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위원장 죽음과 성탄의 의미

by 이재섭 posted Dec 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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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연일 김정일 위원장 죽음에 대해 세계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독신문 사설을 천사홈에 소개합니다.

금년 성탄은 세계적 경기침체로 인해 마음이 무거운 가운데 맞는 게 아닌가 하였는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런 별세로 한반도 정세에 초점이 모아지는 분위기 속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매스컴과 사람들의 화제가 김정일 위원장의 급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대사에 유례없는 3대 세습의 동토 사회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은 단지 북한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고 동북아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중국과 더불어 지상에 남아있는 특유의 공산독재 사회이다. 아니, 중국은 그래도 정치와 경제의 교묘한 분리를 통해 개혁개방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이제는 세계경제대국의 자리를 넘보고 있으나 북한은 선군정책으로 강성대국을 주창하다가 백성을 기아선상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뒤늦게 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김정일 위원장은 경제개발을 위해 남한과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했으나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중국 일변도로 급격한 기울기 현상을 보였고, 대신 중국은 그의 3남 김정은 세습을 인준하였다.

역시 급서한 김일성이 만년에 미국과 문호를 틀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김정일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유진영과 등을 돌리고는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북미외교에 박차를 가하던 중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방 순시 및 독려 차 기차 이동 중 명줄을 놓았다는 것은 ‘경제발전’에 그가 얼마나 골몰했는가를 뚜렷이 알려주는 시사성 짙은 손짓이 아닐 수 없다. 직접 챙기고 확인하는 그의 행정 스타일은 병든 그의 몸을 혹사시켰고, 게다가 병든 노년의 초조함까지 더해 북한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명료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북한 공산정권은 누가 보기에도 남한의 민주정치와 시장경제에 완패했다. 해방 후 북한정권 수립에서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 당국자들은 남한과의 경쟁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었으나 그 뒤 북한은 급락하고 남한은 승승장구하여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우뚝 섰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북한지도부의 오인 내지 오판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김일성의 북한공산정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 가장 귀중한 두 가지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 나라요, 다음은 일용할 양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간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유대인들의 ‘카다쉬’ 기도문 대신 새로운 기도문을 만들어 달라고 스승에게 요청했을 때 예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바로 오늘날의 ‘주기도’이다. 이런 내력을 가진 주기도는 두 가지 청원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하나님 청원이고 두 번째는 인간 청원이다.

마태복음의 하나님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등의 언급이 있으나 그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반면 인간 청원은 일용할 양식, 용서의 삶, 마귀의 시험 등으로 짜여 있는데 그 세 가지 가운데 맨 먼저 나오는 것이 일용할 양식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는 일이다. 여기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산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즐겨 받으며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주저 없이 말씀하신 것도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사람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견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요즈음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처럼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무거운 짐이거나, 공산주의자들처럼 유산계급을 폭력이 수반된 혁명적 방법으로 척결하고 빼앗아야 할 사냥감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구약의 광야 만나와 같은 사랑의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더욱이 공산주의는 증오와 보복을 혁명의 필수적 수단으로 삼고 있다. ‘용서’란 그들에게 변절자의 반혁명적인 감상일 뿐이다. 그들에게 평화의 이룩함이란 공산화 그 자체이지 우리처럼 전쟁 없는 사회 형성이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일용할 양식을 약육강식의 표적으로 삼으며 용서하지 않고 복수를 일삼는 사회는 마귀의 시험에 노출돼 있는 아주 위험하고 극악한 삶의 환경일 수밖에 없다.

북한 공산정권을 위시하여 20세기의 모든 공산정권들은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의 요결을 저버린 데서 애초부터 패인을 안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김정일 위원장의 부음에서 구세주 예수님의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다시금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가 명심할 사항이 있다. 남한의 하나님 자녀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따르는 데 소홀할 경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가나안을 빼앗은 것처럼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각종 복을 거둬 가시거나 아니면 소돔 고모라 사람들처럼 이 복을 우리가 오용하여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을 반면거울로 삼고 더욱 정신 차려 주님께 가까이 가자. 교회를 사랑하며 세상을 복음으로 섬기는 데 박차를 가하자. 북한선교의 문이 속히 열리기를 기도하자.

2011년 12월 20일 (화) 기독신문 www.kidok.com

<사진설명> 영웅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주의 전통에 따라 러시아 곳곳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