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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9일이 되면 전승기념일 행사가 열립니다. 시차가 8시간이나 되기 때문에 도시에 따라 기념행사 시간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르쿠츠크 주 청사 앞에서 펼쳐질 전승기념 행사에 앞서 광장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많은 시간들이 광장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손에 꽃을 든 사람도 있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도 많았습니다. 날씨가 맑고 기후도 비교적 따뜻한 편이어서 가족 나들이하기 알맞았습니다.

시내를 가로질러 온 듯 여러 부대의 행진이 있었습니다. 인솔자가 계급이 높아 보이는 부대도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갈뻔 했던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러시아 군대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했습니다. 스탈린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믿고 방심했다가 서부 전선에 배치된 군용기를 비롯해 많은 전쟁 물자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서둘러 군수 공장 기계를 후방으로 옮기고 내륙 곳곳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했는데 이르쿠츠크 또한 한몫을 했습니다. 전투기와 탱크를 생산하는 외에 군복을 비롯해 여러 군용품을 생산해 전선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어제 이르쿠츠크 1번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러시아 국민이 영적인 승리도 거두어야 한다. 사단은 교회가 없는 대신 샤마니즘이 지배하고 있는 시베리아 원주민 마을을 가리켜 자기가 승리했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최소한 한 개의 교회(또는 기도처)가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독일 기독교인들이 러시아 선교를 위해 많이 기여한 사실도 상기시켰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있는가 하면 빛의 세력도 있습니다.
이땅에 다시는 이런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북관계도 개선되고 북녘 땅에 사는 주민들이 마음놓고 신앙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참고로 독소전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까페를 소개합니다, 이글을 기록한 분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독소전의 역사와 이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던 독소전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발생시켰던 전쟁이기도 했다.
해마다 5월9일 러시아는 이날을 기리며 애국전쟁이라 일컫는 독소전쟁의 승리 퍼레이드를 그들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펼친다.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제3제국 독일을 상대로한 소련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자국 소련의 승리보다도 같은 연합국인 영국과 미국의 유럽 해방 행보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스탈린그라드 에서 독일 6군의 항복 그것은 독일 패망의 전주곡 이었다.
개전 초기부터 파죽지세의 공격을 구사하며 러시아 평원을 침략한 독일의 공세에 계속 밀리기만 하던
소련 슬라브 민족이 공산주의의 똘똘 뭉친 이념을 바탕으로 인민들이 합심하여
독일군을 대대적으로 괴멸시켜 승리했던 전투였다.
그만큼 대단히 격렬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인류 최대,최악의 여러가지 전쟁 에피소드들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스탈린그라드의 전투는 공격군인 독일군과 방어군인 소련군과의 전투로써 1942년 8월 까지 계속 되었다.
이 전투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전환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처음 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서유럽전선에 병력을 주로 투입했지만
히틀런 1941년까지 그런 많은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돌렸다.
처음 독소전의 개전시에는 독일군 대부분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목적지로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했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1942년 남부러시아를 침공하기를 원했다.
남부러시아의 유전지대는 앞으로 전쟁에 수행하는데 많은 전차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석유의 공급이 주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와 많은 도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점령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의 함정이었다.
증강된 소련군은 독일을 포위했고 곧 스탈린그라드를 중심으로 대규모 포위전을 전개했다.
대전개전후 첫 몇 해는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의 우세하게 시작하였다.
1939년 9월에 전쟁을 선언하기 전에 이미 많은 다른 나라들을 합병하였다.
독일군은 이미 몇해 전부터 전쟁을 준비 하였기 때문에 이미 영국이나 프랑스등의 동맹국들이
충분치 않은 전쟁준비에 비해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히틀러는 슬기롭게 소련의 스탈린과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방관 속에 동부 유럽과 폴란드에 대한 공략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후에 프랑스의 보호를 받던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네덜란드를 1940년 봄에 점령을 한다. 그리고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를 공략했다.

몇 주만에 프랑스는 점령 되었으며, 유럽대륙에 주둔했던 몇십만명의 영국군은 덩케르트에서
영국으로 철수 하게 되었다.
1940년 7월까지 독일은 거의 모든 유럽을 점령했다.

이탈리아는 동맹국이 되었으며, 소련은 계속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독일은 마지막 적으로 영국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제공권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히틀러는 독일공군에게 영국 공격을 지시했지만 영국은 이런 독일공군의 공격을 훌륭히 막아냈다.
이로 인해 영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포기 하게 된다.
독일은 이에 대한 다른 전선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생각했다.
이는 영국의 석유 공급을 중단하려했기 때문이다.
이후 히틀러는 다음 공격 대상으로 소련을 생각하게 되었다.
확실히 서유럽은 독일에 장악당했다.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금도 유명하게 알려지는 발바로사 작전이다.

