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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


 




한 사람의 인격과 그의 내면을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있다면 그것은 일기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 바로 그의 일기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는 에드워즈의 내면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거듭난 성도들의 내면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경건문학의 고전이다.




에드워즈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일기는 1722년 12월부터 시작되어 1736년 6월에 끝난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나이 19세부터 33세 때까지의 기간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전체 일기 148일 분량을 분석해보면 1723년 이전의 일기가 9개이며, 1725년 이후의 일기는 모두 13개 밖에 없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일기는 주로 1723년과 1724년 2년 동안 즉 그의 나이 20살과 21살에 집중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일기는 20살 초반의 그의 삶의 단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일기에 나타난 그의 삶과 사상은 큰 변화 없이 그의 평생을 걸쳐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확장된다. 어떤 면에서 에드워즈의 일기는 그의 결심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에드워즈의 일기는 그의 유명한 결심문을 지키기 위한 매일 매일의 투쟁과 노력의 산물이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삶은 일기를 쓴 기간만이 아니라 그의 평생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일기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에드워즈의 내면세계요 영적 세계요, 경건세계라 해도 그리 큰 오차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일기를 통해 한 영적 거인의 신앙세계에 들어갈 출입구를 발견하게 된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에드워즈의 일기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기의 시대구분과 모든 소목차는 필자가 만들어 첨부했다.



1. 뉴욕 장로교회 목회시절 6개월 기간 중 일부(1722.12.18-1723.4)



1722년의 일기(19세)



1722년 12월 18일



회심에 대하여, 35번째 결심문 작성



오늘 35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조금이지만 약간의 의문이 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중생의 예비적 사역에 대한 나의 체험을 그렇게 충분히 말할 수 없다.



둘째, 나는 신학자들이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중생을 체험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셋째, 나는 성도의 미덕들 특히 믿음에 대해서 충분히 체험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단지 외식적인 외적인 감정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두렵다. 그것들이 충분히 내적이고, 완전하고, 진실하며, 온전하고, 마음에서 우러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이 내가 바라는 만큼 아주 본질적이고. 충분히 나의 본질 속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넷째, 나는 때때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는 죄를 짓고 있다. 최근에 나는 악한 말을 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는지 의심이 들었다. 오늘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1722년 12월 19일



신학적 문제 해결, 36번째 결심문 작성



오늘 36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최근 나는 영광에도 다양한 등급이 있다는 교리로 인해 아주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제가 거의 다 해결되었다.





1722년 12월 20일



게으름에 대한 점검



어제와 오늘 아침 게으름의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오늘 다소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었다.





1722년 12월 21일 금요일



영적 침체를 경험함



어제와 오늘 아주 둔감하고, 메마르고, 죽은 것 같은 상태였다.






1722년 12월 22일 토요일



영적 회복을 경험함



오늘 성령님에 의해서 회복되었다. 거룩함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에 대한 느낌으로 감동을 받았다. 평상시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겠다고 느꼈다. 또한 더 민감하게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죄는 자비롭고 선하신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밤 37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1722년 12월 23일 안식일 밤



38번째 결심문 작성



38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1722년 12월 24일 월요일



주간, 월간, 연간 반성을 결심함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탁월함에 대해서 평상시 보다 더 많이 생각했다. 매 월말에 결심문의 내용들이 점차로 잘 지켜지는지 아니면 잘못 지켜지는 지를 보기 위해 결심문의 항목들을 관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한 오늘부터 시작해서 주간평가를 내린 것을 바탕으로 월별평가를 내리고, 새해부터는 월별평가를 내린 것을 가지고 연간평가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1722년 12월 26일 수요일



33번 결심문 작성, 37번 결심문 보충



어제 아침 일찍부터 생긴 두통으로 인해서 많은 손해가 없기를 바랐지만 하루 종일 두통 때문에 지장이 있었다. 37번째 결심문에다가 매주, 매달, 매년에 관한 사항을 보충했다. 밤에 33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1722년 12월 29일 토요일



영적 침체를 경험함



오늘 저녁때쯤 둔감하고 무기력함을 느꼈다.




