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교, 미씨오 데이

by 이재섭 posted Apr 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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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 미씨오 데이(Mission of God /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 즉 'Missio Dei'라는 말은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의학 분야에서

쓰던 용어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삼위께서 몸소 예비하신 방도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선교행위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란 전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또한 성부와 성자가 함께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었다.



최근에 이르러 세계교회는 이와 같은 뜻을 지닌 '하나님의 선교'란 말을

새롭게 발견하였는데, 특히 1952년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윌링겐(Willingen)에서

모였을 때 프로테스탄트 교계의 선교활동과 그 근거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활동 안에서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선교'란 말을 정의하면, "하나님 자신의 역사로서의 선교"(mi-



ssion as an activity of God himself)를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독

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송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때의 마지막까지

역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상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활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에 참여하여 그 사역을 분담하고 봉사하지 않

는 한 참된 교회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수행하는 하나님에의 봉사

는 곧 그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임으로, 교회의 근본적인

기능은 무엇보다도 선교를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신

학에서 볼 때, 교회의 모든 계획이나 방법이나 활동은 개교회 중심주의나 교파

중심주의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을

따라서 행해져야만 한다.



1. 하나님 선교의 개념: '하나님의 선교'란 우선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임을 의미한다. 그는 주이시고 위임명령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선교의 주역(das hanelnde Subjekt)이시다. 이처럼 선교가 하나님 자체에게 속

한 것이라고 봄으로써 선교는 모든 인간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러한 논

리 전개는 윌링겐 회의에서 채택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도출해 낼 수가 있

다. 그 채택한 개념을 보면, "선교란 구원받은 모든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지향하여, 아들을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한 지체로서 참여하게 되는 선교 운동의

원천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나 '우리들의

선교'란 말들을 할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선교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 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직 그분의 선교를 위한 기구요, 인간은 그

선교의 도구로서 응답하는 객체에 불과하다. 교회가 하나님의 관심사를 외면하

면 교회는 교회될 수 없으며, 세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에 참여하지 않

고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교회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선교가 수행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교는 언제나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선행

하고 계심을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미 앞서 행하셨고 지금도 수행하고 계시는 일을 따라 가며

그 일에 참여하고 봉사함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자신의 선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우리들의 직무는 하나님의 직무 속에 예시되어 있고, 우리들의 봉사

도 하나님의 봉사에 의해 이미 약속되어 있음으로, 그 직무와 봉사의 의미와 내

용은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규정된다. 선교의 최대 신비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독생자를 보내시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신다는 사실에 있음으로, 우리

들은 이 사실을 믿고 복종함으로써 우리들의 선교는 살고 자라난다. 이 선교를

통해,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시되시고 세상과 관계하시

며, 그 시대와 관련 맺으심으로써 실재하시고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단에로 부르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에 관

한 메시지가 된다.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인간을 책임성 안에 세우신다(행



14:17, 롬 1:8). 이 책임이란 바로 선교인데, 선교에 대한 특권.전권.위임명령.

의무는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나온다.



3.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전개: 일련의 국제적 선교회의는 선교의 승리

의 노래로부터 차차 반성과 고민과 질문으로 바뀌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

히 1910년의 '에든버러 회의'에서부터 1968년 '웁살라 대회'때까지 선교 자체가

심각한 문제로 논의되어 왔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교회가

선교에 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시도하였는데 그 내용을 압축해 보면 대개 네가

지로서, 선교의 근거.범위.임무.목적 등이다.



(1) 선교의 근거(Basis): 선교의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으며, 성경

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선교에 대한 기록이다.



(2) 선교의 범위(Scope):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이후 기독교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전세계에 복음 전체를 전교회가 증거해야만 한다. 따라서 오늘

의 교회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최전선에 서야 한다. 즉 지리적인 것 뿐만 아니

라 이념.종교.문화.사회.인간의 최전선을 말한다(멕시코 회의, 1963).



(3) 선교의 임무(Task):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초점이시며, 인간실존의

가장 깊은 욕구를 성취시켜 주신 부활의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복음화는 곧 인

간화를 뜻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본성과 성령의 능력으로 '성숙한 인간성'을

성취하는 일이다.



(4) 선교의 목표(Goal): 선교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웁살라 대회, 1968). 증언과 봉사를 통하여 정의를 위해

고투하며, 세계와 인간의 평화와 존엄성을 세워 일으킨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의 징표요 청지기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

지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에 충성되게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이와같은 세계교회

협의회의 선교적 각성은 가히 제2의 종교개혁운동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급진적으로 전개시킨 현대 신학자는 호켄다이크(



J.C. Hoekendijk)이다. 호켄다이크는 강조하기를 "선교는 진실로 하나님의 술

어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세상에 선언하기 위한 사도적

사명에 충실히 참여하는 한에서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고 했다. 호켄다이크는

'하나님의 선교'의 실제 문제를 열거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선교는 내부로부터 외부로"란 발상을 청산해야 한다. 2) 교회의 제

도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를 소유

하고 있을 따름이다. 3) 교회는 세상을 성실히 받아들여 충분히 동일시해야 한

다. 4) 선교의 구조는 결정론적이 아닌, 귀납적으로 항상 연구해야 한다. 5)

교회력과 세상력을 동시간적으로 보는 공부를 해야 한다. 6) 현존하는 신앙고

백과 선교구조와의 상이점에 너무 구애되어서는 안된다. 7) 선교의 목적은 이

스라엘이 메시야에게 기대한, '샬롬'의 수립에 있다. 이 '샬롬'은 개인 구원

이상의 것으로서, 동시에 평화.화합.공동.조화.정의 등임을 알아야 한다.