소련이 1941년 6월부터 시작하여 1945년 독일을 패배 시킬 때까지
약 25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사상 최대의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발바롯사 작전은 사실 처음 부터 문제가 있었다.

첫째, 1941년에 히틀러가 봄동안에 발칸제국등을 점령하느냐고 여름이 되기전에 시작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빠른 전격전을 고려 했기 때문에 예전에 나폴레옹을 격파했던 동장군의 위력을 고려 하지 않았다.
또한 히틀러는 소련의 붉은 군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이 작전을 위해 독일은 약 300만명의 병력과 3300대 가량의 기갑부대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소련은 비록 전차의 숫자는 부족하더라도 약 1200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또 다른 문제는 히틀러의 전술적인 군사적 지식의 결핍이었다
이로 인해 처음 모스크바 근교 까지 공격했던 때에 모스크바 뿐만 아니라 북쪽 그리고
카프카스 산맥으로 레닌그라드를 공격하기 위해서 병력을 손실시켰다.
이런 일들은 발바롯사 작전이전부터 이미 예상되었던 문제였다.
독일 공군은 소련공군의 공격을 맞아 단독 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단지 2일만에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군을 파괴시켰다.
소련의 공군 사령관인 Rychagow는 스탈린에게 이 전투의 결과로 "반역적인 행동"이라 하면서 사형을 당했다.
히틀러의 전술적인 무지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많은 훌륭한 장군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뛰어난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독일군은 뛰어난 기동을 가지고 소련군을 쉽게 포위했으며, 많은 포로를 잡았고 전역을 주도 하였다.
1941년 8월에 히틀러는 독일 장성중 하나인 구데리안과 의견을 나눈다.

구데리안은 전격적으로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의 현재 전력을 말하면서 구데리안의 의견을 거절하였다.
히틀러의 관심은 여전히 성공적인 작전인 민스크와 스몰렌스크와 키에프에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같은해 10월에는 모스크바 공격을 승인한다.

11월 말 태풍작전이라 알려진 모스크바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러시아는 경제 기지와 약 300만명의 병력을 잃었다.
러시아는 장병들의 연령을 낮추고 겨울동안 4500대의 탱크와 900만명의 병력을 다시 모았다.
이로 인해 독일과의 계속된 전쟁을 수행할수 있었다.
1942년 5월에 히틀러는 남쪽유전을 목표로 하는 블루 작전을 시작하였다.
5월 말에 스탈린은 작전을 위해 군대를 철수 시켰다.
이것은 그의 유명한 발언인 한걸음도 후퇴하지 마라! 를 뒤집는 명령이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소련군이 걱정하는 POW 캠프가 있었으며, 그들은 빨리 이곳에서 철수 하고 싶어했다.
이 명령으로 인해 전투동안 포로가 되는 소련군의 수는 많이 줄어 들었다.

7월에는 파울로스가 지위하는 독일 제 6군이 스탈린 그라드로 진격하였다.
동시에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담당하는 주코프 장군을 돕기 위해 츄이코브 장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이동하였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서 많은 손실이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공격명령을 내렸다.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도시가 점령당하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카프카스 산맥과 유전지대를 점령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원했다.
이거은 선전 효과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스탈린그라드만 점령하면 소련연방의 붕괴를 가져올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그라드의 전투는 1000대의 비행기가 공습을 실패한 후 1942년 8월 23일 6시에 시작 되었다.이와 같이 공습을 하여 많은 목재 건물들을 파괴 하였다.
600대의 비행기가 4천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같은날 독일군은 스탈린 그라드 교외에 도착하였다.
독일기갑부대에 의한 첫번째 공격은 근교 공장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독일군이 도시에 들어 갔을때에는 폭격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를 보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수한것에 놀랬다. 곧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그리고 붉은 군대는 단호한 결심으로 애국적인 민간인들과 같이 작전을 펼쳤다.
1812년 나폴레옹이 그랬던것처럼 히틀러는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이미 전쟁의 승리는 멀어졌다.

독일군의 한 장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물조차장의 교체를 위해서도 마일단위로 움직여야 했다."
소련군은 그들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점령지를 잃어 갔다.
비록 소련군이 계속 밀리고 있었지만 전투는 점점 치열해졌다.
맘메브의 마운드로 알려진 고지는 전투동안 주인이 8번이나 바뀌었다.
심지어 전투는 하수구에서도 벌어 졌다.