1723년 1월 1일 화요일



영적 침체를 경험함, 게으름에 대한 점검



며칠동안 계속 둔감한 상태다. 오늘 게으름의 죄를 짓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조사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지었다.






1723년 1월 2일 수요일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심문을 지킬 수 없음에 대한 인식



둔감함. 나는 경험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 없이는 내가 결심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무런 열매가 없으며,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성령이 지난주처럼 언제나 내게서 떠나가신다면 내가 하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장하지 못할 것이고, 시들어서, 비참하게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령을 조금 더 거두어 가신다면 나는 지체 없이 나의 결심문들을 어기게 될 것이며, 곧 나의 옛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은 조금도 신뢰할 만 것이 못된다.



우리의 결심은 어느 날 최고조에 달하지만 다음날 우리는 전혀 딴 사람처럼 비참하게 죽은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면 결심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아무런 목적도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하루는 아주 선한 사람이 되었다가, 그 다음날은 아주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 특히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죄를 고치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과 고난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지난 행동들을 돌아보고, 우리가 잘못했던 것을 발견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특별한 죄와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기를 바라신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어느 길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1723년 1월 5일 토요일 저녁



죄에 대한 깨달음과 게으름에 대한 반성



성경 읽는 일에 있어 오랜 동안의 치명적인 둔감함에서 다소 해방되었다. 이번 주에는 불행하게도 주간평가가 저조했다. 이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열정이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상태가 조금 더 계속된다면 다른 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내 안에는 죄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죄가 아주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두신 다면 그 죄들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가? 죄는 완전히 죽지 않는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옛 뱀은 동면에서 깨어나 다시 활개를 치게 될 것이다. 의무를 행하는 것을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신앙적인 생각을 하는데 힘을 쏟지 않은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게으름을 피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치기로 결심했다.



1723년 1월 6일 안식일 밤



시간관리의 방법에 대한 묵상, 죄죽임과 세상적인 편안함을 경계함



귀중한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몸이 약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죄를 죽이는 삶을 살 것을 또한 절대로 세상적인 평안함이나 쾌락을 바라거나 구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1723년 1월 7일 월요일



40번째 결심문 작성



밤에 40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1723년 1월 8일 화요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죄의 깊이를 묵상



아침에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평상시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평소보다 죄에 대한 회개를 더 깊이 하게 되었다.






1723년 1월 9일 수요일 밤



시간관리에 대한 반성



나는 부패했다. 때때로 나는 실제보다도 내가 훨씬 더 거룩하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때때로 나는 내 안에 혐오스러운 부패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읽고 있는 훌륭한 성도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



나는 시간을 잘 사용하고, 모든 것을 신속히 그리고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처리하며, 부단히 신앙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어제와 그저께 또는 어떤 때 즉 일년전과 비교해 볼 때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만일 그때부터 그 결심들을 잘 지켜왔더라면 지금보다 나는 얼마나 더 나은 상태에 있었을 것인가! 내 마음은 얼마나 거짓된가! 결심을 강하게 가지지만 얼마나 쉽게 그 결심이 약해지는가!






1723년 1월 10일 목요일 오후



세상의 번영을 부러워하는 유혹을 경계함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세상적인 상태와 조건을 보고서 또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거나,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잘되고, 세상살이가 쉽게 풀려나가고, 그들은 많은 측면에서 아주 행복하며, 매우 번성하고, 크게 존경받는 것을 볼 때, 또는 그들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런 것에 대해서 마음이 편치 않고, 나도 똑같은 성공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거나 원하며 그리고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그리스도에게 크게 불명예를 끼쳐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모든 사람의 번영을 기뻐하자.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런 것을 구하지 말고 또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런 종류의 행복을 기대하지 말자. 오히려 역경을 기반으로 해서 나는 전적으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자.



