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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5 04:50

사도신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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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첫째주
제1과
사도신경이란 무엇인가?

읽을 말씀:마태복음 16:13-20
외울 말씀:“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찬 송:94장,399장
학습목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는 사람은 소속이 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싸움에 나갈 수 있는 군사를 계수할 때 무엇보다도“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중에서 계수하라(민1:2)고 하셨다. 이번 학기에는 사도신경을 배우면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신앙을 서로 확인하고 일꾼으로 헌신하도록 하자.

학 습 준 비
신조 혹은 신경이란 말은“내가 믿는다”“신앙의 규범”이란 뜻이다. 대개 교회가 믿는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세례 준비를 위한 교육용으로, 그리고 신학 논쟁의 결과 여러가지 신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도신경 외에도 니케아신조나 아다나시우스신조와 같은 고대 신조와 희랍 정교회의 7가지 신조, 로마 카톨릭의 몇가지 결의문,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루터교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고백(1530-31)과 합의신조(1577), 칼빈이 만든 제네바 교리문답(155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8)등이 있다.
이중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도들의 시대부터 교회내에 널리 신봉되었던 신경이라는 뜻이다. 그 내용도 일정하지 않고 길고 짧다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형태로 완성 된 것은 6세기 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 습 내 용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된 일꾼을 찾으십니다. 준비된 일꾼이란 신자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성경적 지식도 갖추고, 일꾼으로서 합당한 지도력도 갖추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바른 신앙관을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래 전부터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바른 신앙관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가지 즉 주기도문과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암송하도록 했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표준이요, 십계명은 성도 행실의 표준이요, 사도신경은 성도 신앙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1. 신조란 무엇인가?

신앙이란“나”라는 사람이 어떤 대상 즉 신이나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조란 이 믿음의 내용을 조목 조목 정리한 것을 말합니다. 즉 내가 무엇을 믿는가?어떻게 믿는가?하는 것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것을 신조 혹은 신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하나님을 믿는다”“예수님을 믿는다” 혹은“성경을 믿는다”고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성경의 내용이 무엇인데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만 할 말을 잊게 됩니다.
특히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나 교회와 교회, 성도와 성도가 만났을 때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확인하기 위해서도 신조는 신앙의 지침으로서 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신경이란 사도들이 만든 신앙고백이란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도 시대부터 교회내에서 널리 믿고 있던 신앙의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근원을 마태복음 16:16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같이 성경을 찾아 읽어 봅시다.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우리는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신조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동의 유일한 법칙이요 신조는 이 성경을 토대로 해서 사람이 가지는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변함이 없으나 신조는 개정될 수도 있고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흔히 믿는다는 말을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씁니다. 내가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이 있고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지구가 둥글다거나 달에는 풀이 없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사람에 대해서도 쓰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믿고 남편은 아내를 믿고 삽니다. 친구를 믿고 이웃을 믿고 삽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 믿을 만할 때 그의 말도 믿습니다. 경찰서에 잡혀온 도둑이“정말 나는 훔친 것이 이것 밖에 없단 말이에요” 해도 경찰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이“내일은 학교에 오지 말아라” 하실 때 그 말을 의심할 학생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우리는 흔히 보편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말이지요. 이런 믿음 말고 또 다른 믿음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믿음입니다. 보편적인 믿음은 잘 못되어도 약간의 손실이 있지만 종교적 차원의 신앙적인 믿음은 죽고 사는 문제요 영생과 직접 관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9:10-11를 다같이 읽어 봅시다. 신앙적인 믿음이란 누구를 믿는 것이며 또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3. 사도신경의 구조

사도신경은 모두 열두 조항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매주 한 조항씩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맨 앞에 나온 사도신경을 펴 보십시요. 그리고 열두 조항을 분류해 봅시다. 만약 어려우면 구역공과의 목차를 참조하면 됩니다.
맨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2-7조항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8조항은 성령에 대해서, 9조항은 교회에 대해서, 10조항은 죄 사함에 대해서, 11조항은 몸의 부활에 대해, 마지막 12조항은 영생에 대한 고백입니다.
앞으로 한 학기동안 사도신경을 배우면서 지금까지 믿어온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 과연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 확인하면서 주님의 일꾼으로 준비되시기 바랍니다.



1월 둘째주
제 2 과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읽을 말씀:히브리서 11:1-6
외울 말씀:“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찬 송:9장,433장

학 습 목 표
기독교인은 분명한 신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타 종교도 나름대로의 신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막연한 하늘님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란 사실이다. 오늘 공과를 통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관을 확립하도록 하자.

