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선교비화 5. 환란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by 이재섭 posted Sep 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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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한국의 C단체 총무로부터 전화가 왔기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마치 내가 선교지에서 문제를 일으킨 양 나무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처음 온 전화라 반갑게 받았다가  이런 내용이라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총무에게 당신이 소개한 박00으로 인해 우리가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나무랐다. 사실 자신이 무분별하게 사람을 소개한 결과 이렇듯 힘들게 지내게 되었는데 도리어 우리를 문제삼다니 기가 찼다.  

 며칠 후 이번에는 우리가  소속된 I선교회 회장으로부터 우리를 나무라는 전화가 왔다. 아마 박00이 한국으로 가서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열심히 우리를 욕하고 다닌 듯-  그렇다고 해서 정작 나이가 더 든 목사에게 미리 확인도 안 해보고 속단하는 태도도 문제였다. 박00이 그만큼 말을 잘한 탓일까.  자기 사람을 못 믿는데 어떻게 관리를 할까 저으기 염려됐다(결국 이로 인해 많은 문제가 됐다).

  박00은 우리 측인 I단체에다가 오히려 우리로 인해 입은 피해보상을 하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무 곳이나 접근을 폈다. 얼굴이 나타나기 곤란한 곳은 글로 보내기도 했다. 
참으로 교활한 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 속에서도 짧은 기간 동안 교회가 나날이 부흥되어 갔다. 교회를 맡은 지 두 달 만에 출석하는 교인이 60명이 넘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러시아인이었다. 목회 사역으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카작스탄 북부 지역은 러시아 인접 지역이라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부활절 예배에는 더욱 많이 모였다. 점차 교회로서의 틀을 갖춰나가는 것 같았다. 이때 성찬식도 거행했다(박00은 후일 내가 자기 허락 없이 성찬식을 거행했다고 말했다). 외진 선교지에 처음으로 목사가 와서 교회 모양을 지켜나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박의 동생이 형식적으로 교회를 맡을 때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외진 도시라 더 이상 찾아갈 교회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그야말로 땅끝 선교의 현장이기도 했다.


  일단 교회 도장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박00의 성향으로 보아 이 도장을 사용해 일을 벌일 것이 뻔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어 계속 교회허가증과 도장을 내어 놓지 않으면 업무방해로 관계당국에 고발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말을 듣고 문제의 몇몇 인물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일단 돈을 모아서라도 빨리 한국에 알리자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아서도 박00의 만행이 여실히 입증되는 셈이다.

  그 주간에 아침 기도를 위해 사라 선교사와 교회를 갔더니 자물쇠가 바뀌어 있었다. 아마 이들이 걱정이 되어 한국에 알리자, 박이 측근자들에 교회를 점거하라고 시킨 듯- 몇몇 사람이 교회 문을 몸으로 막아섰다.
  나는 현지에서 저들과 부딪치는 것은 무리라 보고 물러났다. 

이때 전체 교인들 앞에 내말을 통역할 자가 마땅치 않아 내 입장을 알릴 수도 없었다. 알라 선생님을 조용한 성품이라 나서길 원치 않았다.
(박00은 이런 것까지 내다보고 자신의 심복을 통역으로 배치한 듯-).

  박00의 추종자들이 자기들 간에 기록했던 회의록을 입수해 그 내용을 보자 미리부터 철저하게 박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00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통역으로 배치한 고려인 여자로부터 교회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은 지휘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우랄스크 교회 교인은 주로 러시아 민족이었는데 민족 간에 창피스러워인지 고려인들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후일 러시아 교인들이 이런 상황을 듣고 이때 자기들에게 상황을 알렸으면 그대로 있을 수 있었다며 아쉬워 했다고 한다. 상위 민족이 집단으로 나선다면 누구도 선뜻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박00의 사주를 받고 있던 자 중에는 그로부터 “하나님의 사자”로 임명된 자도 있었다. 내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목사보다 높은 직책이라고 했다. 현지에 온 목사를 맞서기 위해 별 제도도 다 만들어 둔 것이다. 그는 교주 역할까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현지인의 힘만으로는 뜻대로 안된다고 판단되었던지 얼마 후 박00의 동생(박이 선교사로 임명한 자임)가 한국으로부터 돌아와 한밤에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때 전세터라는 현지인 집사가 동행했다.

