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선교비화 6.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by 이재섭 posted Sep 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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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없는 곳에서 수 개월 지내다가 나이가 든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지난 일을 설명했다. 신00(신송태)에게 그 동안 여러모로 말을 많이 들어왔다고 말하고 특히 박00이 신00를 자주 비난한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숨겨진 배후가 노출되는 게 무척 부담스러운 듯 했다.

그는 박00이 그와 신학교 후배인데다 자신이 선교지로 데리고 온 만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 모양인지 오히려 나로 인해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자기 명예 관리에 민감한 자로 보였다.

  찬미가 많이 아프다고 했음에도 선교사들 간에는 현지 병원을 불신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래서 중환자가 발생해도 한국에서 파견 나온 외과의 M박사에게 보이던가 아니면 무조건 한국으로 후송하려들 뿐 현지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대도시인 알마타에서도 이런데 우리는 조그만 도시에서  어린 자녀를 입원시켰으니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불안이 엄습했다. 과연 치료 과정은 문제가 없었을까.

  이때 마침 숙소를 방문한 김00 목사가 자신이 한국에 머물 때 현지인 소아과 의사를 한 사람 알게 되었다며 소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김 목사는 약수동 S교회가 이 현지인 의사가 한국에서 연수 받을 동안 돌보아 주었다는 말을 했다(사실 자신도 그동안 병원 위치를 모르고 있었는데 어제 우연히 이 의사를 만나게 되어 비로소 알게 됐다는 것이다). 

 현지인은 고려인 소아과 의사로 한국어도 조금할 줄 아는데 경희대에서 설립한 경희크리닉이란 자선병원 의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원비 문제를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주님께서 찬미를 지키기 위해 우리 보다 앞서 준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병원비조차 없는 우리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시간이 늦어 하루를 찬미와 함께 교회에서 보내고 이튿날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밤이 되자 찬미가 점점 호흡이 가빠지더니 그날 밤을 넘기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이제 한국 나이 8살난 딸이 점차 중퇴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라 선교사에게 알릴까 하다가 참았다. 거의 3,000km 떨어진 곳에 남은 두 자녀와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텐데-

  더욱이 알마타까지 남은 아이들을 데리고 올 경비도 남아 있지 않아 괜스레 마음의 짐만 지게 될까봐 부담스러웠다.  혼자 중환자를 돌보자니 답답했다. 낯선 땅에서 거의 중태에 빠진 딸을 함께 지켜봐 줄 사람 하나 없이 외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

나는 찬미 상태가 급박한 상태임을 느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어린 생명이 꺼져가는 듯 가물거렸다.

  “주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딸이 타지에서 외롭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 아이가 죽더라도 저희는 이 땅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주님 그렇지만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 주님이라면 우리 찬미를 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밤새 기도로 보냈다.
한참 기도를 하는데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리게 시작했다.

“내 딸은 내가 지킨다.  너는 찬미를 네 소유하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네게 찬미의 양육을 맡겼을 뿐 찬미는 분명히 내 자녀이다.

  내 자녀는 내가 지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주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성경 구절 가운데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품에 품고 살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엘리사와 같이 찬미를 정면으로 안은 채 밤을 지세우기로 했다. 찬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춥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몸도 점차 식어가는 것 같았다.  이 위기 속에 누구 한 사람 동석하는 사람도 없이 외로운 땅에 외로운 밤을 지내는 동안 오직 주님만 의지했다. 알마타는 200만이 넘는 대도시인데다 숱한 한국 사람들이 와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정작 우리에게 숙소를 제공한 사람들도 그저 방한 칸 내준 것을 놓고 최대한 도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김 목사가 자기 차를 가지고 왔다.  함께 경희크리닉을 찾아가자 세 분의 현지인 의사 선생님들이 계셨다.  함미영 선생님은 고려인 소아과 의사로서 남편은 한국인 사업가였다. 한국에서 1년 간 연수를 받아서인지 한국어를 곧잘 했다. 

 우랄스크 병원에서 가지고 온 기록을 보이자, 함 선생님은 “이럴 수가...” 하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급히 옆방으로 가서 원로 내과 의사이신 루드밀라 선생님과 함께 한동안 숙의하는 것이었다.

  함 선생님은 우랄스크 병원에서 아이 상태에 대해 너무 서두른 것 같다.찬미에게 지나치게 많은 홀몬제를 투약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아마 모두 찬미 상태를 중퇴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함 선생님은 우랄스크 병원에서 찬미에게 ‘프레드니졸론’ 5mg 짜리를 하루에 8개씩 투약해 중요한 내장이 대부분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며 걱정했다.   이미 투약 기간이 8일이 넘었기 때문에 감량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 그동안 열심히 먹인 약이 이토록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말인가.  아무리 낙후된 나라라지만 그래도 의술을 전공한 의사가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루드밀라 선생님이 한 시간 동안 연구하시더니 약 처방과 홀몬 감량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지고 김 목사의 차로 직접 약을 구하러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 목사 도움이 컸다(알마타 약국은 규모가 크지 않아 한 곳에서 필요한약을 다 구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즉시 우랄스크를 떠나라고 하신 말씀이 자꾸 되살아났다. 바로 그날부터 투약이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의학 상식이 없이 다른 나라로 선교를 나왔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르두밀라 선생님은 위장을 보호하기 위해 홀몬제 4개 분량은 주사로 대체하고 심장약을 비롯하여 위, 쓸개 등 간장을 보호하는 약과 벤토린, 심지어 코에 흡입하는 약까지 준비해 오셨다.