학 습 준 비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처럼 증명이 필요치 않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일축한다(시 14:1, 53:1). 무엇이든지“없다”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없음”을 증명하기 전에는 차라리“모른다”는 편이 정직한 말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 오히려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요 20:26-29).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보지 못했지만 믿는다. 날씨가 따뜻한 것은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믿는 것이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눈에 보여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학 습 내 용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데서 출발합니다.“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신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사도신경의 맨 처음 조항은 이렇게 시작합니다.“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1.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이 그저 우리와 크게 다를바 없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도 하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또 @이런 문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별의 수효를 다 세시고 별들의 이름을 다 부르십니다(시 147:4).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수효를 다 세시고 그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다 아십니다. 시편 139:2-4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그뿐 아닙니다.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도 아십니다(출 3:7).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아십니다(마 6:32). 내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체질도 아시고 진토같은 사람임을 아십니다(시 103:14).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아십니다(창 22:12).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며(시 139:7-10),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창 17:1). 그러므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풀무불이나 사자굴 속에서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어떤 질병에서도 고치실 수 있으시며(출 15:26), 절망의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끌어 올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시 40:2).

2.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

성경의 맨 처음은“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천지가 우연히 생겨났고 진화의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증명해 보려고 하지만 부질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이 신비스러운 우주를 누가 만들었을까@@를 연구해 보는 편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대개 일반적인 종교에서는 신을 단순히 소원성취나 해주는 분이나 인과응보의 주관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거역하면 벌을 받고 신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해와 달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새와 물고기를 만드신 분입니다. 풀과 나무를 만드신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시편 139:14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지으셨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뜻을 알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 나를 지으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지 알아야 합니다.

3.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라 해도 그 분이 나와 상관 없는 분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그런데 그 분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로마서 8:16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누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공의의 아버지이십니다.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언제나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한번 하신 약속은 결코 어기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 우리를 위해 아들까지 보내주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로 믿을 수 있습니까?그렇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근심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항상 담대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월 셋째주
제 3 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읽을 말씀:요한복음 1:9-14
외울 말씀:“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찬 송:82장,94장

학 습 목 표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기독론에 대한 논쟁의 역사였다. 또한 수 많은 이단 역시 기독론으로 인해 생겨났음도 잘 아는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를“그리스도의 일꾼”(고전 4:1) 이요“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딤후 2:3) 라고 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의 대장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21세기를 위해 준비된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관을 확립하자.

학 습 준 비
예수가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쓸데 없는 논쟁이 오래 계속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일 수 있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좀 쉽게 생각해 보자. 호랑이의 아들은 역시 호랑이지 토끼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호랑이의 아들이 호랑이의 아버지가 아니듯이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은 아니다. 예수님도“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셨고“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하셨지“내가 곧 아버지이다” 라고 하신 일은 없다.
”아들”이란 말을 사람이나 어떤 피조물의 경우에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분 또한 영원하신 분이신 것이다.“아들”(마 3:17) 혹은“나셨다”(골 1:15) 라는 말은 유한한 피조물처럼“출생”의 의미라기 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관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두번째 고백은 베드로의 첫 신앙고백(마 16:16)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여기서는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그리고 성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요 20:31)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성인 혹은 성자로는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나(마 16:16) 마르다(요 11:27)뿐 아닙니다.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사실주의자 도마도“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라고 고백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처형한 사형집행관인 백부장까지도 두려워 떨며“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물론 이보다 먼저 하나님께서“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자”(마 3:17)라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 스스로“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셨습니다(요 10:30).또 요한복음 14:9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졸랐을 때 주님이 무어라 하셨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한 인간에 불과한 사람으로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그분은 성자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착각속에 살던 미치광이거나 2천년 동안 많은 사람을 속여온 거짓말장이요 사기꾼일 것입니다. 우리는 양자 택일을 해야합니다. 그가 미치광이라고 일축하거나 그의발 앞에 엎드려“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는 우리 주 되심을 믿는다.

”주”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아내가 남편에게도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주가 되신다는 말은 우리 주인이시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창조주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셨습니다. 로마서 11:36을 읽어보십시요. 사람이 어디서 왔습니까?사람이 누구로 말미암아 삽니까?사람이 어디로 갑니까?
또한 예수님은 구주요 심판주이십니다. 우리는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엡 2:1). 이렇게 죽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구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눅 2:11).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 1:21) 하신 것은 이 분이 백성들을 죄에서 건질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3.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직분상의 이름입니다. 다른 말로는“메시아”라고 하는데 모두 다“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왕이요,선지자요,제사장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민족을 포로와 압제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이제 그 메시야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수가그리스도 즉 메시야인줄 믿지 못하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워야합니다. 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왕되심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왕의 명령은 어명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28:18-20을 읽어 보십시요. 왕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어명이 무엇입니까?


1월 넷째주
제 4 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읽을 말씀:마태복음 1:18-25
외울 말씀:“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 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찬 송:112장,122장

학 습 목 표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기독론에 대한 논쟁의 역사였다면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논쟁이었다. 더구나 과학을 절대시 하는 현대인들에게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신화도 아니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맹신도 아니다. 성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하셔야 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 안에는 인류를 구속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학 습 준 비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①이것은 과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느냐는 것이다. ②역사적으로 과거 어느 때도 이런 예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마태복음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인 이사야 7:14의“처녀”는 여자 혹은 숙녀를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물론“처녀”라고 번역한 히브리어“알마”가 현대어에서는 단순히 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2,300년전 히브리어 원전을 근거로 하여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은 분명히“처녀”(파르테노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은 현재“알마”가 단순한 여자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고대에는“처녀”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도 성령께서는“처녀”라고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그렇다 치고 마리아의 반문(눅 1:34)이나 요셉이 고민(마 1:19-20)을 한 이유만 생각해 보아도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음이 분명하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세번째 조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외아들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에 오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임을 믿는다.

