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학교서 師弟로 만나 인생의 동지로…

by 이재섭 posted Jan 2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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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의 사람人] 서울 법대생, 맹학교서 과외 봉사를 하다가…

… 남형두 교수와 김영일 교수의 '특별한 30년 우정'

1983년 봄, 인연
맹학교에 과외 봉사 서울법대생, 배움에 목마른 맹인 고교생 만나…
점자 붙들고 씨름하던 그들… 앞 못보는 학생은 대학에 갔다

2012년 봄, 희망
남형두, 잘나가는 변호사 하다 사회 치료하려 로스쿨 교수 돼, 김영일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장애인 복지 함께 만들어간다"

김영일, 학업에 눈 뜨다
타자기로 밤새 리포트 쳤죠 잉크 떨어진 줄 모르고…
매순간 포기하고 싶었지만 희망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남형두, 인생에 눈 뜨다
16년간 로펌 변호사 하며 비정한 승부사로 살았다
영일이 보며 깨닫게 됐죠 法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책 디지털 파일만 있으면 단말기 통해 점자·소리로 출판사가 파일 제공하도록 저작권법 함께 개정했죠

장애를 넘어, 편견을 넘어
잎 먼저 나는 철쭉은 정상 꽃 먼저 피우는 진달래는 비정상이라 할 수 있는가? 장애도 하나의 개성일 뿐…

인왕산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날. 그는 비탈길을 뛰어올랐다. 서울대학교에서 경복궁 근처 국립서울맹학교까지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온 길이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교실엔 5명의 학생이 눈동자를 허공에 굴리며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을 고르는 그의 기관지로 청명한 산공기가 스몄다. 순간 자기 몸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캠퍼스에 하루도 최루탄이 터지지 않는 날 없던 때였다. 대학생 선생의 당황한 표정이 보일 리 없는 아이들은 책상 위에 수학 점자책을 올려놓고 수업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남형두(48) 교수와 조선대 특수교육과 김영일(44) 교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1983년 봄이었으니 30년 인연이다.

지난 17일, 남형두 교수(왼쪽)와 김영일 교수가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강의실에서 만났다. 30년 세월이라 두 사람의 기억엔 어긋나는 대목도 있었다. “우리 처음 만난 게 봄이었지.” “단풍 물든 가을 아니었던가요?” 분명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의 인생을 진심으로 격려하며 축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서울대 법대 2학년이었던 남 교수는 서울맹학교 고등부 1학년 학생들의 '무보수 과외선생'이었다. 안마사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지식만 가르치는 맹학교에서 그는 대학진학을 꿈꾸는 시각장애 청소년들에게 입시과목을 가르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마만 하고 살라는 법 없지 않습니까." 그 중 한 명이 김영일이다. 남 교수의 도움을 받아 그는 3년 뒤 연세대 교육학과에 합격한다. 93년엔 풀브라이트 장학생에 선발돼 미국으로 유학, 밴더빌트대 피바디교육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1년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임용된다. 지난해에는 임기 2년의 국립중앙도서관 장애인도서관지원센터 소장에 임명됐다.

김영일 교수는 "공부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남 교수님 성탄카드에 적혀 있던 글귀를 읽었다"고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을 거두리로다." 17일, 남 교수의 직장이며 김 교수의 모교인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린 자…김영일 이야기

―시각장애 1급이다.

"선천성 녹내장이었다. 색상과 명암은 구분할 수 있었는데, 여덟 살 때 사고로 다시 눈을 다쳐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안경을 쓰셨다.

"그냥 멋져 보이려고 쓴다.(웃음)"

―장애인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으셨다. 집안이 부유했던 걸까.

"부모님은 전남 무안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그나마도 내 눈을 낫게 하신다고 논을 팔아야 했다. 아버님은 내가 고1 때 돌아가셨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는 빈곤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피아노를 잘 치신다더라.

"목포 맹학교에 다닐 때 배웠다. 맹학교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 우리를 무대에 세우려고 담임선생님이 드문드문 가르쳐주셨다. 피아노가 좋아서 혼자서 매일 1시간씩 연습했다. 일본에서 발행된 점자 악보를 선생님한테 빌려서 통째로 외웠다."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셨나.