한 건물은 러시아 하사관인 파브로브의 지휘를 받아 한개 소대로 방어하였다.
그 집은 그들이 포위하였기 때문에 파브로브의 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점령을 하려 할때에도 59일동안이나 독일군이 점령하였다.
파브로브는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양쪽 모두 광적인 전투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었다.
소련 포병인 알렉세이 페트로브는 그가 동료에서 정찰대로
원대복귀까지 바라보고 있었을때 가 그의 첫번째 전투였다.
그러나 그는 거리위에서 죽었다.

페트로브는 항복하기 위해서 소리치며 달려나오는 몇몇 독일군을 그의 기관총으로 정지 시켰다.
그는 또 다른 독일군이 현관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
오 신이시여, 나로 하여금 살도록 하게 해주십옵소서"
페트로브는 그 독일군의 얼굴에 총을 쏘았으며, 그외의 3명의 독일군을 2층에서 사살하였다.
그는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원래 그의 위치로 돌아 갔다

한 독일군과 12명의 부대는 80명의 포로를 잡았다.
반항하는 사람은 기관총으로 탱크안에 가두고 사살하엿다.
도시안 공장에서 소련군은 바실리 자이체프에 의해 지휘되는 저격병학교를 세웠다.
자이체프는 10일동안에 40명의 독일군을 죽였다.
그는 소련군과 독일군 저격병 모두에서 유명하였다.
육군 대령인 헤인즈 토르왈드는 그와 싸우기 위해서 나섰다.

2명의 저격병이 자이체프가 그의 동지들을 몰래 쏘았던곳을 발견하기 위해서 서로를 열심히 찾았다.
자이체프의 동료는 잠간 밖을 보았고 그리고 사격을 하였다.
그는 지금 적이 있는곳을 알았다.
토르왈드는 그가 방금 소련 저격병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밖을 보았다.
그리고 곧 자이체프가 그를 죽였다.
스탈린그라드의 모든 전투에서 바실리 자이체프는 242명의 독일군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곧 다음 전투에서 지뢰에 눈을 잃게 된다.
많은 전투들의 형상이 소련군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방어하는 곳을 독일군이 공격하는 것이었다.
독일공군은 하루에 수많은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군 폭격기들은 이런 전투를 종결짓기 위해서 도시를 폭격하였다.
추이코프 장군은 그의 병력을 독일군의 공군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게 독일군 근처로 이동 시켰다.

도시는 독일군이 포위를 하였다.
증원을 위한 러시아군은 볼가강을 건너기 위해 독일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강은 마치 붉은 술이라 생각이 들정도라고 이곳을 본 사람들은 말했다.

전투는 계속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끔 전투는 느리게 진행 되었지만 그것은 다음 전투를 위해 전력을 준비하는 순간이었고 다시 전투는 이어졌다.
많은 전투는 칼과 대검으로 이루어 졌다.

거리와 도시에 쌓인 시체들로 인해 한 독일 육군 중위는 스탈린 그라드는 더이상 도시가 아니다.
항상 화약으로 인한 연기로 가득하였으며, 그것에 반사되는 불빛만이 보엿으며, 동물들도 이 지옥에서 달아 납니다. 그리고 가장 단단한 석제들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쌓였습니다.
그리고 단지 군인들만이 남아있을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전투는 탱크들이 이동이 어렵기 때문에 주로 보병들이 전장을 주도하였다.
탱크들은 사실상 쓸모가 없었고 단지 소련의 역습에 대비한 예비병력으로 밖에는 의미가 없었다.
전투의 몇 개월 후에 아프리카군에 문제가 생겼다.
1942년 11월 5일에 독일군 원수인 롬멜이 이집트의 알라메인에서 패배를 하였다.
그리고 제 8군이 모로코와 알제리 해안에 상륙하였다.
이 두가지 사건으로 인해 예비대를 준비하려는 주코프의 계획이 성공하였다.
몰래 준비한 100만명의 병력과 14000대의 야포와 1000대의 탱크 그리고 1350대의 항공기였다.
독일군의 측면은 남부의 독일 연합군에 의해서 보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병력들은 전력에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전차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련군의 우라노스 작전으로 알려진 이공격에서 이곳은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소련이 그들의 계획들을 비밀로하는 것과 2차대전의 추축국 군사력의 우수한 일을 되었던 것은
전적으로 비번으로 알아채졌습니다.
이것을 소련의 작전이라 생각한 Rumania사단은 그런사실들을 무시하였다.
1942년 11월 19일에, 강력한 소련의 공격은 독일 제6군의 좌익을 담당하였던 제 3 루마니아 군을 공략하였다.
하루 후에 또 다른 공격은 독일군 루마니아 혼성 부대(독일 6군의 우익)를 격파하였다.