41번째 결심문 작성, 음식과 수면에 대한 육체의 본능이 주는 유혹을 경계함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을 절제하는 문제에 있어, 몸과 정신 양면에 걸쳐 매일 아침마다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루 중에 내가 짓기 쉬운 죄를 생각하고, 하루를 어떻게 잘 보낼 것인가를 결심하고, 그런 죄를 피하는 것은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매주, 매월, 매해의 초에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그런 것에 두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전에는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그것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으며, 그런 것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지 않고, 그런 것들을 얻을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그런 것들이 계속되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밤에 41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1723년 1월 12일 토요일 아침



43,44번 결심문 작성, 삶의 전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인식



오늘 나는 성찬식 때, 세례 받을 때 했던 언약과 헌신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으며, 나 자신 즉 나의 존재와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이러한 지성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인정할 수 있다. 나는 나의 몸이나 몸의 지체에도 어떤 권리가 없다. 즉 나의 혀. 손과 발에도 아무런 권리가 없다.



나의 감각과 귀와 코와 혀에도 아무런 권리가 없다. 나는 자신을 분명히 버렸으며 내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간직하지 않았다. 세례 때 나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완전히 바치겠다고 말했다. 나는 모든 힘을 그에게 드렸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분명하게 하나님께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오늘 아침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이며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말씀드렸다.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나의 행복이 아니며,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지속적인 나의 순종의 법칙으로 삼으며, 그리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했다. 나는 복음에 대한 고백과 실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복음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수할 것이다. 나는 복되신 성령님을 나의 선생님과 거룩해하시는 분, 유일한 위로자로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에게 조명해주시고, 정결하게 해 주시고, 강하게 해주시고, 위로하고 도와주시기 위해 충만해 지시기를 원한다. 나는 이렇게 해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것이 나의 헌신으로 간주되어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지금 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로 받아주시고, 모든 면에서 가령 하나님이 내게 어려움을 주시든지, 형통함을 주시든지 또는 그분의 것인 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든지 간에 나와 관계를 맺어주시기를 기도한다.



지금부터는 어떤 면에 있어서도 내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나의 어떤 능력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어떤 일에 사용하게 되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전적으로 나의 일로 삼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것으로 행동하는 것이 될 것이다.



즉 만일 내가 고통에 조금이나마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의 부유함을 슬퍼하게 되거나, 어떤 방식이든지 무자비하게 되거나, 상처받은 일 때문에 분노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복수를 하거나, 순전히 나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거나, 나의 편안함을 위해 어떤 일을 회피하거나, 자기부인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지 않거나, 나 자신을 신뢰하거나, 내가 행한 착한 일에 대해 어떤 자찬을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내가 교만하게 된다면 나는 내 것 인양 행동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 42번째와 43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하여간 어떤 다른 목적도 나의 어떤 행동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자. 만일 신앙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내 생각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어떤 행동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지 않을 때보다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44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질문: 신앙적인 목적이외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즐거움이나 만족을 추구해도 되는가?



오후



45번 결심문 작성,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유혹에 대한 경계,



만일 우리가 신앙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이유 이외에는 다른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즉 다른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즉 친구들을 보고서 즐거워하지 않거나 음식 먹는 것에 탐닉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적 본능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왕성한 식욕은 제한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질문은 이렇게 대답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결코 신앙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기쁨이나 슬픔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45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왜 내가 이렇게 빨리 무기력하게 되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할 수 없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편안함을 추구하도록 나 자신을 방치해두곤 했으며 그래서 내가 편안함을 기대하는 습관을 길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나의 마땅한 권리로서 휴식을 취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 그러고 나면 실제로 내가 피곤하고 지친 것처럼 속게 된다.



반면에 편안함을 바라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이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면 나는 휴식을 위한 공백시간이 없이도 동일한 활력을 가지고 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성경 읽기에 있어서 이것을 체험했다. 또한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를 암기하는 것에 있어서나 다른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다.






죄죽임의 실천과 주간평가



이번 주에는 주간평가를 평상시보다 더 철저하게 했다. 너무 지속적인 죄 죽임과 신앙에 대한 너무나 철저한 적용은 건강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하게 이 평가를 중단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그것을 실천하고 경험하겠다. 만일 내 건강이 완전히 상할 정도가 아니라면 아무리 피곤하거나 지치게 되는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





1723년 1월 13일 안식일



45번 결심문 보충, 지속적인 성장 가능성을 발견함



만일 내가 지난주 초부터 지금까지 한 것처럼 계속하기만 한다면 은혜 안에서 계속자라고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분명히 든다. 오후 예배 후에 45번째 결심문에 추가사항을 기록했다.



