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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락부와 군목제도 창설에 공헌한 프란시스 킨슬러 선교사 부부
 


양화진 제1묘역에는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 선교사가 안장되어 있다. 그는 1904년 1월 13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여, 1925년 메리 빌 대학과 1928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10월 4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숭실대학 교수와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1970년까지 신약학 교수로 강의하였다. 그의 신약사상은 복음적이면서 극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중용의 학자였으며, 또 신앙을 생활화하여 실천에 옮기는 진실한 선교사로 전해지고 있다.

◇ 성경구락부와 군목제도 창설에 공헌한 킨슬러 선교사

프란시스 킨슬러(한국명: 權世烈, 1904-1992) 선교사는 평양에서 불우 청소년을 위한 성경구락부를 창설하여 빈민 아동교육에 힘쓴 고마운 선교사이다. 성경구락부 운동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종교, 지육(智育) 체육, 봉사의 4대 원칙에 따라 설립된 사회 선교기관이었다.

1929년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킨슬러 선교사는 어느 추운 겨울날 평양거리에 방황하는 소년 6명을 데려다가 평양 광문서점 2층에서 따스하게 위로하며 기도해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소년들은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모여서 킨슬러 목사의 기도를 받았다. 결국 킨슬러는 이들의 삶을 보다 낫게 할 수 있는 어떤 목적이 필요했고, 보다 희망찬 삶을 추구하는 무엇이 필요했다.

찾아오는 소년들에게 킨슬러 부부는 처음에 교사로서 가르치다가 “개척구락부(Pioneer Club)”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후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이 항일적(抗日的) 단체 성격으로 보이므로 조선총독부는 이름을 개칭(改稱)하여 줄 것을 요구하여 “성경구락부(Children's Bible of Korea)“라는 더 좋은 이름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당시 킨슬러는 평양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진지한 봉사 생활과 불우 청소년 돕기 운동의 고매한 정신 사상에 감명을 받은 제자들이 자진 호응하여 솔선해서 가르치는 일을 무보수로 봉사하며 불우청소년 교육에 참여하였다.

이때 사용한 교과서는 국어, 산수, 음악, 일본어들을 합본하여 프린트한 책을 사용하였으며, 초기에는 일주일에 5일간 매일 3시간씩 수업을 했다. 그리고 성경, 역사, 지리, 국어, 수학, 자연, 응급조치, 체육, 기도하는 법 등으로 확대하여 가르쳤다. 1933년에 이르러서는 중등교육 과정까지 실시했다. 1938년경에는 학생수가 5,000명이 초과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따라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결국 성경구락부도 폐쇄되었다. 그리고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었다.

그는 광복 후 1948년 다시 내한하여 대구, 서울 등에서 선교활동과 성경구락부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1949년 장로회 신학생들 중심으로 성경구락부 재건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울의 큰 교회 중에서 각기 성경구락부를 신설하여 운영하도록 협력했다.

1951년 그는 장로회 총회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52년에는 총회신학교 교장 대리를 역임하였다. 특히 6·25전란 때 그는 군목제도 창설과 운영에 공헌하였다. 피난민 구호와 포로 선교에도 힘썼다. 1951년 5월 7일에는 미국연합장로회 한국선교사 대표로 선임되었다.

1970년 9월 14일 정년으로 은퇴하고 귀국하여 미국 롱아일랜드의 센터모리츠교회에서 1976년까지 목회를 했다. 그 후 한인 이민교회를 돕는 선교사역을 감당하다가 1992년 1월 9일 캘리포니아(Duarte)에서 별세하였다. 묘비에는 “Served Korea for Christ 1928-1970”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땡그렁 땡그렁.”

어디선가 두부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마치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윗동네에 생긴 천막교회에서 글을 가르쳐 준다고 하기에 이웃에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우리 저기 가보자며 달려갔다.  바로 남성성경구락부란 곳으로 남성교회 안에 있었다.

평소 교회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으로 생각했다. 남대문교회 배봉오 집사님을 비롯해 몇몇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가난한 사당동 철거민 주민들을 위해 세운 것이라고 했다.

