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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일원론으로 본 세상)
장창수 선교사

기독교의 성경만 우주의 창조를 기록한다(창1:1절). 창조주는 한 분이다.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주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참 신이란 뜻이다. 그리고 창조 기사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창조주 하나님인 여호와(창2:4절)는 인격적 신(神)이다.
시작과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은 먼저 특정한 목적을 정하고 그 다음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과 계획에 따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의 세계를 창조했고 또 다시 말씀으로 창조하며 이들을 채워나갔다. 추상적인 주제(主題: theme)인 창조 목적이 형상적인 소재(素材: material)라 할 창조 세계를 통해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영적 세계를 물질 세계로 표현시키는 행위로 초월(超越: transcendence)과 내재(內在: immanence) 사이 조화로운 관계를 설명한다. 창조 기사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적인 이해를 위해 초월과 내재를 분리시킬 수 있다.
창조된 우주와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내도록 돕는 구조(構造)와 기능(技能)을 가진다(롬1:19-20절). 즉 자연 계시가 특별 계시를 설명한다. 자연 계시를 잘 이해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도 알 수 있다. 단 두 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너무나 중요하다. 창조 기사가 성경의 나머지 계시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유감스럽지만 교회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아 창조 기사의 중요성을 덜 인식했다. 논리 영역은 물론 역사 영역에서도 초월과 내재 사이 관계를 강제로 분리시켰다. 창조 신학의 일원론이 무시되었다. 그 결과 창조 신학도 거의 무시되고 창세기 3장부터 기독교 신학이 출발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완강하게 부정한다.
창조 기사가 무시된다면 기독교 신학은 그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다. 창조 기사를 재해석하여야 한다.


창조 세계는 유기체이다.
우주와 만물은 모두 하나의 창조물에서 기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1-5절)
첫째 날 하나님은 원형적 우주(창1:1절)와 비물리적인 빛(3-4절)을 창조했다. 원형적인 우주는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러나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했다. 그리고 둘째 날부터 원형적 우주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유일한 주재자(主宰者)란 뜻이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절, 렘31:7절 참조)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시22:28절)
하나님은 질서의 신(神)이다(고전14:33절).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우주는 서서히 안정적인 구조를 드러내며 질서정연하게 존재했다. 이 구조 안에서 우주와 만물은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이 점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될 수 없다.
만물의 주재자인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라는 몸의 머리였고 창조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그 몸을 유지하며 보존하고 섭리하며 통치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첫 날 비물리적인 빛을 창조했고 아울러 성령이 창조된 세상 위에 늘 운행하도록 조치했다.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사단의 존재와 그 활동을 억제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창조 세계가 유기체와 같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도 잘 증명된다. 창조 과정은 주기성(週期性)을 보여준다. 첫째 삼일과 둘째 삼일 모두 우주, 하늘과 바다 그리고 뭍(육지)의 순서로 창조가 진행된다. 첫째 주기인 첫 삼일 동안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창조되었다면 둘째 주기인 두 번째 삼일 동안 그 시공(時空)에 거주할 피조물들이 차례로 창조되었다. 두 주기들은 서로 유기적이다.
창조의 날들이 지날수록 창조 세계도 점점 더 완벽해졌다. 여섯 째 날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최고 걸작품인 인간이 창조되었다. 6일간의 창조 행위는 인간을 위한 창조 과정 자체였다. 인간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서 창조주를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완벽해야 했다.
넷째 날 창조물인 우주의 천체들도 결국 인간을 위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1:14절) 태양은 일과 쉼을 결정해 주는 주야(晝夜)를 인류 사회를 위해 나누어 줄뿐만 아니라 사계절, 일자와 연한까지 정해 주어 덕분에 인류 사회는 규칙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태양의 주기적인 운행 덕분에 인류 사회는 이 지구에서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태양의 에너지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생명을 보존 내지 유지시켜준다. 이 덕분에 인류 사회는 활동에 필요한 양식을 늘 얻을 수 있다(창1:29절). 태양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태양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생물들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였다(창1:12, 21, 24, 25절). 창조 세계는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이다.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있듯이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부분들이 있다. 이 부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맡은 역할과 기능을 소유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은 것도 무용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각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각 은사대로’, ‘각 기능대로’, ‘각 역할대로’, ‘각 사명대로’ 또는 ‘각 직분대로’ 만물(萬物)이 지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각 종류대로’란 표현은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나 ‘양육강식’을 주장하는 무신론적 진화론(進化論: evolution)을 완전히 부정한다.
진화론적 사고는 두 가지로 나뉜다. “어느 것이 더 강하냐 또는 더 크냐?”라는 상대적 이분법(二分法)과 생물들 사이 천적(天敵) 관계를 주장하는 대립적 이분법. 이런 사고에 의하면 피조물들 중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이나 약한 것들은 존재 의미와 목적을 못 갖는다. 또는 천적 관계로 어느 한 쪽은 다른 쪽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 세계는 오로지 강자(强者)와 승자(勝者)만의 소유물이다.
학자들은 진화론으로 인류 사회를 분석한다. 모든 사회적 현상이나 인류의 역사를 상대적 또는 대립적 이분법에 따라 재평가한다. 우생학이나 인종 개량학 그리고 공산주의 등등은 모두 진화론의 결과물이다. 영웅인 강자와 승자만 높게 평가되고 나머지는 약자나 패자로 무시된다. 사람들에게 승리와 성공만이 유일한 가치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 차이가 너무나 크다. 앞엣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모든 만물은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엣 것은 나타난 현상이나 결과에 근거를 두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앞엣 것은 미천한 것도 중요하게 보지만 뒤엣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은 창조 세계의 타락 이전과 이후 사이 차이에서 나온다.
타락 이후 아담의 통치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에게 넘겨졌다. 사단은 자연 세계는 물론 인류 사회에서 하나님의 반대자로 등장하며 하나님이 세운 모든 조화를 무너트린다. 이 때문에 이원론이 맞고 일원론이 틀린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방해와 반대는 일시적이다. 유일한 창조주인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고자 여전히 세상을 통치한다. 그러므로 창조 신학은 인류 사회를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6일 창조 과정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은 통섭적인 관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며 다른 것들을 무시하는 그런 학문적, 과학적 연구 방법은 성경이 처음부터 권하지 않는다.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은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이 달성할 창조 목적에 이바지 하도록 지어졌다. 창조 기사는 통섭적 과학 방법을 주당한다.