오후



교회 공동체의 의미에 대한 묵상



내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이며, 몸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몸의 한 부분으로서 나 만의 분리된 관심과 즐거움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기억난다.






성경이해와 적용



고전7:29-31절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할 것을 결심했다.






1723년 1월 14일 월요일



성경이해와 적용



오전 10시쯤 이 책을 만들어서 이 종이들을 책에다 붙였다.(일기의 첫부분이 쓰여져 있는 종이를 가리킨다). 지난 토요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던 헌신이 내게는 아주 유익했다. 로마서 8장을 읽을 때 이전보다 성경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더 많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63번 결심문 작성, 죄 죽임의 중요성



죄를 크게 죽여본 사례를 가지는 것은 죄의 몸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다. 또한 죄에 강타를 퍼부어서 비틀거리게 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튼튼한 기반과 발판을 얻게 되며, 죄는 쓰러지기 직전이 되고, 다음 번에 우리는 죄와 더 쉽게 싸울 수 있게 된다.



죄는 점점 겁을 먹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죄를 굴복시킬 수 있으며 적어도 죄와 싸우는 것이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마음대로 죄를 죽일 수 있다.



죄를 크게 죽여 본 사례들과 자기를 부인해 본 경험 없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옛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옛사람은 억세고 끈질기기 때문에 작은 타격에는 요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민감하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가장 크게 죄를 죽이고 난 후에 나는 언제나 가장 큰 위로를 체험한다.



63번째 결심문을 작성했다. 성도들이 보통의 정도로 행하는 그런 작은 일들은 은혜가 많이 증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실행해야 한다.



내가 옛날의 좋은 행동들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될 때, 만일 그런 좋은 행동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것을 주목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1723년 1월 15일 화요일



영적 침체에 대한 경험



두 시 아니면 세 시쯤이다. 그간 줄곧 침체되었다. 어제와 그저께와 지난 토요일에는 내가 항상 마땅히 지켜야 할 결심들을 제대로 지켰던 것 같다. 그러나 슬프다. 얼마나 빨리 내가 침체되는가!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얼마나 약하고, 얼마나 부족하고 얼마나 무능력한가! 나는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 불쌍한 존재인가!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 없이는 얼마나 불쌍한 비참한 존재인가! 서 있는 동안에는 내 힘으로 그리고 내 발로 서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마치 내가 적들을 패퇴시키는 것처럼 나는 나의 영적인 적들에 승리할 것만 같다.



불쌍하다! 그때 나는 단지 불쌍한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탱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고 계시며, 나에게 자유를 주셔서 웃으면서 내 원수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게 하신다. 그때 그가 내 앞에서 내 원수들을 쫓아내신다. 그래서 마치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나는 웃는다. 그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가 직접 내 원수들과 싸우신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 잠시 나를 내버려주신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약한가를 깨닫게 된다.



오 나를 가르쳐서 나 자신을 덜 의지하고, 더 겸손해지며, 내 능력에 대한 예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많은 찬양을 드리게 하소서.



사람의 마음은 다른 무엇보다 거짓되고, 심각할 정도로 악하다.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내가 침체되는 때에는 다소 우울한 상태가 된다.



나의 영혼이 침체된 이유는 어제 밤에 어떤 친밀함을 잃어버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침체되고 있고, 나의 결심들은 힘을 잃었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오늘 나는 어제와 다르다. 오늘 반나절동안 나는 아주 강하게 어떤 것도 결심하지 않았다. 나는 어제처럼 내 결심들을 새롭게 하려는 생각을 그렇게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어제의 활기보다 절반도 안 된다. 또한 활기차게 모든 것을 하는데 있어서 어제의 절반도 안 된다. 어제 나는 계속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천천히 하고 있고, 이럭저럭할 사이에 신앙을 생각함으로써 나를 안위하고 있다.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옮겨가는 것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해질 때쯤 겸손하게 되었다. 선한 은혜를 가지고 성도다운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 관리 방법



다음 번 내가 침체되면 신속하게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넘어가서 활기차게 그런 일을 행해야겠다. 신앙에 관심이 쏠려있을 때 나의 생각을 빼앗아 가는 것들은 보통 어떤 큰 변화나 변경 즉 여행. 장소의 변화, 일의 변화, 공부의 변화나 다른 환경의 변화다. 또는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나 어떤 죄들이다.






