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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허무시는 예수님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하나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405장)를 지은 죤 뉴톤 목사가 큰 비를 만나 길가에 있는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그 때에 죄수를 호송하는 마차가 그 집앞에 서더니 보안관이 나와서 쇠사슬에 결박된 죄수를 무자비하게 끌어내어 진창이 되어 있는 길로 짐승 같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죤 뉴톤 목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오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나 같은 죄인에게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지옥에서 마귀들에게 저렇게 결박당해 끌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나 같은 저주의 사람에게 찾아와 주심을 감사드립니다.’고 기도드렸다.
이것은 죤 뉴톤의 기도만이 아니다. 수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이다. ‘그처럼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이처럼 보잘 것 없는 곳으로 찾아오십니까?’ 자격도 없을 뿐 아니라 더럽고 냄새나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 하나 채워 주시면서, 하늘나라의 복을 받게 하시고, 하늘 나라의 일꾼을 삼으셔서, 하나님의 동역자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에 오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BC722년 앗수루제국에 멸망당한 후에 앗수루의 이민정책에 의하여 타민족들과 혼인하여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상실하였다. 순수한 이스라엘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들과 같이 불결하게 생각하여 상종을 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갈릴리 지방에 살고있는 유대인들이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도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골짜기의 먼길을 택하고 있었다. 종교적인 관행도 다르고(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사나에서 예배드림), 민족적인 순수성도 상실하고, 성경도 다른(사마리아인들은 모세 5경만을 중시함) 이단적인 사마리아도 지나거나 그들을 만나는 것은 그들의 더러움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지방에서 갈릴리로 내려 가시면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셨다(3,4절). 예수님은 상종할 수 없는 더러운 지방으로 오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소문난 여인을 만나시고 대화하고 있다. 예수님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그들과 헤어지고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 남자와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있다. 사라마들의 수근거림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해서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는 12시에 물 길러온 한심한 여인과 예수님은 만나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상식의 장벽과 관행의 장벽과 지역적인 장벽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막힌 담을 허시는 삶의 연속이었다. 예수님은 사관에 누울 곳이 없어 마굿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우셨다. 짐승들의 음식물 통, 더러운 냄새가 베어있고 새까만 것들이 묻어 있는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거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하던 악명 높은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유대지방이 아니라 갈릴리 시골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이셨다. 예수님은 해골이라고 하는 곳에서 (요19:17)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예수님은 소외된 곳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더러운 것을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교제가 금지된 사람들과 만나시고, 상종해서 안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고, 넘어서 안될 경계선들을 깨뜨리시며, 저 건너편으로 가셔서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나누셨다.

나 같은 자에게 찾아오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오신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가지 중요한 도전을 주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오셔서 은혜의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예수님의 삶의 모델을 따라서 우리도 장벽을 허물고 하나되는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노예선 선장으로 악한 짓을 하던 죤 뉴우튼에게 찾아오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죄악의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살기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던 사울을 찾아와만나시고 그를 변화시켜 이방인의 대사도로 삼으셨다. 부활의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에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의 맹세를 하던 나약한 의지의 사람 베드로를 열두제자들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만나 주셨다. 그리고 세 번 ‘네가 나를사랑하느냐?’고 물으심으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죄를 벗겨 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말씀하심으로 그를 새 일꾼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나약한 의지 때문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자들,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 우리에서 저주의 삶을 사는 자들까지도 영접하시고 만나시고, 하늘 나라의 영광과 은헤로 채워나가신다.
