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한 공포에 결연히 맞서는 믿음

by 이재섭 posted Oct 0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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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35-41)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소란스럽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주 받게 되는 질문은 “그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요?”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자살 행렬”이라 할만큼 그들의 장례를 교회에서 치루는 모습들을 지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과연 천국에 갔을 것인가를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더러, 그것은 월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 과연 자살에 이르도록 하는 절망이 과연 성도의 것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는 필요성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 어떤 환경에 의해서건 지극한 절망은 불신앙의 증거일 뿐이라 가르칩니다.

풍랑을 만나 배가 물에 잠기게 되는 것만큼 지극한 절망의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로서 잔 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뱃사람들이 바다에서 얼마나 강인하고 담대하다는 것은 이는 바다 위의 그들을 경험해 보면 알게 됩니다.
그들이 탄 배는 주께서 고물에서 주무시면서 이 소란에도 깨시지 않을만큼 큰 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고고학자들은 밝힙니다.

왠만한 상황에서는 제자들이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익사하게 되었다는 절망을 토로하는 것은 그 사태가 얼마나 긴박한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오늘 빛으로, 악성 댓글로, 부부간의 불화로, 불치의 병으로, 혹은 직장에서의 퇴출로 인해 현대인들이 직면한 절망의 이유 이상이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황급히 물을 퍼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배는 이미 가득 차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그 모든 사태에 개의치 않으시고 고물에서 주무실 뿐입니다. 그들은 워낙 다급한 마음에 원망섞인 호소를 주께 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폭풍을 잠잠케 하신 이후의 그들의 독백에 가까운 말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그 사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깨웠다기 보다는 단지 무관심해 보이는 예수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원망섞인 말을 토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성도들조차 절망하는 이유 둘 다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도 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람과 바다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그들 제자들을 절망케 했듯이 오늘 성도들 역시, 자신들이 직면한 그 어떤 특별한 문제는 주님도 그리 해결책을 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크심을 보기 보다 내 빚의 크기를 보며, 내가 지닌 돈의 크기를 보며, 내가 뒤집어 쓰고 있는 오명의 심각성을 보며, 부부간의 불화를 해결할 수 없는 이유들을 봅니다. 그리고 절망합니다.

절망의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혹 내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해결해 주시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절망하던 제자들은 “우리가 멸망해가는 것을 개의치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왜 그렇게 희미하냐?” “그렇게 믿음 없음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고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관심한 태도에 놀랐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조차 그들이 그렇게 동요할 수 있다는 점에 놀라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어떤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바다라는 상황조차도 능히 통제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상황을 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상황보다 더 큰 분이 계심을 알아 두려워 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 사람과 같이 동요되거나 침체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포지션입니다. 믿음은 돌연한 공포에 거부하여 맞서는 것입니다.

주님을 그같이 인식할 수 있었던 한 성도는 심지어 결핵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조차 아내에게 그간 해 주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슬퍼할 수 있었노라 1900년대 초반 이 땅의 선교사 제이콥 목사님이 증언해 주셨습니다.

점술로 생계를 잇던 박씨는 직업적인 면에 있어 잘 나가고 있었으며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신조를 바꿀 필요가 없었으나 신도가 되기로 결정하자 악령을 잡거나 추방할 때 쓰는 모든 도구들을 부수어버렸고, 열성적 제자가 되었노라 선교사님은 증언합니다. 그는 권서전도사가 되어 수천권의 성경을 팔았고 복음을 전했노라 밝힙니다.

시실리아의 귀족 출신이었던 아가타라는 자매는 관리들에 의해 머리가 풀려지게 되는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동료 성도들의 가난을 돕기 위해 수치를 무릅썼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고상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들이라는 점에 있습니다”라는 답변으로 인해 주후 250년 불에 태워졌습니다.

진짜 두려워 할 대상은 길들여지지 않는,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의 힘인 바다가 아닌 주님이었듯이 상황이 아닌 주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에 늘 대답되어지지 않은 문제들과 함께 삽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시는 만큼 대답치 아니하십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고물에 함께 계신 주님을 기억하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상황을 지배하라 하십니다.

김희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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