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교 소 식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러시아 김선숙 선교사
제가 선교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꾼 적 없었습니다. 24살 때 류마치스열로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직전에 “하나님 살려주세요. 지금 죽으면 억울합니다. 저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위해 헌신 하겠습니다.” 라고기도 했던 것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50이 넘어 선교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
1998년 2월 한국 경제가 IMF로 인해 어려워지자 남편이 사업이 부도로 문을 닫게 되고 채무자를 피해 기도원을 전전 하던 중 어느 권사님께서 돈을 주면 러시아로 가기로 하고 기다렸지만 웬일인지 계속 연기가 되여 내가 7일 작전 철야기도를 하던 중에 주님은 선교사로 가라고 말씀 하였고 나는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남편은 한국에서 실패한 사업을 러시아에서 만회 하려고 러시아로 가서 한국 상품을 판매하는 가계를 얻어 장사를 시작 하였습니다.
홀로 남은 나는 작은 교회 전도사로 섬기며 장신 대에서 공부를 하며 선교의 꿈을 키우던 중에 두 아들들이 군대에 가게 되어 홀가분하게 선교사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나라로 갈까요? 주님께 물어볼 것 없이 2001년 8월 1일 남편이 있는 러시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던 날 새벽에 주님은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강하고 담대해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는 응답을 받고 막상 러시아에 들어갔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선교 방향을 잡을 수 가 없었습니다.
러시아에 도착해서 선교지를 물색 하려고 하니 이곳 사정에 생소한 나에게 남편은 저에게 이곳 선교 형편을 알 겸해서 공부를 더해보라고 하여 모스크바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2년을 공부하였습니다. 중 겨울 방학 동안 학우인 샤샤의 고향집 백 러시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학생이 다니던 교회가 건축비 관계로 중단된 상태이므로 재정 지원을 해주는 한국 포항중앙교회에 사정을 전할 한국 사람을 찾던 중이었답니다.
마침 방문한 내게 어려운 형편을 잘 애기 해 달라는 부탁해와 탁한 사정을 전화하니 포항교회 장로님께서 현지를 방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내가 다니던 학교 이사장에게 학생으로 월 권(?)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는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저에게 빨리 선교를 시키기 위함인 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후에 모스크바에서 400을 수영하는 양로원에서 사역을 하시는 이아무게라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선교사님께서 자기가 너무 바쁘니 협력 선교사로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해서 나는 하나님 일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쁘게 생각 하고 양로원으로 갔습니다. 그날부터 식당 앞에서 사탕을 사서 나누어주며 전도를 시작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일날에는 초콜릿과 생일카드를 가지고 찾아가면 자식들마저도 찾아오지 않는데 고맙다며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10여명이던 교회가 50명으로 부흥이 되니 담당 이선교사가 행여나 선교사역을 빼길 염려여서 인지 전에 있던 사건을 꺼내면서 교도소 선교 사역 때 협력하던 분에게 선교 사역지를 빼앗겨다며 만나기만하면 불안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곳도 내가 사역 할 곳이 아니구나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2년 만에 교회를 세우다
아직 러시아 언어가 서투르니 중국 교포들이 상대로 사역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에 겨울 방학 때 ‘라스톱’이라는 곳을 간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최동수 라는 탈북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곳 라스톱에는 장로교회가 없으니 저에게 장로교회를 세워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 말을 흘러 버리고 말았는데 막상 교회를 세우려고 모스크바를 돌아다니며 기도하던 중 “너는 유다의 고통을 아느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유다는 탈북자 최동수의 부인입니다.
그 때 이었습니다. 최동수가 ‘따간호프’로 이사와 보니 이곳에는 장사가 잘되는 곳이니 한번 다녀가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 장로님과 함께 ‘따간호프’에 가서 전도를 하던 중에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김옥자 라는 성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중국에서 5년 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으로 ‘따간호프’에 와서 보니 교회가 없어서 주일에는 자기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린다면서 영적 갈급함이 죽겠으니 이곳에 꼭 교회를 세워 달라며 내손을 잡고 애원하였습니다.