예수님이 거기에 오심은 단순한 인간적인 만남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능력이시오, 기적이시오, 사랑이시다. 예수님이 거기에 오심은 하나님의 기적이 거기에 들어오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역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새창조가 일어나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열등감의 사람이요, 수치와 죄책의 사람이었다. 그의 남편들이 그녀를 버린 것인지, 그들이 일찍 죽은 것인지, 그녀가 그들을 버린 것인지에 관해서 성경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에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 남자와 살고 있다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몇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녀가 내면적으로 엄청난 상처와 저주를 안고 살고 있다는 점이다. 한번의 결혼과 한 번의 헤어짐만으로도 절망과 저주와 상처가 찾아오거든 하물며 다섯 번의 헤어짐을 생각해 보라. 하나하나의 헤어짐마다 분노와 절망과 수치와 죄책과 싸움과 악독이 들끓었을 것이다. 그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저주와 한의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그녀는 외적인 압박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압박일 수도 있고, 그녀의 내면에 느끼는 압박일 수도 있다. 어째든 그녀는 사람들을 피하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앗다. 그래서 그녀는 12시에 물길러 나왔다.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잠자는 시간이어서, 특히 여인들이 이 시간에 밖에 나와 돌아다니면 남자를 찾아 다니는 그렇고 그런 여자로 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오해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물을 길러 나왔다. 이것은 아마 우물가에서 사람들과 부딛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여자를 만나셨다. 이 여인이 예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녀에게 들어옴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이 그녀에게 들어왔다. 예수님과 그녀의 만남은 단순한 인간들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이 그녀에게 흘러들어 옴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12시에 물길으러 왔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이 모인곳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의 속에 있는 두려움과 저주가 끝이 나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그 속에 일어났다. 과거에는 자기의 행한 모든 일을 숨기고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29절)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자기의 더러운 과거가 자기를 쏘는 가시로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변화되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기적에 동참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그 만남으로사마리아 여인은 성경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주님이 오시는 날 까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사랑을 받는 여인이 되었다. 그녀가 비록 저주와 상처의 여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축복과 치료의 사람이 되었다. 오늘도 우리 주예수님은 한 숨 쉬는 당신에게 오셔서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시기를 원하신다. 그 분은 당신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당신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만드실 것이다. 주님을 구하라.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라. 예수님을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오셨다는 사실은 첫 번째로 낮은 곳에 오셔서 작은 자를 영광의 일꾼으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가르치며 두 번째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모델이요 가능성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모델과 인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마리아로 내려갈 것을 촉구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교제가 금지되고, 상종해서는 안된다고사람들이 주장하는 저주와 상처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돌보며 섬길 때에 예수님을 바로 그곳에서 생명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생명이 숨쉬는 목회,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일어나는 목회를 원한다면 사마리아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며, 에수님께서 돌보아주기를 원하는 사람들, 치료와 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목회의 근본적인 의미이다. 그곳으로 내려가는 목회가 우리의 진정한 모델이다.
우리민족은 무언가 특별한 거이 되고자 애쓰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갈망하여 모든 험한 일들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의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갖는 아주 특별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약간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지만 이 만큼이라도 급진적인 발전과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우리 민족의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 주고 있다. 그것은 지방색과 지역주의를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이다. 여러 가지 차별주의를 만들어낸 뿌리이다. 이런 사상이 교만과 열등감, 자존심과 수치심, 자랑과 죄책의 심리적 상처들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무언가 특별한 성취를 사모하고, 특별한 성취를 인간 그 자체 보다도 더크게 생각하는 성취중심의 가치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드럼메이저 본능
이것을 말틴루터 킹 목사는 드럼 메이저(Drum major) 본능이라고 불렀다. drum major는 본래 악장 또 밴드리더를 의미하는 말인데 자기가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이것은 느브갓네 살왕의 지구 중심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의 꿈을 의미한다. 이 꿈을 가진자들, 즉 드럼 메이저 본능은 우리 인간을 위대한 고지를 바라보게 만들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게 만든다. 이런 본능은 사람들보다도 자기의 꿈을 더 크게 만들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 보다도 저 멀리 보이는 꿈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여기에 인간상실을 만들어 내고 자기 상실을 가져오게 만드는 역동성이 있다.
예수님은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드럼 메이저본능을 없애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에수님은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본능은 인정하시면서, 그 본능을 성취하는 길을 바꾸어 놓으셨다. 세상사람들은 사마리아를 피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가르친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올라가라고 가르친다. 더럽고 추하고, 낮은 곳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가르친다. 지배하고 다스리고 권세를 부리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에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내려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존귀한 자 보다는 소외된 자, 도움이 필요한 자, 상처입은 자, 저주 받은 자들을 만나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고 가르친다. 예수님 자신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구유에 내려와 누우신 분이요, 골고다로 가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입으신 분이시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자가 되셨으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다.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모델은 낮은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것이다. 상처와 저주의 사람들을 섬기며 돌보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으며, 지금도 부르시고 계시고 앞으로도 게속하여 사마리아로내려가라고 부르실 것이다.
우리의 뛰어남은 지배와 소유와 성취의 뛰어남이 아니다. 우리의 뛰어남은 내려가는 뛰어남이요 더 많이 내려갈수록 더욱 뛰어나며, 더 많이 버릴수록 더 뛰어남이다. 우리의 뛰어남을 섬기며, 돌보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뛰어남이다. 지극히 높은 자가 되고,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는 자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자요, 더 많이 섬기며, 더 공감적으로 돌보며, 가장 많은 사랑을 전하는 자이다. 에수님은 저 아래사마리아에서 우리를 손짓하여 부르시고 계시다. 그곳으로 내려와 상처의 사람들, 저주의 사람들을 볼보라고 권면하신다. 영의 눈을 열어 주님의 손짓함을 보자. 영의 귀를 열어 주님의 권면을 듣자. 그래서 진정으로 차별의 장벽이 깨어지고, 저주와 상처에서 해방되는 주님의 권능을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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