호켄다이크에 의하면, 신국의 기능으로서의 사도적 사명으로 인하여, 하나

님은 세계를 위하여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사도성에

충성하는 한에서 교회 자체는 선교가 되고, 영광에 가득찬 인자의 승리적 행진

에 들어서며, 그 도상에 있어서 임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들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역사를 선교의 문맥

에서 볼 때 참으로 의미 깊은 지평선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협동하여 역사를 그 종국으로 이끌어 올리시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가

메시야적 생을 확대한다는 뜻도 바로 메시야적 생의 실질적 내용을 역사에 실현

하기 위한 '해방'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

교를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우상적 제도와 속박으로부터 구출하는 운동

에 초청하신다.



호켄다이크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교는 이렇게 인간을 해방시키시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개방하신다. 선교는 때의 마지막, 땅의 저 끝을 바

라보며 행진하는 '자유의 향연'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의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4. 하나님의 선교와 고난의 증언: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로서 주

도하시며,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승리와 약

속 안에 있기 때문에, 종말의 승리를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 종말의 승리에 대

한 희망과 신앙은 도리어 이 세상과의 싸움을 심각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종말의 희망은 선교의 정열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는 않다. 교회의 선교 사역은 신국의 종말론적 전미(foretaste)이며, 종말에

대한 성경적 희망은 선교 사역에 대한 가장 강렬한 자극제가 된다. 왜냐하면

신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을 확신하는고로, 우리들은 도리어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활동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승리는

종말론적 비극, 즉 전쟁, 기아, 우주적 격변, 인간들과 민족간에 격화되는 악

등을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악의 세력은 '선교의 행진'과 '자유의 향연'을 시

기하며 방해한다. 그리고 종말의 때가 임박할수록 '적그리스도'도 더욱 기승을

부리며, 붉은 말이 나타나 지상의 평화를 파괴하려 든다. 이같은 묵시록의 종

말적 재앙들은(계 19-20장) 선교공동체로 하여금 세계를 향해 회개를 재촉하는

선교의 긴박성을 각성시키며, 또 성령은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증언하도록 압

력을 가해 오신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그리고 사

도들이 당한 법정 심판과 무수한 순교자들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난은 하나님이 그의 선교 가운데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

하여 특별하게 일하신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이 고난의 시간은 또한 그의 교회

에 대한 약속이 특수한 방법으로 성취되는 때이기도 하다. 교회는 이 때에 고

난을 담당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직을 완성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바쳐진다. 이

고난은 구원이 보다 좋은 삶의 약속이나 인도주의적 쾌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

해준다. 이 사실은 또한 그 추종자들에게 안녕과 성공을 약속하고, 고난을 신

의 저주이며 행복을 구원과 동일시하는 비기독교적 타종교와 엄격히 구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고 고난에 특별한 의무를

부여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함께 받는 고난이 교회의 특권이 되게 하시며(

벧전 4:12 이하, 행 4:41), 하나님의 소유인 도구가 되게 하신다.



실제로 교회는 주님이 가신 길만을 갈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 안

에서 세상을 위해 고난을 받는 책임을 지고 늘 화해의 사역에 관여한다. 교회

는 거듭거듭 세상을 위해 특별한 복종함은 바로 고난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는 것은 항상 배반이요,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고난을 거부

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거부하는 것이라서, 그리스도의 몸과 분리되

는 것으로 된다. 그런고로 한국의 교회나 신학계에서 고난의 종말론적 구속사

적 의미를 심각하게 다루려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소이인 것이 분명하다. 오늘의 우리들이 고난을 겁내어 회피하면서 기독

교화된 세계를 꿈꾸고, 인간의 권리와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는 소리는 한낱 울

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는 항상 박해와 고난받는 순례자의 공동체

가 될 때, 하나님은 그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의 선교의 목표에 도달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안전을 바라는 교회와 안락을 바라는

현대인의 철학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된다. 그러

나 하나님의 이 어리석음과 미련함이 도리어 인간들의 지혜나 현명함을 심판하

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의 증언은

고난을 통하여 더욱 진지하게 빛난다. 공동체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

라가 와서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

을 위한 가장 확실한 증언이며, 그 고난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하신 가장 무서운 고발이며 가장 힘있는 공격이기도 하다. 교회의 수난은 그렇

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선교 가운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역사하

신다는 증거이다. 수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를 사도직의

도구로 선용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가진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공동체에 진리를 선포할 때는, 언제나 세상과 대결함으

로 공동체 자체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깨

어 있어야만 하며, 선교 태만(Missions-traegheit)의 위험성을 추방해야 한다.




두란노알박사의 성경공부하기 http://blog.paran.com/mp3bible

http://blog.paran.com/mp3bible/24913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