구 세계에서 일어난 새로운 선교세력이 이어받은 영광과 욕됨이 함께하는 이름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들은 어떤 영성과 인성과 심성과 지성의 조화를 이룬 선교사를 양성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몇 명을 동원하고 어디로 어떻게 파송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의 문제를 가지고 모일 때마다 수많은 전략과 이론들을 내어 놓았으나 정작 선교를 위임받은 선교사들의 인격과 사람됨의 문제는 소홀히 다루어 왔던 것을 인정하며 이번 2006 세계선교대회는 앞으로 동원되고 헌신될 한국인 선교 사역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복합문화 인식과 실력
한국 선교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단일, 단선, 독점으로 직할하는 관행을 고수한다. 한국 선교사들끼리만, 우리 선교단체 선교사들끼리, 나 혼자 모든 것을 직접 해야만 만족한다. ‘함께’나 서로’가 아닌, 또는‘다른 단체와 함께’다른 나라 선교사들과 더불어 나아가서 각각 분담’하여 하고자 하는‘역할분담’이나‘지역분담’을 통한‘선교의 세계화’로 가는 길에 한참 뒤져 있다. 이러한 취약점 속에 양성된 한국선교사들 역시 국제사회 속에 적응하는데 문제가 많다. 국제문화 속에서의 복합문화의 인식은 우리가 지구촌에 흩어져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한국인 선교사들로 우리의 약점인 언어의 보안과 발전, 초문화권에 대한 인식과 이질적 요소를 제거하는 노력을 기우리는 일은 한국선교의 미래를 위한 시급한 요구인 것이다.
21세기는 강한 경쟁력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선교분야에 있어도 이러한 경쟁은 마찬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실력을 쌓지 못한 선교사들은 할 일이 없는 시대란 말이다. 선교지 사람들이 선교사들보다 더 노력하고 그들의 학문이나 기술이 선교사들보다 한 수 위인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고 실력이 없는 사람들에겐 사역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의 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이것이 실력이고 기술이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력이 있는 선교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선교사들이 수는 많은데 실력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고 결국엔 현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빼앗은 사람들이 될 것이란 것을 기억하며 한국선교사들의 언어 기술, 학문적 발전, 인간관계, 세계 동향에 대처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역자들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경쟁력을 갖춘 선교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
2) 정직과 성결
오늘날처럼 사람들의 양심 기능이 마비가 된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 선교사들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초문화권에서 사역 하다보면 양심의 기준이 흔들려 판단하는 능력이 더 빨리 흐려질 수 있다. 변화하는 21세기 가치관이 목적 달성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온갖 거짓과 권모술수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 선교사의 정직과 성결은 그의 삶과 사역, 선교보고, 재정관리, 인간관계 등 모든 면에서 나타나야하며 살아있는 양심과 정직하고 순결한 삶의 모본으로 한국 사회와 선교현장의 마비된 양심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국선교사들이 감당하지 못한다면 한국선교의 미래는 참담할 것이다.
3) 고정관렴 탈피
혹자는 선교는 희생이요 선교는 순교를 당하는 것이며 말라리아와 대기열병으로 죽는 것이고 죽도록 고생하는 것으로 생각 한다. 그래서 선교는 아무나 못하는 것으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특별한 희생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는 곳마다 원수를 밟고 주의 나라가 임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간혹 사탄의 방해를 심하게 받느니, 영적으로 눌린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빛이 들어가면 어두움이 물러간다. 선교사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약한 것 같아도 우리가 빛으로 들어가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간다. 그럼으로 교회가 사탄을 공격하는 것이고 사탄이 수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약한 것 같으나 우리가 움직일 때 어두움이 떠나고 마귀가 떠나는 것이다. 내가 눌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에게 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미 전쟁이 끝난 것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미 왕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사단을 다스리며 사는 자들이다” 라는 확신은 신약을 사는 교회들과 선교사역자들의 바른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사탄의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탄과 어두움을 공격하는 것이고 사탄이 방어하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을 받아 선교하는 사람은 매일 피를 흘리는 고생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은 거짓 영이요, 두려움이란 무기를 사용하는 사탄의 계략이다.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죽는다. 선교지에만 강도의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미국은 선교지 보다 더 잔인한 살인 사건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천재지변으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는 것이 선교지에서 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선교는 고난이며 죽음이고 질병이며 희생이라는 생각은 사탄의 속임수이다. 한국인 선교사들의 건강한 역할 감당을 위하여 선교에 대한 선입관과 고정 관념을 바꾸는 일은 전략이나 계획보다 우선되어야 할 사안이다.
