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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애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총(창13:1-18절) 장 창수선교사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시련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성숙한 신앙에 달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귀로 들은 말씀이 삶의 체험을 통해 눈으로 본 말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성도는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시련은 우리 성도들에게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말한대로 우리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항상 선을 이루게 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같은 시험을 걱정할 필요없습니다.


아브람은 정직하지 못한 신앙으로 애굽의 바로 앞에서 부끄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과 그의 가족은 바로에 의해 애굽과 가나안 사이 국경선까지 강제로 이송(移送)되었습니다(창12:20절). 바로가 아브람의 부인 사래 연고(緣故)로 인한 큰 재앙에 너무나 놀랬기 때문입니다(창12:17절). 그러므로 다른 애굽인들이 아브람의 부인 사래를 손대지 못하도록 그렇게 특별조치를 취하여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 마자 북방을 향해 부지런히 서둘러 발행(發行)하였음을 우리는 봅니다(3절) 그곳은 다름 아닌 벧엘과 아이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하나님께 처음 단을 쌓았던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당도(當到)하였을 때 그는 곧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만사(萬事)를 제치고 무엇보다 먼저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참 궁금합니다.

애굽을 무사히 떠난 아브람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모든 소유와 조카 롯까지도 안전하게 가나안 남방으로 올라갔다고 본문 1절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다고 기록됩니다. 저는 이 기록을 묵상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람이 한 행동은 사람이나 하나님이 볼 때 모두 부정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와 그 신하들 앞에서 크게 부끄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과 그의 가족은 여전히 안전했습니다. 그리고 부인 사래로 인해 바로에게서 받은 노비와 짐승들도 여전히 그의 소유물로 남아 있었습니다(창12:16절) 그 결과 그의 재산이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자신은 불의한 것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명도 보존(保存)되고 그의 재산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을 떠나면서 그의 재산을 볼 때마다 그리고 자신이 생명이 부지(扶持)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부끄럼과 수치심을 느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큰 은총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는 절실히 깨닫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 하나님의 언약때문인 것을 그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아브람과 사래를 보호하여야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을 깨달은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 단을 쌓던 곳으로 서둘러 달려 갔습니다(4절). 그곳에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을 새롭게 다짐했읍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신앙인은 누구나 잘못을 범합니다. 그러나 흔히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리고 책망을 들었을 때 되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아주 고약한 사실은 그는 이런 은혜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공할수록 그 만큼 더더욱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의로워서 결과가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그를 기다립니다. 그를 여전히 은총으로 보호하시면서 그가 겸손하기를 기다립니다. 모든 일들이 잘 될수록 자신의 부끄럼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는 신앙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땅에서 숨쉬며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은총으로 우리의 목숨을 연장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시때때로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그리고 게으름과 태만으로 수많은 죄를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생명을 연장시켜준 하나님의 은총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자신이 의인처럼 자신을 가장(假裝)합니다. 아브람의 신앙을 본받읍시다!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수치를 깨닫고 그리고 은총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겸손합시다! 다시 신앙의 헌신을 재다짐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재물들은 결국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재물이지만 이 세상의 재물은 항상 언젠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재물이 많다고 교만하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히려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땅에 쌓지말고 하늘에 쌓을 것을 권면했습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사이 목자들간에 목초지와 우물 때문에 가끔 서로 다투었습니다(7절) 그것은 그들이 소유한 목축의 수에 비해 그 땅이 좁았기 때문입니다(5-6절) 더구나 이들은 원주민들이 차지한 좋은 목초지를 이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초지와 우물은 목자들에게는 생사(生死)가 걸린 문제입니다. 이 싸움이 자주 일어나므로 아브람도 그리고 조카 롯도 이를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브람은 삼촌이며 윗사람으로 큰 결단을 내렸읍니다. 조카 롯에게 목초지를 먼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讓步)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조카 롯과 혜어지기 위한 방편(方便)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 앞에서(7절) 재물문제로 싸우는 것은 아주 부끄런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별력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윗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강압(强壓)하지 않고 양보한 그의 자세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조카 롯이 제한된 목초지를 택한다면 그의 목축들은 굼주리고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그는 조카 롯에게 양보하였읍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양보와 자기절제가 가능했을까요? 아브람이 이미 믿고 있는 언약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거(依據)하여 그와 그 후손이 마침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을 알았읍니다. 이렇게 언약을 믿는 믿음은 세상의 이해 관계를 초월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수준을 뛰어넘는 윤리적 삶을 살 수 있읍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상식(常識) 이상의 세계에 삽니다. 그는 세상의 것을 잃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이해관계에 억매여서 살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도 깍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옳고 그름에만 의존하며 살므로 사랑이 부족한 냉혈한(冷血漢)으로 불신자들에게 비춰지지는 않았습니까? 진실한 신앙인은 손해볼 줄도 압니다.


