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사상1 / 장창수 선교사

by 이재섭 posted Jun 0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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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사상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1-8장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에 바탕 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설명했다.
그 다음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9장부터 11장까지 다룬 후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11:33-35절)


한 때 하나님이 이방인을 버린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 이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마찬 가지로 한 때 유대인들이 버림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구원을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11장에서 설명한다.

이 설명 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그리고 그의 측량할 수 없는 판단을 곧 찬양했다.

인류의 구원 문제에 있어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지혜나 도움도 필요 없이 결국 다 이루실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이런 주장에 따르면
구원에 있어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어떤 신학이나 교리도 그 정당성을 고집할 수 없다.
그가 이렇게 결론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는(왜냐하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절)

사도 바울도 다른 많은 성경 저자들처럼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하게, 놀랍게 그리고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의 주장으로 보아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칼빈주의가 가장 타당한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보여진다.
칼빈주의도 사도 바울처럼 구원 문제를 인간의 관점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


이 사상을 고집한 칼빈주의는 인간을 하나님보다 앞서 주장한 알미니안 신봉자들과 극렬하게 투쟁했다.

그 시대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신자들이 다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고 믿는다.

자신의 주권에 따라 하나님도 한 동안 또는 오랜 동안 그렇게 내버려 둔다.
그리고 이들 또한 칼빈주의자들처럼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런 신자들을 도울 의무와 책임은 있어도
이들을 출교시키거나 미워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

기독교 성경은 첫 권인 창세기의 첫 장 첫 절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이렇게 강조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절)
이 성구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를 말한 사도 바울의 하나님 주권 사상을 잘 설명해 준다.

대이지(大理智)의 소유자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면
계속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마침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은 분명하다.
성경의 창조론 자체가 하나님의 주건 사상을 잘 증명한다.

이 점에서 한 때 유럽에서 유행했던 초연신론(deism) –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한 후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의 창조 세계를 떠나 우주 한 쪽에서 초연하게 존재한다. – 이것은 비성경적인 사상과 철학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의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모든 것을 다 창조한 후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창1:27절).
그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만물 창조 목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실현할 무대를 창조하기로 작정했고
이에 따라 우주와 지구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자신의 피조세계에 실현할 것이다.

이 작정을 세우기 위해 먼저 성삼위 하나님 사이 동의와 합의가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기쁜 작정(作定)에서 나왔다.
이 작정에 따라 통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해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도록 했다.
창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만물은 주(主)로 말미암고 종국적으로 주(主)에게로 돌아갈 것도 분명하다.

달리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실현할 목적으로 만물을 계속 돌볼 것이며
종국적으로 자신의 통치를 이 지상에 이루도록 만물을 이끌고 나갈 것이다.
물론 이 일에 그의 피조물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참여할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를 자신의 피조 세계에 실현시킬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리 통치자로 세워 자신의 나라를 이 지상에 건설할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 나라의 설계자이며 그 건설의 주책임자이며 인간은 건설 현장의 일군으로 참여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 창조 목적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을 들어 창조 목적을 이룰 것인가?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재미있는 예를 들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사10:15절)

도끼는 찍는 자의 의지에 따라 일할 것이다.
겉으로는 인간이 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불완전한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린다면
하나님 나라도 불완전하게 세워질 것이다.
인류는 신이 아니라 잘못 행할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여 잘못을 수정하며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역사적으로 건설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말하는 대로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 신학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악의 존재

이원론(dualism)이라는 세상 철학은
이 우주와 이 세상에 선(善)한 신(神)과 악(惡)한 신(神)이 대등한 세력으로 존재하며
서로 영원히 다투면서 인류 역사는 한없이 돌고 돈다고 말한다.
세상 철학인 이원론에 종말론 사상이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 발견된다.

물론 기독교 성경의 창조론에서 볼 때도 이원론은 잘못된 철학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악(惡)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는가?

창조 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 동산을 창설하고 그곳에 이들이 살도록 했다(창2:8절).

동산 중앙에 각종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생명과와 선악과를 맺는 나무들도 있었다(창2:9절).
그러나 에덴 동산에는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뱀도 있었다(창3:1절).

