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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Story(욘 4:1-5)

대부분의 옛날 이야기는 Happy Ending으로 끝이 납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입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이상한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요나서가 3장으로 끝이 난다면 얼마나 멋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요나는 마침내 회개했고, 그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니느웨 성은 왕으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금식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니느웨 성이 구원을 얻었으니 여기에 승자만 있고 패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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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1: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그러나 4장의 요나는 3장의 요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원위치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나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Mystery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이야기는 요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Love Story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의 이상한 모습은 용두사미(龍頭蛇尾)가 아니라, 극적인 클라이막스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요나서가 3장으로 끝이 난다면 요나서는 Bible이 될 수 없습니다.

(욘2: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의 선교를 통하여 큰 성 니느웨가 돌이키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큰 기쁨의 잔치가 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속이 뒤틀려 있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원수의 나라가 심판을 받아 망해야 마땅한 것인데, 요나의 생각과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원수의 나라를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실 것을 알았습니다(욘 4:2).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10).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요나는 이 사실을 스올의 뱃속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구원이 악독한 원수의 나라에 베풀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원수의 나라 앗수르는 이방인이요, 우상 숭배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히브리 사람들의 選民思想이 세계 복음화의 걸림돌입니다. 이방인들은 우상 숭배 때문에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히브리식 사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들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기도를 합니다. “요나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욘 4:2) 그러나 요나의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히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제 고집을 꺾지 않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말합니다. 제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 구절을 갖다가 꿰어 맞춥니다.
요나는 자신의 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인생이 주인이 되어서 감히 하나님을 정죄하고, 하나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싫어합니다.

(욘 3: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만약에 요나의 생각대로 니느웨 성이 회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심판이 그대로 임했다면 요나는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요나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하나님 앞에 큰 소리를 치고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요나의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싸우고 나면 ‘나는 이제 너와 놀지 않을 거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요나의 이 말은 유치한 것 같지만, 진심입니다. 요나의 이성을 잃은 행동과 말에 대해서 하나님은 합리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화하지만, 단호합니다.

(욘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합리적인 말씀에 요나는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빠져 나와서 니느웨 성의 되어가는 모양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니느웨 성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욘4: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우리는 요나서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요나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이 사랑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탕자도 사랑하시지만 큰 아들도 사랑하십니다(눅 15장).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사랑하시지만, 이스라엘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가 필요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눅 6:35)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 이런 사랑이 없을까요? 왜 원수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할까요? 바울은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였다’(살전 2:8,9)고 했습니다. 바울은 결심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과 친척을 위하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원하는 바라”(롬 9:3)고 했습니다.
우리는 요나서의 핵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나서에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확호한 사명입니다. 요나를 책망하신 하나님은 지금 전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우리를 동일하게 책망하십니다.

(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하나님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요나에게 오히려 박넝쿨을 선물로 주셔서 니느웨의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요나는 시원한 박 넝쿨 때문에 기뻐하고 잠이 듭니다. 마치 요나가 다시스로 다망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다가 시원한 그늘이 덮이고, 서풍(西風)이 불어오니까 잠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욘4: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그러나 박넝쿨이 사라지자 요나의 불평이 다시 폭발합니다. 요나는 지극히 만족한 상태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다시 떨어집니다. 요나는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요나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속을 다 드러내 보였습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은 정말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풍랑을 만났었고,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서 음부의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더구나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원수의 나라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니느웨의 되어가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박 넝쿨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요나는 박 넝쿨을 기뻐했습니다. 자신이 그런 은혜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벌레(worm)가 박 넝쿨을 죽여(kill)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가 누리는 작은 기쁨마저 거두어가셨습니다. 요나는 이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죽겠다고 발악을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죽음(death)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가치 있는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신자는 결코 개죽음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박 넝쿨)을 더욱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가 영혼보다 육신을 더욱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박 넝쿨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금방 시들어버릴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박 넝쿨 보다 이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은혜의 현상보다도 본질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것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마 6:33). 욥은 많은 박 넝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욥도 사단이 박 넝쿨을 한꺼번에 거두어가자 생일을 저주했습니다(욥 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욘 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많은 박 넝쿨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니느웨에게도 박 넝쿨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짐승조차도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이가 12만입니다. 요나(BC 781-740)가 주일학교를 세우고 그 일을 바로 감당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에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큰 성이 통째로 회개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으니,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가 할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주일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세례를 베풀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요나는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 기쁨과 승리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박 넝쿨을 자신의 오두막으로 삼았습니다. 니느웨에 거처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요나는 자신의 초막에 엉뚱한 교회를 세우고 그 곳에서 세례 요한처럼 니느웨의 심판만을 기다렸습니다.
이 부분이 세례 요한이 주님을 의심했던 부분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당연히 원수들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할 터인데, 주님의 하시는 일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마 11:3) 물어보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이 심판을 당하고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에게 원수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원수 갚을 자격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원수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원수입니다. 빈 라덴과 김정일이 그렇게 미운 것이 아니라, 내 자식, 내 남편이 원수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 갚으려고 하면 할수록 원수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는 떵떵거리고, 나만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일하려다 제 명에 살지 못합니다. 반대로 우리의 할 일은 숯불을 그 머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악한 양심을 다루는데 있어서 분에 넘치는 호의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0). 잠언서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 25:21,22). 이것이 원수의 심령을 녹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善으로 惡을 이겨야 합니다.
니느웨는 멸망하고 않았고, 오히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멸망하고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기적으로 요나 시대의 아이들이 커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기수들이 된 것입니다. 이웃과 자식, 남편을 미워하면 할수록 그들은 두고 두고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의 졸열한 태도를 통하여 현대 교회의 완고한 모습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우리보다 더 악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나서의 결말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는 박 넝쿨에 관심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니느웨에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니느웨에 관심이 있습니까? 과연 니느웨의 원수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요나처럼 변명하고 도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 역시 요나처럼 박 넝쿨을 사랑하고, 니느웨의 원수들을 미워한다면, 저들은 앗수르가 되어서 우리를 두고두고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과 친족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저들 역시 이 다음에 우리를 괴롭히는 앗수르가 될 것입니다.
요나서는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에 대답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나는 그 후에 어떤 모습을 취했을까요? 지혜로운 선생님과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문제지를 사 줄 때에 해답지를 일부러 빼버립니다. 요나서에 해답이 실수로 빠졌을까요?
그 해답은 우리 자신이 써야 합니다. 만약 요나가 그 일을 완벽하게 감당했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벌써 세상은 종말을 고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해답이 빠져있는 것은 각자가 해답을 쓰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선지자가 되고, 제사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사명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기껏 복음을 전하고 니느웨가 구원을 얻자 분을 내고,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요나는 사명을 포기하고 오히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사명을 포기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요나처럼 박 넝쿨을 사랑하여 자신의 오두막을 짓고 성도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현대교인들이 자신의 가정과 직장에서 선지자와 제사장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주님 다시 오셔야 합니다. 이번 성탄에도 우리 교회와 가정에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저 니느웨의 원수같은 자들에게도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인들은 주님 오셔서 니느웨를 심판하고 자신들을 구원하여 휴거되기를 기다리고 기도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분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죽어라고 전도를 싫어합니다. 성경공부, 기도회는 참석하는데 전도를 싫어하고 무서워합니다. 요나처럼 두 번이나 죽더라도 전도 못하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회나 부흥회, 성경공부에는 열심입니다. 그러나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명을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경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요나서의 사랑의 이야기(Love Story)가 니느웨와 요나와 같은 저들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강진구 목사(미국 애틀란타 아가페 선교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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