남자 없이 여자가 아기를 낳을 수 없고 또 여자 없이 남자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자가 없이 태어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잉태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35을 찾아 함께 읽어봅시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 될 것이라 하셨습니까?
마리아와 정혼한 남편인 요셉도 이 사실을 믿었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각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동정녀의 몸에서 아기를 잉태케하시는 그 능력도 믿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나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다만 이 땅에 내려오시기 위해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의 눈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신앙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구태여 성령으로 잉태하셔야 했을까요?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자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을 찾아 오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남자를 통해 태어나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결혼하여 남자를 알기 이전에 출생했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 13:55) 하였으니까요.
또한 죄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고 탄생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의 몸을 통해 태어나게 되면 죄인의 혈통을 피할 수 없게 되고 죄인으로 출생하니 남을 구원할 구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 분이 성자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죄 없이 오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것을 믿는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혼은 우리나라의 약혼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고 한 집에 살지 않았을 뿐이지 부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사실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18에“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34을 읽어봅시다. 마리아는 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까?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숭배하다보니 억지 주장까지합니다.“마리아는 부모에게서 무죄 잉태되어 원죄의 유전을 받지 않았고, 일평생 남자를 알지 않은 동정녀로 지냈으며, 죽은 후에는 부활 승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가지는 다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마리아는 그 후 요셉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따라서 예수님에게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와 같은 육신의 동생들이 었습니다(마 13:55, 막 6:3).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태어나고, 자라시고, 고생을 하시며, 굶주림도, 피곤함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하지 않고 하늘에서 직접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그 분의 신성은 증명되겠지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우리의 구주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2월 첫째주
제 5 과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

읽을 말씀:누가복음 24:25-27
외울 말씀:“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 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찬 송:135장,144장

학 습 목 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잘 살기를 갈망한다. 이처럼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죽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마 21:28). 우리가 고침을 받고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의 죽으심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 공과를 통해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고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 하겠다(마 16:24).

학 습 준 비
십자가의 형틀은 고대 중동과 로마제국에서 주로 사용하던 처형 방법이었다. 3세기 말 콘스탄틴이 법으로 금지시키기 전까지 흉악한 노예, 반역자, 살인강도 등 죄가 무거운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공개 처형을 해 왔다. 십자가는 보통 세가지 형태가 있었다고 한다. ×자형(성 안드레 십자가), T자형(성 안토니우스 십자가), 十자형으로 되어 있었다. 십자가의 형벌은 가장 부끄러운 형벌이었고 십자가에 죽는 사람은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신 후 십자가는 평화의 상징으로 변했다. 그래서 적십자와 녹십자를 비롯해서 세계 13개국 이상의 국기에 십자가를 그려 넣고 있는 것이다.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架上七言)을 찾아보자.①눅 23:34 ②눅 23:43 ③요 19:26-27 ④마 27:46, 막 15:34 ⑤요 19:28 ⑥요 19:30 ⑦눅 23:46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네번째 조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고백 다음에 예수님의 생애나 교훈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고백할 만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고난 받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의 생애를 사셨음을 믿는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이름외에 빌라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년부터 10년간 유대지방을 다스렸던 로마 총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이 잡혀온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처형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의보다는 타협을 택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의원들, 그리고 수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사형을 요구하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만 것입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아야 자신의 총독직도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손을 씻으면서“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나는 무죄하다”고 했지만 지금도 수억의 사람들은“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 길은 이미 이사야 53장이나 시편 22편등에 예언된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절을 보면 예수님은 목숨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스스로 버리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대신 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4-5을 한 번 읽어봅시다. 그리고“우리” 라는 말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고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간 죄로 발에 못을 박히셨고, 우리가 손으로 지은 죄 때문에 손에 못을 박히셨습니다.
또한 제자된 우리의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베드로전서 2:21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2.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을 믿는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의 부활과 함께 사도신경에서 예수님께 대한 고백중 가장 중요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은 가장 수치스런 죽음이요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죽음이었습니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끝에 뼈와 납조각이 달린 가죽 채찍으로 수없이 맞으신 예수님은 아픈 몸으로 60kg이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처형장까지 메고 가셔야 했습니다.
살이 찟기는 아픔, 피를 말리는 뜨거운 날씨, 타는듯한 목마름,덤벼드는 파리떼도 고통스러웠지만구경꾼들의 비방과 욕설은 고통을 더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기는 수치도 참으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하는 법은 매달아 굶겨 죽이는 법도 있었지만 손과 발에 못박아 죽이는 것은 가장 고통스런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 없는 죽으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의 아내가 증언했고(마 27:19) 빌라도도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습니다(요 18:38,19:6). 그 분의 죽으심은 그 분의 죄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은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가 있을 때마다 소나 양같은 짐승을 잡아 속죄제로 드렸습니다. 자신들의 죄 대신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18-19을 찾아 읽어봅시다. 우리가 구속된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걸어가신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2월 둘째주
제 6 과
예수님의 부활하심

읽을 말씀:누가복음 24:1-12
외울 말씀:“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 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찬 송:93장,159장

학 습 목 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그의 죽으심과 함께 기독교의 중심사상이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인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다.

