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요한 복음 8:1-11)

by 이재섭 posted Dec 0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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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 복음 8:1-11)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영화의 가장 클라이막스는 유괴범에 의해 아들을 잃은 여인이 교도소에 찾아가서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했을 때, 유괴범이 이미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함을 받았고 마음을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라고들 말합니다. 여인은 ‘피해자인 내가 용서해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이 클라이막스라고 이해할만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끼친 그 어떤 해악으로만 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상대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그것이 죄요, 그 손해 끼친 것을 갚으면 죄를 갚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과 이전의 용서나 긍휼은 없습니다.

그 같은 사람들의 죄 인식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신은 어쩌면 제 3자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잘못하지 않는 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정에 대해서 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누구에게 잘못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뇌물도 그 누구에 대해 직접적인 해악을 끼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도덕적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찜찜할 뿐입니다. 담배 꽁초를 길에 버리면서도 아무런 죄책이 없습니다. 돈을 주고 성을 사는 문제에 있어도, 학연 지연을 들어 공사를 따려고 하는 시도에 있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배운 것과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도 그것이 죄악인 줄 알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그 누구에게 특별한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하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뭘 잘못했냐는 것입니다. 내가 왜 지옥 갈 정도로 죄인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관계되어진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가 죄 없는 거룩한 자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녀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지은 간음죄로 인해 그 누구의 가슴에 못을 박았느냐를 묻지도 않으십니다. 그 여인이 그 상대자의 부인과 가족에게 끼친 죄악에 대해 사죄를 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죄치 않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간음한 남자의 가족들이 용서해 줄 것인가 여부도 묻지 않고 죄를 묻지 않겠노라 밝히신 것입니까? 왜 피해는 그 가족이 입었는데 용서는 예수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까? 죄란 하나님께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을 돌로 치려고 서 있던 이들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물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식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돌을 던질 만큼 의로운 자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악한 자들로만 구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이 든 사람들로부터 떠나갔습니다. 오래 산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용서 받아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박윤선 목사님께서 “나는 80년 묶은 죄인입니다”라고 밝히셨던 바로 그 고백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들은 여인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 또한 타락의 희생자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품을 때 그는 용서케 됩니다.

그는 ‘예물을 드리다가 속상하게 한 사람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그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려’ 합니다. 상대가 속상하게 있는 것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남편을 잘 대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바울 사도는 그것이 흠없는 교회됨을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이 나와 너와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 분과의 관계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렇기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있을 수 있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그 안에서 죄됨을 인식해 낼 수 있는 사람이요, 일반사람들에게는 죄라 인식되어지지 않는 무정함 조차도 자기 안에서 읽어 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추수감사절 헌금). 그는 임금을 내일 주마 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압니다. 피던 담배꽁초를 길에 버리거나, 여러 사람들이 있는 데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밤 문화에 술로 동참하는 것도 죄악임을 읽어 내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아무 윤리적 가치도 지니지 않아 보이는 전도의 일에 우리는 최선을 다합니다. 전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최고의 가치를 지닐 뿐 세상은 오히려 나쁘게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가장 기뻐하신다고 밝히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에 그 일에 힘을 씀으로 그 하늘 아버지의 기쁨을 구하고자 합니다.

우리들 각각은 우리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그 분의 기쁨을 위해 지금 누구를 용서하며 긍휼이 여기려 하고 있는가? 그 분이 기뻐하시는 적극적 의를 위해 나는 무엇을 힘쓰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물어야 하겠습니다. 그 물음이 있어야만이 오늘 귀한 시간 내고, 귀한 물질을 드리러 여기 나와 예배 드리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소망교회 김희승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