이런 선택권을 받은 롯은 주저없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 보았읍니다(10절) 그러나 롯이 아버지같은 아브람에게 조카로서 선택권을 양보하였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롯이 욕심에 사로잡힌 증거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롯을 몰인정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도 경제적인 문제가 사람 문제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우리는 봅니다. 사람은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존재이지만 물질이나 경제 문제에 부딪히면 그런 존재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영적 가치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욕심에 사로잡힌 인간의 판단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는 나중 자신이 선택한 땅에 살면서 포로가 되는 불행을 당할 것입니다.

조카 롯이 택한 소돔과 고모라지역에 대한 기록이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이 두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이었음으로 이 지역이 여호와의 에덴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기록됩니다(10절). 이 말은 어느 특정 지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직전에는 그곳에 경제적인 그리고 물질적인 부요가 넘치게 된다는 사실를 가르칩니다. 고대 문명들이 최절정기를 맞아 언젠가 하루 아침에 빈터로 남게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서도 우리는 이 진리가 맞음을 깨닫습니다. 서로마도 물질적인 부요가 넘칠 때 그리고 최고의 문명과 문화를 자랑할 때 망했습니다. 이로 보아 물질적이며 경제적인 부요는 인간에게 타락의 지름길을 제공함을 알게 됩니다(13절).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인 부요를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지금 서구 유럽이나 미국등 선진국들에서는 보통 시민들도 옛날 임금이나 귀족들이 누릴 수 있었던 부요(富饒)를 누릴 정도로 잘 삽니다. 옛날 임금님도 겨울에 맛있는 과일을 마음놓고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겨울에 보통 시민들도 각종 과일을 사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잘 살수록 더욱 부패해져서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합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부요해짐에 따라 한국인의 성도덕이 더욱 타락해 감을 저는 봅니다. 사회의 이런 도덕적 부패현상은 이미 서구 유럽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에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들 나라에 이혼율은 너무나 높습니다. 이들 나라의 아이들은 가정이란 개념 자체도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들 아이들도 부모를 쫓아 어릴 때부터 육체를 즐기며 살게 됩니다. 이들은 장성하여 결혼 대신 손쉬운 동거 생활을 택합니다. 이제 결혼도 이들 나라에서는 구시대의 유물(遺物)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 나라에 미혼모(未婚母)들이 많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도 많이 태어납니다. 이들 사회는 이제 스스로 붕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인 부요는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깁니다.


롯과 혜어진 아브람은 몹시 마음이 서운했을 것입니다14절)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 아브람에게 후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후손을 그에게 약속했지만 그는 만약을 대비하여 조카 롯을 데려왔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 따르면 그는 아브람의 후손이 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혜어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 결과 아브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만 바라고 믿어야 했읍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는 온전한 그리고 진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이외 것은 바라지 않는 순전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롯과의 혜어짐은 그에게 한편 시원했지만 다른 한편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 위에 조카 롯이 좋은 목초지를 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한편 자신의 목축에 대한 불안을 또한 느꼈을 것입니다. 이 모두 그의 결심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인간인 아브람의 마음은 몹시 산란스러웠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적시(適時)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아브람에게 명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땅은 모두 아브람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시겠다고 다시 언약하셨습니다(15절). 이것은 절망 가운데서도 언약에 바탕한 믿음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권면이었습니다(14절) 성도는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언약만 믿고 바라며 살아야 함을 교훈합니다. 이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재확인되었지만 가나안 땅은 여전히 그의 기업이 아니었고 그리고 사래가 여전히 애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언약을 계속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그리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어도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히브리서 11장 1절은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점에서 아브람은 그의 조카 롯과 달랐습니다. 롯은 스스로 요단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계시에 의존하여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탐심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자율적(自律的)인 눈을 가졌다면 아브람은 타율적(他律的)인 눈을 가졌습니다. 결국 인간의 자율적인 눈은 세상만 탐하지만 계시에 의존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하늘 본향을 소망합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평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절)


이렇게 철저히 계시에 의존한 신앙 삶만이 하늘 나라를 상속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의 생각과 자율적인 노력은 영생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 이후 롯과 아브람의 삶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읍니다. 결국 조카 롯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롯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읍니다.