학 습 준 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①기절설: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②다른 무덤설:새벽에 마리아가 길을 잘못들어 다른 빈 무덤을 보고 오해했다는 것이다. ③도난설:밤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후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④환상설: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본 여인들과 제자들이 실제인양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 변명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이런 학설을 증명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다섯번째 조항은 예수님의 장사지내심과 부활하심으로 되어 있습니다.“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기독교가 탄생되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에 제자들이 나가 전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교훈이 아니었습니다.“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살리셨고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이 죽어 장사되셨음을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4복음서 모두가 한결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영혼이 떠나가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은“운명하시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도“운명하시다”라고 하였고 요한복음에는“영혼이 돌아가시니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절하신 것이 아니요 죽는척 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보통 3일장이니 5일장이니 하는 풍습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24시간 전에 장례식을 끝냅니다. 기후가 무덥고 습해서 시체가 쉽게 부패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불과 서너시간 전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장례를 치르치 않으면 독수리나 까마귀, 들개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공회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이 가까운 곳에 새 무덤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안식일 전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다고 해서 완전히 죽지 않은 사람을 장사하도록 내어줄리 없고 완전히 죽지 않은 사람을 장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9:38-39을 읽어 보십시요. 예수님을 장사지낸 사람은 누구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장사까지 치뤘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되셨다는 말은 완전히 죽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소망이 다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다.

죽음이 절망과 낙심을 가져왔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글로바와 또 한명의 제자는 예수님이 죽으시자 낙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갔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순간 새 힘을 얻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눅 24:13-35).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막아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돌 문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군병들이 무덤을 지켰지만 막을 수 없었습니다. 군병들에게 돈을 주어 입을 막으려 했지만 돈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권력도 대제사장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8:6을 찾아 읽어보십시요. 죽은 예수님을 찾으러 왔던 여인들에게 천사는 무어라 말했습니까?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왜 그리 중요할까요?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죽어도 살고 죽어야 사는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신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하셨습니다.
둘째,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부활이 없다면 죽으심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신자 부활의 예표입니다.“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을 찾아 읽어보십시요.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무엇이 되셨습니까?
넷째,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희망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절망과 실의에 빠졌으나 부활의 소식을 듣는 순간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솟아 올랐습니다. 그들은 더이상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뛰쳐 나가 담대히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가 막을 수도 없고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역사적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임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2월 셋째주
제 7 과
예수님의 승천하심

읽을 말씀:사도행전 1:6-11
외울 말씀:“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마가복음 16:19
찬 송:234장,101장

학 습 목 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 분의 인성을 나타내지만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명하고 있다. 승천하신 주님은 아주 먼 하늘나라에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을 길러야 하겠다.

학 습 준 비
구약성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사람이 있었다.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가 그 사람들이다. 그런데 에녹은 승천이란 말을 쓰지 않고“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다. 승천이란 곧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오르사” 에서 하늘은“장소”라는 뜻의 공간적 의미의 하늘보다는“하나님이 계신곳” 이라는 뜻의 차원적 의미의 하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를 여행하고 다녀와서“아무리 찾아 보아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여섯번째 조항은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고백하는 것으로“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셨음을 믿는다.

부활은 무덤을 지키던 몇몇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승천은 다릅니다.“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라고 했습니다. 수 백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이야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어도 죽은 분이 살아있는 것을 보면 믿을 수 있지만 승천은 그 광경을 직접 본 증인이 없으면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도 승천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1950년 11월 1일 당시 교황 비오12세가 마리아 승천 교리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도 마리아의 승천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증인을 찾을 수 없으니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새로운 사역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셨을 때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갈릴리에 계시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에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들어오실 수 있으셨지만 열명의 제자들이있던 곳과 도마가 있던 곳에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심으로써“함께 계시다”는 개념에 변화가 왔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승천하신 예수님이 언제까지 누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2.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믿는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처럼 몸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그러므로 하늘나라에 하나님의 의자가 있고 그 오른쪽에 예수님의 의자가 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22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누가 순복합니까?시편에만도 오른손이란 말이 30여회 사용되었지만 성경은 오른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오른편은 존귀와 위엄과 영광의 자리요, 축복과 능력의 자리요, 권력과 지배의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본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시기 이전의 자리로 복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첫째, 성도를 위해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며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아니라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누구나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계신 것입니다(히 7:25).
둘째, 성도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마 28:18)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권세를 가지시고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엡 2:21-22).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그 오른 손에는 일곱 별(즉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즉 교회) 사이를 운행하고 계십니다(계 2:1). 교회가 주님의 뜻대로 서나갈 때 칭찬하시고 주님의 뜻을 저버릴 때는 책망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권세를 누리면서 편히 쉬고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우편에서 분연히 일어나 계셨습니다(행 7:55-56). 승천하신 주님은 언제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험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롬 8:31-39) 담대히 주님을 섬기며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믿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2월 넷째주
제 8 과
예수님의 재림하심