나를 불렀던 최동수에게 상의 해보니 교회를 세우려면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하는데 탈북자가 불가능 하다고 하며 한 발 물러섰습니다. 다음날부터 중국인들이 모여 마작하고 도박하는 집을 택해서 이곳을 예배처소로 달라고 매일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교포가정 김진석씨 집에서 2003년 11월 2일 제가 러시아에 간지 만 2년 3개월 만에 반석장로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시장을 돌아다니며 노방전도를 시작하니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옆방에는 오신옥이라는 중국 교포가 살고 있습니다. 열심 있는 신앙 생활하는 모범 교인인데 남편의 핍박이 심해서 매일 고통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술 중독으로 가정불화가 끝이 없고 예배시간에는 교회 문을 두드리며 자기 부인을 내보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기도하고, 겨우 설득해서 교회 안으로 불러 같이 예배를 들일 때면 담배를 마구 피워 교회가 연기에 자욱하여 방해도 하고, 들러 누워 코를 골며 자기도하여 개척교회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날마다 술에 취해 살다가 병원에서 간암 판정을 받게 되자 교회가 금식과 합심기도를 하여 치유를 빌었지만 본인은 끝내 회개하지 않고 버티다가 죽기 직전 교회에서 시장 상인들에게 여비를 거두어 중국 고향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지금은 생사를 알 수없습니다. 그 후 교회는 평온해 졌지만 안타까운 일로 기억 됩니다.
두 번째 교회를 세우다.
다음해 2004년 3월 23일 우리교회 창립멤버인 김옥자집사가 70km 떨어진 ‘재미니크’로 이사 가게 되었습니다. 이사 간 김옥자 집사는 그곳에 선교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드려 달라는 부탁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게 생각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따간호프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재미니크 9시에서10시까지 예배를 드리고 다시 ‘따간호프’로 와서 저녁 6시에 예배를 드리므로 교회가 한곳에 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따간 호프 교인들이 김옥자 집사가 있는 ‘쩨미니크’와 ‘따간호프’를 선교사인 내가 왕래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 설교를 사도행전 16장 19절 34절 바울과 실라가 선교하다가 에 갇혔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와 찬송을 부르던 중에 옥문이 열렸던 말씀을 전했는데 그날 저녁 러시아 경찰에게 연행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유는 러시아는 거주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 모스크바에서 살지 않고 살고 이곳에 와서 사는 것이 위법인고로 감옥에서 2일을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했던 것 같이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 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하는 국민이라서인지 한국가사로 찬송을 불러도 경찰들이 구경을 하며 박수를 치고 모두들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마침 같이 수감되어 있던 중국교포들 두 명이 옥중에서 결식 자가 되어 풀려난 후에는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후에 따간호프는 중국교인들이 검문에 걸리면 불법 체류자로 1.000달라 벌금을 지불해야 하므로 낯 시간에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밤 시간에 이용하기로 하여 자연이 아침 예배는 째미니크에서 저녁에는 돌아와서 따간호프에서 저녁시간에 예배를 드리도록 결정 했습니다. 이것도 두 교회를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충성하고 있습니다.
나물을 뜯어 팔아 건축 자금으로
따간호프는 러시아 서쪽 흑해 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는 한국 날씨와 비슷합니다. 하루는 친목을 다지고 믿음의 형제애를 돈독히 할 목적으로 바다가로 야유회를 갔었습니다. 즐겁게 놀던 중 김옥자 집사가 “선교사님 우리 여기 와서 보니 러시아 사람들이 반찬으로 즐겨 먹는 나물들이 많은데 시간을 내어 뜯어다가 팔아 교회 건축하면 어떨까요?” 모두들 “좋은 생각이야 당장 시작합시다.” 이런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할 뿐입니다. 이날 나물 판돈 230루블 (한화 1만원)로 씨앗이 되어 지금은 미화 3.000달라가 모아지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불안 한 이국 생활로 고생 하면서도 교회를 건축하여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려는 미국으로 갔던 청교도들처럼 이런 신앙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너무나 감사한 가족들입니다 모두들 불법으로 러시아에 남아 있는 분들 인고로. 검문에 잡히면 1.000 달라 (한화 1.000.000원)를 벌금을 내야 만 하니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할 때는 교통수단은 유일한 택시를 이용하며 시장으로 가곤 합니다. 정말 순교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이가 50줄에 선 여자 몸으로 선교의 사명을 받들어 이역만리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 당 러시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봤지만 아무 곳도 내가 설 곳이 찾지 목하여 애태우던 나 대교회가 막대한 자금으로 조직으로 선교하는 틈에서 서울 봉천 소망교회가 정성으로 지원하는 힘을 보태서 힘쓰던 차에 이 분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벅찬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가 부흥이 되어 3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봉천 소망 교회에서 성경책과 찬송가 그밖에 찬송가 전곡이 있는 녹음데프와 예배에 필요한 도구들이 보내 왔습니다. 이곳 성도들은 뛸 뜻이 기뻐했습니다. 찬송가 녹음데프는 다시 복사해서 째미니크 교회도 보내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대부분 장사를 하고 있고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반주기가 있으면 하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라도 반주기를 보내 줬으면 하고 기도하는 중 입니다.