하나님이 만든 뱀은 본래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사탄의 수단으로 이용 당한 뱀은 그의 능력에 힘입어 여자에게 말을 걸어 유혹했다(창3:1-5절).

이 시도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뱀은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을 상징한다.

이렇게 창조 후 타락 전에도 악은 이미 존재했다.
겉으로 보아 이원론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사탄이 자신의 피조물 인간을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즉시 하나님은 원복음을 통해 구속의 약속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절)

상식적으로 사람을 뱀을 쉽게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뱀은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을 상징한다.

결국 여인에 속한 인류와 뱀에 속한 인류로 나뉘어 인류 역사는 진행될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인류 역사는 사람들과 나라들 사이 투쟁의 역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두 인류가 하나님과 사탄을 대신한 투쟁의 역사일 것이다.

선과 악이 인간 사회에 사람이라는 인격체를 통해 활동할 것을 원복음은 말한다.
그러나 결국 선이 악을 이길 것이다.
이렇게 원복음은 이원론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사탄이란 존재를 허용했는가?

이 세상에 불가피한 죄와 그 결과인 악 그리고 사망과 어둠을 주관하도록(엡6:12절)
한시적(限時的)으로 그의 존재와 활동을 허락했다(계20:10절).

그렇다면 사탄은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방해하도록 창조되었는가?
겉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질 수 없다.

사탄이란 존재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기여하도록 하나님이 일할 것이다.
즉 사탄이 하나님을 반대하려는 노력과 그의 행동이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기여할 것이다.

이 원복음에 의하면 타락의 결과 인류는 둘로 나누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류 중 여인의 후손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최종적인 낙원에 들어갈 자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시험하는 나무인 선악과를 에덴 동산 중앙에 둔 목적이 악의 활동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이렇게 사탄과 그에게 속한 인류가 하나님을 반대할수록 그 만큼 더 하나님을 도울 뿐이다.


기독교 성경은 악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허용 아래 일시적으로 활동하는 존재이며
그의 존재와 활동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돕는다고 말함을 본다.
이런 역할을 다 한다면 사탄은 파멸 당하고(계20:10절) 그 후 새세상이 등장할 것이다(계21장).

그 세상에선 유혹이 있을 수 없다.
사망이나 어둠 그리고 눈물이나 애통함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계21:4, 22:3-5절).

사도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롬11:33-35절).

그렇다면 성도는 악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탄을 대적하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류 역사

기독교 성경의 하나님 주권 사상은 인류 역사도 하나님의 주도 아래 진행됨을 말한다.
겉으로는 인간 영웅들에 의해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듯 하나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진행된다.
이 점에서 인류 역사를 인간 관점에서만 해석할 수만은 없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류 역사를 섭리하실 것인가?

물론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인류 역사를 진행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동시에 인류를 통해 성취될 것이다(창1:26절).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류로부터 찬양과 영광과 명예와 존귀를 받기 원하신다(시100편).

인류를 배제한 인류 역사는 불가능한 이유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 세계를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위탁시키며 다스리도록 명했다(창1:28절).

인류가 자신의 통치의 실현이라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도록
하나님은 자신의 권세와 권위를 인류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창1:26절).

이 점에서 인류는 위임된 권한으로 인류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류는 불완전한 존래로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길 수 없다.
개입하여 잘못된 것을 수정하거나 조정하며 자신의 창조 목적을 실현할 것이다.

아담의 타락 때문에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기여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새롭게 인류 역사를 시작해야 했다.
이 새로운 인류 역사는 하나님이 마련한 구속의 은총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원복음(창3:15절)을 통해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에 대해 계시해 주었다.

원복음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류 역사의 주인공은 여인의 후손이다.
결국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을 위해 인류 역사를 진행시킬 것이다.
여인의 후손에 속하는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연혼하며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포기했다.

이 때 하나님은 홍수 심판으로 옛인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창6장).

여인의 후손인 인류가 뱀의 후손인 인류와 전혀 다르지 않을 때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더 이상 옛 인류에게 어떤 희망도 둘 수 없었다.
하나님은 셋의 후손인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 새로운 인류 역사를 시작해야 했다(창6-9장).

이런 심판은 바벨탑에서 또 다시 나타났다.
홍수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새로운 인류가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한 소망 대신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인류를 징계했다.
그 결과 인류는 언어를 중심으로 여러 민족으로 나뉘었다(창11장).

