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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의 주인공/ 등단 작품


                                                                                                                                                                 이 재 섭
나의 부모님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피난민 틈에 섞여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고향인 안동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피난민들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부모님은 고향에 땅이 조금 밖에 없었던 터라 부산에서 정착을 시도했다. 나는 전쟁이 막 끝난 1954년 여름, 부산 동래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일용직으로 일하신 아버지의 수입으로 우리 가족은 생계를 꾸렸으나 무척이나 궁핍했다. 후손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토지를 일구어 놓으신 할머니는 당신 슬하의 자식 중 유일하게 고생하고 있는 아버지를 몹시 마음 아파하셨다고 한다.


내가 태어날 무렵까지 집 지을 땅이 없어 개울 위에 판자로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어머니는 습한 바닥에 차마 갓난아이를 뉠 수 없어 배위에 올려놓은 채 밤을 보내고 날이 새면 동래 역 안에서 매점을 하는 친구 가겟방에 뉘여 놓았다고 했다.
얼마 후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하역 일하는 큰 창고 옆에 딸린 집으로 이사했다. 이때 나와 다섯 살 터울로 첫째 동생 진이가 태어났다. 내가 8살 무렵 우리는 보기 좋은 집으로 이사했다. 동산 중턱에 있었는데 방이 여러 개 있고 마당도 있었다. 큰 형은 꽃을 심었다. 이 집으로 이사한 직 후 막내 동생 현이 태어났다.
 

우리 형편에 비해 무리해서 집을 장만한 것 같다. 형 둘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고 아버지의 건강마저 나빠져 노동을 계속하는 데 무리가 따랐다. 아버지는 10대 시절 나무하러 갔다가 허리를 다쳤는데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꼽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온 식구가 나서서 부업을 하고 조그만 장사를 해보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듯 위기감이 감돌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61년 6월,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다섯 살 난 동생 진이는 배가 고프다며 계속 울고 있었다.
 

“엄마, 나 배고파. 밥 줘 잉잉….”
진이의 울음소리가 먹구름처럼 집안을 덮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야들아, 미안하데이. 나도 어쩔 수가 없데이. 대신 오늘은 학교가지 말거래이.”
어머니는 굶주림에 지친 나와 형을 바라보면서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당신 몰래 학교에 갈까봐 아예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형은 6학년이 되도록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해 줄곧 우등생이었다. 형이 빈손으로 밖을 나서며 내게 눈짓했다. 내가 엄마 몰래 형의 책가방과 실내화주머니를 담 아래로 던져 주자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나도 그동안 결석한 적이 없었던 탓에 학교만은 꼭 가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당연히 학교에 가지 않으리라 생각한 듯 신경을 덜 쓰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 몰래 가방을 챙겨들고 학교로 향했다. 똑바로 걸으려 해도 몸이 자꾸 휘청거렸다. 이 정도 일로 학교를 결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느린 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갔다.
집에서 동래 역 근처에 있는 유락국민학교까지 약 15분 정도 걸린다. 학에 들어서면 외팔이 수위 아저씨가 교문을 지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팔 한쪽을 잃은 상이용사 아저씨였다. 교실이 모자라 우리 반은 운동장 한 편에 친 군용 천막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여름엔 거운 열기가 후끈거렸다. 더울 땐 천막 옆을 둘둘 말아 올린 채 수업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저마다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음식 냄새가 코를 찔러 견디기 힘들었다. 밖으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수돗가로 갔다.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냉수를 잔뜩 마셨다. 순간 머리가 잠시 맑아졌지만 기운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교실로 들어서서 뒤쪽에 있는 내 자리를 찾아갔다.
 