4 일 후에 소련 공격군들은 파울루스가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군대(1940년에 파리를 점령하였던 같은 것)는 보급이 끊기게 되었다.
280000명의 독일군이 겨우 몇 일내에 소련군에 의해 포위 되었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히틀러가 후퇴가 가능할때 파울루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독일 공군 사령관인 괴링은 하루에 제 6군에 500톤의 물자를 투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제 6군에게는 충분한 물자였다.

히틀러는 이것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1942년 11월 22일에 그는 파울루스에게 그곳을 요새화하고 기다리라고 지시하였다.
만슈타인 장군은 지원병력을 가지고 도착하였다.
그리고 파울루스와 북부에서 만나기를 희망하였다.
파울루스는 그런 작전을 히틀러에게서 받지 않았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만슈타인장군은 병력을 철수 시켰다.
그리고 파울루스와 그의 군대는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소련군과 추운 겨울에 양쪽으로 문제가 되었다.
독일군은 겨울옷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병력이 여름 공세에 참가했던 병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일 공군에 의해 배달된 공급의 양에 결핍을 느겼다.
독일 공군은 오직 하루에 그들이 유지에 필요했던 500톤중에 불과 100톤만을 수송하였다.
비행기들은 부상자들을 수송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편지를 가져왔다.
파울루스 장군은 이 암울한 조건하에서 히틀러에게 지원병력을 요청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그곳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황은 더더욱 비극적이었다.
부족한 물자로 인해 독일군은 하루에 100그램의 빵을 50그램으로 줄였다.
독일군은 식량을 위해서 군마들도 도살하였다.


1943년 1월 8일 소련군은 독일군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다시 2일후에 소련군은 공략을 다시 하였다.
파울루스는 다시 히틀러에게 무선으로 이런 상황을 보고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항복은 없다라고 파울루스에게 말했다.
1943년 1월의 25일에 소련군은 모든 독일군의 비행장을 점령하였고 이로 인해 모든 공중보급도 중단되었다.
이제 독일군은 식량과 탄약이 없었다.
수많은 부상자들이 있었으나 의료지원이 없기에 이들은 진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1943년 1월 31일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 시켰다.
그리고 독일군의 결사 항전을 명령했다.
히틀러는 항복을 불명예로 여기고 자살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1943년 2월 2일에 항복을 하였다.
소련군은 24명의 장성을 포함하여 110000명의 포로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은 약 40만명의 병력을 잃었다.

스탈린 그라드의 소련의 작전은 성공하였고 이로써 소련에 대한 러시아의 작전은 실패하였다.
그것은 앞으로의 전황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의미했다.

스탈리 그라드의 전투는 소련의 첫번째 승리였다.
이로써 독일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파울루스의 항복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신은 우리의 적에게 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의 한주가 안되어 소련군은 독일군이 점령하였던 아조프해의 바다에 도착하였다.
3월에 소련군은 서서히 유럽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은 긴급히 기갑부대를 집결시켰다.
곧 최고사령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만슈타인 장군은 소련의 전진을 허용하고 주변을 포위하는 작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소련에게 영토를 잃는것이 않좋다는 이유로 이런 제안을 거절하였다.
대신에 히틀러는 모든 팬저들을 집결시켜 쿠르스크지역으로 공격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많은 철도들이 모이는 쿠르스크를 점령함으로써 소련의 보급에 압박을 가하려는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조언을 무시하면서 공격군에 새로이 만들어질
기갑부대의 핵심 전투력인 Panther전차와 Tiger 전차들을 준비할때까지
지연시킴으로써 소련군에게 이 전투를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되었다.
히틀러는 완벽한 승리를 위해 새로운 기갑부대 병력이 투입되기를 기다린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쿠르스크의 승리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를 덮어줄것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영국 브래칠리 파크에 심어 놓은 소련 스파이에 의해
쿠르스크전투를 독일 지휘부가 결정할때 이를 소련 군부에 알려주고
이를 보고받은 주코프 장군은 이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40만개의 지뢰와 많은량의 대전차포를 지원되었다.

