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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7 07:36

교회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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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교회의 본질


1. 교회의 정의

(1) 교회의 개념에 대한 혼동
교회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또한 매우 자주 오해되는 주제이다, 또한 그것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기독교 신학의 몇몇 측면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들이 기독교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접촉점이요, 어쩌면 유일한 접촉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언급하기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간순히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교회는 기독교를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첫 접촉점이자 유일한 접촉점이기도 하다. 교회의 중요성에 비해 정작 교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론 교회가 어느 특정된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분파를 업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혼동은 교회의 기본적인 본질에 관한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이해의 부족은, 기독교사상사를 볼 때 그 어느 시기에도 교회에 관한 교리가 다른 교리들만큼 직접적으로 충분히 논의되고 연구된 적이 없었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기독론, 성령론은 A.D. 4세기와 5세기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교리는 중세시대에, 그리고 구원에 관한 교리는 16세기에 각각 신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러한 동일한 관심이 교회론에 모아진 적은 결코 없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점차 교회가 신학 저술들의 주제가 되고 있는데 교회 일치 운동이 그 한 예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세상에 대항하는 입장에서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이러한 견해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로마 카톨릭의 견해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은혜의 저장소이며, 따라서 세상이 이은혜를 받고 교회에 의해 변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교회와 연결되어 교회의 성례를 받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좀더 개신교적인 형태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복음 즉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채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 세상이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재결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복음을 듣고 믿어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중생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라는 형식적인 구조를 벗어나서 세상 안에서 직접 활동하시며,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 아님이 분명한 사람들이나 비기독교적인 제도들을 통해서조차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서 간주되고 있다.

(2) 교회에 관한 경험적 - 역동적 정의
오늘날 교회론의 발전을 저해시켜온 또 하나의 이유는 20세기에 이르러 철학, 특히 형이상학(metaphysics)을 기피해 온 데 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기 보다 그 현상적인 모습 즉 교회의 포출된 부분으로부터 반대로 교회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의 영역에 골몰하기 보다는 관찰이 가능한 이 세상의 영역에 몰두하도록 움직여 가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불변하는 순수한 이론적 정의가 아닌 이러한 가변적인 현실적인 경험은 한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널리 인식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러한 방향성의 변화는 우리의 문화 안에서 발생했으며, 많은 신학자들은 그것을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면, 칼 마이캘슨은 언급하기를,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 그의 본질과 속성들, 교회의 본질, 인간의 본질, 그리스도의 선재적 본질 등 추측을 통해서만 다룰 수 있는 이러한 주제들은 신학을 살아있는 인간의 자리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형이하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색의 영역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마땅히 포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흔히 언어의 변천이 역동적인 것 처럼 교회의 본질 또한 역동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실존주의적 해석은 위험하다.

(3) 교회에 관한 성경적 - 철학적 정의

“church"라는 단어, 그리고 그것과 같은 어족에서 나온 다른 언어의 용어들은 ”주님께 속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큐리아코스’라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에클레시아(έκκλησια)라는 신약성경 헬라어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용어가 정작 신약성경에서는 마16:8과 18:17에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의미가 성경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비록 같은 용어가 공통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결국 그러한 표현이나 사상이 성경 전반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고전헬라어에서 ‘폴리스’ 즉 시민들의 집회에서 유래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교회의 의미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카할(להק)과 에다(הדע)를 들 수 있는데, 카할은 모임의 구성원을 가리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이는 행위의 발생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에다는 사람들 특히 회막 앞에 모인 사람들과 관게가 있다. 이말은 곧 제의(cult)나 법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말이 신약의 에클레시아와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알기 위해서 먼저 70인경의 예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카할의 경우 ‘에클레시아’로 자주 사용되나 에다는 ‘회중’으로 번역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의미는 어떠한가. 바울은 어떤 특정한 교회외에 가정 또한 교회임을 암시하고 있다(예 롬 16:5, 고전 16:9). 골로새서에서도 그는 “라오디기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 집에 있는 교회에 나의 안부를 전하라”라고 쓰고 있다(골 4:15).
우리는 특정된 장소에 있는 신자들의 개별적인 모임이나 그룹이 결코 단순히 전체 교회의 한 부분이나 구성원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교회는 개별적인 지역 모임들의 총합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인 지역 모임들 하나하나가 온전한 교회이다. 각 공동체는 비록 그것이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체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2. 성경적인 교회상