2. 한국선교의 미래와 선교구조
1) 수용자 중심
선교지가 없는 선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선교 없는 선교지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 교회들은 무엇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가? 를 자문해 보아야 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열정 때문에 선교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선교사 개인의 요청이나 교회의 필요와 가타 다른 요청 때문에 선교사를 지원하고 파송하는가?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인가? 아니면 선교하는 선교사 개인이나 파송한 교회를 위한 선교인가?'라는 문제는 한국선교의 미래와 직접 연관된 또 하나의 주요 주제이다. 어떤 경우에는 선교지의 영혼 구령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연으로 알게된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하고 그 선교사 때문에 선교의 열정을 품게 된다. 그러다가 그 선교사가 도중하차를 하게 되거나 후원자의 마음이 바뀌게 되면 선교 자체를 중단하거나 다른 선교사를 골라서 선교지를 바꾼다. 선교사는 단지 도구일 뿐인데 대부분의 교회들이 마치 선교가 선교사 때문에 존재하는 것 같이 행동한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주님이 부탁하신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선교사와 파송교회, 선교지는 모두가 필요하지만 선교지는 목적이고 선교사와 파송 단체는 수단일 뿐이다. 선교지의 복음화 때문에 선교사가 필요한 것이지 선교사나 선교하는 교회 때문에 선교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선교는 잃어버린 영혼들과 선교지를 품는 것이다. 한 개인과 민족을 평생 동안 영적으로 입양한다는 것은 선교사나 선교하는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교지 요구와 필요에 우선한다는 말인 것이다.
비즈니스맨들은 제품을 만들 때 소비자의 관심과 필요를 먼저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그 물건을 팔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영혼 구령을 하는 선교가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과 종족들의 입장과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하는 사람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된 것이다 지구촌 대부분의 나라에는 비록 작은 수 일지라도 현지교회들이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와 관행이 있다. 그런데 선교사를 파송하면서도 현지 교회의 의견을 ane지 않는다. 단기 선교를 가도 그 선교지의 사람들이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현지인들은 아무 것도 안하고 오로지 단기 팀만을 기다리고 있는 줄로 아는지? 일방적으로 방문 기간을 정해 통보한다. 그런가 하면 몇 십 명씩 몰려다니며 잠자리 챙기고 밥해 대느라 정신이 없게 만든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 모 교회는 현지에 와서 현지법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다가 구속, 추방되고 그 지역의 한국인 선교사는 그들과 관계가 없지만 한국인 팀이 다녀갔다는 이유로 현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하는 등 피해를 주면서도 전교인들을 선교사화 하여 매년 전 세계로 단기선교사를 내보낸다고 자랑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선교지를 자녀들의 극기 훈련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디한번 나쁜 환경에 가서 죽도록 고생을 해보라! 그러면 네 환경과 부모가 얼마나 고마운가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을 선교지로 보낸다. 우리가 하는 선교 사역들은 과연 남아 있는 민족과 종족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영혼 구령을 위함인가? 아니면 선교하는 개인이나 파송하는 교회와 선교단체를 위한 일인가? 철저하게 수용자 중심으로 기획하고 시행하는 선교자세는 21세기의 세계 선교를 주도하기 원하는 한국 선교가 점검해야 할 또 하나의 주요 과제이다.
