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2) - 가난한 이웃들(봉제공장 청소년들)과 함께

by 이재섭 posted Dec 1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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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선교단체 관계자가 후원자들을 사전에 확보해야만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선교지로 당장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대신 국내에서 사역하더라도 가능한 가난한 이웃의 벗이 되길 원했다. 주일학교 때부터 서울에 줄곧 살아온 관계로 서울이 두 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화려한 도시 배후에는 가난하고 헐벗은 자 또는 나 어린 청소년들이 종일토록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협력 사역 중인 교회 집사님이 자신의 사위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전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가난한 시골 아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봉제공장과 전자조립공장을 가지고 있는 소규모 무역회사였다. 그래서 이곳에 근무하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전도와 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졌다. 열악한 환경 속에 반찬도 제대로 없는 밥을 먹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직 성장기 청소년들이었다.

  회사를 출입한 지 얼마되지 않아 사장이 나를 사목으로 임명했다. 아무래도 일종의 강제성을 띠어 예배 모임을 갖는 게 최선책으로 보였다.  근무가 시작된 다음 예배 시간을 가지기 위해 회사 측과 협의해 주1회 전 근로청소년을 한 자리에 소집해 놓고 사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모두 그리 많지 않았지만 현장이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회사 측의 양해로 봉제공과 전자 조립공 모두 약 300명을 대상이 근무 시간 중에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이들에게 복음 전파는 물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90% 이상 비 기독교인이었음에도 한 차례도 반발이 없이 사내예배를 잘 따라 주었다.

  얼마 후부터 친구인 김 변호사님으로부터 매월 헌금이 보내왔다. 1986년 3월, 이 헌금을 계기로 본사 가까이에 있는 한 건물을 임대해 청소년을 위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이 무렵 봉제공장에 근무하는 근로청소년들은 대개 초등학교 출신들이었다. 대학교 주변은 여러 선교 단체가 활동을 하고 있지만 가난한 근로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는 자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대신 경영자들이 두려워하는 기독교 단체가 생겨나 노동자의 힘을 집약해 경영진과 맞서는 등 회사 경영을 뿌리 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중학교 조차 진학하지 못한 채 온종일 지하실 공장에서 미싱과 씨름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은 아직 어리지만 한국 경제 발전에 일익을 감당해 온 산업의 역군들이기도 하다. 
  시다(보조공)를 2년 정도해서 시험을 합격하면 미싱사나 제단사가 된다. 미싱사에 합격하면 이들은 ‘말’(미싱이 말처럼 생킨 탓인 듯-)을 타게 됐다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을 관리하는데 있어 비인격적이거나 폭력적인 요소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술자 외에 일반 시다(보조원)의  경우 기숙사에 일단 입주하면 스스로 짐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혹 작업 중 실수를 해 회사의 손해를 입히거나 간부의 말을 듣지 않게 되면  끌려가 구타하기 일쑤였다.
  암울했던 시절에 모든 권력이 사주를 보호하고 있었던 탓에 어디 하소할 때도 없었다. 

  근로 청소년들은 갑자기 회사를 벗어나게 되면 자신이 사용하던 소지품이나 심지어 퇴직금까지 포기한 채 도주(?)하기도 했다. 그 동안 어떤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엄연히 자유가 있는 소시민이었음에도 퇴직 절차를 안 밟고(물론  신청해도  대개 받아주지도 않지만)근무지를 떠나면 이른바 도망자란 닉네임이 붙었다.
  ‘도망자’란 말은 한국이 어려웠던 시절 공원들 사이에 공공연히 사용되었던 명칭이었다.
  멀리 지방에서 일하다가 올라온 청소년에게 어떻게 그곳을 나왔냐고 물었더니 도망 왔다는 것이다. 무엇을 훔쳐 가지고 달아난 것도 결코 회사에 빚을 진 것도 없는데 이렇듯 도망자가 되고 만 것이다. 때로는 체포조가 동원되어 도망자(?)를 붙잡아 오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끌려오게 되면 비인격적인 대우를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근로 청소년 가운데 부득이 회사를 떠나야 하는 경우에는 교회를 찾아와 하소하기도 했다. 이때는 이곳 사정을 아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대화가 오고 갔다. 
  “목사님, 지난해 겨울에 산 오버는 10만원 짜리예요. 그것만이라도 좀 빼내 주세요. 제발 부탁해요.”  이럴 때면 교회에 나오는 고참 미싱사인 자매를 시켜 살짝 들고 나오게 한다. 정문을 지키는 수위도 일단 기술 수준이 있는 대상이 짐을 들고 나갈  경우 이를 묵인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필요한 짐을 챙겨 전달해 주기도 했다.
  유급 사목이라지만 결국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이 내가 주어진 직무라 생각되었다.

