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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9 18:19

스크랜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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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스크랜튼 선교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명문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컬럼비아 의과대학의 전신인 뉴욕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였던 스크랜튼은 아펜젤러보다 앞서 서울에 들어와 알렌의 제중원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스크랜튼은 무엇보다 조선 사람들의 자리에서 조선 사람들을 사랑한 몇 안 되는 분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당하는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무던히도 애썼고, 그런 일로 선교사 직까지 사임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지만 그는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등 감리교회의 모교회들을 세웠으며, 수많은 빈민들을 치료했습니다.

“나는 국왕의 환심보다는 민중의 환심을 사기를 더 원하고 있습니다.” 그가 미국의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보입니다.

초기 임시정부의 요원들 대부분이 함께하던 상동청년회가 바로 스크랜튼이 세운 상동교회의 청년모임이었습니다. 그 모임의 회장으로 당시 우리 사회의 큰 존경을 받았던 전덕기 목사의 멘토이기도 한 분이고, 전 목사가 뼈 속까지 담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분이 스크랜튼 선교사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이끌던 많은 인재들 뒤에는 그가 있었던 셈입니다.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사건도 알고 보면 국가가 한 것이 아니라 상동청년회가 감행한 일이었고, 그 뒤에 역시 스크랜튼 선교사가 있었음을 봅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바로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튼 대부인이지요. 조선의 여성들은 노예와 같다는 말에 이 땅의 여성들 교육을 위해 헌신한 참으로 고마운 어른입니다. 최용신 박에스더 등 기라성 같은 당시의 여성들은 바로 스크랜튼 대부인과 스크랜튼 선교사의 헌신 속에서 찾아낸 진주였던 게지요.

이 여름 사서 고생하자, 그런 이야기를 특집으로 꾸밉니다. 우리가 이렇게 소중한 헌신을 받았으므로 또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스크랜튼 선교사를 기억하는 여름이고 싶습니다.


박명철 기자 아름다운동행 [64호] 2009년 07월 19일 (일) http://www.iwithjes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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