"책 읽는 걸 좋아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마련해준 '5분 동화책 읽어주기' 시간만 기다렸다. 지리, 사회 과목도 아주 좋아했다. 맹학교 선생님들이 만들어준 세계지도를 손이 닳도록 만져보면서 머릿속에 세계를 그렸다. 각 나라의 수도를 외는 것, 국내 각 지역의 특산물을 외는 게 내 취미였다. 세상의 모든 책이 점자로 돼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교과서만 해도 학년이 시작된 지 한두 달이 지나야 점역된 교과서를 겨우 받았다. 3월 새 학기가 되자마자 받은 책이라고는 '황강에서 북악까지'가 유일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전기였다."

―고등부는 서울맹학교에서 다녔다.

"안마사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직업교육 위주였다. 나 말고도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대학에 가고 싶어했지만 맹학교 수업만으로는 입시를 준비할 수 없었다. 그때 서울법대생이었던 남형두 교수님을 만난 거다. 우리 같은 아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을 꾸려 달려와 주셨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내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서울대 학생들에게 '과외'를 받는다니, 어찌 꿈이나 꿀 수 있었겠는가."

―남형두 교수 말고도 '선생님'이 몇 분 더 있었나 보다.

"김우진(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황덕순(현 한국노동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형님 등 남 교수님의 경성고·서울대 후배들이다. 고3 때까지 영어, 수학을 가르쳐주셨다. 황덕순 형은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경찰이 봉쇄한 대학교 담장을 넘어온 적도 있다. 평생의 은인들이다."

―연세대에 합격했다.

"당시에 시각장애인이 지원할 수 있는 과는 세 군데밖에 없었다. 요즘처럼 장애인 특별전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악물고 공부해야만 했다. 340점 만점에 20점을 차지하는 체력장에서 불리한데다, 한자 문제는 점자가 없기 때문에 예닐곱 문제를 그냥 틀려야 했다. 제도가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을 남 교수님과 후배 형님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대학 문을 뚫을 수 있었다."

―대학 4년은 행복하셨나.

"사실 감격은 잠시였다. 첫 학기에 18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어느 과목 하나 녹음이나 점자로 된 교재가 없더라. 한번은 수동타자기로 밤새 리포트 40장을 쳐서 제출했는데 교수님이 '왜 리포트를 쓰다 말았느냐'고 하신다. 알고 보니 타자기 잉크가 떨어진 줄 모르고 공타를 쳐댔던 거다. 정체성 때문에도 괴로웠다. 2학년 1학기에 남자 동기들은 전방입소란 걸 가는데 나는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도 아니니 제3의 성(性) 아닌가.(웃음) 우울하더라.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 사이로 내가 지팡이를 짚고 지나갔다는 걸 알고 서글펐다."

―그래도 대학원에 진학했다.

"1주일에 서너 권의 책을 읽어야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는 대학원 공부는 주로 녹음 봉사에 의존했다. 논문은 그때 막 나오기 시작한 PC로 썼다. 부팅하고 저장하기까지 모든 스텝을 외워서 작업했다. '한글이 열렸겠지' '저장이 되었겠지' 짐작해가면서. 저장 안 하고 작업을 끝내버린 적이 부지기수다."

과거 시각 장애인의 유일한 정보 접근 수단은 점자(點字)였다. 그러나 IT 발달로 디지털 파일만 있으면 모든 정보를 점자나 소리로 전환해 습득할 수 있게 됐다. / 연합뉴스 ―미국 유학 시절은 한국보다 나았을까.

“알바(ALVA)라고, 컴퓨터 화면을 점자로 전환해주는 단말기를 제공해주더라.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6년을 사용했다. 시스템은 선진적이지만 장애에 대한 개개인의 의식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지원되는 5년 동안 학위논문을 마치지 못해 1년을 연장해야 할 상황인데 당장 생계비가 필요해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학교 취업지원센터에 전화했더니 맹인이 일할 자리는 없다며 끊으려고 하더라.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당신의 수퍼바이저와 통화하겠다고 맞섰다. 전화를 건네 받은 센터장이 30여개의 구인광고를 읽어주었고, 그중에서 밴더빌트대학 공공정책연구소 일자리를 신청했다.”