  어느 날 교회 나오는 청소년들이 나를 찾아와, “목사님, 이상한 애들이 셋이나 왔어요, 고등학생 같은데 머리를 이상하게 하고 화장도 짙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나보니 자신들은 상고에 다니는데 부기를 배우는 것이 싫기도 하고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일찍부터 일하러 왔다고 말하지만 결국 가출 소녀들이었다.
  며칠 공원 생활을 하다 보니 식사도 못 마땅하고 밤늦도록 일을 해야 하는 환경이라  더 있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문제의 청소년들은  회사 규정상 자기 짐을 다시 못 가지고 나가게 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4층 건물 옥상 뒷 편에서 자기 짐을 아래로 던진 후  유유히 빠져 나가고 말았다(수일 후 이 학생들 가족을 동원해 무사히 구출했다. 관련 글은 천사홈에 옮겨 싣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관리자인 주임은 화풀이로 학생들과 친했던 청소년들을 붙잡아 미리 정보를 안 주었다며 심하게 구타해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가끔 교회에 잘 나오던 어린 자매가 얼굴이 많이 상해 물어 보면 이런 이유로 주임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과연 언제까지 참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때론 이런 생각이 일었다.

  만일 회사 체제를 비판하게 되면, 수 년 간 유지해 온 사내 예배가 일시에 중단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노동 운동가들은 나같은 사목을 가리켜 어용 운운 하기도 했다.이러한 환경을 보면서 자주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있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청소년들이 억울하게 맞고 비 인격적인 대우를 당하는 것이 목격될 때면 당장 가서 관계자들을 나무라고 회사 정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보다 큰 하나님의 일을 위해 참아야 했다. 그래서 인지 혹 양쪽이 서로 충동해도 나에게 반감을 경우는 없었다.
  예수님께서도 식민지 통치하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유대인을 대변해 가이사를 향해 데모를 주동하신 적이 없지 않았던가. 자신의 지배지 정보에 민감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저를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노동자들을 동원해 회사 체제에 맞서기 보다 사랑을 가지고 극복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보았다. 사실 사목으로 인해 곤란을 당하는 사주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내가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도 이런 단체 소속이 아니냐고 확인 후 받아들였다.

  예배와 상담 때론 청소년 선도를 하는 가운데 알파벳도 채 모르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됐다. 그래서 일단 화장품에 나오는 영어라도 읽을 줄 알아야 된다며 야학을 시작했다. 이때  A, B, C를 처음 써 보는 청소년들도 많았다.
  “여기 나온 영어 철자를 자세히 보렴. 바로 아모레 화장품이다. 자 이건 뭘까?”
  당장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더라도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을 도와주고 싶었다.
  어떤 청소년은 검정고시 학원 근처에 있는 신문 지국에 머물면서 공부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중학교 과정은 내가 어느 정도 가르칠 수 있지만 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 학원으로 보내야 했다. 후일 신문 지국에 간 청소년은 한 명은 1년도 안 되어 벌써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며 꼭 대학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나머지 한 명도 얼마 후 자신도 합격을 했다며 희망에 싸여 있었다. 이들을 외부로 소개하는 것은 회사에서 알면 곤란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근로자를 구하려면 그만큼 힘들었던 만큼 인력 관리에 예민할 때라 이런 일은 비밀히 진행해야 했다. 마침 남자 기숙사가 외부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을 돌보는 사이 나의 30대가 거의 흐르고 말았다. 이 시기에 여러 비정규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어떤 신학교는 학생이 약 600명 규모였는데 교무과장 대리겸 전임교수로 있었다).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용혜원(목사 시인)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내가 해준 말 한 마디 때문에
내가 준 작은 선물 때문에
내가 베푼 작은 친절 때문에
내가 감사한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땅을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작은 미소 때문에
내가 나눈 작은 봉사 때문에
내가 해준 말 한 마디 때문에
내가 나눈 사랑 때문에
내가 함께해준 작은 일들 때문에

누군가 기뻐할 수 있다면
내일을 소망하며 살아갈 가치가 있습니다


<사진설명> 민족사랑교회(노숙자쉼터교회- 담임 유수영 목사) 예배 모습-
11살부터 노숙자 생활을 했던 소년이 목사가 되어 설교 하는 모습이 눈여겨
보였던지이 교회 성도님들과 많이 친해졌습니다. 담임목사님이 협동목사라
생각하고 틈나는대로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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