  4명의 집사 모두 박00의 하수인이 된 탓에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문밖에 세워둔 채 왜 왔냐고 묻자, 자신들이 우리에게 받은 물건 인수비를 돌려줄테니 집을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이곳 오느라 들었던 모든 경비를 물으면 고려해 보겠다고 말하자, 말도 안된다며 돌아갔다.

  현지에 온 이래 한국 나이로 8살된 찬미가 식탁에 앉을 때면 숟가락을 들기 앞서 한숨 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양배추로 대강 만든 김치는 딱딱하고 전혀 다른 맛을 풍겼다. 배추는 고사하고 바다로부터 먼 나라여서 생선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다.  

우랄스크 주 주청이 있는 도시였지만 햄버거 가게 하나, 버젓한 문방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학용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버스로 꽤 걸리는 중앙시장에 가야 하는데 노천 시장이라 낮에만 구할 수 있었다. 자연히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어도 당장 학용품을 못 구해 못할 때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옷을 입혔지만 추위를 막기가 쉽지 않았다. 또 목도리, 모자 등으로 꽁꽁 싸서 내보내지만 아이들이 추위에 잘 적응할 지 의문이었다. 더욱이 잔뜩 찌푸린 하늘은 보름이 가도 해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우랄스크 17학교로 입학한 찬미가 왠지 점점 약해만 갔다. 차도 없이 먼 학교까지 눈길을 걸어가느라 몹시 힘들어 했다. 본래부터 추운 나라인 탓인지 그 추운 날씨에도 학교를 가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유난히도 춥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타지에서 문화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도 없는데다 식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환경이 어린 자녀에게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으리라.

어느 날 찬미가 기운이 없어 보여 업고 눈길을 따라 학교를 가고 있는데, “아빠 나 숨쉬기 힘들어”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데려고 가자 담임선생님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지 빨리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셨다.

  학교를 휴학시킨 후 우랄스크 주립병원으로 찬미를 데리고 가자 나중에는 소아과 선생님께서 집에 그냥 두라고 하면서 대신 매일 집으로 왕진을 와 주어 고마웠다. 의사 선생님께 조그만 쵸콜렛을 선물하면 안받겠다고 사양하다가받아가는 것이었다. 참으로 순수한 의사 선생님이셨다.

  며칠 동안 집을 드나들던 주립 병원 찬미 담당 소아과 선생님은 찬미가 이상해 보였던지 옷을 벗겨보라고 했다. 그러자 몸에 부스럼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담당 선생님은 사태가 심각해 보인다며 큰 아동병원에 입원시키라는 것이다. 그래서 급히 찬미를 데리고 아동병원을 찾아갔다.  
큰 병원이어서 인지 보호자까지 소독을 시키고 아이와 함께 내부에만 있도록 했다. 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여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비교적 수준이 나은 러시아 의사들이 거의 본국으로 철수한 상태인데다 원주민인 카자흐스탄 의사들은 아직 실력이나 경험이 부족하고 약이나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 다소 불안해 보였다.

매일 찬미를 면회 갔지만 제한된 면회실에서만 볼 수 있었다.  투약 후 마사지 선생님이 따로 있어서 정성스럽게 마사지까지 해 주어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찬미는 주로 오전에 1시간 이상 기침을 하고 구토까지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던 문제의 현지인들도 한 차례씩 문병을 다녀갔다. 
모두 좋은 만남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먼저 알고 있던 박00의 말만 믿다보니 혼란이 온 사람도 있고 아예 박00에게 고용된 자도 있었다.

찬미는 아동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점점 약해져 갔다. 구토와 호흡장애가 계속되면서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도 병원이 안전할 것 같아서 의사들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주위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는데 아이마저 위중해 마음이 무거웠다.