―연구소 일자리는 쉽게 얻으셨나.

“전화로 내 연구분야를 설명했더니 현재 자기네가 진행하는 미국정신보건연구원 프로젝트에 딱 맞는 인재라며 좋아하더라. 그런데 통화가 끝날 무렵 내가 시각장애인이라고 밝히자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다. 인터뷰할 기회만 달라고 매달렸고, 약속한 날 내가 그동안 미국에 와서 쓴 논문들을 보여줬다. ‘좋다, 해봅시다!’ 하더라. 나중에 그 사람 하는 말이 화장실을 어떻게 다닐까 걱정되어 거절하려고 했단다. 이틀 만에 나는 연구소의 내부 구조와 주변 지리를 다 익혔는데 말이다.(웃음) 그만큼 편견이 심하다.”

―남형두 교수와의 교류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나.

“유학 오면서 끊어졌다. 한국 있을 때 교수님을 너무 물고 늘어져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사시 합격해 변호사 하고 계시니 툭하면 도와달라고 전화를 드렸지. 동료 시각장애인들 고소고발 사건부터 내 사사로운 문제까지 다 여쭤보고 해답을 달라고 매달렸다.”

―금의환향했다. 인간승리의 모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포기하지 않아서 이룰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큰 힘이 되어준 건 책이다. 대학 때 읽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잊을 수 없다. 내가 과연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적 물음에 나치를 체험한 프랭클 박사가 답을 주었다. 그런데 내 개인사는 적게 써달라. 일반 장애인들에겐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 수퍼장애인 신드롬은 사라져야 한다.”

◇로펌 변호사에서 ‘사회적 의사’로…남형두 이야기

김영일 교수의 ‘멘토’였던 남형두 교수는 나경원·원희룡 의원, 김난도·조국 교수로 유명해진 ‘서울법대 82학번’이다. 86년 사법고시 합격 후 법무법인 ‘광장’에서 16년 동안 변호사로 일했다. 로펌 변호사 시절 미국 워싱턴대에서 저작권법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2005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남 교수는 김영일 교수와 함께 2009년 장애인 관련 저작권법과 도서관법을 개정하는 데 기여했다. 국내에서 발행된 출판물의 디지털 파일을 장애인이 요구할 경우 출판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를 납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유명세를 치른 서울법대 82학번이다.

“나는 그 대열에 오를 인물이 못 된다. (웃음)”

―대학 2학년 때부터 장애인 봉사를 시작하셨다.

“봉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나한테는 탈출구였다. 군부독재의 암울했던 시절, 캠퍼스는 최루탄가스로 자욱하고 잔디밭엔 사복경찰들이 진을 쳤다. 캠퍼스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교회 선배를 통해 스무 살에 시력을 잃은 중도실명자를 알게 됐다. 그 사람이 서울맹학교에 다녔는데, 그를 포함해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장애인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철, 버스를 갈아타고 맹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공부하는 시간이 그 시절 나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이전부터 있었던 건가.

“맹학교를 오가면서 장애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실감했다. 맹학교의 위치부터 그랬다. 계단이 수십 개나 되는 산비탈에 지어져서 비장애인도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일곱 계단 오른 뒤 꺾고, 여덟 계단 오른 뒤 꺾고, 하는 식으로 지리를 외워가면서 아이들이 위험하게 뛰어다녔다. 기숙사는 불이 안 들어온 형광등이 더 많아 어둡고 우중충했다. 운동장도 손바닥만 했다. 안 보이니까, 뛰어놀 일도 없다고 생각한 거다.”

―앞 못 보는 ‘제자’를 연세대에 보내셨으니 대단한 실력이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지만, 영일이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스무 개를 알아들었다.(웃음) 눈 뜨고 봐도 어려운 수학 그래프와 함수를 영일이는 설명만으로도 기막히게 알아들었다. 그보다 대단한 건 영일이의 집념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이 기숙사를 같이 쓰는데, TV를 못 보니까 다들 라디오를 끼고 산다. 하루종일 프로야구 중계 아니면 음악을 들으니 공부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대학을 꿈꾸던 아이들도 ‘내 주제에 무슨 대학’ 하면서 지레 포기한다. 점역된 영어사전은 A자 한 편만 보통 사전 1권 분량의 두께가 된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한 영일이의 토플 점수가 613점이었다. 나보다도 기십 점이 높다.(웃음) 공부 끝나고 학교 앞 분식점에서 라면 한 그릇씩 나눠 먹던 때가 엊그제 같다.”