신국론이 창조 신학의 중심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6일 째 날 마지막 창조물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은 창조 결과를 은혜로 받고 누리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면 되었다. 창조주는 피조물 인간으로부터 이런 영광과 찬송과 명예를 받길 원했다(시102:18, 사43:7, 21 60:21, 61:3, 엡1:6, 14, 21절).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독특한 방법으로 창조해야 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복사본으로 하나님과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의 통치권(창1:28절)을 넘겼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처럼 문화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처럼 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설 것이다(엡1:4-5절).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용어는 인간 존재의 출발은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은사와 능력을 인간에게 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대로’라는 용어가 품는 신학적 의미이다. 신의 일을 맡은 인간은 신의 성품에도 참여한다(벧후1:4절 참조).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처럼 이성, 지식, 도덕, 감성 그리고 예술 면에서 은사를 소유한다. 이로써 불완전한 인간은 세 단계를 거쳐 완전함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문화 사명을 수행하는 인간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침을 받은 인간. 이것은 신약 성경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칭의, 아들로 살아가는 성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는 영화.

문화 사명은 세 분야로 구성된다. 문화 사명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한 것이다(하나님과 사람 사이 관계, 신앙과 종교 영역). 이 사명은 인간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을 명한다(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 윤리와 사회인문과학의 영역) 그리고 자연은 문화 명령을 수행할 또 다른 무대이다(자연과 사람 사이 관계, 자연 과학의 영역). 이것들이 신앙 삶을 구성한다. 신앙은 윤리나 과학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인문과학과 자연 과학도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신학과 각종 과학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신학은 앞의 두 가지 관계만 중요하게 보았다. 셋째 관계는 비교적 무시되었다. 물질 세계를 저급한 것으로 보는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 때문이다. 오늘날 환경 오염과 파괴의 원인은 바로 이원론에 있다. 그러나 창조 신학은 하나님의 통치가 자연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의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명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창1:26절). 기독교는 자연 세계의 보존과 유지 그리고 관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다른 관계들과 동등하게 자연과의 관계도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은 세상의 학문이나 과학을 배척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인류가 효과적으로 문화 사명을 수행하도록 별도의 조치를 취했다. 안식일을 정하고(창2:1-3절) 에덴 동산을 창설했으며(8-15절) 선악과 규례를 주었고(16-17절) 그리고 가정(家庭)을 세웠다(18-25절).
일주일 중 마지막 날 인류는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창조 기사를 묵상해야 한다. 육적 쉼이 영적 쉼을 겸할 때 진정한 쉼이 된다. 이로써 인류는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늘 창조주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과 명예를 돌릴 것이다. 이를 잊는다면 인간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미천한 짐승처럼 살 것이다.
에덴 동산은 문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근거지이며 동시에 출발점이다. 문화 사명은 에덴 동산의 영역을 세상으로 점점 더 확장시켜 나감으로 훌륭하게 수행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 영역도 세상으로 확장되어가며 하나님 나라가 저절로 이 세상에 건설된다. 그리고 에덴 동산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장소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훈련 받는 곳이다. 여기서 배우고 습득한 후 에덴 밖에서 실천할 수 있다.
