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this page
조회 수 354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이 선교사 목사 임직받은지 24년

이 선교사는 1985년 10월 15일 예장 동서울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습니다.
1975년 2월 남부교회 교육전도사를 시작으로 1997년 1월 이래 선교사로 사역 중입니다.
아래 글은 천사홈에 기록된 이 선교사 소개를 중심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출생 배경과 어린 시절

저는 6.25동란 직후 경북 안동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셨던 부모님이 전후 부산에서 정착을 시도하신 탓에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랜 유교를 바탕으로 한 배경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 안팎 때 부산에서 잠시 교회를 다녔던 큰 형을 따라 어린 저또한 교회 첫 발을 디뎠습니다. 하지만 큰 형이 교회에서 어떤 충격을 받고 출석을 포기함에 따라 중도에 멈췄습니다.
보릿고개 시절 유난히 어렵게 보내다가 끝내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한 채 부산을 떠나야 했습니다. 유리방황하던 중에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님을 설득해 열 두 살 가을 서울로 전입하게 되어 천막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천막학교에 세워진 성경구락부를 통해 신앙생활과 중단했던 학업을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얼마후 인근에 생긴 초등학교 졸업반에 편입해 우등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나어린 직장인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열두 살 겨울에 서울로 이주한 후 다시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린 마음이지만 제가 작정하고 교회를 나간 탓에 줄곧 교회를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소명)

 스무 살이 다될  무렵,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보다 확실히 알고 싶었습니다.  
 “주님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더 잘 알고 싶습니다. 아직 내 의지로 주님을 믿고 있사오니  주님을 잘 더 알게 해 주시고 친히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봉천동에 대형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하기에 수일 동안 그곳에서 침식을 하며 참석했습니다.
  마침 다니던 교회에서 밤마다 기도하고 계신 집사님들 몇 분 있었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관악산 건너 편 야산에 있는 등대교회 기도실을 알게 되어 자주 찾아갔습니다.

  아카시아  꽃 냄새가 온 산을 메우고 있던 어느 봄날, 친구와 집사님 그리고 권사님이 1평 남짓 조그만 이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기도를 시작한 지 약 두 시간 지나자 갑자기 눈앞에 번개가 번쩍 비취는 것은 같이 느껴졌습니다. 순간 그토록 막힌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의 세계가 열렸습니다. 새날을 맞은 것입니다.
  순간 천국 기운에 싸이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지 않았던 은사가 온 몸을 휘몰아쳤습니다.드디어 주님과의 만남이 확실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너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지금까지 지키고 이끌어 왔다.  나의 빛을 이 어두운 땅에 드러내거라. 내가 너와 언제나 함께 하겠다.”

  기도회를 주관하시던 집사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이분은 제게 신앙의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후일 인사를 가자 지금도 본래 있던 교회에 계속 나가시고 있었습니다(최근에는 노환인 듯 많이 불편해지셨습니다).

  산상 기도를 가진 다음 주일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찾아갔습니다. 그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오라고 몇 차례 부탁해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며 미루어 왔었는데 이제 내발로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주일학교 부장 장로님께서 내가 주일학교를 찾아온 것을 보고 바로 교사 겸 부장 대리를 맡기셨습니다. 이제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독교 교육에 관한 책도 구할 수 있는 대로 빌려다 읽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매일 철야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이 말씀이 내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어떤 은사보다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또 집사님이 장차 주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기도해 준 내용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수고들은 결국 주님께서 종을 삼기 위함이었을까요.

  가을이 되자 교육 전도사님으로 와 계셨던 최 전도사님이 내게 신학을 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본래 나는 자선사업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래, 신학이 좋겠다.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역시 뜻 깊은 일’ 이라 생각되었다. 이는 물론 주님의 부르심과 응답 즉 소명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보다 확실히 안 후에 받겠다며 그 동안 미루어 왔던 세례도 신학교 진학을 앞두고 서둘러 받았습니다.

  1974년 교회 전도사님이 졸업반으로 있었던 성결교신학교(현 안양성결신대)를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연단을 많이 받아서인지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습니다.
  학교 교정을 울려 퍼지는 찬송가 소리, 교수님들의 강의가 새롭게 나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동안 비교적 일찍이 사회를 경험하고도 주초를 멀리할 만큼 훈련된 터였습니다.