1723년 1월 17일 목요일



영적 침체에 빠짐



세시쯤, 완전히 우울함에 빠졌다.






1723년 1월 18일 금요일 밤



영적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



요즈음 며칠동안 빠져있었던 죽음 같은 상태로부터 회복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723년 1월 20일 안식일 밤



영적 침체에 대한 반성, 주간평가, 결심문 만드는 일에 대한 두려움



지난주에 나는 아주 바닥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까봐 두렵다. 나는 주간평가가 아주 저조함을 느끼고 있다. 내 마음은 아주 거짓되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떤 결심문을 만드는 것이 완전히 낙담된다. 지난주간에 나는 태만했다. 그리고 내가 빠져있는 치명적인 저조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더 나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겠는가?






1723년 1월 21일 월요일



찬양과 신앙의무 실천의 중요성, 월간평가에 대한 반성



동트기 전에 어제 던졌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죄를 회개하면서 시편 특히 회개에 대한 시편과 찬양을 노래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야만 했다. 이러한 의무들은 내가 빠져있었던 상태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의 영광스러움에 감동을 받을 정도로 노력하는데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고 있다. 월간 평가가 부족했다. 신앙의 즐거움에 대한 이전의 감각이 떨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1723년 2월 5일 화요일 밤



자기부인과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 대한 반성



그러나 지금 비록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충분히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도들이 말했던 것처럼 싸우고 투쟁하기 위해 전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사도들이 말했던 죄 죽임처럼 그렇게 크고 지속적으로 죄를 죽이고 자기부인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내가 더욱 죄를 죽였어야 했는가? 내가 다시 점점 먹고 마시고 잠자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부주의하며, 험담하는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주의하지 못한 것 같다.






1723년 2월 16일 토요일



내가 복음이 말하고 있는 거룩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안다.






식욕, 늦잠, 개인기도 불충분의 3가지 게으름에 대한 반성



지난 세월동안 나는 예배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태만했었다. 나는 이번 달의 지난 날 동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태만했었다.



첫째 나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나의 식욕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했다.



둘째 나는 아침에 너무 늦게 일어났다.



셋째, 나는 개인기도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






1723년 2월 17일 안식일 해질 무렵



세상 유혹을 떨쳐버림



하나님을 나의 전부로 받아들이며, 그 밖의 것은 가지지 못한다하더라도 만족하리라 새롭게 다짐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은 잘 되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하더라도 나는 불평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겠다. 최근 나는 이와는 반대로 행동했다.






1723년 2월 21일 목요일



세상 유혹을 떨쳐버림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며, 이 세상에 우리의 분깃을 가지지 않고 다른 세상에 대한 관심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전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세상과 단절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내 마음의 상당부분이 아직도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 오, 내 마음이 완전히 세상에서 분리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힘과 명예를 가지고 있을 때는 내가 하나님을 나의 전부로 삼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내 스스로에게 말해도 마음이 편지 않으며, 그것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1723년 2월 23일 토요일



시간 관리를 2배 혹은 7배나 잘 할 수 있는 방법



나 자신이 아주 게으르며, 만일 집중하기만 하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두 배나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게으름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이 지금과는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게으름에 빠져 지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몰랐다.



나는 지금 동일한 시간에 다른 때보다 7배나 많이 할 수 있다. 이것은 내 능력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불타고 있는 불같은 부지런함 때문이다.



만일 내가 항상 그렇게 계속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내 고통의 4/1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도로서 달려가야 할 경주를 더 잘 달려야 하며,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1723년 3월 2일 토요일



교만과 겸손에 대한 경험



내가 다소 겸손한 상태에 있을 때보다 교만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오, 나는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 인간인지! 겸손이 교만보다 얼마나 더욱 사랑스러운지!



지금 나는 분명하게 그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을 느끼고 있다. 나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보다 겸손한 즐거움이 얼마나 훨씬 더 강도 높은 즐거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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