선악과 규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류가 문화 사명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사명이라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길을 따라 수행하여야 한다. 일만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길을 따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조건으로 인류는 에덴 동산에서 계속 살며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이를 창조 언약(창2:17절)이라 한다.

이런 삶과 사명 수행을 통해 인류는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완전한 순종자만이 하나님이 마련한 완전한 낙원에 이를 것이다. 이 낙원의 기업을 얻는다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받는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완성인 영화 단계이다.
그러나 순종은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 달하는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미 낙원 에덴에 살고 있다(칭의, justification). 그런 무조건적인 은총을 받은 인류는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다(성화, sanctification). 그러나 노력의 정도에 따라 받을 상급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정 제도는 문화 사명을 위해 꼭 필요하다. 문화 사명을 수행할 일군들은 가정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제도, 부부 제도 그리고 가정 제도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신성하다. 최초의 가정은 바로 교회와 학교와 정부 노릇을 했다. 가장이 목사, 교사 그리고 왕의 역할을 맡는다. 구약 시대로 말한다면 가장이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같은 존재이다. 가정은 인류 사회라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 교육장과 훈련장이다. 이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일군들이 배출된다.

남녀관에서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 차이가 발견된다. 보편적 창조 기사를 말하는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동등한 존재이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수평적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인간 창조를 기록한 2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 않다. 남자는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왕적 존재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 관계는 수직적이며 종속적이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가정에선 창세기 2장의 가르침을 그러나 가정 밖 사회에선 창세기 1장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하와의 저주(16절)를 예로 든다. 그러나 본문도 가정을 배경 한다. 즉 가정 안에서 여자는 남편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 밖 사회에서 남녀 사이 성적 차별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문화 사명의 수행과 은사 면에서 여자를 남자와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명이 수행되는 인류의 문화 영역은 너무나 다양하다. 효과적으로 사명을 수행하려면 남자와 여자 사이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자의 우월성은 현대 사회 이전 농업 시대 절대적이었다. 그 시대 육체적인 힘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화 시대 몸의 힘보다 머리의 힘인 지식이 더 중요해졌다. 여자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다원화 시대 여자가 활동할 수 있는 분야들은 참으로 많다. 이 모든 일들을 남자들만 감당할 수 없다. 학자들은 여성의 노동력이 나라의 발전과 성장을 좌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전 인류 사회는 한 사람의 유능한 리더에 의존했다. 그러나 오늘날 다원화 시대 유능한 전문가들은 참으로 많다. 이젠 조직원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최대한 끄집어 내는 리더가 필요하다. 이 리더십에 권위적인 남성보다 모성적인 여성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남녀관은 이런 시대와 사회를 미리 내다보고 있다. 인류 사회도 일인 지도자만 고집하는 권위주의보다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평등주의를 요구한다. 이제 인류 사회는 여성 지도력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교회와 성도가 노력해야 할 다섯 가지 일들이 있다. 성경 말씀의 고수, 문화 사명 수행, 주일 성수, 교회의 보존 그리고 경건한 가정의 육성이다. 이들은 그대로 창조 신학의 가르침들이다. 이들에 힘쓴다면 교회는 산 위에 켜진 등불처럼 만인 위에 비출 것이며 성도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 만큼 하나님 나라도 인류의 문화 영역에서 더 빨리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교회도 인간 사회도 모두 사는 길이다.

