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에 지나는 기쁨(아가1:1-4)

by 이재섭 posted Jul 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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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에 지나는 기쁨(아가1:1-4)

고대 한 랍비는 아가서는 ‘이스라엘이 받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선물이며, 모든 경전 중에 가장 거룩한 책이다’ 고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최대의 축일이 되는 유월절과 무교절의 8일 동안에 아가서를 노래로 불렀습니다.
잠언은 성전의 뜰에 해당되고, 전도서는 성소에 버금가며, 솔로몬의 아가서는 지성소에 비견되었습니다. 아가(왕중 왕)서는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로 스스로 불립니다. 솔로몬의 노래 중에 아가서처럼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다른 어떤 것도 아가서와 비견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아가서는 Canticles(찬송가)라는 시리즈로 된 노래입니다.

아가서를 푸는 열쇠(key)
아가서는 어려운 책이기 때문에 아가서를 읽는 데 필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말씀이신 예수가 아가서를 푸는 열쇠입니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교회는 주님의 사랑하는 신부입니다. 아가서에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뜻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를 부부관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더럽고 추한 자신의 신부를 구하러 이 땅에 오신 최고의 신랑입니다.
당신의 신부가 음란한 데 뒹굴고 자신의 몸을 더럽혔습니다. 그 신부가 배반하고 신랑을 떠났습니다. 결국은 비참한데 이르게 되고, 더욱 못된 율법(律法)의 신랑을 만나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고 차라리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예수를 떠난 교회의 모습이며, 주님의 신부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입맞춤(kiss)
(아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우리는 입맞춤(kiss)를 흔히 욕정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입맞춤은 주로 순결하고 절실한 사랑의 표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화(聖化)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의 신기하고 놀라운 사랑이 눈앞에 보입니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의 체험을 하는 신부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주의 피로 씻김을 받은 거듭난 자만이 이 놀라운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된지라” 여기에 하나님의 입맞춤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맞춤으로 아담이 생령(living soul)이 되게 하시고,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입맞춤은 속죄의 한 표시(sign)입니다. 이는 평화의 증거이며 사랑의 표시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원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서로 입맞추고 울었다고 하였습니다(삼상20:41). 도저히 화해하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에 서로 입맞추고 친구가 되는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요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형제들을 불러서 입맞추고 화평을 이루었습니다(창45: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집을 나간 탕자가 비참함에 이르러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에 그 아버지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남의 눈에 뛸 새라 버선발로 달려나가 입을 맞추고 잔치를 배설합니다. 이 풍성한 잔치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 아들을 잘 부탁하려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입맞춤입니다(눅 15:20).