“형님의 오른팔은 언제나 든든하고 따뜻했습니다.” 남형두 교수의 팔을 꼭 잡은 김영일(왼쪽) 교수가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었다. / 이명원 기자 ―대학에 진학한 후로도 남 교수께 의지를 많이 한 모양이더라.

“지금도 목엣가시처럼 걸리는 일이 있다. 대학원 때인가, 점자단말기를 한 대 사줄 수 있느냐고 연락이 왔더라. 그때 돈으로 600만원이 넘어서 망설여졌고 끝내 들어주지 못했다. 그때의 미안함, 거절당했을 때 영일이가 얼마나 참담했겠나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2001년 박사학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김 교수가 먼저 전화를 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웃음)”

―16년 동안 유명 로펌인 ‘광장’에서 일했다. 고액의 연봉을 포기하고 왜 대학으로 가셨나.

“치열하고 비정한 승부사들의 세계에서 살았다. 재판에서 승소하고 돌아온 어느 날, 가족들 앞에서 무용담을 들려줬더니 초등학생 둘째 아이가 그러더라. ‘아빠, 그러면 아빠한테 진 상대방이 너무 불쌍하잖아.’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에 의해서 패배를 맛보는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던 거다.”

―워싱턴대학에서 저작권법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몇 안 되는 저작권법 분야의 권위자다.

“광장 시절 속옷업체인 ‘제임스 딘’의 변호를 맡은 적이 있다.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의 유가족이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가 승소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저작권에 흥미를 갖게 됐다. 94년부터 4년간 진행된 소송을 중심으로 석사논문을 썼고, 내친김에 박사까지 했는데, 학위 받고 돌아오니 한류와 함께 저작권이 초미의 관심사가 돼 있더라.”

―김영일 교수와 재회하신 뒤 장애인 복지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건가.

“박사 마치고 돌아온 김 교수와 다시 만난 날 그의 손에 점자정보단말기가 들려 있었다. 아래한글, MS워드 같은 텍스트 파일이 기계 안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점자 또는 소리로 전환됐다. 점자책, 녹음에 비하면 혁명적인 변화였다. IT기술의 발달이 시각장애인들에게 ‘눈’을 제공한 셈이다.”

―김 교수와 함께 추진한 저작권법, 도서관법 개정으로 출간물의 디지털 파일만 있으면 점자변환단말기를 이용해 시각장애인들도 그때그때 새로 나온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출판사의 디지털 파일 제공이 강제조항은 아니라고 들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완성된 인쇄활판을 통째로 넘겨주는 셈이니 위험한 일이다. ‘저작권’과 ‘장애인의 정보접근권’이라는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저작권이 도로의 턱 같은 존재다. 그들을 위해서 턱을 깎아주자는 거다. 반칙하는 사람도 물론 생길 거다. 마치 장애인 주차구역에 비장애인들이 가짜 발급증을 받아 주차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 주차면을 없앨 것인가. 출판사의 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의존하는 조항이다. 지난해만 해도 270여개 출판사가 파일을 보내주었다. 김 교수는 요즘도 틈만 나면 출판사를 찾아다닌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로 임용될 최영만 해도, 그를 사법시험에 합격시키려고 사회복지관 전 직원이 매달려 타이핑하고 녹음 봉사를 했다더라.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다.”

미국 유학 시절의 김영일 교수가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을 찾은 모습. / 조선일보DB ―장애인의 책읽기를 왜 그리 강조하시나.