결론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의 종국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를 대리자로 세워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시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다.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국론(神國論: doctrine of God’s kingdom)은 모든 신학들의 목표이며 방향이다. 모든 신학들은 신국론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엡1:4-5절)이 이를 증명한다. 시간적으로 선택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이다. 그리고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 선택의 목적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정을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방법이다. 피택자들로 표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세움을 입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거룩한 신분 획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양자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각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 이후에도 성도의 삶에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그리스도를 닮은 형제들로 그를 세우기 위함이다.
피택자들은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둔 형제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의 아버지이다. 결국 하나님의 가정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면목이다. 창세 전 세워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즉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창조주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창조 후 인류 사회는 바로 하나님의 가정의 상징이며 모형으로 하나님 나라였다.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를 전세계로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인류의 사명이었다. 문화 사명은 바로 이를 목표했다. 지금까지 살핀 대로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학적 주제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라는 제 일차적인 주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창조 신학은 이런 논리적인 진리 체계를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문화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사실은 부활주인 예수님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절, 계1:5절 참조) 만물의 으뜸이라면 지금도 예수님이 세상 역사를 주관한다.
비록 보이는 차원은 아니라도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져야 한다. 이것은 문화 영역에서 실현된다. 이를 위해 부활주 예수님도 은사들을 나누어 주며 신자들을 돕는다. 먼저 예수님은 성도의 인격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그 영역이 세상으로 확대되도록 일한다. 이 점에서 신약 시대 교회는 창조 기사의 에덴 동산 같고 구약 시대의 가나안 땅과 같다. 그리고 신약 시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점이며 출발지이다.
결론적으로 헬라 인의 이원론은 창조 신학에 안 맞는다. 성도는 히브리 인의 일원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일원론과 이원론은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 사이만큼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세계관과 역사관과 가치관 면에서…… 인류 삶의 내용과 성격은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일원론을 택하여야 한다.
사단이 아직도 활동함으로 이원론이 맞는 듯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의 품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의 시험은 성도들에게 연단의 기회가 되지만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에게는 파멸케 하는 유혹이 된다. 결국 사단은 자기 일로 참 주인인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줄 뿐이다.

기독교와 성도는 이원론에서 나온 대립적 또는 상대적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일원론에 근거를 둔 논리적 이분법에 따라 사고해야 한다. 일원론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성도들에게도 유익하다(롬8:28절).
그러나 사물을 상대적으로 또는 대립적으로 판단하는 이분법은 사물의 다른 면들 중 어느 하나를 버리게 만듦으로 성숙한 그리고 지혜로운 판단을 방해한다(창3:6-24절). 흑백 논리에 따라 산다면 편협한 인간이 된다. 이로 인해 신앙 삶의 내용인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모두 파괴된다.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이며 그가 원하는 바이다. 이원론과 그에 따른 사고 방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사고로 살아야 한다. 옛 사람의 사고 방식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사고 방식을 따름으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사실은 창조 기사의 신학이란 다른 신학들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줄 뿐 성취나 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자신의 대표자로 세운 뜻과 목적이 실패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였다(창3:15절).
예수는 둘째이면서 마지막 아담(고전15:45-47절)이 되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중생하여야 한다고 말했다(요3:1-16절). 오늘날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성취된다. 기독론, 구원론과 성령론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성취내지 완성된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열쇠이다. 진실로 예수님은 인류의 참 소망이다 (딤전1:1절). 마라나타!!!

2011.06.03 http://rpress.or.kr

장창수 선교사님은 한국외대와 합동신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예장 합신선교회 소속 러시아 선교사로 20년 가까이 사역 중입니다. 이따금 만날 기회가 있을 때면 자상한 형님처럼 친절과 사랑으로 대해 주십니다. 종교 비자 문제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이르쿠츠크 1번 교회를 소개해 주시는 등 저희 사역을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ㄴ다.

<사진설명>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 부랴트 종족 마을에서 본 저녁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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