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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04:25

선교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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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 도착하게 되면 이질적인 요소로 인해 당황하게 된다. 선교사 자녀들의 경우 더욱 이질감에 놀라게 된다. 필자는 1997년 1월 어린 자녀들과 함께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갔다. 김치조차 구경할 수 없는 새로운 환경으로 인해 7살 난 찬미가 밥상 앞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친구들은 물론 한국적인 요소라고 찾아보기 힘든 땅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선교사는 현지인과의 교류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또한 방해자들의 농간으로 가로막혀 위기가 가중되었다. 기도와 지혜로 어려운 환경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야 했다. 이때 한국어에 능숙한 고려인 알라 선생님 가족을 만나므로 위기가 해소되기 시작했다.
선교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의 소통, 문화적 적응, 상호 신뢰 등이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메시지의 전달이 중요하다. 메시지 전달에 앞서 현지인들의 언어 특징, 문화적 상황, 토착 종교, 생활 습성 등 선교지 사람들의 습성이나 환경 이해가 중요하다.

선교 커뮤니케이션과 문화

선교 커뮤니케이션은 타문화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문화가 갖고 있는 의미와 역할을 선교사의 삶과 사역과 관련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상호간에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해하고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의 개념과 정의
선교 커뮤니케이션에서 이해하는 문화의 개념은 선교인류학에서 다루는 그것을 의미하며,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의 전 삶과 생활에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실체를 가리킨다.
문화에는 몇 가지 충돌이 발견된다. 우선 ‘행동’이나 ‘산물’은 표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인간의 오관을 통해 쉽게 관찰되고 경험된다. 예의범절과 관련된 행동이나 의식주 등의 산물이 그 대표적 예이다.

문화적 상이성과 타문화권에서의 삶
선교사의 임무는 그리스도를 타문화권에 전파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가 자기 자신의 문화적 영향권을 피하면서 주어진 문화에 따라 성경적 메시지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과 그 본래의 메시지를 수신자 문화 속에 이해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용어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핵심 단어는 “문화”이다. 문화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문화는 사람들이 물질적 ㅈ화, 사상, 가치를 인식하고 조직하는 모든 방식을 의미한다. 문화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대용물일 뿐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인간이 상호교류하는 방식을 내포한다.
인간들은 다양한 문화들을 창조해 왔고, 그 다양한 문화들로부터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받고 그 속에서 익숙해져 왔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바나나 잎사귀 위에 담겨진 음식들을 숟가락없이 오른손으로 먹는 것을 즐긴다. 그 남자들은 ‘사롱’이라는 긴 치마를 입고 편안해한다. 인사를 위해 악수를 청할 때, 사회적 신분이나 서열이 낮은 쪽이 손을 내민다.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있을 때 나어린 소년이 어른들에게 먼저 악수를 하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어느 날 필자가 나보다 젊은 현지인에게 악수를 청하자 좀 이상한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문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이 당혹스럽고 불편한 경험이 낯선 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찾아올 수 있음을 먼저 인정해야 된다.
더 나아가 배우려는 자새와 함께 상대 문화에 대한 오해나 성급한 판단은 피해야 한다.
타문화를 배우며 타문화인을 존중하는 것은 현지인보다도 선교사에게 더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선교사는 자신의 문화가 현지의 그것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에게는 본능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이 자문화우월주의적 정서를 처리하기 전에는 현지 묺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다 해도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다 해도 현지 문화에 적응해 들어가기 힘들다.

(3) 선교 커뮤니케이션과 문화적 장벽
선교 커뮤니케이션에는 유진 나이다가 말한 바, ‘의사소통의 삼중 언어 모델’이 적용된다. 선교사는 성경 속에 나타난 복음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여 현지어로 전달해야 한다. 여기에는 성경의 언어, 선교사의 언어, 그리고 선교사의 언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해석과 전달 과정이 요구된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존재, 사고, 감정, 행동 등의 실재를 인간의 마음과 연관시켜 주는 하나의 상징체계라고 할 수 있다.
선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응답자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임스 엥겔(James Engel)은 청중은 “최고”(sovereign)라는 신념을 가지고 응답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찰스 크래프트는 “선교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핵심 참여자”는 수신자이며 따라서 선교 커뮤니케이션은 “수신자 중심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4) 선교 커뮤니케이션과 언어
타문화권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영역 가운데 언어는 가장 명확한 영역이며 언어를 통해서 선교사는 대처해 나갈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많은 선교사들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 문화에 대한 진실한 정보들이 감춰져 있는 광맥을 구성하고 있다.
선교지에서 통역 사용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러시아 대 도시에 있는 한국 선교사 교회에서 후임자가 무리하게 현지어 설교를 시도하다가 그만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현지어에 능숙하지 않다면 통역을 적절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지혜이다.