하나님은 이들 중 여인의 후손의 혈통을 이을 민족을 택해야 했다.
이를 위해 셈의 후손(창9:26-27절)인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창11-12장).
그를 여인의 후손의 혈통을 잇는 조상으로 하나님은 세웠다.

나중 모세는 인류 역사가 메시아가 나올 선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을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32:8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많은 열방들 가운데 있음은
한편 여호와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이기 위함이지만(겔5:5-9절)

다른 한편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함이었다(사10:5, 호10:10절).
가나안 7족도 이스라엘의 옆구리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수23:13, 삿2:3절).

이스라엘과 관계하여 이들 나라들은 모두 심판이나 징계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열방들은 하나님에 의해 고용된 품꾼들과 같았다.
정해진 기한이 끝나면 하나님이 정해준 역할을 마치고 나라들은 역사상 사라졌다.

이사야서에 이렇게 기록된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소용이 없이 되리라 하시도다."(사16:14절)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같이 일 년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21:16-17절)

그리고 하나님은 다른 나라를 세워 다른 품꾼 계약을 맺어 자신의 목적대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신흥 바벨론도 하나님에 의해 고용되어(사51:7절)
대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흩어졌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고토로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이 많았던 이유였다.
이들은 로마 제국 시대까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았다.

바벨론 제국은 한편 남방 유다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 심판의 수단이었지만(렘50:23절)

다른 한편 예수님의 초림 이후 복음이 전 세계로 쉽게 전해지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사전 조치였다.

물론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고용된 하나님의 품꾼이었다(레25:42, 55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열방들과 다른 품꾼이었다.
이스라엘은 구속사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품꾼이었지만
열방들은 세속사를 위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품꾼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구속사를 잘 수행하도록 돕도록 일시적으로 고용되었다.



하나님은 품꾼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잠21:1절)

이 성구는 어떻게 하나님이 구속사를 중심으로 세계 역사를 진행시키는지를 잘 설명한다.

이렇게 구약 시대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중동 지역의 역사를 섭리했다.
반면 신약 시대 역사 무대는 서서히 전 인류로 확대했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앞으로 이끌 것인가는 이미 구약이 보여주었다.

구약 시대보다 더 넓은 역사 무대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구속사를 섭리할 것이다.
부활한 아들은 만유의 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온 이후 인류는 서서히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복음에 노출되었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에 관한 복음이 온 세상 만민에게 전해질 것을 이미 아셨다.
그 때 인류 역사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예언했다(마24:14절).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 이전이든지 이후든지
세상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를 위해 계속 전개될 것이다.

구약 시대 원복음의 약속(창3:15절)이 보존되고 실현되도록
선민을 중심으로 중동 지역 역사를 하나님이 섭리했다면
신약 시대 재림 때까지 여인의 씨인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은 백성을 위하여 세계 역사를 진행시킬 것이다.
이 역사관을 가진 기독인들은 항상 인류의 소망인 예수님만을 믿고 소망하며 이 세상 삶을 산다.

북핵 사건으로 세상 나라가 긴장하고 미국 민주당의 승리로 세계정세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기독인은 재림하실 예수님으로 인해 인류 역사가 끝나고 성도는 승리자들로 드러날 것을 압니다.
이런 소망이 있는 성도는 내일 종말이 와도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합니다.

한국 교회는 강대상에서 현상적인 세상 일만 말합니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유식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목회자와 강연자 사이 차이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 한 결과입니다.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과 구속사를 이해함으로 가능합니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장창수선교사

러시아 시베리아 노보시리르스크에서 온 목회 서신 E-Mail: lyuboph@hotmail.com

장창수 목사님은 한국외대와 합동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94년에 러시아 시베리아
노보시비리스크 지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셨다.
뛰어난 조명으로 선교와 신학, 목회 등 분야 여러 분야에 관해 많은 글을 쓰셨다.
우리가 벙해 세력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에반젤리칼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보라고
주문하셨다. 이 말이 계기가 되어 이르쿠츠크 침례교 노회와 유대를 갖게 되었다.
사모님이 선교지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해 건강이 안 좋으신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