(1) 하나님의 백성
바울은 신자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다. 그들은 그의 소유이며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개념은 그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를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존의 어떤 나라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민족을 실제로 창조하셨다. 그는 먼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신다는 이러한 개념이 더욱 확대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서신을 통해,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쓰고 있다(살후 2:13-14;또한 살전 1:4을 보라).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이며 교회이다. 이 교회는 곧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특질은 바로 거룩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룩하기를 기대하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화도 거룩해야 한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께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니라”(엡 5:25하 - 27).

(2) 그리스도의 몸
아마도 가장 확실한 교회상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일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이 이미지가 교회에 고나한 가장 완벽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완벽한 진술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 동안에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 활동하신 것과 꼭같이,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보편적 교회는 물론 개별적인 지역 모임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또한 교회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결합을 강조한다. 구원의 전과정은 대부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이다. 신자는 곧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성도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또한 갈 2;20도 보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들 상호간의 연결 관계를 말해 준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고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결국 신자 개개인은 다른 모든 신자와 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을 강조하여 말한다.
이처럼 교회를 몸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의 상호관계- 각 신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몸은 전체가 다 순결해야 하며 서로의 짐을 져야 한다(갈 6;2). 또한 지체 가운데 법죄한 일이 발견되면 그 사람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몸으로서의 교회의 특징은 진정한 교제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상호 관련성이 아닌,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긴밀한 교감을 의미한다. 그러한 교제에는 상호간에 감정이입과 격려, 그리고 상호계발(edification)이 있어야만 한다. 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모두에게 경험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줄거워하나니”라고 쓰고 있다(고전 12;26).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는 물질적인 소유까지도 함께 공유하였다.

(3) 성령의 전
바울의 삼위일체적 교회 개념 가운데 나머지 하나는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상이다. 교회를 처음 존재케 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행하신 극적인 사건은 오순절에 일어났는데, 그때 그는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시고, 삼천명을 회개시키셔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 이후 그는 계속해서 교회 안에 거주하고 계신다:“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지금 성령께서는 교회에 내주(內住)하고 게신데, 신자 한사람 한사람 안에 개별적으로 내주하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 안에 공동으로 내주해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분명하게 쓰고 있다(고전 3:16-17). 그밖에도 그는 신자들이 “주 안에서 성전”(엡 2;21)이며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22절)라고 묘사하였다. 베드로도 신자들을 “신령한 집”으로 언급하고 있다(벧전 2:5).
교회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교회를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드신다. 그 이유는, 옛 언약 아래서는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셨기 때문에 성전이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였던 것과 같이, 새 언약 아래서는 신자들이 성령의 전이므로 그들이 거룩해졌기 때문이다(고전 6:19-20).

3. 특별한 문제들

교회론에 관한 서론을 다룸에 있어서 특별히 주목해애 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슈가 있다.
(1)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분명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후, 곧바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천국(하늘나라) 열쇠를 네게 주리라”(마 16:18-19).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임을 추론할 수 있다.
조지 래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굳이 비교하여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역(realm), 즉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교회는 그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 공동체라는 것이다. 래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요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2)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3)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4)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5)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리인이다.

