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불가침 조약-
스탈린은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다. 독일의 침공이 현실화되기까지 독일을 우방(?)으로
믿고 있다가 개전 초기에 그만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친구로 생각한 대상이 이처럼 무모한 공세를 취해 올 때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하게
된다. 소련은 결국 독일을 이김으로써 많은 손실에 비해 명예적으로나마 자위하게 되었다.
동유럽에서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 분할이 확정된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두 나라가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국가들과 연합해서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② 조약 당사국이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경우 그 제3국을 원조하지 않는다.
③ 공동관심사에 대한 문제점은 서로 접촉하여 협의한다.
④ 양국가 중 하나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국가집단에 동참하지 않는다.
⑤ 상호간의 분쟁은 협상이나 중재로 해결한다. 조약은 10년간 유효하고 어느 한쪽이 만기
1년 전에 조약폐기를 통고하지 않을 경우 다시 5년간 자동적으로 연장된다.
이 상호 불가침조약에는 폴란드를 분배하고 동유럽 전체를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분할
하는 비밀의정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 조약으로 라트비아·에스토니아·핀란드 등과 나레프·
비스툴라·산 강으로 이루어진 폴란드 동쪽은 소련 세력권에 할당되었다.
독·소불가침조약은 영국과 프랑스를 경악케 했다. 독일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의 서쪽을
침략하자 소련군은 9월 17일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략해 이틀 뒤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근처에서 앞서 진군하던 독일군과 합류했으며, 폴란드의 분할은 9월 29일 이루어졌다.
그 뒤 소련은 곧 동쪽에서 다시 시작된 독일의 공격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들의 세력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 결과 11월 30일 소련은 핀란드를 공격했고 1940년 3월 그 이웃나라로
하여금 카렐리아 지협(地峽)과 다른 영역들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라트비아·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발트 3국은 소련에 합병되었고 1940년 8월 소비에트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불가침조약은 나치독일이 서부유럽과 중부유럽의 대부분을 침략한 뒤 1941년 6월 22일 바바
로사 작전에서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공격하자 무효화되었다. 히틀러는 소련 침략을 개시하
여 거의 무저항으로 쾌속 진군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독일이 거둔 승전은 눈부셨다. 11월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교외 지역을 돌파했으며,
키예프를 함락하고 레닌그라드의 성문 앞에 이르렀다.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크림 반도의
대부분도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저항이 완강해졌다. 1943년 초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전세의 전환점이 되었고 소련
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해 1945년 초에는 베를린에 도착했다.
내용출처- http://www.britannic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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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을 침공한 독일군도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막대한 병력 손실과 과로 및 다가오는 겨울
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은 붉은 군대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쳐 더욱 쇠
약해졌다.
G.K. 주코프와 A.M. 바실레프스키 및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로노프 장군이 계획한 소련군
의 결정적인 반격은 1942년 11월 19일에 시작되었다. 땅은 첫서리로 단단해져 있었지만, 아직
눈으로 길이 막히지는 않을 무렵이었다. 소련군의 반격은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바로 맞은편에 있는 25만 명의 독일군 2개 야전군을 포위하는 협공 작전의 형태를 취했다.
대세를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었던 1943년 1월초에 히틀러는 카프카스에서 병력을 빼내지 않으
면 스탈린그라드 근처에 포위되어 있는 독일군은 더 큰 재난을 당하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독일군은 마침내 소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출처 http://ganzichaos.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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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의 독일군에 밀려 유럽 전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독일은 러시아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지 얼마되지 않아 러시아를 공격했습니다.
러시아로 진격하기 위해 뻬쩨르부르그를 먼저 통과해야 하는데 2년 이상 계속된 포위 공격
에도 끝까지 항쟁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 수집광인 히틀러에에게 러시아가 가
지고 있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대신 뻬쩨르부르그에서 러시아 민족이 수 십 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행군할 때 러시아에서는 후퇴작전을
썼다고 합니다. 대부분 점령 지역에서 숙소와 양식을 현지 조달하는 점을 감안해 아예
거점을 없애고 식량마저 가져갈 수 없는 것은 모두 불태우면서 후퇴를 한 것입니다.
결국 독일군은 보급로가 너무 멀어 본국에서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긴 겨울 동안 갖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러시아 군은 지형적인 이점과 추위에 강한 탓에 독일군을 괴롭
혔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기선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 20만명이
넘는 독일군이 거의 전멸당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이 전의를 상실하자 이를 기다린 러시아 군대가 역습을 감행하기 시작하고 독일군
의 수도인 베를린까지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주력 부대가 러시아 공세에 들어갔다가 자
멸한 상태여서 독일군은 끝내 러시아를 비롯한 연합군에 항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러시아 군대의 진격을 돕기 위해 연합군 측에서 여러모로 지원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나라가 이미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여서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습
니다. 멀리 미국에서 군인과 장비가 파견되고 영국에서 출격한 미공군기의 공격이 계속
되었지만 전쟁의 승패는 육군에 의해 좌우되는만큼 연합군 측에서는 주로 러시아 군대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독일군이 양면을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독일의 수도를 점령한 러시아 군대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5월 9일 드디어 독일이 러시아 군대에 항복하자 유럽 전역이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평화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끝에 마침내
적의 수도를 점령한 러시아 군대의 수고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일본이 미국의 원자폭단 투하로 항복하지 않았다면 서부 전선에 있던 러시아 군대가 동부
지역으로 이동해 일본과 전쟁을 치뤘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이 있기까지 연합군의 수고가 컸음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이
북한군을 지원해 남쪽을 침입한 것이 아픔으로 남아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제 화해의
시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선교사가 러시아를 선교하러 온 것도 뜻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러시아를 사랑합니다. 천사홈 가족도 러시아를 사랑하시죠.
전쟁의 승리 후 45년간 철의 장막을 지켜온 러시아가 1990년에 이르러 개방을 선언함으로써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고 선교사의 진출도 용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러시아가 영적 승리를 위해 더욱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넓은 지역에 교회가 골고루 들어서도록 위해 기도바랍니다. 여러 종족이 살고 있
는 땅인 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를 펴야겠습니다.
러시아 땅에 살고 있는 여러 종족 선교를 위해 기도바랍니다.
사진설명- 승리의 날 기념 행사 후 중앙광장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군인들과 운집한 시민들
모스크바 붉은광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승리의 날을 기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