2) 화해와 용서
선교를 예수님이 본을 따라 용서와 화해자의 자세로 임하기보다는 선교를 상대를 쳐서 무찔러야 하는 군사 활동으로 생각하는 선교 지도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본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선교 120주년을 맞은 우리 한국교회의 급선무는 우리와 다른 국가들과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선교를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세계 도처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의 전쟁은 형제간의 싸움이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형 이스마엘과 동생 이삭이 그리고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후손들이 수 천 년을 내려오며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화해 할 수 있겠는가? 빼앗고 상처를 준 자가 먼저 용서를 빌어야한다. 창세기 33장이 보여 주는 대로 잘못을 저지른 동생 야곱이 형 에서에게 생명을 걸고 용서를 구했던 것과 동일한 용서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구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는 한 이슬람 형제들과의 진정한 화해를 기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5장 24절의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잘못을 보상하고 용서를 구했던 야곱을 본받아 형제와 화목하는 일에 생명을 거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주의 명령을 따라 세계선교를 다짐하는 한국교회가 갖아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란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 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다고 방탕하며 살았으며, 다스리고 지배하라 하셨다고 총 칼로 짓밟고 경제적으로 침략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침략하고 짓밟고 빼앗으란 것이 아니라 선한 청지기의 심정으로 그것을 맡아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온 전한 것이 되도록 최상의 것을 만들라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형제와 화목하며, 열악한 환경과 빈곤 가운데 방치되어 있는 수많은 나라들과 종족들을 위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바쳐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번 선교대회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전략과 방법들을 거론하기에 앞서 원수된 이방 형제들과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축복된 선교대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3) 사람 중심
초대 교회에서는 선교사업(Mission project) 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현대 선교는 다양한 사역들이 수반 된다. 각종 선교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신학교, 지역 교회 개척과 건축, 병원, 학교, 농장, 고아원, 기술학교, 구제사업 등을 위해 우리 한국선교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특히 이런 project가 없으면 선교 사역 자체가 불가능한 나라들이 있다. 이슬람, 공산주의와 힌두교 국가 등 문이 닫쳐있는 지역들은 이런 사업들이 선교의 문을 여는 열쇠로 사용 될 수 있고 선교의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사업과 사역을 구분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업들이 실제 복음전파에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가? 오히려 지나친 사업 확장으로 비대해진 단체를 유지를 하느라 영혼 구령이라는 본연의 목적이 희석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에 민감하여야 한다.
인도네시아의 한 섬에서 작은 진료소를 개원하기를 원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 지역 모슬렘들은 환영하며 작은 진료소가 아니라 100병상의 종합병원을 지을 수 있는 땅을 줄 테니 큰 병원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이 선교사는 큰 감동을 받고 큰 병원 건물을 세우는 일에 전념 하였다. 공사비가 떨어지면 한국과 미국교회를 돌며 모금을 하느라 잦은 여행을 하였다. 공사를 하다 보니 자재를 사다 놓으면 사람들이 훔쳐가고 믿고 있던 현지인 직원은 2중 장부를 만들어 선교비를 빼돌리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제는 선교비도 직접 관리하고 건축자재들도 밤새 순찰을 돌며 지켰다. 이런 세월을 10여 년 보내다 보니 병원 건물을 세워졌지만 그 선교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은 형사의 눈으로 변했고 더 이상 복음 전도자가 아니라 건축 공사현장 감독과 병원 사무장으로 변해 버렸다. 중국정부가 한국의 한 기독교 단체에 100만평을 주었다. 그 선교회 사람들은 뛸 뜻 기뻐했다. 중국 관리들의 속셈은 그 땅을 다 채우라는 것이다. 현대식 건물과 시설들로 그 땅을 채우면 그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중국 정부의 것이 되어서 좋고, 선교사들을 그냥 놔두면 돌아다니며 전도만 할 것이니 다른 일에 정신을 팔게 하여 1석 2조의 효과를 얻자는 사탄의 전략인 것이다. 