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苦難)을 생각한다

by 이재섭 posted Mar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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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이 다가왔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의 핍박과 수난,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을 되새기며 기념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욕심과 세속적 사고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이 엄청난 고난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 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곧 신앙적 후퇴이며 성장이 정체된 현대 교회의 비극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은 인류구원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한 필연이었다. 이 여인의 후손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분이 찔렸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키셨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설명했고, 예수께서도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죄 용서를 얻도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제2아담으로서의 운명이 있었다. 제1아담이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범했고, 이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형벌이 부과되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온갖 불행과 죽음은 이런 연유에 기인한다. 이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대표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인류에게 왕 노릇하였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되었다. 한 사람, 즉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세움 받은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아내에게 내리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문화명령은 단지 아담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을 대표(머리)로 존재하는 인류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 부부의 불순종은 그들만의 불순종일 수 없었다. 그들을 대표로 하는 모든 단위 존재의 불순종이 된 것이다. 설사 선악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도무지 따 먹은 적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아담적 실존이기에 아담의 복 받음은 그들의 복 받음이요, 아담의 벌 받음은 그들의 벌 받음이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이 모든 참극은 아담 한 사람의 불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못된 대장 한 사람이 전 대원의 운명을 재앙에 빠뜨린 것이다.

죄와 사망의 원인이 이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초래되었은즉 의와 생명의 원인 역시 한 사람으로 인해 결과맺는 것이 원리상 맞지 않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생명 안에서 은혜와 선물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다.

하나님에 의해 아담의 대각선상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과오로 빚어진 인류의 재앙을, 아담 즉 인류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셨다. 이를 위해 그분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리를 박차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당하는 온갖 불행을 몸소 겪으시며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형의 형벌을 짊어지셨다. 이렇게 하여 구원 곧 하나님 나라(통치)가 이 땅에 실현된 것이다.

이 때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마른 땅에 돋아난 연한 순 같았다.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고 털 깎는 이에게 자신을 맡기고 얌전히 누워 있는 양을 방불하였다. 짐짓 죄인 되어 한없이 연약한 자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 고난의 예수 그분이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해온 힘의 메시야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여기에 가룟 유다의 절망과 배신의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제2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지셨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골간이요 핵심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그 이해가 빈약하고 그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언저리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그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훌륭한 것으로 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아무쪼록 “그분은 자신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수치를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을 참으셨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 쪽에 앉으셨다. 너희는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한 것을 이렇게 참으신 분을 생각하여라.”

오호, 이렇게 하여 말세 예수님의 대대적 결집은 시행되었고 새 언약의 백성이 보무도 당당하게 출현한 것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고난(苦難)을 생각한다

2008년 03월 11일 (화) 기독신문 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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