읽을 말씀:마태복음 24:29-51
외울 말씀:“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 24:44
찬 송:167장,163장

학 습 목 표
최근들어 성도들을 가장 혼란속에 빠뜨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신앙을 가르치는 이단들의 주장은 그렇다 치고, 건전한 교회들이나 신학자, 목회자들까지도 각자 다양한 재림 신앙을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우리 개혁주의 재림신앙을 바로 배우고 깨달아 21세기의 준비된 일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겠다.

학 습 준 비
”저리로써”란 무슨 뜻인가?이 말은“저곳에서”“저곳으로부터”의 뜻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니“하나님 보좌의 우편에서” 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곳은 어떤 공간적 장소라기보다는 존귀와 권세와 축복의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오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심판의 자격을 가지고 오시는데 그 심판의 자격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밝혀주는 말인 것이다.

학 습 내 용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중 가장 관심이 있으면서도 혼란을 가져오는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입니다. 탄생이나 죽으심, 부활, 승천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래서 장차 이루어 질 일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호기심도 많고 각자의 해석과 주장도 다양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도신경의 일곱번째 조항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이미 2천년 전에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부활 승천 하셔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본 그대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1/25에 해당하는 318절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으로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재림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언제 오실까?이것은 지난 2천년간 수 많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풀어보려고 노력해온 문제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예언과 예측도 다 빗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안하시면 우리도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죽을 날을 아는 것이 좋지 않은 것처럼 주님이 오실 날을 아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늦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3:9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곧 오시마 하신 예수님의 재림이 왜 이렇게 늦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늙고 병이 들면 죽을 날이 임박한 것을 짐작하듯이 하나님은 재림의 징조를 알려주셨습니다.주님이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마 24,25장)가 보일 때마다 깨어 정신차리고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는다.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예수님이 왜 다시 이땅에 오셔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시기 위해 재림하십니다(고후 5:10).“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 16:27)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12-15을 읽어 보십시요. 각 사람의 공력을 무엇으로 시험하실 것입니까?
이때, 충성되고 지혜있는 청지기는 칭찬과 복을 받을 것입니다.하나님이 맡기신 재능, 은사, 기회, 시간, 물질, 직분의 청지기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셈하실 것입니다. 물질을 맡은 사람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확인하실 것입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사람은 상을 주실 것입니다. 온갖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한 사람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단 12:3).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합니다.
①승리한 전사(戰士) 에게는 의의 면류관(딤후 4:8)
②끝까지 달려 승리한 사람에게는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27)
③죽기까지 충성한 사람에게는 생명의 면류관(계 2:10, 약 1:12)
④헌신적인 사역자들에게는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⑤양무리의 본이 된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3-4)
그러나 주님이 더디오신다 하여 사명을 망각하고 사는 청지기는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며(계 19:19-21), 사탄을 결박하고 영원히 심판할 것입니다.
둘째, 왕으로 통치하기 위해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제 그 권세를 행사하기 위해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천년 동안 왕노릇 하실 뿐 아니라(계 20:4) 세세토록 왕노릇 하실 것입니다(계 22:5). 예수님이 다스리실 그 때의 형편을 상상해 보셨습니까?이사야 11:6-9을 찾아 읽어 봅시다.
주님은 속히 오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은 도적 같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날이 오기를 바라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주님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3월 첫째주
제 9 과
성령을 믿사오며

읽을 말씀:요한복음 16:7-13
외울 말씀:“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 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
찬 송:178장,177장

학 습 목 표
우리 한국교회의 성령론은 극단적인 신비주의와 이에 반대하는 극단적인 이성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마치 옛날“신이 내렸다”고 하는 것처럼“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이해하려고 하는 지나친 신비주의나,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체험하지 못한 일은 무조건 배척하고 부인하려 하는 극단적인 이성주의로는 성령의 역사를 믿을 수 없다.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은 바른 신앙의 기초임을 알고 사도신경이 고백하고 있는 성령론의 원리를 깨닫도록 하자.

학 습 준 비
오래전부터 성령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이 성도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①성령은 하나님의 힘이나 능력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분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이시다. 성령은 위로도 하시며(행 9:31)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도 하시고(롬 8:26) 근심하기도 하신다(엡 4:30).②성령은 삼위일체중 가장 낮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1위,2위,3위 하는 것은 권세나 능력의 순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③체험적 역사가 있어야 성령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둘째조항부터 일곱번째까지는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고백은 비교적 간단한 한 마디로 되어있는듯 하지만 넓은 의미로 이해할 때 여덟번째 조항부터 열두번째까지가 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덟번째 신앙고백은“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간단한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말은 성령이 계신 것과 성령의 하시는 일을 믿는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1.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성경은 성령을 가리켜“하나님의 신”(창 1:2),”그리스도의 영”(롬 8:9),”진리의 영”(요 14:17)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거나 하나님의 사자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본체는 한 분이시지만 그 안에 삼위(三位)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즉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성령도 하나님이시지만 이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진리이면서도 많은 공박과 논란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만 믿는다면 믿지 못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전기의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믿고 편리하게 사용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를 낳으셨고 지금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 만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하나님(요 10:30-33), 성령님도 하나님(행 5:3-4) 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명기 6:4을 찾아 읽어보십시요. 하나님은 몇분이라고 하셨습니까?