  1학년 봄 야외예배를 갔다가 그만 비가 왔습니다. 반장이었던 전태규 학생(현재 서광교회 목사)이 보물찾기를 하려던 것을 그냥 추첨으로 대체하기로 했습니다. 내겐 주어진 쪽지를 펴보니 ‘예수님’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의 1등을 의미했습니다. 상으로 커다란 예수님 얼굴이 들어있는 액자를 받았습니다.
  집에다 걸어 놓으니 비록 하나의 그림이지만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자야, 난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나는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목회자로 사역보다 선교사가 더욱 마음이 끌렸습니다.  또 미지의 땅에 복음을 심기 위해서는 자신이 충실한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나 자신이 다시 현지 지도자 양성을 위해 가르쳐야 할지 모른다는 부담을 안고 공부해 나갔습니다.

  ‘분명히 어딘가 복음이 잘 닿지 않은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주님, 먼저 한 알의 잘 여문 밀알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혹 자갈 밭에 심기더라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신학을 수업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자주 나오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중국이나 미지의 나라 선교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다졌습니다. 복음의 수원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만일 그곳에 단 한 사람의 신자도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날 이런 부담이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하다면 기독교에 관계된 것은 모두 조금씩이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나중에 이 과목들을 다시 미지의 땅에 있는 영혼들에게 가르쳐야 될지 모른다는 부담이 왔습니다.

  도서관을 비롯해서 책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며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을 대비했습니다. 
성경원어에 관심을 갖고 학교 수업 외에 장국원 박사님 자택에서 있었던 원어 연구 모임에도 오랫동안 참석했습니다.  혼자 공부해 온 습관이 있어서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내게 직접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선교지에서 필요할 것 같아 교회 올겐으로 틈틈이 반주 연습도 했습니다.

군을 전역한 후 장로교 총회 신학교로 편입해서 학부와 신학부를 졸업하고 1984년 10월 17일 강도사로 1985년 10월 15일 목사 임직을 받았습니다. 현재 예장 합동 소속 목사입니다.

현재 시베리아에서는 러시아 현지 교단(침례교)과 협력해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현지 교회도 한국과 같은 교단이면 훨씬 유리하겠지만 선교지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마음을 모아 사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무살 나이에 장차 선교사가 되기 위해 기도한 지 35년 지난 지금 비교적 어려운 선교지로 꼽히는 동시베리아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인 이르쿠츠크에서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한 기도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 기도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던지 무조건 순종하고 따를 때 더욱 힘을 주십니다.

1997년 1월 24일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2006년 8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세계선교회(GMS) 소속 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2007년 1월 13일 사랑과평화의 교회 경력선교사로 영입되어 파송을 받았습니다.

이 선교사와 가족을 위해 그리고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여러 종족들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말아라.
사람들은
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 래리 스탁스틸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다가
여러분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말을 한 후,
다시 자신에 대한 생각을 계속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에 가치를 둡시다. +

한몸기도에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앞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아갑시다.

<사진설명> 이르쿠츠크 1번 교회(에반젤리칼 까이스까야)에서 딸 찬미의 동시통역
도움을 받아 자유스럽게 설교하는 이 선교사

  1. 러시아 대학생들, 첫 `한국어 올림피아드'

  2. 시베리아 나무들이 잎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3. 5월 9일은 러시아 '승전 기념일(전승 기념일)'

  4. 지부 선교사들 방문

  5. 흩어져 예배드려온 앙가르스크 성전 부지 구입- 신축을 위해 기도바랍니다

  6.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7. No Image 18Mar
    by 이재섭
    2010/03/18 by 이재섭
    Views 4607 

    조용한 러시아 영사관

  8. No Image 10Mar
    by 이재섭
    2010/03/10 by 이재섭
    Views 3794 

    3월 8일은 러시아 여성의 날

  9. No Image 09Feb
    by 이재섭
    2010/02/09 by 이재섭
    Views 3771 

    쉐마 교육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10. 우솔 시비르스크에 다녀왔습니다.

  11. 잃어버린 땅을 찾아서- 시베리아 선교사의 하루

  12. 요즈음 영하 35도를 오르내리고 있답니다.

  13. 새해 위로부터 내리는 복많이 받으세요.

  14. 영하 34도에 맞은 성탄절

  15. 축 성탄- 한 해동안 후원과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16. KOSTA RUSSIA 포스터가 나왔네요. 1월 26일 모스크바 집회를 위해 기도바랍니다!

  17. - 세계 선교의 중심되기 위한 부선선교포럼-

  18. 부르심과 응답~처음 마음 갖기 원합니다

  19. 아름다운 만남 아름다운 동행

  20. 일 만리(왕복 4000km) 기차 여행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14 Next
/ 14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