(2) 교회와 이스라엘
두 번째 특별한 이슈는 이스라엘괴 교회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또 하나의 이슈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어떤 개혁 신학자들은 문자적 이스라엘이 교회 혹은 영적 이스라엘에 의해 실제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문자적 이스라엘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더 이상 성취될 것이 없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이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탁월한 위치로 회복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루시는, 영원히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간주한다. 구러나 래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문제에 있어서의 진실은 -다른 많은 문제들에서도 그렇듯이- 그러한 양 극단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먼저, 문자적 이스라엘이 여라 가지 면에서 영적 이스라엘로 대체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로마서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라고 썼으며(롬 2;28-29), 갈라디라서에서도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니라”라고 썼다(갈 3:29). 이밖의 관련 구절들로는 로마서 4;11,16,18과 9:7-8을 들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에서 문자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어떤 약속들을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이 점유하엿던 위치를 새 언약에서는 교회가 점유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역사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교회를 통해 역사한다. 굴나 이스라엘에게는 다가올 특별한 미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대대적으로 회심하고 교회에 들어오리라는 것이다.

(3)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세번째 이슈는 가견적(可見的) 교회(혹은 유형 교회)와 불가견적(不可見的) 교회(혹은 무형 교회)간의 관계이다. 이러한 구분은 어거스틴 때부터 나타나기는 했으나, 마틴 루터에 의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발표되었으며, 또한 존 칼빈에 의해 그의 신학에서 구체화되었다.
루터는 이러한 구분을 통해, 성경에서 펼쳐 보여주고 있는 교회의 특질들과 경험적 교회, 즉 지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교회의 튻ㅇ들 간에 뚜렷한 불일치를 설명하였다. 그는 참 교회란 오로지 의롭다고 칭함받은 사람들, 즉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들로만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의 구분-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을 검토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구분이 지역 교회와 보편적 교회의 구분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참 교회가 현존하는 지상의 제도와 과연 어느 정도까지 동일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가견적 교회의 일원이 먼저 되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하는 측은 주로 카토릭 교회이며 전통을 중시하는 기독교회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과연 제도적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과 개인적/영적 체험 중 과연 어느 것이 상대편을 정당화하는가?
참 교회의 주요한 표지는 바로 사도성(apostolicity)에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도들에게 그와 같은 전폭적인 특권을 주셨다. 따라서 참 교회는 어떤 특정한 계보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건물을 꾸미고 나서 스스로 교회라 칭했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정식 제도와 적절한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결코 교회가 아니며 그들 개개인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결국 교회란 신약성경에 있는 교회상 까지 소급되어 연결될 때 비로소 하나의 교회로 인정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이 신앙을 전제로 하고 가견적 교회보다 불가견적인 교가 우선인 것 처럼 보이나 가견적 교회가 결코 무식되어서는 안된다. 신자가 된 후 그 사람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분명히 표준적인 절차였다. 그러므로 신자는 곧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며 철저히 헌신해야 한다. 기독교적인 삶은 오직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관계를 가질 때에만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신자는 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일치성을 가져야 한다.

(4)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교회는 과연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루이스 벌코프는 족장시대와 모세 시대에 이미 교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교회에 관해 오직 두 차례(마 16:18;18:17) 언급하셨는, 그 중 첫번째 언급에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미래시제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누가가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교회’(에클레시아)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다가 사도행전에 이르러서는 24회나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의미0심장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형태를 취하였으나 신약에 이르러서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 교회라는 범주에
속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결국 그 이전 시대의 신자까지 포함하게 된다. 즉 교회가 이스라엘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교회안에 포함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진실로 하나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몸 또한 진실로 하나이다.