수사학의 이해 아테네,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곳에 살던 고대인들에게 수사학은 최고의 지식 성취를 의미했다. 수사학은 완성된 학문과 논리적 설득 기술 양자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학에 뛰어났던 어거스틴이 기독교에 귀의하므로 이교적 사고가 도입되었다는 점이 다소 꺼림칙하지만 기독교 교리 체계 확립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어거스틴 자신이 설정한 사명은 기본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기독교 자체의 배타적 성격을 유지하고 이교도의 증가를 철저히 억제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교리를 규정하는 것이며, 둘째는 계시적 진리와 여기에 원천적으로 위배되지 않는 이교도의 지적 성취 측면 양자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다양한 노력관 관련해 제임스 머피는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성경을 다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과 우리가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인 것이다.
어거스틴은 애굽의 금도 여전히 금이다라는 표현을 했다.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 어거스틴은 “애굽의 금”을 들여와서 기독교 커뮤니케이션 가운데 설교 형식의 기본들을 가르침으로써 그것을 정통 기독교 과정 속에 활용하였다.
수사학을 비롯해 이방적 요소를 기
독교 커뮤니케이션에 도입하기 앞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는 본질적인 지식은 성경에 기독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지식은 무엇이든 그 실체를 밝혀서 올바르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사명 중 일부분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지식”은 애굽의 “금”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금”이기 때문이다.

3. 선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선교신학적 기초

바른 사역은 바른 신학적 기초 위에 새워진다. 선교 커뮤니케이션이 바르고도 효과적으로 진행되려면 그 선교신학적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1)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화자로서 하나님
선교 커뮤니케이션은 특정 문화권의 배타적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화자는 선교사나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아니며, 그렇다고 현지에 세워진 교회나 현지인 사역자도 아니다. 이들은 모두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부름받았을 뿐이다. 궁극적 화자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초문화적 기원을 가진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전적 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이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선교 커뮤니케이션을 펼쳐오시다가 마침내는 완전한 자기 계시인 그 아들을 통해 인류와 커뮤니케이션하셨다(히 1:1-2).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함께 하시는 커뮤니케이션의 하나님으로서 육신 되어 오셨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매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주체이기도 하셨다.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쳤고, 삶과 사역으로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들을 보여 주셨다. 죄인들을 용서하고 질병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회복시키셨다. 사회 속에서 정죄 받고 소외를 경험하던 세리와 죄인들을 식탁의 공동체로 회복시킴으로 인류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으로 초청하는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절정을 이루셨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복음 사역자에게 능력을 수여하시고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서 선교 커뮤니케이션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도록 하신다.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그분은 예루살렘에 강림하심으로 교회를 세우셨고(행 2:1-4), 사마리아 땅에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강림하셨고(행 8:14-17),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임하셨고(행 10:44), 마침내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다(행 13:1-3). 그리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복음을 커뮤니케이션하고 계신다.

(2)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메시지 내용으로써 총체적 복음
기독교의 메시지는 보편적이다. 인종, 언어, 문화, 혹은 상황과 관계없이 전 인류를 위한 것이다.
복음에 대한 이해를 선교와 직결된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이 굳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획기적 결정을 내린다. 이것은 유대인 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자신들의 문화적 옷을 입히지 않기로 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3)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응답자로서 문화 속의 인류
선교 커뮤니케이션에 가장 큰 도전 가운데 하나는 선교지 문화이다. ‘문화’ 혹은 ‘문명화’는 언제나 비서구적인 것을 서구의 것으로 대체시켜야 한다는 서구우월주의 혹은 서구절대주의가 전제된 단어였다.
한국 선교사들 가운데 이런 한국 기독교 문화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사실 인간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초문화적 기원을 가진 복음이 구속사 속에서 표현될 때는 문화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성자 하나님은 유대 문화의 틀 속에 한 인간이 되어 들어오셨다. 신성이 전혀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다.
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장면 나오고 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문화 충돌부터 시작되는 만남을 극복하고 마침내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를 사용하여 복음이 새롭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해서 현지 문화의 모든 요소가 무비판적으로 사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문화에는 이방인 요소와 다양한 죄의 요소가 자리잡고 있는 만큼 적절한 구별과 조화가 따라야 한다.

(4)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대리자로서 파송 교회, 선교사, 그리고 현지 교회
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화자이신 하나님의 대리자요 매개자로 부름 받았다. 이 같은 선교적 본질로 인해 교회는 지리적,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선교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한다. 교회의 파송을 받은-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선교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응답자들 속에서 ‘함께함’의 삶과 생명 나눔의 사역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응답하도록 사역한다.
선교는 섬김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러시아 침례교단과 동역해 왔다. 상호 존중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현지인 지도자들의 한계점을 극복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공동체 의식을 지닐 때 선교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게 된다.