선교 사업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잘못하면 사업으로 탈바꿈 해버릴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1947년 인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독립 한 후 1972년 방글라데시로 재 독립 했다. 1960년 전까지 이곳에는 비록 적은 수이지만 현지인 기독교인들과 지역교회들이 있었고 교회 안에는 설교자들이 있었으며 사회 봉사활동들도 현지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었다. 1970년 전쟁과 기근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많은 선교단체들과 구호기관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슬람이 1억 이상인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 공식적인 선교단체들과 다양한 기독교 NGO들이 진출하게 되면서 그 동안 지역교회 중심이던 선교 사업들은 막강한 재력과 인력을 갖춘 국제 NGO들에게 넘어갔고 사람도, 돈도, 심지어 선교사도 NGO로 가고 현지인 목회자들도 월급이 많은 서방 NGO로 옮겨감으로 지역 교회에는 전임으로 사역할 목회자가 없어지고 선교사들도 이제는 NGO 관계자로 오고 교회 일에 자발적이던 청년들도 앞을 다투어 NGO로 가 지역교회는 비게 되고 점점 더 쇠약해져 현지 기독교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만성적 의타심에 빠지게 되었다. 수많은 선교 인력과 선교비가 투자되었지만 사업이 확장 될수록 현지 교회는 오히려 더 약해지고 지도력이 없어져 영적 기갈과 Mission= Money 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수많은 선교 사업들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교회는 점점 쇠퇴하여 현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돈과 직업, 부모의 혈통 유지, 지위 향상, 단순한 종교 행위를 행함으로 위로 받기 위한 것 등으로“예수는 빠지고”세상적인 요구들만이 남게 된 것이다. 사업과 사역을 구분하지 못한 선교의 결과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를 깨닫게 된 서방교회들은 1980년 이후부터는 사업에 치중하던 사역들을 사람을 세우는 사역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해외 활동을 확장하고 있는 한국 구호단체들과 한국교회의 선교 사업들은 여전히 과거 서구 단체들의 실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한국의 민간 구호 단체들은 외국의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언론과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각 단체마다 매년 수백억을 모금할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자신들도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한다며 인건비를 주지 않아도 되는 한국인 선교사들을 자신들의 해외 직원으로 채용하여 선교와 봉사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구와 사업 확장하며 막강한 재력으로 선교지에 들어와 과거 서구 단체들의 실수를 답습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지의 신자들을 자국민을 위한 초석으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의 심부름꾼들로 만들 것인가? 비록 연약하고 적은 수이지만 그 민족의 구원을 위해 세우심을 받은 현지 기독교인들을 양육하고 건강한 지도자로 세워 간다는 사역 목표를 분명히 하고 구호단체들과 선교사업이 확장 될수록 현지의 지역교회들이 상대적으로 병약해졌던 뼈아픈 역사가 되지 않도록 하루 빨리 한국교회의 깃발을 내려놓고 지역교회 아래서 사역하기를 기뻐하며 철저한 수용자 중심과 사람 중심으로 선교 할 것이란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우리의 한국교회의 선교는 과연 사업인가? 사역인가?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 한국교회인가? 단체인가? 선교사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 올 민족과 방언들을 위한 사역인가? 를 자문해 보며 공격적인 자세와 고정관념을 버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역하며, 지역교회 아래에서 사역하기를 자원하고, 화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선교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고 양육하는 일에 집중하며, 양심이 실종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선한양심과 성결한 삶을 유지함으로 남은 세계선교의 과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한국교회와 선교사들로 축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 본 내용은 2006년 한국세계선교대회 '한국선교 미래포럼'(2006. 6. 1(木) 16:00 ~ 18:00 ▪ 내리교회 나사렛성전)에서 발제된 것입니다.
작성자 장순호 선교사(방글라데시개발협회)
http://www.missionmagazine.com에서 인용
나에게 주어진 주제는“한국선교의 미래와 선교사의 역할”이다. 한국선교의 미래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선교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와 선교구조가 건강하여야 한다. 한국선교와 선교사들이 바른 역할 감당을 위하여 우리는 먼저 21세기의 한국인 선교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한국교회의 선교구조를 점검하여야 한다.