4. 함축된 내용들

(1) 교회는 일차적으로 어떤 사회학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 생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그것이 활동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규정되어서는 안되며, 오하려 성경으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2)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존재한다. 또한 그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주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3) 교회는 주님의 임재와 사역이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4) 교회는 자신들의 주님의 영적 특질들을 드러내는 중생한 신자들이 모인 단체이어야 한다.
(5) 비록 교회는 신적 창조물이기는 해도,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 때 까지는 그것이 완전한 성화 혹은 영화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2. 교회의 역활

1. 교회의 기능
(1) 전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에 관한,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의, 기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강조된 한 가지 주제는 바러 전도이다. 마태복음 28:19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로 하셨으며, 사도행전 1:8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에의 부르심은 일종의 명령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 제자들은 그의 법에 복종하고 그가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모든 권세를 받으신 후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 이처럼 그들은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전도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 것이며 그 결과로 너희는 권능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권능을 받았고 또한 그 과업을 수행할 수 잇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만 보내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그들로부터 떠나셔야만 했으나, 영적으로는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마 28:20).

(2) 건덕(建德)
교회의 두 번째 주요한 기능은 신자들의 덕을 새우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전도에 더 큰 강조점을 두셨으나, 논리적으로는 신자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다. 건덕은 우리의 말을 포함한 모든 활동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자못 크다고 하겠다:“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여기서 건덕이란 그 몸의 모든 지체들이 서로 덕을 세우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다른 지체들에게 덕을 새우는 것은 단지 목사나 교역자의 일이 아닌 것이다. ‘코이노니아’란 말 자체가 “모든 것을 공동 으로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서로 고통을 함께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할 때 건덕이 드러나게 된다.

(3) 예배
교회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기능은 바로 예배이다. 건적이 신자들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고 또 그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인 반면, 예배는 주님께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이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히 10:25).
성경시대에 교회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교육을 한 후 나가서 전하였다. 예배에서는,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님께 집중하며; 교육과 교제에서는, 자기 자신과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전도에서는 그들의 주의를 불신자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사회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궁핍이나 고통, 혹은 불의가 발견되는 모든 곳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행동을 취해야 한다. 과거에, 교회가 흥황했던 이유는 곧 교회의 사회 참여 때문이다. 병원, 학교 등이 교회로 인해 설립되었던 시절에 교회의 역활은 정부 이상갈 때가 많았다.

2. 교회 사역의 핵심: 복음

이제 여기서는 교회가 행하는 모든 활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유일한 요인인 복음에 대해 관찰할 필요가 있다.
교회 사역은 그 어떤 것보다 복음-기쁜 소식-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시초부터 선언하시기를,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특별히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기쁜 소식을 신자들에게 위탁하셨는데, 그것은 그가 처음부터 행하신 자신의 모든 가르침과 설교를 특징짓는 것이었다.
구약에서 복음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용어로 ‘바사르’(רשׁב)가 있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을 선포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음과 관련된 헬라어 ‘유앙겔리죠마이’(εύαγγέλιζομαι)와 ‘유앙겔리온’(εύαγγέλιον)은 모두 ‘유’(εύ) 라는 접두어로 말미암아, 항상 불변적으로 좋은 소식을 나타낸다.
복음은 과거와 미래, 그 어느 때나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한 길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 복음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복음이 변질될 때, 교회의 생명력은 상실되고 결국 교회는 죽게 된다.

3. 교회의 특성

우리는 교회의 역활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그 기능들에 대해 살펴 보아야 한다.

(1) 자발적인 섬김
예수께서는 그가 이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성육신하시기 위해서 그는 종의 형체를 취하셧다(빌 2:7).“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8절). 교회는 이와같이 자발적인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그 자신이 높임을 받고 그 자체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주님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두셨다. 예수님은 아무 댓가가 없는 천하거나 소외된 대상을 가까이 하셨다. 진정한 교회의 표본은 그 사역을 위하여,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교회일 것이다.

(2) 적응성
또한 교회는 그것이 보는바 세상의 변화하는 상황에 발맞추어 그 자신의 방법들과 절차들을 조절하는 데 유연성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지리적 혹은 문화적 변화를 의미한다 할지라도, 곤핍한 사람들이 발견되는 곳이라면, 교회는 어디든지 가야 한다. 교회는 무조건 옛날 방법들만 좇아서는 안된다. 교회가 섬겨야 할 대상인 세상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교회도 그에 따라 자신의 사역을 적응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교회의 기본적인 방향을 변경해서는 안된다.