 입원 5일째 되던 날인 금요일 밤, 집에서 찬미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입을 통해 생각지 않은 말이 흘러 나왔다(이처럼 강하게 다그치는 지시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나님께서 급히 경고하시는 것이었다).

  “사단이 찬미를 노리고 있으니 빨리 데리고 이 도시를 떠나라.”

   혹 내가 못 알아 들었을까봐 몇 번 반복되는 것이었다.

  “예, 알았습니다.  주님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하자 그쳤다.

  순간 병원 쪽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이 앞섰다.

  이튿날 병원에 갔더니 친절히 대해 주던 담당 의사 선생님이 휴일이라고 안 나오셨다.  할 수 없이 월요일에야 병원을 찾아가서 상태를 물어보았다.  
외국 아이라 해서 특별히 그 지역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선생님께서 주치의로 배정됐는데 이분이 찬미에 대해 설명했다.

 “낫다가도 도로 나빠지고 하는 상태가 반복되어 치료가 어렵다. 혹 아이들 데리고 나가게 되면 앞으로 계획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왔다.

“일단 찬미를 알마타로 데리고 가보겠다. 혹 거기서도 잘 안되면 한국까지 후송시키겠다.”고 말하자, 쾌히 퇴원을 동의하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챙겨주는 약을 받아들고 그동안 입원한 만큼 병원비를 내려고 하자 굳이 안 받겠다고 사양하기에 선물로 대신했다.
  하지만 선교지 병원은 한국인의 상식으로 이해 못할 때가 많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낙후된 나라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은 위험스러웠다.

  알마타로 가는 비행기가 자주 있지 않아 금요일이 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선교비 반을 집에 두고 반만 가지고 알마타로 향하기로 했다. 온 몸에 기운이 빠진 듯 나약해 보이는 찬미와 함께 알마타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무엇보다 경비가 부족한 것이 더 문제였다.


 국내선으로 3시간이나 걸려 알마타에 도착하자 마침 공항에서 한국 선교사 2명을 만났다. 이들에게 신00 목사님을 아느냐고 했더니 친절히 알려 주었다. 

 그래서 이들과 시내로 들어오면서 그 동안 박00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하고 아이 치료차 왔다고 했다. 자신들은 새로 수도가된 아크몰라에 답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워낙 추운 곳이라 지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만난 젊은 선교사들은 우리가 우랄스크에서 왔다고 하자,  “아마 선교의 A,B,C도 모르는 것 같다. 선교란 예루살렘부터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젊은 선교사들의 말이 마치 자신들의 변명처럼 들렸다.

예수님께서도 온 유대와 사마라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또 친히 사마리아 전도에 나서지 않으셨나. 저 넓은 땅을 마냥 방치해 두는 게 선교를 아는 자들의 태도인가.

이들의 말대로라면 이제 아크몰라(이스타나로 지명을 변경함)가 수도로 변한 만큼 그곳으로 가야지 계속 알마타에 상주하는 것 또한 모순이 된다. 아크몰라는 북부 도시로 아주 추운 지역이어서 선뜻 가기가 쉽지 않을 게다.

남한의 12배가 넘는 나라에서 수도만 고집한다면 나머지 땅에 사는 사람들은 복음을 접하지 말란 말인가. 어려운 지역에서 수고한다는 말 대신 자격 운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수도권을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알마타에는 카자흐스탄 타 지역 선교사를 모두 합친 수 보다 많은 50여명의 한국 선교사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 이 나라 예루살렘이라 생각되어 이곳만 고집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일단 신00 목사 교회를 찾아가자 교회에 딸린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신00 목사는 한국에서 직접 만난 적이 없었지만 여러 경로로 많이 들어왔다. 특히 그가 몇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친구 출판사가 편집을 했다. 나는 한때 출판사 편집 팀에 근무한 적이 있어 이따금 편집을 거들어 주기도 했다. 이때 그의 책이 출판되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언제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사람의 태도가 변하기도 한다. 결국 이 자는 우리 일을 여러 가지로 방해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상부상조가 이처럼 힘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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