조카 롯과 혜어진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6절). 이렇게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불가능함 중에 가능성을 그에게 제시하시면서 그 미래를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살라고 그에게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는지 우리는 여기서 배울 수 있읍니다. 전혀 실현될 것같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며 믿으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종말이 오며 그리고 불로 심판받는다는 성경 말씀을 누가 믿습니까? 다 비웃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었기 때문에 그 당시 전혀 일어난 적이 없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얻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자세히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구약을 열심히 읽으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구체적인 지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 생활이 훨씬 쉬워집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이 신앙 성장에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후 아브람은 가나안 땅 중앙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숲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그는 단을 쌓았습니다(18절). 그가 가나안 땅에서 두 번째 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주어진 계시와 언약을 믿겠다는 의지를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결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첫결단을 다시 다짐하는 신앙고백을 종종 하나님 앞에 아뢰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열기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자신의 첫결단을 기도중 아룁니까? 달리 말해 예수님에게 빠진 첫사랑의 감격을 계속 주님께 고백하고 있습니까? 이를 위해 예수님을 게속 그리고 깊히 알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만 믿으면 가나안 땅에서 신앙 삶을 살도록 아브람을 훈련하고 있음을 우리는 본문에서 읽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면 당연히 하나님만 의존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쎸 그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세상도 얻지 못하고 천국도 얻지 못하는 불행을 맞기 때문입니다.


잘 될수록 더욱 자신을 살피면서 하나님께 겸손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 재물이 쌓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늘에 그 재물을 쌓으려고 노력합시다! 이 세상을 욕심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계시에 의존한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불가능함 중에서도 하나님만 바라고 믿읍시다! 자신의 첫결단과 첫사랑을 주님께 계속 고백하는 복된 성도가 됩시다! 아멘!

새벽(28-2)


왕같은 아브람(창14:13-18절) 장 창수선교사


아브람이 사는 가나안 땅에 갑자기 전쟁의 회오리가 불었습니다. 소돔을 비롯한 다섯 왕들이 12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13년만에 그를 배반했기 때문입니다(4-5절). 이에 그 다음 해 엘람 왕이 3개국의 동맹군과 함께 소돔 지역을 공격했습니다(5절). 소돔 지역은 갑자기 9개국이 모여 싸우는 세계적인 전쟁 지역이 되었습니다(9절). 이 전쟁에서 소돔 지역의 연합국이 패했습니다(10절). 그 결과 이들은 모든 것을 약탈당했으며 그 와중에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의 식구들도 포로로 잡혀 끌려 갔습니다(12절).

왜 갑자기 이런 전쟁이 여기 14장에 기록되었습니까? 그것은 13장에 기록된 아브람과 롯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그 차이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조카 롯은 목축을 보호한다는 핑계아래 가나안 땅을 욕심으로 바라 보았고(창13:10절) 그리고 요단 들을 택해 살며 곧 심판을 받을 소돔 사람과 어울렸읍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습니다(창13:14절). 그리고 그 계시에 의해 가나안 땅은 그와 그 후손의 기업이 될 줄 계속 그는 믿었습니다(창13:15-18) 롯은 가나안 땅을 경제적인 면에서 보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계시의 도움으로 계속 신앙적인 면에서 그 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카 롯은 모든 재산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먼 나라 시날 평지까지 포로로 끌려 가는 비운(悲運)을 당했습니다. 이 세상의 경제적인 부요가 아무리 좋아도 영원하지 않음을 교훈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 후 어떻게 삶을 살았읍니까?


첫째, 아브람은 항상 깨어 있었습니다.

조카 롯은 악한 소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신앙이 서서히 사라짐도 몰랐읍니다. 육체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안락함은 그의 영적 경각심(警覺心)을 느슨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 성은 물질적 풍요와 함께 성적 타락이 심각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라고 창세기 13장 13절은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산지나 광야로 이전하면서 어려운 장막 삶중 하나님만 바라 보았습니다. 신앙은 확실히 어려운 여건 가운데 더 잘 자랍니다. 그 때 우리는 더욱 하늘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아브람도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그런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롯이 떠난 후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알 수 있읍니다(창13:18절)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아브람에게 이 세상 넘어 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있었다는 점은 조카 롯과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위해 모두 함께 갈데아 우르를 버린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러나 결국 그 결말이 너무나 달랐읍니다. 한 사람은 기름진 땅 가나안 자체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 가나안 땅이 상징하며 모형하는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원인에 있어 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버렸다면 다른 한 사람은 계시를 계속 붙잡았습니다. 결국 한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을 위해 하늘의 것을 버렸다면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의 것을 위해 이 세상의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 넘어 하늘 나라를 바라봅니다. 저는 가끔 성도들은 위대한 철학자들 이상 가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들은 아직도 죽음이나 영생의 문제를 못 풀었습니다. 세계 철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같은 대철학자도 하나님과 영혼 그리고 영생의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대상이 아니라고 포기했습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도 이 세상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 넘어 저 세상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죽음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동네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은 집을 찾아 자신에게 알려주면 대답해 주겠다고 말했읍니다. 그 사람은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석가모니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임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이 세상 넘아 저 세상을 알며 그리고 이 세상과 인간의 종말이 무엇이며 그 후 무엇이 올줄 이미 압니다. 이들은 죽음 문제와 인생과 세계 문제를 이미 해별받은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임마누엘 칸트 이상 가는 철학자들입니다.