“헌법재판소 구성원이 바뀔 때마다 스포츠마사지협회가 위헌소송을 낸다. 안마사를 시각장애인들만 할 수 있게 허용한 것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거다. 99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양 1마리를 빼앗는 격이다. 시각장애인은 안마사라는 직업밖에 선택할 길이 없지만, 비장애인은 만 가지의 직업 중 하나를 못하는 것뿐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을 기회와 권리를 우리 사회가 부여해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책을 읽어야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안마사 외의 다른 직업을 추구해볼 수 있지 않겠나. 위헌소송이 제기될 때마다 시각장애인들이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사건이 사라지려면 그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줘야 한다.”

―30년 전엔 스승과 제자 사이였는데, 이제는 두 사람이 협업하는 관계가 됐다.

“영일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작권이 장애인들에게는 도로의 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다. 매 학기 우리 대학에 와서 특강을 해주는데 김 교수가 강단에 서는 것만으로도 감동의 도가니가 된다. 그는 언제나 로스쿨 학생들에게 ‘사회적 의사’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메디컬 닥터’가 사람의 질병을 낫게 한다면, 법을 공부하는 여러분은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어달라고. 내가 한 학기 강의한 것보다 그의 한 시간 특강이 훨씬 강력해서 어느 땐 질투가 난다.(웃음)”

―연세대 장애학생지원센터 소장을 3년째 맡고 계신다. 신문에 장애인 복지와 관련한 기고도 참 열심히 하시더라.

“연세대는 사립대로는 처음으로 장애인 콜밴을 도입해 운행하고 있다. 전체 3만명 구성원 중 50명에 불과한 장애학생을 위해 전용차량이 캠퍼스 이곳저곳을 누빈다. 그러나 나는 장애인 콜밴보다 계단이 없는 저상버스가 도입되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다. 버스에 오르기 위해 휠체어 리프트가 가동되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며 불편을 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권교육, 소수자 배려교육이다. 특수교육은 반드시 통합교육으로 가야 한다. 잎이 나온 후 꽃망울을 터뜨리는 철쭉은 정상이고,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진달래는 비정상인가? 신체적 장애를 서로 다른 특성의 하나로 본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따뜻해질 것이다.”

◇눈물보다는 땀을 흘리고 싶다…에필로그

인터뷰 내내 남 교수는 김 교수에게 양팔을 빌려주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강의실로 갈 때, 화장실에 다녀올 때, 구내식당으로 갈 때 김 교수는 남 교수를 의지했다. 그러나 남 교수는 “우리의 관계가 봉사나 재능 기부의 차원이었다면 이렇게 오랜 우정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남 교수가 실수담을 하나 들려줬다. “밥을 먹는데, 딴엔 김 교수를 도와준다고 밥을 뜬 숟가락에 콩나물과 고기를 올려줬지요. 그런데 영일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형님, 반찬 위치만 알려주세요’ 하는 겁니다. 과잉친절이 실례가 된 거죠.(웃음)”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남형두(48) 교수와 조선대 특수교육과 김영일(44) 교수의 30년된 빛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김영일 교수는 비장애인 여성과 결혼했다. 연애담을 묻자 한사코 사양한다. 남 교수가 농담을 했다. “외모를 보고 결혼하지 않은 건 확실해요.(웃음)” 흥미로운 건 아내가 운전할 때 김 교수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앞이 안 보이지만 ‘○○수퍼 앞에서 좌회전, △△학교 앞에서 우회전’ 하는 식의 동네 지리는 물론 서울과 광주를 오가는 고속도로까지 훤하단다. “자주 오가는 길은 익숙하니까요. 특별한 재능이 절대 아닙니다.”

웃음이 많은 김영일 교수에게 “눈물도 많으십니까” 물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웃음엔 눈물을 감추려는 목적도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김 교수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눈물’에 대한 추가답변이었다. “대학 시절 자취방이 있던 공항로 육교를 올라 귀가하는 길에 힘들었던 하루를 한숨과 눈물로 정리하면서, 보이지 않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서울 하늘 아래 나처럼 장애로 인해 눈물 흘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지요. 그래서 유학을 갔고, 그래서 한국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자신과 약속했어요. 저는 가능하면 눈물보다는 땀을 흘리고 싶어요. 눈물을 흘리더라도 날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수많은 장애인과 함께 나누는 눈물이길 원합니다.”

2012.01.28. 조선일보 www.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