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을 믿고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낯선 선교지까지 따라나선 결과 어이없는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박의 눈에 내가 바보로 보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 제물로 삼느라 그의 눈이 먼 탓일까.
며칠 후 박이 알고 있는 고려인 부호 집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모임이 있었다. 교회 일군이라는 네 명의 고려인들이 다 모였다(이들은 모두 박이 집사라고 임명한 자들이다).
부잣집이라 많은 음식을 장만했다(박은 얼마후 자기 동생을 이 집 딸과 재혼시켰다. 살고 있던 러시아 부인과 이혼시키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박의 동생은 굳이 러시아를 사용해(한국어도 대강 알아듣는 가정임에도) 자신과 살던 러시아 여자가 문제가 많아 더 살기 어렵다. 헤어지는 게 좋을 것같다는 내용의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태도에 대해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지만 이 두 형제를 나무랐다.
“야 이놈들아, 한국말로 해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 뭣들 하는 짓들이냐. 예비군 운운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동안 데리고 살던 여자 가지고 이제 더 못 살겠다며 수작을 부리느냐. 하나님이 무섭지도않느냐.” 고 소리쳤다. 그리고 다른 방으로 나와 있었다.
이날부터 이들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잠자러 오지도 않은 채 며칠간 다른 집에 머물렀다. 외지인만큼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하루는 박이 교장선생님인 현지인과 함께 찾아와, 소지품을 챙겨가면서,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요.” 하는 것이었다.
아마 자기 말을 잘 안 들어 유대가 어렵겠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네가 아니라도 우리가 이왕 왔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적응해 나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6개월 정도 이곳에 우리가 온 사실을 한국에 알리지 말아 달라. 대신 여름까지 모든 것을 잘 정리해 우리가 현지에서 일할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에서 한 말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면 믿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분간이 안 갔다.
두 형제가 현지를 떠난 직후, 그동안 이들의 태도를 보아 자칫하면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알라 선생님 댁을 찾아가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와 줄 것을 부탁헸다(박은 한국에서부터 이 사람을 만나면 안된다고 누누히 강조했다. 하지만 이럴 때는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답이 빠를 것 같았다) .
알라 선생님께 가정교사비 외에 통역을 해 줄 때마다 따로 통역비를 주기로 했다. 알라 선생님이 쾌히 승낙했다. 이제 이곳에서 협조가가 생긴 것이다.
알라 선생님이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 집을 출입하면서 기공이의지난 행적을 알게 되었다. 박은 선교사로 왔다지만 가는 곳마다 반감을 사서 한국인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사실이 점차 드러났다.
과연 그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였을까. 정체가 자못 궁금했다
박이 한국에서 이 장로나 내게 10,000불에 사라고 말한 집은 현지에 와서 물어보니 3,000불도 채 나가지 않을 만큼 값이 떨어져 있었다.
화장지도 A4 용지도 못 구한다던 말 또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차라리 책을 몇 권 더 가져올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을 믿은 탓에 굳이 무거운 A4용지를 몇 권 들고 온 것이다.
그의 측근자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은 급료를 받고 있거나 아니면 성향이 비슷한 자였다. 특히 내게 통역으로 배정한 현지 고려인은 박의 심복이었다(나중에 이 통역은 자신이 내게 온 급료 또한 박이 미리 내게맡겨 둔 것이라고 말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심복을 배치해 둔 것이었다).
박이 4년 반 있었다는 끄즈오르다 교회에 보리스란 현지인 전도사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우랄스크에 미리 연락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라 선생님 일행도 3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를 나가 본것이라고 했다. 사실 한국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지만 혹시 어떤 사람이 왔는지 궁금해서 한번 참석해 본 것이라고 했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양들이 스스로 목자를 찾아나선 것이다.
그러나 박이 배정한 통역이 알라 선생님을 너무 몰아붙이자 자신은 더 이상 교회를 못나오겠다고 해서 아쉬웠다. 박의 심복인 통역은 한국으로 돌아간 그의 사주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음모가 서려 있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루는 교회 도장과 허가증을 찾았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수소문했더니 박의 측근(?) 고려인 집에 있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을 보내 여러 차례 도장과 허가증을 내 달라고 해도 끝내 내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인들이 당신 돈 받고 이런 일 하냐고 묻자, 그렇다고대답하면서 박이 내주라고 해야 내줄 수 있다며 버티는 것이었다.
얼마후 한국으로 돌아간 박으로부터 글이 왔다. 이곳 교회 설립자(?)이자 책임목사(?)의 자격으로 담임목사직에서 해임한다는 명(?)이 들어 있었다.
이 나라에 법에 의해 이 나라 안에 세워진 교회인데 외국에 있는 그가 무슨 명령을 내리겠다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발신일로 보아 우리가 현지에 도착한 지 20일 만에 이런 글을 쓴 셈이었다.
6개월 간 한국에 선교편지를 보내지 말고 조용히 정리하기를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자신은 한 달도 못 되어 이런 글을 먼저 보낸 것이다.
박의 조종을 받고 있는 자들은 무조건 그의 말을 듣는 반면에 그외 대다수 교인들은 그만 혼선을 빚게 되었다. 교회도 없는 도시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디 옮겨갈 교회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박 우리가 그동안 소모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아직 인수 안한 물품비를 마저 갚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덧붙였다. 심지어 그는 입국한 이후 자신이 음료수와 식사를 산 것까지 계산할 뿐 아니라, 이번엔 먹으라고 남겨둔 쌀과 감자 등 양식 값마저 시세보다 더 많은 돈을 계산한 청구서까지 넣어 보내왔다.
박이 쓴 글 가운데에는 자신의 동생인 평신도가 가르쳤다는 현지인 전도사(결국 신학으로 볼 땐 거의 무학자나 마찬가지임)와 현지인 집사 힘으로 얼마든지 이곳 교회를 유지할 수 있으니 굳이 더 이상 목사가 필요없다는 말까지 들어 있었다(이것은 신학 교육이나 목사 무위론과 같은 말로 선교사조차 나갈 필요가 없다는 억지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가 한때 신학 교육을 받고 파스터 임직까지 받았던 자인지 의아심이 갔다.
사라 선교사를 가리켜 남의 글을 몰래 읽은 것은 교양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썼다(자신의 언행을 모두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머리는 정상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가까이 있을 때는 숨어진내다가 이처럼 멀리서 글을 통해 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