1. 한국선교의 미래와 선교사
선교사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세상’에 보냄 받기 위하여 선택받은 사람이다. 선교사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이며 선교사의 일터는‘세상’이다.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세상’을 사랑해야 하며 그리스도가 본이 되신 것 같이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의 영성, 지성, 심성을 포함한 그 선교사의 Life Style, Working Style 표출되는 지도자 상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선교사’가 되기 전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이 있다. 한국선교는 그동안 보다 많은 선교사 파송이라는 수적인 노력과 그들의 영성 키우기에는 힘을 써 왔으나 오늘 세계선교를 선도해야 할 선교사들의 ’삶의 자세‘와 인간성을 길러내는 일에는 등한히 해온 결과 한국 선교사들의 수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선교지에서의 영향력은 그리 늘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선교사’란 칭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복음의 증인’에 대한 올바른 칭호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영광과 욕됨을 함께 지닌 이‘선교사’란 칭호는 20세기 중반 이후 엄청난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이슬람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을 볼 때 3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공격주의(십자군), 지배세력(식민주의), 세속주의로 서구국가를 기독교 세력과 동일시하기 때문에‘선교사’란 말은 그들에게 식민통치의 나쁜 기억을 상기시키는 상징적인 단어가 되었다. 선교 역사가 오래 된 동인도 지역사람들은 영어로 싸움을 시작한다. 자기가 상대방보다 유식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언쟁이 격해 지면 모국어를 사용한다. 그러다 싸움이 격정에 이르면 상대를 향해 에이 Missionary 같은 놈아!(악의 축 또는 매국노)라고 욕을 한다. 그 순간부터 주먹이 오가는 본 싸움이 시작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이‘선교사’란 이름은 비서구 세계에서 일어난 새로운 선교세력이 이어받은 영광과 욕됨이 함께하는 이름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들은 어떤 영성과 인성과 심성과 지성의 조화를 이룬 선교사를 양성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몇 명을 동원하고 어디로 어떻게 파송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의 문제를 가지고 모일 때마다 수많은 전략과 이론들을 내어 놓았으나 정작 선교를 위임받은 선교사들의 인격과 사람됨의 문제는 소홀히 다루어 왔던 것을 인정하며 이번 2006 세계선교대회는 앞으로 동원되고 헌신될 한국인 선교 사역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복합문화 인식과 실력
한국 선교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단일, 단선, 독점으로 직할하는 관행을 고수한다. 한국 선교사들끼리만, 우리 선교단체 선교사들끼리, 나 혼자 모든 것을 직접 해야만 만족한다. ‘함께’나 서로’가 아닌, 또는‘다른 단체와 함께’다른 나라 선교사들과 더불어 나아가서 각각 분담’하여 하고자 하는‘역할분담’이나‘지역분담’을 통한‘선교의 세계화’로 가는 길에 한참 뒤져 있다. 이러한 취약점 속에 양성된 한국선교사들 역시 국제사회 속에 적응하는데 문제가 많다. 국제문화 속에서의 복합문화의 인식은 우리가 지구촌에 흩어져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한국인 선교사들로 우리의 약점인 언어의 보안과 발전, 초문화권에 대한 인식과 이질적 요소를 제거하는 노력을 기우리는 일은 한국선교의 미래를 위한 시급한 요구인 것이다.
21세기는 강한 경쟁력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선교분야에 있어도 이러한 경쟁은 마찬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실력을 쌓지 못한 선교사들은 할 일이 없는 시대란 말이다. 선교지 사람들이 선교사들보다 더 노력하고 그들의 학문이나 기술이 선교사들보다 한 수 위인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고 실력이 없는 사람들에겐 사역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의 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이것이 실력이고 기술이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력이 있는 선교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선교사들이 수는 많은데 실력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고 결국엔 현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빼앗은 사람들이 될 것이란 것을 기억하며 한국선교사들의 언어 기술, 학문적 발전, 인간관계, 세계 동향에 대처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역자들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경쟁력을 갖춘 선교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
2) 정직과 성결
오늘날처럼 사람들의 양심 기능이 마비가 된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 선교사들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초문화권에서 사역 하다보면 양심의 기준이 흔들려 판단하는 능력이 더 빨리 흐려질 수 있다. 변화하는 21세기 가치관이 목적 달성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온갖 거짓과 권모술수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 선교사의 정직과 성결은 그의 삶과 사역, 선교보고, 재정관리, 인간관계 등 모든 면에서 나타나야하며 살아있는 양심과 정직하고 순결한 삶의 모본으로 한국 사회와 선교현장의 마비된 양심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국선교사들이 감당하지 못한다면 한국선교의 미래는 참담할 것이다.