마지막 5교시는 미술시간이었다. 수업 시작 종소리가 나자 아이들은 크레용과 도화지를 꺼냈다. 부잣집 아이는 색이 많은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가지고 와서 책상 위에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담임인 최귀련 선생님은 아름답고 젊은 분이었다.
“오늘 미술 준비 안 해 온 사람 앞으로 나와.”
나는 일어나 힘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앞쪽 여학생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얘, 가만히 있으래이. 내가 도화지 한 장 줄게. 니 나가면 선생님한테 매 맞는데이.”
여학생은 스케치북 한 장 찢어 주려 들었지만 나는 못들은 척 그냥 앞으 계속 갔다.
‘선생님, 지금 우리 집이 어떤 형편인 줄 아세요. 도화지 살 돈이 있었다면 동생 먹일 빵을 샀을 거예요. ’
나는 마음속으로 항의하며 선생님 쪽으로 다가갔다. 우리 집이 제일 가난했든지 이날 미술 준비를 안 해온 학생은 나뿐이었다.
“손바닥 대. 앞으로 미술 준비 꼭 해와. 내가 때릴 때마다 크게 센다. 알았지?”
“네.”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란 듯이 손에 든 매를 내리쳤다.
“딱-”
“하나.”
“딱-”
“둘.”
“딱”
“….”
셋을 세려는 순간 갑자기 선생님이 한바퀴 빙 돌더니 앞이 안 보였다. 더 이상 숫자를 셀 기력도 없이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담임선생님은 깜짝 놀라 나를 업고 양호실로 데리고 갔다.
 

저- 양호 선생님, 전 지금 수업 중이라 얘를 잘 부탁해요.”
“예, 선생님 걱정 말고 제게 맡기소.”
양호 선생님은 남자였다. 내가 깨어나자, 한참 살펴보더니 물었다.
“너 밥 안 먹었제?”
“예!”
“며칠이나?”
“3일은 됐나 봅니더.”
“대단하구나. 그러고도 학교를 오다니….”
양호선생님은 밖으로 나가더니 빵과 우유를 구해오셨다. 지금 환자는 약 대신 음식으로 치료해야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담임선생님이 다시 와서 양호선생님께 물었다.
“어디가 이상이 있는 거 같아요?”
“글쎄요.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밥을 오래 안 먹었다나 봐요.”
“어머나! 저런. 얼마나 안 먹었대요?”
“사흘 정도 됐다나 봐요.”
 

두 선생님이 대화하는 동안 나는 침대에 앉아 양호 선생님 사 온 빵과 우유를 먹고 있었다. 집에 굶고 있는 동생이 생각나 빵이 자꾸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은 내 옆에 앉아 손을 붙잡으며 사과했다.
“진작 말하지. 미안하다. 나랑 교실까지 같이 갈 수 있겠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교실로 함께 갔다. 선생님은 나를 앞에 세워놓고 반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 친구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오랫동안 밥을 못 먹었대요.그래서 국군장병 아저씨께 보내려고 모은 위문품 중에서 음식물을 골라 내어 우리 친구에게 주려고 하는데 괜찮겠죠?”
“예!”
아이들이 큰 소리로 합창했다. 담임선생님은 위문품 주머니를 쏟아 여러 가지 음식물을 찾아내어 빈 주머니에 옮겨 담았다.
“이거 가지고 집에 가서 쉬어라. 친구 한 명을 같이 보내주마.”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위문품을 보내주기로 한 결정이 고마웠다.
“선생님 고맙심데이. 그렇지만 전 조퇴 같은 건 안 할라캅니더.”
“그래. 선생님이 조퇴로 처리 안 하기로 약속할게. 그럼 됐지.”
“예!”
나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담임선생님이 건강해 보이는 남자 아이 한 명을 불러 가능한 집에까지 업고 가라고 말했다. 친구 등에 업힌 채 학교 문을 나서 집으로 가는 동안 내가 그냥 걸어가겠다고 말해도 친구는 자기가 힘이 세다며 힘닿은 데까지 나를 업고 가겠다는 것이다. 친구의 등에 업인 채 위문품
자루를 열어보니 건빵이 보였다. 건빵을 꺼내 먹으면서 친구에게도 주려들자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고만. 니나 많이 묵어라.”
“야, 이상하데이. 군인 아저씨들은 부대에서 건빵을 주는기라. 그런데 왜 이 안에 이런 게 들어있지?”
군에 지원 입대한 큰형이 이따끔 외출 나올 때 건빵을 가져와 여러 번 먹어보았다. 큰형은 동생들이 걱정되었던지 건빵을 안 먹고 모아두었다가 외출할 때 가지고 나왔다. 먹을 것이 없던 터라 건빵이 입에 녹듯 맛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동생 진이가 굶주림에 지쳐 더 이상 울 기운도 없는지 힘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먹을 것이 잔뜩 든 주머니를 진이 앞에 쏟아 부었다.
“진아, 이것 보래이. 내가 맛있는 거 많이 가져왔데이. 퍼뜩 묵거라. ”
진이는 깜짝 놀란듯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누가 가져갈세라 입에 물고 양 손에 잔뜩 움켜진 채 좋아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도 놀라서 물었다.
“학교에서 이런 것도 주던?”
“예,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국군장병 아저씨께 보낼 위문품에서 조금 덜어 주었심더. 엄마도 하나 잡숴보이소. 엄마 몰래 학교간 거 잘못했심더.”
“고만 괜찮다. 언제 우리 형편이 풀릴꼬. 고생이 많제.”
 