도움주실분
로뎀 네트워크
02-6745-1318, 011-383-5089
http://www.rodem.or.kr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러시아 김선숙 선교사
제가 선교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꾼 적 없었습니다. 24살 때 류마치스열로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직전에 “하나님 살려주세요. 지금 죽으면 억울합니다. 저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위해 헌신 하겠습니다.” 라고기도 했던 것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50이 넘어 선교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
1998년 2월 한국 경제가 IMF로 인해 어려워지자 남편이 사업이 부도로 문을 닫게 되고 채무자를 피해 기도원을 전전 하던 중 어느 권사님께서 돈을 주면 러시아로 가기로 하고 기다렸지만 웬일인지 계속 연기가 되여 내가 7일 작전 철야기도를 하던 중에 주님은 선교사로 가라고 말씀 하였고 나는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남편은 한국에서 실패한 사업을 러시아에서 만회 하려고 러시아로 가서 한국 상품을 판매하는 가계를 얻어 장사를 시작 하였습니다.
홀로 남은 나는 작은 교회 전도사로 섬기며 장신 대에서 공부를 하며 선교의 꿈을 키우던 중에 두 아들들이 군대에 가게 되어 홀가분하게 선교사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나라로 갈까요? 주님께 물어볼 것 없이 2001년 8월 1일 남편이 있는 러시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던 날 새벽에 주님은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강하고 담대해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는 응답을 받고 막상 러시아에 들어갔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선교 방향을 잡을 수 가 없었습니다.
러시아에 도착해서 선교지를 물색 하려고 하니 이곳 사정에 생소한 나에게 남편은 저에게 이곳 선교 형편을 알 겸해서 공부를 더해보라고 하여 모스크바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2년을 공부하였습니다. 중 겨울 방학 동안 학우인 샤샤의 고향집 백 러시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학생이 다니던 교회가 건축비 관계로 중단된 상태이므로 재정 지원을 해주는 한국 포항중앙교회에 사정을 전할 한국 사람을 찾던 중이었답니다.
마침 방문한 내게 어려운 형편을 잘 애기 해 달라는 부탁해와 탁한 사정을 전화하니 포항교회 장로님께서 현지를 방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내가 다니던 학교 이사장에게 학생으로 월 권(?)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는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저에게 빨리 선교를 시키기 위함인 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후에 모스크바에서 400을 수영하는 양로원에서 사역을 하시는 이아무게라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선교사님께서 자기가 너무 바쁘니 협력 선교사로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해서 나는 하나님 일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쁘게 생각 하고 양로원으로 갔습니다. 그날부터 식당 앞에서 사탕을 사서 나누어주며 전도를 시작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일날에는 초콜릿과 생일카드를 가지고 찾아가면 자식들마저도 찾아오지 않는데 고맙다며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10여명이던 교회가 50명으로 부흥이 되니 담당 이선교사가 행여나 선교사역을 빼길 염려여서 인지 전에 있던 사건을 꺼내면서 교도소 선교 사역 때 협력하던 분에게 선교 사역지를 빼앗겨다며 만나기만하면 불안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곳도 내가 사역 할 곳이 아니구나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2년 만에 교회를 세우다
아직 러시아 언어가 서투르니 중국 교포들이 상대로 사역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에 겨울 방학 때 ‘라스톱’이라는 곳을 간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최동수 라는 탈북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곳 라스톱에는 장로교회가 없으니 저에게 장로교회를 세워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 말을 흘러 버리고 말았는데 막상 교회를 세우려고 모스크바를 돌아다니며 기도하던 중 “너는 유다의 고통을 아느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유다는 탈북자 최동수의 부인입니다.
그 때 이었습니다. 최동수가 ‘따간호프’로 이사와 보니 이곳에는 장사가 잘되는 곳이니 한번 다녀가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 장로님과 함께 ‘따간호프’에 가서 전도를 하던 중에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김옥자 라는 성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중국에서 5년 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으로 ‘따간호프’에 와서 보니 교회가 없어서 주일에는 자기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린다면서 영적 갈급함이 죽겠으니 이곳에 꼭 교회를 세워 달라며 내손을 잡고 애원하였습니다.