(5) 선교의 도구이자 목적이라는 긴장 관계를 가진 커뮤니케이션
타종교인에 대한 교회의 선교적 태도는 ‘증언과 대화’라는 두 단어로 정리된다. 하나의 극단은 하나님은 논쟁이나 토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타종교인을 향한 ‘증언’적 성격을 띤 선교를 주로 강조한다.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증언’을 위한 수단적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이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선교의 돗구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삶도 죄인들과의 생동적인 ‘함께함’의 교제를 보여 준다. 따라서 증언은 대화를 대체히거나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대화적이어야 한다. 한편 진정한 교제와 대화는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그 주체성을 전제한다.

4. 한국 교회의 바람직한 선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실천적 과제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가 20000명을 돌파해 세계 2위로 선교사를 보낸 나라가 됐다.UBF 선교사 수를 포함시키는가 아닌가에 따라 상당한 수치 차이를 낳게 된다. UBF측에서는 3300명 이상 선교사가 활동 중이라고 말한다(2011년). 하지만 한국 교회 선교사와 이질적인 요소가 적지 않은 만큼 과연 이 숫자를 모두 전체 선교사 수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은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한국 선교사의 질과 사역 전반에 걸쳐 점검하고 효과적인 사역을 위한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1) 복음의 통전적 해석과 적용의 지속적인 추구
그 동안 한국 사회는 대화와 절충에 미숙한 흑백 논리와 양극성 장애에 빠지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한국인과 한국 교회의 문제를 선교지에서 재현해서는 안 된다.
선교지 교회들은 선교사가 전달하는 신학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피동적인 대상이 아니며 이들은 복음의 원 메시지에 충실하면서도 현장에 적절한 선교 메시지를 주체적으로 성찰해 내는 대화 당사자이다. 이런 노력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복음의 원 메시지에 충실하면서도 현장에 적절한 선교 메시지를 주체적으로 성찰해 내는 대화 당사자이다.
서구 교회나 한국 교회가 포착해 내지 못한 복음의 풍성한 면들이 선교지 교회와의 원탁회의의 대화를 통해 더 온전하게 이해되고 적용될 것이다.

(2) 성육신 및 십자가 영성의 함양
육신을 입어 종의 형체로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연약하게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선교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영성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성육신이 보여 주는 ‘낮아짐’과 ‘긍휼’과 십자가에서 비쳐지는 ‘약함’과 ‘화해’의 영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인 인류와 함께 나누시려는 ‘긍휼’은 공생애 전체를 이끌어 가는 내적 동인이 되었다. ‘긍률’의 진정한 의미는, 강자가 더 이상 강자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낮아짐’과 ‘함께함’이 실천되는 영성이다.
(3) 동반자적 협력 관계 및 유기적 공조 체제의 모색
1947년 휘트비(Whitby) 선교대회는 “복종 가운데서의 동역”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동역과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목과 질시, 갈등과 분열 등으로 인해 인력과 자원의 중복 투자 및 낭비가 초대된다는 것을 일찍부터 파악했기 때문이다.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선교 사역의 통제력과 소유권을 장악하여 인간의 제국을 건설해 가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상호복종의 정신을 따라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를 구현해 가는 데 있다. 동반자적인 협력을 진작하고 유기적 동역 체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정보, 인력, 그리고 물질의 나눔까지도 이루어져야 한다.

(4) 현지인 주체적 사역의 진작
바울이 개척한 교회는 바울이나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 교회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현지인 주체적 사역은 ‘제4자’리 명명될 수 있는 ‘자기신학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필자는 현지 기독교 교단 소속 노회와 협력 사역을 했다. 원주민 마을에 3년 동안 사역비를 지원했는데 이또한 노회를 거쳐 지원비가 가도록 하므로 현지인 교단의 자기신학화에 협력했다.

근대 선교는 타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방적으로 ‘말하는’ 선교 커뮤니케이션의 성격을 띠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쌍방적이고 인격적인 커뮤니케션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도 공동의 증언을 위한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보내는 교회’와 ‘받아들이는 교회’의 구분이 지리적, 국가적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선교해야 할 땅 끝은 지리적인 관점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성경적 세계관과의 문화적, 영적 거리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낮아짐’과 ‘긍휼’의 성육신적 영성과 ‘약함’과 ‘화해’의 십자가적 영성은 커뮤니케이션이 선교 도구이면서도 목적이라는 긴장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해 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선교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다각적인 연구와 지침이 설정되어야 한다. 파송교회 위주의 선교 정책도 지양되어야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파송교회 담임목사나 성도들이 선교에 있어서 비전문가일 수 있다. 이로 인해 선교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선교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에서 출발해야 한다. 선교사와 후원교회(또는 후원자들과)의 정직한 소통, 선교사와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성령님이 주도하는 선교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본다.

참고서적
데이비드 헤셀그레이브. 선교 커뮤니케이션. 강승삼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9.
이장호. “선교 커뮤니케이션”, 기독교 커뮤니케이션. 서울:예영, 2007.

<사진설명> 젊은 제니스 목사 자녀들과 놀아주고 있는 찬미- 선교커뮤니케이션은 존중과 소통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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