3) 고정관렴 탈피
혹자는 선교는 희생이요 선교는 순교를 당하는 것이며 말라리아와 대기열병으로 죽는 것이고 죽도록 고생하는 것으로 생각 한다. 그래서 선교는 아무나 못하는 것으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특별한 희생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는 곳마다 원수를 밟고 주의 나라가 임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간혹 사탄의 방해를 심하게 받느니, 영적으로 눌린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빛이 들어가면 어두움이 물러간다. 선교사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약한 것 같아도 우리가 빛으로 들어가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간다. 그럼으로 교회가 사탄을 공격하는 것이고 사탄이 수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약한 것 같으나 우리가 움직일 때 어두움이 떠나고 마귀가 떠나는 것이다. 내가 눌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에게 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미 전쟁이 끝난 것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미 왕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사단을 다스리며 사는 자들이다” 라는 확신은 신약을 사는 교회들과 선교사역자들의 바른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사탄의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탄과 어두움을 공격하는 것이고 사탄이 방어하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을 받아 선교하는 사람은 매일 피를 흘리는 고생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은 거짓 영이요, 두려움이란 무기를 사용하는 사탄의 계략이다.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죽는다. 선교지에만 강도의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미국은 선교지 보다 더 잔인한 살인 사건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천재지변으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는 것이 선교지에서 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선교는 고난이며 죽음이고 질병이며 희생이라는 생각은 사탄의 속임수이다. 한국인 선교사들의 건강한 역할 감당을 위하여 선교에 대한 선입관과 고정 관념을 바꾸는 일은 전략이나 계획보다 우선되어야 할 사안이다.
2. 한국선교의 미래와 선교구조
1) 수용자 중심
선교지가 없는 선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선교 없는 선교지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 교회들은 무엇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가? 를 자문해 보아야 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열정 때문에 선교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선교사 개인의 요청이나 교회의 필요와 가타 다른 요청 때문에 선교사를 지원하고 파송하는가?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인가? 아니면 선교하는 선교사 개인이나 파송한 교회를 위한 선교인가?'라는 문제는 한국선교의 미래와 직접 연관된 또 하나의 주요 주제이다. 어떤 경우에는 선교지의 영혼 구령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연으로 알게된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하고 그 선교사 때문에 선교의 열정을 품게 된다. 그러다가 그 선교사가 도중하차를 하게 되거나 후원자의 마음이 바뀌게 되면 선교 자체를 중단하거나 다른 선교사를 골라서 선교지를 바꾼다. 선교사는 단지 도구일 뿐인데 대부분의 교회들이 마치 선교가 선교사 때문에 존재하는 것 같이 행동한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주님이 부탁하신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선교사와 파송교회, 선교지는 모두가 필요하지만 선교지는 목적이고 선교사와 파송 단체는 수단일 뿐이다. 선교지의 복음화 때문에 선교사가 필요한 것이지 선교사나 선교하는 교회 때문에 선교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선교는 잃어버린 영혼들과 선교지를 품는 것이다. 한 개인과 민족을 평생 동안 영적으로 입양한다는 것은 선교사나 선교하는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교지 요구와 필요에 우선한다는 말인 것이다.
비즈니스맨들은 제품을 만들 때 소비자의 관심과 필요를 먼저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그 물건을 팔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영혼 구령을 하는 선교가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과 종족들의 입장과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하는 사람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된 것이다 지구촌 대부분의 나라에는 비록 작은 수 일지라도 현지교회들이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와 관행이 있다. 그런데 선교사를 파송하면서도 현지 교회의 의견을 ane지 않는다. 단기 선교를 가도 그 선교지의 사람들이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현지인들은 아무 것도 안하고 오로지 단기 팀만을 기다리고 있는 줄로 아는지? 일방적으로 방문 기간을 정해 통보한다. 그런가 하면 몇 십 명씩 몰려다니며 잠자리 챙기고 밥해 대느라 정신이 없게 만든다. 어디 그뿐인가? 서울 모 교회는 현지에 와서 현지법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다가 구속, 추방되고 그 지역의 한국인 선교사는 그들과 관계가 없지만 한국인 팀이 다녀갔다는 이유로 현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하는 등 피해를 주면서도 전교인들을 선교사화 하여 매년 전 세계로 단기선교사를 내보낸다고 자랑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선교지를 자녀들의 극기 훈련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디한번 나쁜 환경에 가서 죽도록 고생을 해보라! 그러면 네 환경과 부모가 얼마나 고마운가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을 선교지로 보낸다. 우리가 하는 선교 사역들은 과연 남아 있는 민족과 종족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영혼 구령을 위함인가? 아니면 선교하는 개인이나 파송하는 교회와 선교단체를 위한 일인가? 철저하게 수용자 중심으로 기획하고 시행하는 선교자세는 21세기의 세계 선교를 주도하기 원하는 한국 선교가 점검해야 할 또 하나의 주요 과제이다.