3. 교회의 정치

교회 연합운동에 대한 강조와 함께, 20세기에 특별히 두드러지게 제기된 문제는 교회의 조직 혹은 교회의 정치에 관한 문제이다.

1. 교회의 정치 형태

(1) 감독정치
감독정치란 감독(bishop,έπισκοπος)에게 권위가 주어지는 교회의 형태이다. 감독정치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가장 단순한 형태의 감독정치는 감리교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 감독은 하나의 등급으로 존재한다. 이보다 다소 발전된 형태가 성공회의 정치구조이며, 반면에 로마 카톨릭은 가장 완벽한 계급제도를 가지고 있다. 카토릭의 경우 최고 성직자인 로마의 감독은 교황에게 속해 있다.
감독제도에는 본질적으로 ‘성직의 수준 혹은 서품의 등급들은 모두 같지 않다’는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 첫번째 등급은 보통 목사 혹은 사제의 등급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러한 첫번째 등급을 또다시 여러 단계들-예를 들면, 집사(deacon)와 장로(elder)- 나눈다. 감독은 교회정치를 시행함에 있어서 열쇠가 되는 중요한 직분이다.

(2) 장로회 정치(Presbyterian)
장로회 정치제도도 물론 어떤 특별한 직분에 일차적인 권위를 둔다. 그러나 개인의 직분자보다는 그 권위를 시행하는 일련의 대의관에 도 큰 강조점을 둔다. 장로회 조직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직분자는 장로로서, 이 지위의 기원은 유대교의 회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 시대의 장로들은 다스리는 역활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에피스코포스(개역성경에 감독으로 번역되었음)는 장로들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장로라는 용어가 통상 복수로 나타나며 이는 장로들의 권위가 개별적이라기 보다는 오하려 집합적인 것임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회중정치(Congrerational)
세 번 째 형태의 교회 정치는 회중 정치로서, 이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역활을 강조하며 지역 회중에게 권위를 두는 정치 제도이다. 회중 정치제도는 자율성과 민주정치라는 두 가지 개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자율성이 의미하는 바는 ‘지역 회중은 독립적이며 자치적’이라는 것이다. 지교회에 행동방침들을 명령할 수 있는 외부의 힘은 전혀 없다. 한편, 민주정치가 의미하는 바는 ‘지역 회중에 속한 모든 회원들은 그 회중의 업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를 소유하고 또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은 바로 지역 회중에 속한 회원들 개개인이다.
이와 같은 회중 정치 형태를 취하는 주요 교파는 침례교, 회중파(이를 ‘조합주의자’라고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루터파이다.
회중정치에서는, 장로회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사의 등급이 오직 하나만 존재할 뿐이다. 이는 초대교회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무교회 정치( Nongovernment)
이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교회 정치를 주창하지 않는다. 퀘이커파나 포리머스 형제단 같은 단체들은 구체적 혹은 가견적 교회의 필요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그들은 실제로 모든 정치 제도를 배제해 왔다. 대신 그들은 성령의 내적 사역을 강조한다. 즉, 성령께서는 어떤 조직이나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신자 개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각 단체들은 가능한 한 체계적인 조직을 배제하는데 일치된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가 우너하시는 것을 확신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의존한다.