이를 어떻게 압니까? 계시로 압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믿는 믿음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 계시를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무리들만 그 계시를 믿고 대철학자 이상가는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믿음을 항상 깨어있게 합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면서도 지혜롭게 살았읍니다. 그는 혜브론의 마므레에 살면서 그곳에 사는 마므레와 에스골과 아넬 3형제들과 동맹하였읍니다(13절) 이 세상을 초월한 그런 믿음으로 살지만 그는 만약을 대비하여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도 소원(疎遠)하지 않았읍니다. 이 동맹은 군사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도 아브람과 함께 그돌라오멜 연합군과 싸웠기 때문입니다(창14:24절) 그 뿐만 아닙니다. 그에게는 318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있었읍니다. 그 당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유일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쉽게 아브람을 쳐서 모든 재산을 빼앗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미리 대비하였습니다. 사람을 모아 군사 훈련까지 시켰읍니다.

이런 기록은 믿음이 뜨거운 신앙인에게 의문을 줍니다. 믿음으로 사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사병을 두다니! 세상을 포기한 사람이 그렇게 세상에 집착하다니! 그러나 성도들도 인간입니다. 인간인 이상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 일에 게으르면 안됩니다. 이를 예수님의 경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양육함이 없이 혼자 복음을 능히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아무 의문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가병(家兵: 집에서 길러낸 군병들)들을 이용하여 그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하려고 지구를 창조하셨고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음 인간에게 땅과 그 모든 것을 위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며 기도하는 학생에게 하나님은 지혜를 더 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 하면서도 자신의 노력만 의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자신의 노력에 함께 하길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한다면서 아무 것도 노력하지 않는 성도는 세상이 보기에도 게으른 사람이 됩니다. 이들은 믿음이라는 핑계아래 아무 것도 노력하지 않는 맹신자(盲信者)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절)

둘째, 그는 가나안 땅의 왕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군사들과 마므레 형제들과 함께 조타 롯을 구하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야간을 이용하여 승리에 도취한 결과 술에 취해 쓸어져있는 연합군을 쳤습니다(15절). 단에서부터 다메섹의 호바까지 쫓아가 그들을 쳐서 소돔의 5개국이 잃은 모든 것을 도로 되찾았읍니다(15-16절) 그는 대승리를 걷우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조카 롯도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소돔왕이 마중 나왔습니다. 틀림없이 다른 왕들도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낯이 뜨거웠습니다. 군사를 거느린 왕들도 못한 일을 아브람이 318명의 가병을 거느리고 대연합국을 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그 왕들이 잃어버린 모든 포로들과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땅의 주인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습니다. 아브람에게 모든 탈취물을 취하라고 소돔왕은 말했읍니다(21절) 이렇게 아브람이 진정한 승리자이며 자신은 패배자임을 소돔왕도 인정했습니다. 아브람이 탈취물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줄 때도 그는 아무 소리 못했습니다. 본래 그의 것이었지만 패배를 통해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승전으로 그의 모든 것이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것은 이제 아브람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마음대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전쟁의 승리자가 갖는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결국 주인과 손님이 바뀌었습니다. 소돔왕은 왕으로서 주인 노릇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손님으로 그 땅의 주인 노릇했습니다. 아브람은 그 지역의 모든 왕들이 인정하는 유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명자가 하루 아침에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6장 9-10절에서 성도들이란 무명한 자같으나 유명한 자이며 근심하는 자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평했읍니다.

이 기록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아브람의 기업으로 주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아브람과 그 후손이 기업으로 얻을 가나안 땅에서 주인 노릇할 수 있도록 아브람에게 승전(勝戰)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 땅의 주인 노릇했읍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그돌라오멜의 연합국은 아브람 개인의 적이라고 말한 기록에서도 이는 증명됩니다(20절). 사실상 가나안 땅에 쳐들어온 그돌라오멜 동맹군은 소돔 왕의 적이었지 아브람의 대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동맹군은 아브람이 주인으로 있는 가나안 땅의 적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대적들을 아브람의 손에 붙였읍니다(20절). 이렇게 아브람은 그 땅의 나그네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땅의 주인과 다름없었다. 아브람을 부를 때 주신 언약이 문자적으로 이미 실현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제 그 후손이 실제적으로 그 땅을 기업으로 얻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항상 깨어있을 때 범사에 승리합니다.