2. 우리는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천지 만물과, 모든 인류, 그리고 신자에 대한 역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께서는 천지 만물에 대해 역사하십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성령은 함께 일하셨으며(창 1:2, 시 104:30), 만드신 만물을 보존하고 계십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인간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요 16:7-11). 무엇보다도 불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셔서(요 15:26) 믿음의 길에 들어서게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심이 없이는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도 없고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고전 12:3).
셋째,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믿는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도들 안에 항상 계셔서(고전 3:16)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요 14:2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십니다(롬 8:16). 우리가 간구할 때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고(롬 8:26-27), 항상 찬송하며 감사의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권능을 주셔서(행 1:8)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도록 하시고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갖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4-11을 찾아보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살펴 봅시다.

3.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가 악하니 술취해 방탕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 안에는 성령께서 살아 계시지만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이지만 충만을 받는 것은 계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①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요 7:37). 엎어놓은 항아리에는 소나기가 쏟아져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②죄를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행 2:38). ③믿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눅 11:13). 믿음이 없이는 무엇이든 받을 수 없습니다. ④성령충만을 받고 싶은 동기가 옳아야 합니다(약 4:3). 시몬은 성령의 권능을 받으려 했지만 오히려 책망을 받았습니다(행 8:18-24).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갈라디아 5:22-23을 찾아보고 성령의 열매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나에게는 어떤 열매가 열렸는지 살펴봅시다.


3월 둘째주
제 10 과
거룩한 공회와 성도

읽을 말씀:에베소서 2:19-22
외울 말씀:“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 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42
찬 송:245장,278장

학 습 목 표
우리 나라도 여러 선교단체들이 들어와 뿌리를 내리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또 이 교재들을 교회에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교회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도시의 교인들은 점점 개인주의로 빠져가 그저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듣고 헌금만 하면 된다는 생각들이 싹트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바른 교회론을 확립하고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겠다.

학 습 준 비
<거룩한 공회>란 라틴어 sanctam ecclesiam catholicam를 우리 말로 번역한 것인데 영어에서는 Holy Catholic Church로 번역했다. 여기서“카톨릭”이란 말이 천주교회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본래 카톨릭(catholica)이란 말은“보편적””일반적”이란 뜻의 희랍어“카톨리케”를 로마자로 쓴 것이다. 로마 천주교는 자신들이 보편적인 교회라고 카톨릭이란 말을 쓴다. 또 희랍 정교회는 자신들이 보편적인 교회라고 교회 이름을 동방정통교회(東方正統敎會)라고 부른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정통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바른 성례전이 집행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진정한 카톨릭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아홉번째 신조는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말의 사도신경은 애매한 용어의 선택으로 인해 오해를 많이하는 부분입니다.

1.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

”거룩하다”는 말의 희랍어는“하기오스”인데 본 뜻은“갈라낸다”“구별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구별된 날이기 때문에“성일”이라고 합니다. 책의 종이가 달라서“성경”이 아니고, 집 지은 재료가 달라서“성전”이 아닙니다. 구별된 책이 성경이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집이 성전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서 구별된 사람이“성도”요 그 모임이“성회”즉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소금 처럼 맛을 내야지 함께 썩어지면 안됩니다. 교회는 빛을 내야지 함께 어두워지면 안됩니다. 세상이 어두워갈수록 세상이 썩어갈수록 더욱 외로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성도요, 이런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요즘의 교회를 과연 거룩하다고 하겠습니까?교회 안에 좋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비난을 받기도 하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셨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맛을 내기 때문에 소금이 아닙니다. 비취기 때문에 빛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소금이라 하셨고 빛이라 하셨습니다.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엡 2:22)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에베소서 5:29-30을 읽어 보십시요. 우리를 무엇이라 하셨습니까?몸이 거룩하면 그 지체도 거룩한 것입니다.

2. 우리는 공회를 믿는다.