 미국 선교사님이신 권세열(미국명, 프란시스 킨슬러) 박사님이 북한 땅에서부터 시작한 성경구락부는 반드시 교회를 모체로 설치할 수 있다는 말에 따라,  선생님은 먼저 남성교회 설립을 위해 앞장섰다고 들었다. 자연히 남대문교회 청년들이 많이 합세했다꿈에도 그리던 동생의 학교 입학은 비록 천막학교였지만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된 셈이다.

  선생님은 나또한 학교에 다니라고 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학생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동생은 입학을 시키고 나는  학교에 편입하게 되었다

 

성경구락부는 아침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울 수 있어 어린 영혼을 일깨웠다. 특히 찬송가는 대개 어른 찬송을 불렀다. 비록 정규 선생님은 한 분도 없는 대신 할아버지 선생님을 비롯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구성되어 우리를 가르쳤다

금방 학생들이 400여명을 넘어섰다.  자연히 주일엔 교회 나오는 학생들도 많았다천막학교라 바람이 세게 불면 학교 전체가 넘어지기도 했다그래서 힘이 센 아이들이 천막 기둥을 잡고 수업을 하기도 하고 무너진 교실을 다시 세우기도 했다.

주일학교 예배 때면 아이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분반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따라 산으로 들로 흩어지곤 했다. 나중에 남성교회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자 아이들이 돌맹이를 날라 기초를 판 곳이 금방  메워졌다.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는 교회 벽만 완성되고 지붕이 없는데 그만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예배를 드리는 동안 영혼의 안식처가 주는 의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린 영혼을 받으시기 원하셨던 것 같다.

 선생님 댁을 들릴 때면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제 갓 결혼해 불과  정도된 딸을 두고 있었다. 배 선생님이 아무 대가 없이 학교 일만 하시느라 사모님이 광주리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모님이 얼마 벌어오면 학교 애들 시험 봐야 한다며 배 선생님이 시험지 값으로 챙겨가곤 하시는 것이었다사모님 또한 아무런 불만이 없으신 듯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천사 같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도 대개 죽을 끓여 드셨는데 날더러 같이 먹자고 해서 가끔 같이 식사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나중에 고기도 먹을 수 있다면서 구김 없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을 어려서부터 몸소 체험하게  것이다

 

 나는 천막학교 선생님들을 대하면서 굳게 다짐한 것이 있다. ‘ 여기 모인 400여명의 학생들이 모두 선생님들의 은혜를 잊을지라도 나 혼자 400여명 이상의 불우한 아이들을 돌보므로 그 빚을 갚겠노라고...’

미국에서는 이따금 성경구락부 학생들을 위해 학용품을 보내주기도 하고권세열 박사님이 미국 방문단을 데리고 직접 학교를 찾아오기도 했다.  이때 즉석  카메라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우리를 모아 놓고 찍는데 금방 사진이 현상되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KA 파견단또는 미국 친구들이 보내는 선물이란 선물 꾸러미를 받으면서 새삼스럽게 먼 나라에서 우리를 돕는  대해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더욱 이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 도로시 킨슬러(Dorothy Woodruff Kinsler.1907-2001) 선교사

도로시 W. 킨슬러(권도희)는 1907년 6월 20일 미국 뉴저지(Trenton)에서 출생하였다. 윌슨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9월 12일 여성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프란시스 킨슬러와 1930년 9월 8일 평양에서 결혼하였다. 남편의 성경구락부 사업을 도우면서 고아 자선사업과 장애인 수양부모로서 공헌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영어교사로 1970년까지 활동하다가, 2001년 3월 14일 미국 캘리포니아(Pasadena)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마-3)에 안장되었다. 자녀는 헬렌, 아더(Arthur W. Kinsler, 권오덕), 로스 등 3남매가 있다. 킨슬러 가문의 한국 선교활동 상황과 사진 자료 등을 제공해 준 프란시스 킨슬러의 며느리 신영순(Sue kinsler) 선교사께 감사드린다.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5-07-18 (157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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