2) 화해와 용서
선교를 예수님이 본을 따라 용서와 화해자의 자세로 임하기보다는 선교를 상대를 쳐서 무찔러야 하는 군사 활동으로 생각하는 선교 지도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본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선교 120주년을 맞은 우리 한국교회의 급선무는 우리와 다른 국가들과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선교를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세계 도처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의 전쟁은 형제간의 싸움이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형 이스마엘과 동생 이삭이 그리고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후손들이 수 천 년을 내려오며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화해 할 수 있겠는가? 빼앗고 상처를 준 자가 먼저 용서를 빌어야한다. 창세기 33장이 보여 주는 대로 잘못을 저지른 동생 야곱이 형 에서에게 생명을 걸고 용서를 구했던 것과 동일한 용서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구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는 한 이슬람 형제들과의 진정한 화해를 기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5장 24절의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잘못을 보상하고 용서를 구했던 야곱을 본받아 형제와 화목하는 일에 생명을 거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주의 명령을 따라 세계선교를 다짐하는 한국교회가 갖아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란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 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다고 방탕하며 살았으며, 다스리고 지배하라 하셨다고 총 칼로 짓밟고 경제적으로 침략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침략하고 짓밟고 빼앗으란 것이 아니라 선한 청지기의 심정으로 그것을 맡아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온 전한 것이 되도록 최상의 것을 만들라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형제와 화목하며, 열악한 환경과 빈곤 가운데 방치되어 있는 수많은 나라들과 종족들을 위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바쳐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번 선교대회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전략과 방법들을 거론하기에 앞서 원수된 이방 형제들과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축복된 선교대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3) 사람 중심
초대 교회에서는 선교사업(Mission project) 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현대 선교는 다양한 사역들이 수반 된다. 각종 선교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신학교, 지역 교회 개척과 건축, 병원, 학교, 농장, 고아원, 기술학교, 구제사업 등을 위해 우리 한국선교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특히 이런 project가 없으면 선교 사역 자체가 불가능한 나라들이 있다. 이슬람, 공산주의와 힌두교 국가 등 문이 닫쳐있는 지역들은 이런 사업들이 선교의 문을 여는 열쇠로 사용 될 수 있고 선교의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사업과 사역을 구분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업들이 실제 복음전파에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가? 오히려 지나친 사업 확장으로 비대해진 단체를 유지를 하느라 영혼 구령이라는 본연의 목적이 희석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에 민감하여야 한다.