셋째, 그는 승전 후에도 겸손하였다.

승전 이후 아브람이 보인 모습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는 탈취물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께 승전의 영광을 돌렸읍니다(20절) 멜기세덱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적을 붙였다고 찬양할 때 아브람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무명인이 하루 아침에 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어도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인양 교만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자신이 받으려고 할 수 있다. 이 때 자만심과 교만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영적으로 독약과 같다. 하나님은 이를 가증스럽게 여긴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 산 위에 주둔했다. 이 때 승전의 원인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할까 염려되어 하나님은 군인의 수를 줄이라고 그에게 명령했다(삿7:2, 4절) 결국 출병한 3만2천명의 군인중 300명만 뽑혀 미디안 군사와 싸워 승리하였다(삿7:8, 22절). 교인수의 증가로 교회가 커지면 무슨 행사든지 수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이것은 큰 교회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영적 위험중의 하나이다. 수에 의존하면 행사에 필요한 재정과 사람 동원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소홀해집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운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할 때 참 생명 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돔왕이 포로만 제외하고 모든 탈취물을 취하라고 아브람에 말했다. 아브람이 승리자로서 모든 탈취물을 취할 권리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탈취물을 갖지 않았다.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한 영광도 함부러 취하지 않는 신중함이 그에게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중 아브람이 소돔 왕의 탈취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라고 아브람은 분명히 말했다(23절) 이 얼마나 깨끗하고 투명한 믿음인가?

성도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그 이외 다른 것으로 부요해지면 안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탈취물을 취한다면 아브람의 부요의 원인이 소돔 왕에게 돌려질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그의 많은 재물은 본래 소돔 왕의 것이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하나님의 은총은 가려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은총이 가려지는 것을 아브람은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애굽에서 자신의 부인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이고 애굽 왕에게서 많은 재물을 아브람이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많은 재물 때문에 그는 조카 롯과 혜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재물은 항상 자신의 과거 부끄러운 잘못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는 재물을 볼 때마다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결단을 새롭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승전으로 얻은 수많은 재물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 살면서 수많은 문제를 또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는 과거의 경험으로 이것을 미리 알았다. 누구든지 아브람을 노략의 목표로 삼고 그를 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 생활에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사전에 방지하여야 했다. 이렇게 이 세상 재물은 신앙의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 뿐만 아니라 탈취물을 안돌려주면 소돔 왕의 마음이 항상 불편할 것이다. 이것은 아브람도 결국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부각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 문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은 없는지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탈취물을 돌려주면 이 행위는 소돔왕에게 은혜가 된다. 빈털털이가 된 그들을 다시 부요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돔왕을 비롯한 4왕들은 항상 아브람에게 고마워하면서 그를 선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욕심과 무관한 사람 즉 그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썩어질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처사(處事)이다. 그 결과 전도가 용이해진다. 또한 아브람이 탈취물을 되돌려 준다면 이것은 아브람이 가나안의 왕적 존재라는 사실을 시위하는 바가 된다. 흔히 승전자가 그 탈취물을 신하들과 국민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행위로 하나님 나라의 왕적 존재다운 면모를 아브람은 보였다. 물질에 인색한 성도는 영적 위기에 빠질 수 있다. 하늘 나라를 영원한 기업으로 얻은 성도답게 물질 문제에 연연(戀戀)해서는 안된다. 이 면에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아브람은 사려가 깊은 사람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마므레 형제들이 가져야할 탈취물의 분깃을 잊지 않고 갖도록 한 배려 때문이다(24절) 흔히 승리에 들떠 있으면 그리고 영적인 교만에 빠지면 분별력을 상실한다. 이 때 성도는 몹시 이기적이며 주관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 결과 남의 사정을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승전의 영광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했고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겸손했다. 이 또한 아름다운 신앙 모습이다.

우리는 13장의 결과를 14장을 통해 살펴 보았다. 롯의 잘못된 선택은 계속 영적, 정신적 그리고 욱체적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계시에 의존하는 아브람의 바른 선택은 영적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 결과 경성(警省)하는 삶과 승리(勝利)하는 삶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신앙으로 자신의 경건을 지키며 그 결과 승리하는 성도가 됩시다! 아멘!


설교: 장 창수선교사 (러시아 노보시비리스크에서 사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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