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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캐리보다 140년 전인 1621년 오스트리아 땅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요, 최초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유스티니안 벨츠(Justinian Welz)는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보다 140년 전인 1621년 오스트리아(Austria) 땅에서 태어났다. 유럽을 혼란과 폐허 속으로 몰고 간 30년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루터교 신자들인 벨츠 가족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구교의 나라인 오스트리아를 떠나 1628년 독일 삭소니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가 20세 되던 1641년 화란 라이덴(Leiden)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했다. 벨츠는 그의 첫 논문 「독재에 관한 소고」를 발표하여 사회정의의 실현과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 당시 종교적인 명목 하에 시민들의 재산을 몰수한 몇몇 통치자들을 공격했다. 벨츠는 통치자들의 독재야말로 기독교 몰락의 원인이 된다고 공박하면서 정의의 실현을 촉구했다.

화란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온 이후 벨츠는 얼마동안 방탕의 생활에 빠졌다. 그러나 성경연구와 순교자들의 이야기와 신비주의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자기의 죄를 뉘우친 다음 세상을 등지고 전적으로 성경과 교회사 연구에 십 수년을 바치게 됐다. 이 기간동안 그에게 큰 감화를 준 인물들로는 유세비우스, 어거스틴, 토마스 아켐피스, 루터 및 존 아 안트였다. 심각한 내적 변화를 체험한 결과 벨츠는 일종의 "복음주의적 금욕주의자"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42세가 되었을 때 그의 삶의 가치와 목표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어 세계선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벨츠는 1663년과 1664년 사이에 5, 6종류의 소책자를 출판하여 당시 루터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통박하며 영적 개혁의 필요성과 아울러 세계선교의 긴급성을 역설했다.

벨츠는 특히 당시 루터교회가 마태복음 28장의 선교 대위임령이 사도들에게 해당된다고 가르쳐 온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말씀 중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는 말씀을 구별하여 특수한 명령[사 도들에게만 해당되는]으로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계속되는 세례에 대한 말씀은 보편적인 말씀으로 받아 모든 교회들이 실 천하면서 "가서…"라는 말씀을 보편적인 말씀으로 받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벨츠는 계속하여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동기와 이유 4가지를 제 제시했다. 그리고 선교단체 조직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제시했다. 벨츠는 선교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독일 각 지역의 개신교 통치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의회의 복음주의 협의회」가 개최되고 있는 레겐버르그로 갔다.

벨츠의 호소는 전적으로 허사였다. 깊은 좌절에 빠진 벨츠는 이방선교에 관해서 다시는 성직자들이나 통치자들과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깊은 명상과 영적 훈련에 들어갔다. 깊은 명상과 영적 체험을 통해 벨츠는 새로운 확신을 가지게 됐다. 요나의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벨츠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그의 말씀을 통해 회개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 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664년 말 벨츠는 성직자들과 귀족에게 보내는 마지막 호소와 도전의 글 을 썼다. 「불신 백성의 개종을 수행하여야 할 의무에 대한 반복되는 성실하고 진지한 충고와 권면」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벨츠는 이 글에서 당 시 교회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의 냉담한 태도를 맹렬히 공격했다. 벨츠는 루터 교회의 냉담과 자기에 대한 비난을 이겨낼 만한 인내력과 겸손이 부족했던 것 같다. 벨츠는 이 글에서 당시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통치자들에 대 한 저주의 선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벨츠는 이제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엄숙한 안수 및 파송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벨츠는 자기의 남작의 칭호를 버리면서 「유스티니안의 자기 부정」(Justinian's Denial of Himself)이라는 고별인사를 했다. 1666년, 드디어 벨츠는 평생의 소원과 야심을 이루게 됐다. 배를 타고 남미 북해안의 서리남(Surinam)에 도 착했다. 본국의 아무런 원조도 없이 2년간 갖은 고생과 역경의 선교활동을 하다가 1668년 서리남에서 그의 생을 마쳤다. 경건주의 창시자 야콥 슈페 너(Jacob Spener)는 그가 야수에 찢기어 죽었다고 기록했다. 혹자는 그가 말라리아 병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벨츠의 저술을 편집한 그뢰 쎌(Groessel)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유스티니안 벨츠는 외롭게 버림 받은 채 죽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한 소명을 위한 희생의 죽음이었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고자 하는 신실한 용기와 기쁨에 넘친 각오를 보여준 표본의 죽음이었다.

교회개혁과 세계선교를 부르짖다가 외롭게 죽은 벨츠의 생애는 허무한 생애였는가? 그가 죽은지 7년 후 슈페너는 1675년에 독일교회의 영적부흥 과 개혁을 부르짖는 경건주의 운동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 데시 데리아」를 발표했다. 1706년에는 프랑케의 지도하에 할레대학에서 훈련받은 선교사 지겐발그와 풀루챠우가 인도의 트랑퀘바에 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732년에는 최초의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서인도제도, 버진군도 의 Saint Thomas로 향했고, 1735년에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벨츠의 순교지 서리남까지 도착하게 됐다. 벨츠의 외로운 부르짖음은 그 당시 멸시와 조소를 당했지만 결코 허무한 것은 아니었다. 벨츠의 생애와 사역은 결국 경건주의운동과 세계선교운동을 태동시킨 예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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