인도네시아의 한 섬에서 작은 진료소를 개원하기를 원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 지역 모슬렘들은 환영하며 작은 진료소가 아니라 100병상의 종합병원을 지을 수 있는 땅을 줄 테니 큰 병원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이 선교사는 큰 감동을 받고 큰 병원 건물을 세우는 일에 전념 하였다. 공사비가 떨어지면 한국과 미국교회를 돌며 모금을 하느라 잦은 여행을 하였다. 공사를 하다 보니 자재를 사다 놓으면 사람들이 훔쳐가고 믿고 있던 현지인 직원은 2중 장부를 만들어 선교비를 빼돌리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제는 선교비도 직접 관리하고 건축자재들도 밤새 순찰을 돌며 지켰다. 이런 세월을 10여 년 보내다 보니 병원 건물을 세워졌지만 그 선교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은 형사의 눈으로 변했고 더 이상 복음 전도자가 아니라 건축 공사현장 감독과 병원 사무장으로 변해 버렸다. 중국정부가 한국의 한 기독교 단체에 100만평을 주었다. 그 선교회 사람들은 뛸 뜻 기뻐했다. 중국 관리들의 속셈은 그 땅을 다 채우라는 것이다. 현대식 건물과 시설들로 그 땅을 채우면 그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중국 정부의 것이 되어서 좋고, 선교사들을 그냥 놔두면 돌아다니며 전도만 할 것이니 다른 일에 정신을 팔게 하여 1석 2조의 효과를 얻자는 사탄의 전략인 것이다. 선교 사업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잘못하면 사업으로 탈바꿈 해버릴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1947년 인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독립 한 후 1972년 방글라데시로 재 독립 했다. 1960년 전까지 이곳에는 비록 적은 수이지만 현지인 기독교인들과 지역교회들이 있었고 교회 안에는 설교자들이 있었으며 사회 봉사활동들도 현지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었다. 1970년 전쟁과 기근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많은 선교단체들과 구호기관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슬람이 1억 이상인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 공식적인 선교단체들과 다양한 기독교 NGO들이 진출하게 되면서 그 동안 지역교회 중심이던 선교 사업들은 막강한 재력과 인력을 갖춘 국제 NGO들에게 넘어갔고 사람도, 돈도, 심지어 선교사도 NGO로 가고 현지인 목회자들도 월급이 많은 서방 NGO로 옮겨감으로 지역 교회에는 전임으로 사역할 목회자가 없어지고 선교사들도 이제는 NGO 관계자로 오고 교회 일에 자발적이던 청년들도 앞을 다투어 NGO로 가 지역교회는 비게 되고 점점 더 쇠약해져 현지 기독교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만성적 의타심에 빠지게 되었다. 수많은 선교 인력과 선교비가 투자되었지만 사업이 확장 될수록 현지 교회는 오히려 더 약해지고 지도력이 없어져 영적 기갈과 Mission= Money 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수많은 선교 사업들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교회는 점점 쇠퇴하여 현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돈과 직업, 부모의 혈통 유지, 지위 향상, 단순한 종교 행위를 행함으로 위로 받기 위한 것 등으로“예수는 빠지고”세상적인 요구들만이 남게 된 것이다. 사업과 사역을 구분하지 못한 선교의 결과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를 깨닫게 된 서방교회들은 1980년 이후부터는 사업에 치중하던 사역들을 사람을 세우는 사역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해외 활동을 확장하고 있는 한국 구호단체들과 한국교회의 선교 사업들은 여전히 과거 서구 단체들의 실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한국의 민간 구호 단체들은 외국의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언론과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각 단체마다 매년 수백억을 모금할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자신들도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한다며 인건비를 주지 않아도 되는 한국인 선교사들을 자신들의 해외 직원으로 채용하여 선교와 봉사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구와 사업 확장하며 막강한 재력으로 선교지에 들어와 과거 서구 단체들의 실수를 답습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지의 신자들을 자국민을 위한 초석으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의 심부름꾼들로 만들 것인가? 비록 연약하고 적은 수이지만 그 민족의 구원을 위해 세우심을 받은 현지 기독교인들을 양육하고 건강한 지도자로 세워 간다는 사역 목표를 분명히 하고 구호단체들과 선교사업이 확장 될수록 현지의 지역교회들이 상대적으로 병약해졌던 뼈아픈 역사가 되지 않도록 하루 빨리 한국교회의 깃발을 내려놓고 지역교회 아래서 사역하기를 기뻐하며 철저한 수용자 중심과 사람 중심으로 선교 할 것이란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우리의 한국교회의 선교는 과연 사업인가? 사역인가?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 한국교회인가? 단체인가? 선교사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 올 민족과 방언들을 위한 사역인가? 를 자문해 보며 공격적인 자세와 고정관념을 버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역하며, 지역교회 아래에서 사역하기를 자원하고, 화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선교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고 양육하는 일에 집중하며, 양심이 실종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선한양심과 성결한 삶을 유지함으로 남은 세계선교의 과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한국교회와 선교사들로 축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 본 내용은 2006년 한국세계선교대회 '한국선교 미래포럼'(2006. 6. 1(木) 16:00 ~ 18:00 ▪ 내리교회 나사렛성전)에서 발제된 것입니다.
작성자 장순호 선교사(방글라데시개발협회)
http://www.missionmagazine.com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