”거룩한 공회”란 말의 영어 번역은“홀리 캐톨릭 쳐치”입니다. 여기서 캐톨릭이란 말은 천주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보편적”“일반적” 이란 말입니다. 즉 모든 인종, 모든 민족, 모든 계급을 망라해서“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러 지역 교회들이 있지만 같은 신앙고백 안에서 같은 성경으로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교회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누가 어디에 세웠건 교회는 개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한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화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요한복음 17:21을 찾아 보십시요. 예수님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남이야 어찌되건 내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모든 지역 교회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고전 12:12) 서로 관용하고 협력하여 그 몸을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

”교통”이란 말은“서로 사귄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교통은 먼저 하나님과 교통(요일 1:3)이 이루어져야 하고, 다음에는 성도들 상호간의 교통(행 2:42)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지만 고립적인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 그들끼리 모여 성도의 교통을 하고 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여러가지 기능과 역할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혼자 교회에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서로 사귀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잘타는 석탄도 한 개를 꺼내 놓으면 꺼지고 장작불 속에는 생나무를 넣어도 활활 타오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함께 모여 예배 시간에 은혜 받고 다 쏟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 끝난 후 끼리끼리 모여 남을 비방하고 곗놀이나 하고 하는 것은 성도의 교통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44-47을 읽어보십시요. 그들은 모여 무엇을 했습니까?
가정도 그렇지만 교회가 화목해야 은혜와 축복이 넘칩니다. 초대교회는 네것 내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롬 12:13)“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히 13:16) 하셨습니다.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고 낙심당하고 환란 중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며 어려운 일, 슬픈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특히 현대는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도의 교통은 더욱 절실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될 때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3월 셋째주
제 11 과
죄를 사하여 주심

읽을 말씀:요한일서 1:1-10
외울 말씀:“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 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 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찬 송:336장,337장

학 습 목 표
기독교는 사죄의 종교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죄의 문제를 다루지만 자신의 죄를 자신이 갚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인과응보(因果應報)니 업보(業報)니 하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또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시다. 이 과에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음을 깨닫게 하자.

학 습 준 비
성경은 무엇을 죄라고 하는가?
①<과녁을 맞추지 못했다>(하말티아) 즉 목표대로 살지 못한 것
②<불법>(아노미아) 즉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어기는 것
③<부채>(호페일레마) 즉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신세 못갚은 것
④<짚고 넘어가다>(페르바시스) 즉 정직과 부정,선과 악을 분명히 긋지 못하는 것
⑤<미끄러지다>(페랍토마) 즉 실수한 것도 죄라고 하셨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열번째 신조는“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라고 하여회개와 사죄의 은총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누구나 죄인임을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교도소만 가지 않으면 죄가 없는 줄 압니다.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보다는 선하게 살았다면서 상대적인 의를 주장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은“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하셨습니다.
죄를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님께 대한 죄와 사람에게 대한 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죄요,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손상을 입힌 것이 죄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가운데 하늘나라를 가보니 천사가 일생동안의 행실을 기록한 큰 책을 가져왔는데 첫 장을 펴니 일생동안 행동으로 지은 죄가 잔글씨로 가득 써 있었답니다. 다음 장을 펴니 더 작은글씨로 가득히 쓰여 있는데 그것은 말로 지은 죄들이었습니다. 셋째 장을 펴니 더 작은 글씨로 빽빽히 써 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지은 죄들이었습니다. 넷째 장을 펼치니 글씨가 보이지 않고 새까맣게 되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천사가“이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님 보실 때 더 크고 작은 죄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사람은 누구나 죄가운데서 태어나 죄와 함께 살다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도 유서의 첫머리에“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썼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1:8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누가“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죄를 사하여 주심을 믿는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리면 죄사함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다 지키면 용서 받는 줄 알았습니다.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그냥 죽어버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그러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아들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 처럼,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예레미야 31:34을 찾아 읽어보십시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또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하였습니다.

3. 우리는 사죄하신 분의 요구가 있음을 믿는다.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할 일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았으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 용서 받은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의 요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하셨습니다.
둘째,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구라파를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은 그가 아끼던 원숭이에게 손가락을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만한 것쯤이야 무슨 죄가 되겠느냐 하지 말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셋째, 죄 용서 받았으니 남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면서 무어라 하셨습니까?마태복음 6:12을 읽고 대답해 보십시요. 예수님은 부언하여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영국의 경건한 문학가인 루이스 스티븐슨은 어느날 가정예배를 드린 후 주기도를 암송하다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도저히 주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었습니다.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죄를 회개하고 죄사해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가는 길 뿐입니다.


3월 넷째주
제 12 과
몸의 부활

읽을 말씀:고린도후서 5:1-10
외울 말씀:“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 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사도행전 24:15)
찬 송:194장,539장

학 습 목 표
기독교는 또한 부활의 종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성도들에게는 부활의 확신을 주었다. 과거의 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현실주의적 신앙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이때 부활의 신앙으로 재무장할 필요가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학 습 준 비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과 몸의 부활은 전혀 다르다. 윤회사상은 중생(생명이 있는 것)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는 사상인데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세계에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하늘의 육도(六道)가 있다고 믿는다. 이 6도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인 업(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이 악업을 쌓으면 축생이나 아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의 모기나 파리도 전생에는 우리 조상 이었을지도 모르니 파리 한 마리도 마음대로 죽일 수 없고 모기가 피를 빨아도 조상님 잡수시라고 팔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열한번째 신조는“몸이 사는 것과”라고 하여 몸의 부활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1.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을 믿는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이건 식물이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에“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거듭 거듭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모세는 노래하기를“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 이라고 하였습니다(시 90:3,10).
이 죽음은 장차 누구나 당할 가장 큰 당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어떤 법칙이 없습니다. 젊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건강한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부자 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일찍 죽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또 이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수가 없고 피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의술이 죽음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현대 과학도 죽음 앞에서는 손을 들었습니다. 재산이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생명보험도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을 위해 돈 몇푼 가져다 줄 뿐입니다. 히브리서 9:27을 찾아 읽어 보십시요.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은 무엇입니까?

