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도를 사랑해야 하는가(요일 5:1)

by 이재섭 posted Jul 1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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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나 또한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속하여 있는가 하는 것이 모호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 모호하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에 있어서나, 또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 두려움을 지니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는가 여부가 그렇게 모호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어진다(4:12)”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누가 형제, 곧 성도를 사랑한다면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확신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지극한 평강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되는가?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7) 성도에 대한 사랑은 어떤 사람의 기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인가 여부가 결정짓는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4:7) 그러므로 사랑은 선택조항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만 한다.”(4:21) 사랑은 우연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떤 사실로 성도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는가? 같은 배에서 나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형제를 사랑합니다. 무엇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기 보다 같은 배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 사랑을 위한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성경은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는 원리도 그와 같다고 가르칩니다. “성부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그 분으로부터 난 자를 사랑한다.(5:1)” 하나님이라는 같은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영적 가족으로서 상대를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면식이 전혀 없었던 목동 다윗을 만났을 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영혼 안으로 knit되었다고 밝힌 것입니다(삼상 18:1) 요나단은 단지 다윗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섬기는 자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 역시 그의 노래인 시편 16:3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자신을 즐겁게 해 주었던 그 어떤 것보다, 성도의 존재야말로 최고의 기쁨을 자신에게 주노라 밝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것을 들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성경은 그 사랑의 원형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 사랑이란 사랑 받지 않았음에도 행하는 것이다. “이것 안에 사랑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점에 있다.”(10)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반응에 개의치 않습니다. 심지어 사랑의 극치에 이르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조차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께서 죽음에 이르러서조차 자신에게 돌을 던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고 순교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2. 또한 사랑이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죄들을 위한 속죄(화해)가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다는 점에 있다.”(10). 아낌 없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주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왕권이었으며,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의 물질들을 지녔으면서도 궁핍한 그의 형제들을 보고서도 그의 마음을 닫는 그 누구라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할 수 있겠는가?(3:17)”라며 말과 혀로만의 사랑을 결코 사랑이라 부를 수 없음을 밝힙니다.

바지를 줄여 주시는 일을 하시는 성도님께서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주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산동안교회 한 형제는 생수 일을 하는데 단기 선교 여행을 다섯 번 다녀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월말이 되면 돈을 받아서 돈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하는 일이 있어 시간을 내기가 힘이 들지만, 이제는 월말로 시간이 잡혀도 담대하게 복음 들고 나가게 되었노라 밝혔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이 중 3 때 청송 교도소로 말씀을 전하러 가시다가 하늘나라로 불림을 받으셨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어 우리 교회 성도님들 못지 않게 늘 선한 수고를 행하는 형제를 바라 볼 때의 기쁨은 정말 큰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이 거듭났는가 여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나 장차 다가올 심판에 대해 두려워 않습니다.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계신 그 모습대로 우리가 태도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분 그대로,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4:18) 사랑한다면 그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심치 않아도 된다고 성경은 밝힙니다(3: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은 두려움의 마음이 아니라, 지극한 평강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일을 깊이 도모함을 통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안에 내가 거하고, 또 그 분을 내 안에 모시는 그 큰 기쁨을 평생 누리고 사시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늘소망교회 김희승 목사(www.preaching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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