 또한 피하 주사와 항생제 등 주사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입원실이 없는 탓에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는 숙소에서 내가 대신 주사와 투약을 하라고 주문하셨다. 또 내가 주사를 놓은 경험이 없는 것을 알고 낮에 찬미와 함께 병원에 있을 동안에는 현지인 의사 선생님들이 직접 주사 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감량이 시작되면 순간적으로 위험해 질 수 있는 만큼 홀몬제와 벤토린을 항상 가지고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중환자를 밤 사이 내가 돌보게 된 것이다. 시간별로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환자 상태를 감시해야 했다. 그래서 찬미가 잠잘 때도 자주 관찰했다.

 경희크리닉에서는 위험시 즉시 함 선생님 집으로 전화하고 그전에 호흡장애가 심해지면 일단 홀몬제 양을 다시 늘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이제 생명을 건 홀몬제와의 전쟁이 시작되려나 보다.’

찬미에게 저녁을 먹인 다음 의사들이 시킨 대로 약을 줄이고 주사로 대체하자 얼마 후 찬미의 호흡이 가빠오면서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가지고 있던 홀몬제 한 개를 더 먹였더니 조금 후 다소 안정을 찾는 것이었다.

다음날 주일이 되자 교인 중에 몇 분이 찬미를 지켜보았다. 특히 그 교회 집사이기도 한 M박사가 청진기를 찬미에게 대고 들어보더니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전혀 숨을 쉬는 것 같지 않다.” 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M박사는 나에게 청진기 소리를 들어보라며 귀에 대 주었다. 호흡할 때마다 ‘끼이끽’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마 횡경막 쪽이 잘 작동을 않는 모양이었다.  

교회 한 여자 성도님이 찬미를 돌보는데 쓰라며 50불을 주고 갔다. 어려울 때여서 큰 힘이 되었다. 이에 비해 정작 주위 선교사 가운데 돌보아주는 예는 거의 없어 이상했다. 신00이 회장이라지만 일부러 안 알린 듯-
그래도 신00 목사는 몇 차례 외식을 시켜주어 고마웠다.

하지만 신00은 M박사가 위험하다고 말해서 인지 내게 아이를 빨리 한국으로 안 데려간다고 매일같이 성화였다.  “너가 내 동생 같았으면 미련하게 군다고 두들겨 패 주겠다. 어째서 아이가 급한데 한국을 안 가는 거냐.”며 나무랐다. 정말 피곤하기 짝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신00님, 저는 지금 중환자를 돌보느라 심적 부담이 크니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한국에 가지요. 대신 여기 있는 게 정히 부담스러우면  일단 다른 곳으로 옮기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신00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화가 나서 한동안 말도 않는 것이었다)


엄밀히 따져보면 신00 자신이 박00을 이 나라로 데리고 왔으니 이러한 원인을 제공한 셈이 된다. 더욱이 자신도 한 사람의 파스터가 아닌가-.   
신00는 또 김00 목사를 가리켜 고도의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며 이에 비해 나는 선교사 자격이 없음을 자주 강조했다. 

 하지만 대개 3년 정도 선교훈련을 받는데 비해 김 목사 측은 교단 선교사 훈련이 불과 3개월 정도로 고도의 훈련이라 칭하기엔 너무 짧게 느껴졌다. 선교지에 교회 건물을 세우고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을 내세워 유능한 선교사로 평가하는 풍토 또한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신00가 툭하면 “너는 내가 베푼 은혜를 평생 잊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하기에 그의 호의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지나친 것 같아 말했다.

  “나는 근로청소년 사역을 오랫동안 하느라 고아를 재우고 야학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로서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병든 선교사 딸을 며칠 교회에 재우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일입니까. 이 교회가 당신 개인 소유인가요. 엄밀히 따지자면 후원자들이 자기들 대신 일해 달라고 후원금을 보내고 교회 또한 세운 것이 아닙니까. 정히 우리가 있는 게 부담되신다면 속히 집은 비워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신00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말도 못하고 한동안 나를 만나도 대화조차 피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보리스 선생님을 처음으로 한 차례 만났다. 시원하게 생긴 모습이 인상이 좋아 보였다. 그분은 서울에서 온 인물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둣 했다.

한 선교사의 자녀가 이토록 사경에 처해 있는 데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정작 신 00는 오히려 핀잔만 늘어놓으니 아무래도 새로운 곳으로 처소를 옮겨야 할것 같았다.  

(이런 위기를 겪게 된 것은 박00의 말만 믿고 언어훈련을 비롯해 선교사로서의 출발을 지키지 않은 것과 소속 단체가 박의 농간에 넘어가 자기 선교사를 불신한 것, 처음부터 한국인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바로 간 것 등을 들 수 있다. 대신 상처입은 양들을 치유하고 한국인 선교사들의 이면을 목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계 도처에 아웃을 사랑하고 헌신적인 선교사가 많을텐데 주위에서 이런 분을 만나지 못해 위기가 계속되었다.
대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곁에 계셨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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