2.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그 존재에 종말이 있습니다. 모기나 파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다시 살아나거나 삶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인류도 과학의 힘으로 죽은 생명을 다시 살려보려고 온갖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미이라를 만들고 냉동인간을 만들어 재생시키려 해보았지만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 성경에 몸이 다시 살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라”(사 26:19). 우리가 믿는 것은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입니다. 사람이 죽었다 해도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시편 104:29을 읽어 보십시요. 몸이 흙으로 돌아갈 때 인간의 호흡(즉 생기)는 어디로 갑니까?
죽음이란 함께 있던 몸과 영혼이 서로 떨어져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가고 몸이 썩어 땅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전 12:7). 이것을 예수님은 잔다고 하셨습니다(요 11:11). 영혼이 주님의 품 안에서 쉬기 때문입니다. 몸의 부활이란 이렇게 죽어 티끌로 돌아간 사람의 몸을 다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3. 우리는 부활 뒤에 심판이있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마지막날 다시 살리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무엇보다도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합니다.
이 세상의 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일을 하고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죄를 짓고 형벌이 무서워 스스로 죽음을 택해 심판을 피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반드시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 선악간에 그의 몸이 행한 것을 따라 상과 벌을 받게 될 것(고후 5:10)입니다.
요한계시록 20:12-15을 읽어봅시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사망과 음부까지도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사람들은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따라 어디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만약 우리의 삶이 다만 금생뿐이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무덤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선악간의 심판이 있음을 믿습니다.


3월 다섯째주
제13과
영생


학 습 목 표
바울이 말 한 대로“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소망이 있다. 사도신경을 마치면서 구역식구들에게 분명한 영생의 소망을 심어주자.

학 습 준 비
영생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이 있다. ①각 사람은 후손을 통해 혈통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다. 대가 끊어지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②개인이 훌륭한 업적을 남기면 후세에 영원히 남아 사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우리의 국민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는 생각이다. ③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면 그것이 곧 구원이요 영생이라는 것이다. 영생은 현세에 얻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어떤 생의 상태라는 생각이다.

학 습 내 용
사도신경의 맨 마지막 열두번째 신조는“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로 끝납니다. 즉 사도신경은 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시작하여 영생에 대한 고백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내세나 영생에 대한 사상은 동서고금에 많이 있어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먼 나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능에 배를 만들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황천(黃天) 즉 저승에 간다고 믿고 입이나 주머니에 노자(路資)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영생은 이렇게 희미하고 불투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우리는 영생이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몸을 다시 살리실까요?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수(長壽)가 복이라고 하지만 굴욕과 고통스런 삶은 차라리 저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병들어 아픈 몸으로 영생하는 것이 어찌 복이라고 하겠습니까?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썩지 않는 몸, 영광스런 몸, 강한 몸, 신령한 몸(고전 15:42-44)으로 다시 살리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만일 우리에게 영생이 약속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목표도 없고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삶의 진지함도 없고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요한복음 3:16을 읽고 대답해 보십시요.또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요한복음 20:31을 찾아 읽고 대답해 보십시요.

2. 영생이란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영생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악인들이나 불신자들도 지옥에서 영생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영생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영생이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계 21:3-4). 이것이 곧 영생입니다.
둘째, 영생을 누리는 몸은 부활한 몸이요 영생을 누리는 장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질병과 고통과 근심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처음 하늘, 처음 땅, 바다도 다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한 몸을 입고 들어가 영생을 누릴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1:5을 찾아 보십시요. 보좌에 앉으신 분이 무어라 말씀 하셨습니까?

3.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알아야 한다.

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찾아와“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결국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행위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값진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 해도 믿지 않고 받지 않는 사람은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을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간부터 영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요 6:47).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11:25-26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요. 살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생명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 오늘을 살아가며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1월 둘째주
제 2 과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읽을 말씀:히브리서 11:1-6
외울 말씀:“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찬 송:9장,433장

학 습 목 표
기독교인은 분명한 신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타 종교도 나름대로의 신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막연한 하늘님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란 사실이다. 오늘 공과를 통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관을 확립하도록 하자.

학 습 준 비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처럼 증명이 필요치 않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일축한다(시 14:1, 53:1). 무엇이든지 “없다”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없음”을 증명하기 전에는 차라리 “모른다”는 편이 정직한 말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 오히려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요 20:26-29).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보지 못했지만 믿는다. 날씨가 따뜻한 것은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믿는 것이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눈에 보여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학 습 내 용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신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사도신경의 맨 처음 조항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1.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이 그저 우리와 크게 다를바 없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도 하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또 ‘이런 문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아시는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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