셋째형은 중학교에 입학하자 도서부에 소속되어 많은 책을 빌려왔다. 난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형이 가져온 책을 대부분 읽었다. 이때 읽은 책이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운오리세끼가 되었다가 소공녀가 되기도 했다. 행복한 왕자가 제비를 시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모습이 마음에 다가왔다.
1964년 6월 7일 새벽,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다.
“야, 인나래이. 우린 오늘 이사 간다.”
아니 무슨 이사가 미리 한 마디도 없이 갑자기 떠나야 했을까. 내가 태어나 10년을 살아온 부산을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결석 한번 안 하고 학교에 다녔는데 친구들과 인사할 기회도 없이 떠나게 된 것이다. 미리 집을 정리하고 몸만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손실을 입은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송구스럽다. 동래 역에 가서 기차를 타자 북쪽을 향해 질주했다. 피난민 틈에 끼여 부산에 오신 부모님은 다시 피난하듯 어디론가 떠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한 채 유리방황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동안 읽은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만 것이다. 시일이 흐르는 동안 미운오리새끼가 백조의 호수를 만나듯 또다른 환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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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수상 소감
 

저는 책과의 인연이 비교적 빨랐습니다. 선뜻 책 한 권 보기 어려운 시절인 1963년 국민학교3학년 때, 중학교에 진학한 형이 도서부원이 되더니 거의 매일같이 책을 빌려왔습니다. 형 덕분에 종류를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형은 자주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이야기로 들려주었습니다. 집안 환경이 무척 어려웠지만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964년 여름,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유리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해 가을 전학 간 학교 가을 소풍날을 기해 초등교생활마저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읽은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하나둘 내게 다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열두 살 소년이었던 저의 결단과 노력으로 우리 가족은 1년 만에 서울로 입경해 판잣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얼마 후 사당동 철거촌 입주 자격을 얻었습니다. 엄청난 환경의 변화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때 찾아간 교회 천막학교(성경구락부)는 백조의 호수같이 제 마음에 평안을 주었습니다. 끊어진 줄 알았던 학업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더니 인근에 생긴 정규초등학교에서 천막학교 학생 모두 수용해주었습니다
우등으로 졸업하고도 진학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주경야독 끝에 중고교 과정 모두 검정고시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학점은행 제도에 힘입어 얼마 전 사회복지학 학사 자격까지 취득했습니다. 성장기의 용기와 주어진 몫을 조금이나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이 주는 힘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함께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전자전이랄까 큰 아이가 취학 연령이 되기도 전부터 엄청난 양의 책을 읽기 시작해 놀랐습니다. 선교사의 길을 택한 부모를 따라 세 자녀가 어린 나이서부터 낯선 땅에서 지내야 했지만 모두 잘 자라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교 후원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펼쳐진 생의 드라마에 제 자신도 놀라고 있습니다.
안식년 기간 중에 김종완 선생님 수필 교실을 찾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틈틈이 수필 수업한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습니다. 김종완 선생님, 조정은 주간님의 자상한 지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선배와 동료 문우님들의 친절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이 재 섭
 

1954년 부산 출생
성결대학교 3년 수학
개혁신학연구원. 총회신학원 졸업
서울성경대학원대학교(Th.M) 수료
(1985년 10월 15일 목사 임직)
1997년 1월 이후 중앙아시아 선교사를
거쳐 러시아 선교사(GMS소속)로 사역
김종완 수필아카데미 회원
전화: 010-2220-0091
e-mail: mrussia@hanmail.net
톡아이디 leejaesup
크리스챤문학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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