2. 오늘날을 위한 교회의 정치 체계

성경의 권위를 고수하는 교회 정치체계를 발전시키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이에 대한 자료의 부족이고 다음에는 교회정치에 대한 단일 패턴이 없다는 점이다.
교회 정치를 성경적으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성경이 교회 정치에 대해 뚜렷한 지침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규정을 정하기 어렵다. 단지 바울이 직분에 대한 자격 요건을 제시한 것 정도를 근거로 교회 정치에 대해 논하는 예가 많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대다수 회원들이 어떤 문제들이나 직분을 맡을 후보자들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모할 수도 있다. 따라서 대의적인 방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선출된 종들은 그들이 전체 몸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훈련받고 능력있는 평신도 지도자가 없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단체에 있어서는, 목사가 일반적인 경우에서보다 더 많은 주도권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계속해서 회중을 가르치고 양육함으로써 그들이 교회의 일들에 점점 더 많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교회의 입문 의식: 세례
1. 세레에 관한 기본적인 견해들
구원을 가져오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세례
세례를 보는 시각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먼저 몇 가지 예를 샇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단체들은 물로 세례를 주는 행위가 세례받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은혜를 전달한다고 믿는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세례를 통한 중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즉 세례에는 세례받는 사람을 영적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변화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로마 카토릭에서 주로 발견된다.
성례중시주의자(sacramentalists)에 따르면, 세례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의 수단이며, 그것은 죄의 사면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그러나 성례가 세례받는 사람들의 영혼에 어떤 영적인 알맹이를 물리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약의 표시와 인(印)침으로서의 세례
정통적인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입장은 언약의 개념과 밀점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성례들-세례는 그중의 하나이다-을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아니며, 또한 은혜를 전달하는 어떤 고유한 내용들이 그 의식 자체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할례처럼 세례는 언약에의 보증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인 언약이 칭의와 구원의 기초이며 근원인 반면, 세례는 우리를 그 언약 안으로 옮겨져 그 유익들을 경험하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구원의 상징으로서의 세례
세례의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다(마 28:19-20).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다. 세례의 행위가 어떠한 직접적인 영적 유익이나 축복도 전달해 주지 않는다. 다만 신자로서의 객관성을 지니게 되므로 지교회의 회원이 되어 그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2. 문제의 해결
세례의 의미
세례가 중생의 수단 혹은 구원의 필수요소인가?
이러한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구원은 믿음과 관련되는 문제이지 세례와 별개의 요소이다. 마가복음 16:16에서 “믿고 세레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구원은 믿음에서 비롯되며 세례는 그 증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귀절은 몇몇 사본에 나와 있지 않다.
요한복음 3;5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 말에서 물이 곧 세례를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서 물은 정결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베드로전서 3;21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하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숙고해 보자.
이 구절에서 세례가 구원에 어떤 효과가 있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 즉 그분께 의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신앙의 행위일 때만 그러한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회개와 세례를 함께 연결시키는 구절이 있다(행 2:37-8). 여기서도 먼저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세례의 대상
세례의 대상을 논함에 있어서 유아세례 문제는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다. 재세례파와 같이 유아세례를 거부해 온 자들이 이단시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들의 세례가 옳은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서도 유아세례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세례란 성인들 즉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 때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유아세례 지지자들은 예수님들이 어린아이들에게 기도하신 장면을 들고 있다(마 19:13-15;막 10:13-16;눅 18:15-17). 이들이 과연 주님으로부터 세례받기 위해 데려와졌는가.
결과적으로 유아세례에 대한 논거는 세례가 구원받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견해나 혹은 세례가, 구약성경의 할례와 마찬가지로, 언약 안으로 들어왔다는 표시이자 인침이라는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세례의 형식
세례의 형식은 어떤 것인가? 특히 ‘밥티죠’(βατιζω)의 의미가 “물에 담그다 혹은 물 아래 가라앉히다”라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심지어 마틴 루터와 존 칼빈조차도 침례가 그 용어의 기본적인 의미이며 초대교회에서 시행된 세례의 원래 형식이라고 인정하였다. 실제로 성경의 세례는 거의 모두 침례였다. 밥티죠라는 말은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다시 물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이다.