1943년 7월 4일까지 200만명의 병력과 6천대의 전차, 그리고 5천대의 비행기 그리고
3만문의 야포가 9000마일 지역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1943년 7월 5일에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후 그렇게 많은 군대에 의해 좁은 지역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좁은 지형에서 많은수의 독일군은 제대로 된 전력을 발휘 할수 없었다.
소련은 독일의 기갑부대에 대비하여 파놓은 수많은 대전차 참호와 대전차 무기의 구비로 독일의 전력을 꺽었다.
새롭게 투입된 Tiger전차와 Panther전차들과 그리고 돌격포들이 게속 진격하였다.
Tiger는 1000야드의 사거리를 가진 88미리 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또한 75mm의 장포신을 지닌 야전 돌격포들의 성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독일군의 보병들의 진격을 위해서 이런 돌격포와 Tiger 전차를 투입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독일군에는 아직 이 신무기가 충분한 양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속 전투를 강요 당했다.

러시아의 T-34전차는 이런 독일군의 전차를 격파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성능의 차이를 메울수 있는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양쪽이 치열했던 1943년 7월 12일에 절정에 달했다.
공군과 포병들은 아군과 적군이 뒤섞이면서 제대로된 지원을 하지 못했다.

독일 기갑부대는 지원사격을 받지 못했다.
1943년 7월 13일 히틀러는 패배를 절감했고 곧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것은 쿠르스크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소련군이 진격을 하였으며,
연합군이 시실리아에 상륙했기 때문이었다.
쿠르스크의 전투는 2차 세계대전중에 벌어진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컷던 희대의 전차전으로 기록 되었다.

이 곳에서의 패배는 스탈린그라드의 패배와 합쳐 독일군의 사기를 저하 시켰다.
2차 세계 대전에 연합군이 승리로 이끌었던 소련의 공세로 인해 소련의 군생산력은

이미 독일군의 그것을 뛰어 넘었으며, 스탈린 그라드의 승리로 독일의 발바롯사 작전은 실패를 하게 된다.
스탈린 그라드전투후의 주도권이 소련에 게 있었으며,
소련군은 자신의 잃어버린 영토를 재빨리 재 점령하였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소련이 대형 구조물로 만들어 축하했다.

스탈린그라드에는 52미터 높이의 대형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것은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기 위해 죽어간 100만명의 소련군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었다.
Stalingrad에서의 독일군과 소련군의 공방전은 1942년 8월 1943년 1월까지 전개 되었다.
그리고 치열했던 스탈린그라드의 전투로 근 200만명 이상의 군인들이 이 전투로 사라져버렸다,
그 병력의 대부분은 소련군이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끝이 났다.
이것은 결국 붉은 소련군대가 1945년에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까지 밀고 쳐들어가며
공격할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준것이다.
히틀러가 추진했던 소련침공 작전인 바르바롯사 작전은 동절기에
영하 30~40도를 밑돌아 살을 에일듯한 소련의 혹독한 강추위와
소련군의 필사적인 저항과 독일군에 대한 보급의 실패및
독일군 수뇌부의 무능으로 인한 총체적인 작전의 실패였던 것이다

http://cafe.daum.net/ajsqkek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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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GMS 2011 세계선교대회] file 이재섭 2011.09.06 3246
271 35년만의 만남 이재섭 2011.08.23 2848
270 사도 바울의 삶의 특징 6가지 file 이재섭 2011.08.17 3233
269 겸손 file 이재섭 2011.08.11 2894
268 혀의 위력 file 이재섭 2011.08.07 3254
26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자 / 차성도 교수 file 이재섭 2011.08.01 3008
266 교만과 겸손 file 이재섭 2011.07.21 2977
265 다문화사역 더 높은 관심 가져야 file 이재섭 2011.07.19 2980
264 기도와 신앙생활 file 이재섭 2011.07.12 3191
263 전도부는 초청잔치- “시대적 과제 ‘이주민 사역’ 적극 나서야” file 이재섭 2011.07.08 2906
262 창조 신학이 근본이다. file 이재섭 2011.06.22 4592
261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 차성도 교수 file 이재섭 2011.06.06 4232
260 5월 30일은 기성이의 만 20세 생일입니다 축하바람니다. file 이재섭 2011.05.30 3561
259 주님과 만남의 날 file 이재섭 2011.05.25 3290
258 미하일 목사님 댁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말의 진위 file 이재섭 2011.05.24 3370
257 영원한 스승 file 이재섭 2011.05.15 4213
256 이 건물의 진짜 주인은? file 이재섭 2011.05.13 3103
» 5월 9일은 독소전-전승기념일(독소전의 역사) file 이재섭 2011.05.10 3771
254 러시아 봄의 불청객 클레시 조심 file 이재섭 2011.05.08 3409
253 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하는가? file 이재섭 2011.05.06 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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