네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화목케 하시고 우리와 입맞추기를 원하십니다. 입 맞추기를 원한다는 것은 주님과 내가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먼저 프로포즈(propose)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우리를 안으시고 입맞추십니다. 주님이 더럽고 추한 나에게 키스하기를 원합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여기서 입맞춤은(로딤 ??????) 복수(複數)로서 간절한 열망을 표현합니다. Living Bible에서는 이 말을 "Kiss me again and again"으로 번역합니다. ‘나에게 다시 또다시 입 맞추기를 원한다.’
나의 입술은 신랑을 배반하고 신랑을 부인하고 음란한데 더럽힌 입술이요, 거짓말하는 입술입니다. 이런 더러운 입술을 거룩한 신랑에게 내밀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먼저 입맞춤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을 때와 같이 나에게 입맞춤을 원하는 것입니다. 입맞춤은 직접적인 교제를 말합니다. 신랑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뜻합니다.
주님의 입맞춤은 포도주에 지나는 것입니다. 포도주보다 더 나은 것은 신부에 대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입맞춤은 최대의 환희로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포도주는 육적(physical 肉的)인 지상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주님의 입맞춤은 모든 기쁨들 중에 뛰어난 영적(spiritual 靈的)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의 포도주와 같이 일시적이고 조건적인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콧대가 센 여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스칼렛 오하라’는 정열적이고 야망이 큰 여자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에 그녀의 큰 야망은 아무 남자와 닥치는 대로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버틀러’라는 사람은 스칼렛의 당돌하고 엉뚱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를 넉넉히 포용합니다. 버틀러는 스칼렛이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혜성처럼 나타나서 도와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칼렛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어느 날 버틀러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랑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분이 아닙니다.
잘난 여자는 콧대가 높습니다. 현대 여성들은 특히 저마다 개성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남녀 관계에서도 자신의 개성을 주장하고 콧대를 꺾지 않습니다. 남녀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면 할수록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로가 다른 개성과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인 사이나 부부 사이에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가정문제는 주로 아내 때문에 발생합니다. 아내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남편들은 아내보다 더 강합니다. 남편의 질투는 여자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은 남편보다 더 강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남편이신 주님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참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고 겸손하시지만, 주님은 결코 약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보다 강하고 고집이 세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정과 교회에서 문제에 부딪힐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염소처럼 목자를 따르기를 거부하면 할수록 문제와 고통만 더하게 될 뿐입니다. 언제든지 내 뜻이 주님의 뜻과 상치될 때에는 즉시로 내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하고 부인하고 떠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시며 구애(求愛)하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똑 같은 사랑의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요 21:15-17).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입맞추기를 원하십니다. (요20:22)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주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입 맞추기를 원하신다. 그 거룩한 입맞춤을 통해서 지금도 그의 고귀한 생명을 나누어주십니다. 이 시간 주님과의 긴 입맞춤을 통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뵈옵고 진실한 사랑의 밀어(密語)들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네 기름이 향기로와(아 1:3)
(아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이 향 기름(싸 )은 기온이 45도까지 올라가는 기후에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여인들은 햇볕 때문에 크림을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신부는 세상의 천박한 여인들처럼 싸구려 향(싸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좋은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신랑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스런 향기입니다. 신랑의 인격은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풍성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다” 이 향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형제와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신랑의 좋은 향기가 온 천지에 진동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처녀들이 우리의 신랑을 흠모하고 우리 사이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그의 모든 피와 향 기름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갈보리의 언덕에는 엄청난 향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이 향기는 신랑을 믿고 흠모하는 자들에게는 사랑과 찬송의 향기이며, 승리와 영광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싸만)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이며, 이기게 하는 향기이다(고후12:14-15).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죽음의 냄새(향기)가 됩니다. 그는 우리의 부요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시고 희생하셨습니다(고후8:9). 신랑을 중심으로 그의 신부인 교회들이 성령의 내주(內住)를 통하여 모여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에 바로 나를 사랑하는 주님이 쏟아 부은 향 기름이 있습니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아 1:4)
(아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침궁으로 이끌림은 신랑의 독점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둘 만의 사랑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결론입니다. 주님과 결혼함으로 주님과만 입맞춤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길에는 아무런 방해도 없음을 신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넉넉히 극복하고 사슴과 같이 달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잘난 신랑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달린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앞에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보조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견인의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이끌어주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강력한 사랑의 줄로 주님께 메여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잘난 신랑은 만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강력한 자석처럼 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은 참으로 매혹적이며 매력적인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주님의 마력에 끌려서 주님을 찾아 주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가 길을 보여주고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을 따릅니다. 우는 애가 엄마의 품을 파고 들 듯이, 송아지가 엄마소의 뒤를 따르듯이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면 알수록, 신랑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집니다. 바울은 참으로 많은 체험을 하고 삼층천까지 갔다 왔으나, 주를 더욱 알기를 소원했습니다(고후 12:2). 그만큼 주님과 함께하며 그를 알아 가는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설(paradox)이지만 진리입니다. 주님은 나를 이끄시고 나는 오늘도 주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
이제 신부는 신랑에게 이끌림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왕의 침궁에 이끌림 받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결혼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끄시는 자가 항상 앞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은 언제나 앞서가시며 길을 내십니다. 먼저 위험을 제거하시고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원수는 사방에 덫을 설치해 놓고 이 사랑을 방해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은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생명 주시기 위해 입맞춤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육신을 입고 오신 말씀에 대해, 우리의 사랑 많으신 신랑에게 죽음의 입맞춤을 하였습니다(눅22:47).
유다의 입맞춤은 은 30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人子)를 파느냐?” 그러나 마리아는 겸손히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그의 발아래 엎드려 그 발에 입을 맞춥니다.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드리고 생명의 키스(kiss)를 나누었습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영원토록 기념이 되었습니다(마 26:13). 우리가 악한 것의 유혹에 넘어가면 돈 때문에 주님에게 죽음의 키스를 하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지만, 마리아처럼 영적으로 깨어 주님과 생명의 키스를 나눌 때에 포도주에 지나는 기쁨을 맛보게 될 뿐 아니라 영원한 기념이 될 것입니다

강진구 목사(미국 애틀란타 아가페 선교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