5. 교회의 계속적 의식: 성만찬
1. 일치점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하셨다. 또한 반복이 필요함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예수께서 “이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 속에 내포하고 있다. 떡과 포도주가 단순한 상징 이상의 이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다.
성만찬의 보다 큰 의미는 선포에 있다. 또한 참여자에게 영적 유익을 주게 된다. 성만찬의 참여 자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제한하는 것이 통례이다.
2. 불일치점
그리스도의 임재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이다.
2) 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를 포함하고 있다.
3) 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4)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성만찬 의식의 효력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르다.
첫 번째, 성만찬이 참여자에게 실재로 은혜를 전달한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 성만찬이 참여자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접촉을 돕는다는 견해이다. 즉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와 유익을 말한다.
세 번째, 성만찬이 단지 주님께서 임재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진리를 상기시키는 역활 뿐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은 마치 깊은 의미를 주는 설교와 같은 것이다. 듣는 자에 따라 은혜가 다르듯이 성만찬 역시 대상에 따라 받는 의미가 다르다.
성만찬의 집례자의 자격에 제한을 두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카토릭의 경우 사제만이 성체배령을 할 수 있다.
적절한 수찬자는 누구인가. 반드시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며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제외된다. 수찬자는 그 몸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신자라야 한다.
올바르게 시행되는 성만찬은 신자로 하여금 주닌의 죽으심의 경이로움과, 그를 믿는 자들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함으로써 신자의 신앙과 사랑을 고무시키는 수단인 것이다.

6. 교회의 통일성
1.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근거
교회가 통일성을 추구해야만 하는 이유들 중에 교회가 반드시 하나이어야 하며, 실제로 하나이며, 또한 하나가 될 것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교훈적인 구절들이 신약성경에 있다. 아마도 가장 설득력있는 구절은 소위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 또한 하나되게 하신다. 신자들 사이의 통일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세계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예배의 대상도 하나님 한 분이시다. 따라서 교회는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2. 통일성의 본질에 관한 개념들
영적으로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순수성과 생활의 순결성이 따라야 한다. 또한 상호 인정과 교제가 있어야 한다.
성경은 신자에게 화목을 요구한다. 바로 화해적 통일성이 따라야 한다.
끝으로, 교회의 통일성은 실제로 단릴 기구를 창설하여 독립된 여러 교파들을 그안에 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교회의 회원과 성직 임명을 사로 공유한다.

3.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와 현재의 상태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sm, 이것을 교회일치운동 혹은 교회연합운동이라고도 한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18,19세기에 있었던 부흥 운동은 교파를 초월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확실한 기본적인 진리들에 관해 일치하지 않는 한 협동은 불가능하다고 항상 주장해 왔다. 신앙의 연합은 그 주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만 한다. 따라서 인위적 연합은 자칫 하나님과의 관계를 애매하게 할 수 있다.
4.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신학적인 부분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실천에의 근거로서 성경의 최고 권위; 그의 대속적 죽음 및 육체 부활을 포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중생과 칭의의 초자연적 사역으로서의 구원; 그리스도의 재림. 복음주의자들이 볼 때, 에큐메니칼 운동은 협력을 위한 신학적 기초에 관하여 종종 최저 수준의 공통 요소만을 가지고 있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은 교회론에 있어서 분명한 공통점이 있는 단체들과 연합 운동을 펴게 될 것이다.

5. 교회의 토일성을 위한 행동 지침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 신자들의 영적 통일성은 서로에 대한 호의, 교제, 그리고 사랑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3)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할 때마다 함께 사역해야 한다.
(4) 협동의 교리적 기초와 목표들을 신중하게 서술하는 것은 중요하다.
(5) 우리는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어떠한 통합에 대해서도 경계해야만 한다.
(6) 그리스도이들은 경솔하게 그들의 모(母) 교파(혹은 교단)을 떠나서는 안된다.
(7) 그리스도인들은 분리와 분열이 인간적인 갈등이나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확신과 원칙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8)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아니면 교파(혹은 교단)적으로든, 그리스도인드링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 상대방을 논쟁하거나 비웃지 말고 오히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진리로 서로를 바로 잡아주며 상대방을 납득시켜려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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