나를 불렀던 최동수에게 상의 해보니 교회를 세우려면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하는데 탈북자가 불가능 하다고 하며 한 발 물러섰습니다. 다음날부터 중국인들이 모여 마작하고 도박하는 집을 택해서 이곳을 예배처소로 달라고 매일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교포가정 김진석씨 집에서 2003년 11월 2일 제가 러시아에 간지 만 2년 3개월 만에 반석장로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시장을 돌아다니며 노방전도를 시작하니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옆방에는 오신옥이라는 중국 교포가 살고 있습니다. 열심 있는 신앙 생활하는 모범 교인인데 남편의 핍박이 심해서 매일 고통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술 중독으로 가정불화가 끝이 없고 예배시간에는 교회 문을 두드리며 자기 부인을 내보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기도하고, 겨우 설득해서 교회 안으로 불러 같이 예배를 들일 때면 담배를 마구 피워 교회가 연기에 자욱하여 방해도 하고, 들러 누워 코를 골며 자기도하여 개척교회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날마다 술에 취해 살다가 병원에서 간암 판정을 받게 되자 교회가 금식과 합심기도를 하여 치유를 빌었지만 본인은 끝내 회개하지 않고 버티다가 죽기 직전 교회에서 시장 상인들에게 여비를 거두어 중국 고향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지금은 생사를 알 수없습니다. 그 후 교회는 평온해 졌지만 안타까운 일로 기억 됩니다.
두 번째 교회를 세우다.
다음해 2004년 3월 23일 우리교회 창립멤버인 김옥자집사가 70km 떨어진 ‘재미니크’로 이사 가게 되었습니다. 이사 간 김옥자 집사는 그곳에 선교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드려 달라는 부탁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게 생각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따간호프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재미니크 9시에서10시까지 예배를 드리고 다시 ‘따간호프’로 와서 저녁 6시에 예배를 드리므로 교회가 한곳에 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따간 호프 교인들이 김옥자 집사가 있는 ‘쩨미니크’와 ‘따간호프’를 선교사인 내가 왕래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 설교를 사도행전 16장 19절 34절 바울과 실라가 선교하다가 에 갇혔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와 찬송을 부르던 중에 옥문이 열렸던 말씀을 전했는데 그날 저녁 러시아 경찰에게 연행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유는 러시아는 거주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 모스크바에서 살지 않고 살고 이곳에 와서 사는 것이 위법인고로 감옥에서 2일을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했던 것 같이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 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하는 국민이라서인지 한국가사로 찬송을 불러도 경찰들이 구경을 하며 박수를 치고 모두들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마침 같이 수감되어 있던 중국교포들 두 명이 옥중에서 결식 자가 되어 풀려난 후에는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후에 따간호프는 중국교인들이 검문에 걸리면 불법 체류자로 1.000달라 벌금을 지불해야 하므로 낯 시간에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밤 시간에 이용하기로 하여 자연이 아침 예배는 째미니크에서 저녁에는 돌아와서 따간호프에서 저녁시간에 예배를 드리도록 결정 했습니다. 이것도 두 교회를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충성하고 있습니다.
나물을 뜯어 팔아 건축 자금으로
따간호프는 러시아 서쪽 흑해 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는 한국 날씨와 비슷합니다. 하루는 친목을 다지고 믿음의 형제애를 돈독히 할 목적으로 바다가로 야유회를 갔었습니다. 즐겁게 놀던 중 김옥자 집사가 “선교사님 우리 여기 와서 보니 러시아 사람들이 반찬으로 즐겨 먹는 나물들이 많은데 시간을 내어 뜯어다가 팔아 교회 건축하면 어떨까요?” 모두들 “좋은 생각이야 당장 시작합시다.” 이런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할 뿐입니다. 이날 나물 판돈 230루블 (한화 1만원)로 씨앗이 되어 지금은 미화 3.000달라가 모아지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불안 한 이국 생활로 고생 하면서도 교회를 건축하여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려는 미국으로 갔던 청교도들처럼 이런 신앙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너무나 감사한 가족들입니다 모두들 불법으로 러시아에 남아 있는 분들 인고로. 검문에 잡히면 1.000 달라 (한화 1.000.000원)를 벌금을 내야 만 하니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할 때는 교통수단은 유일한 택시를 이용하며 시장으로 가곤 합니다. 정말 순교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이가 50줄에 선 여자 몸으로 선교의 사명을 받들어 이역만리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 당 러시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봤지만 아무 곳도 내가 설 곳이 찾지 목하여 애태우던 나 대교회가 막대한 자금으로 조직으로 선교하는 틈에서 서울 봉천 소망교회가 정성으로 지원하는 힘을 보태서 힘쓰던 차에 이 분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벅찬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가 부흥이 되어 3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봉천 소망 교회에서 성경책과 찬송가 그밖에 찬송가 전곡이 있는 녹음데프와 예배에 필요한 도구들이 보내 왔습니다. 이곳 성도들은 뛸 뜻이 기뻐했습니다. 찬송가 녹음데프는 다시 복사해서 째미니크 교회도 보내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대부분 장사를 하고 있고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반주기가 있으면 하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라도 반주기를 보내 줬으면 하고 기도하는 중 입니다.
도움주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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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745-1318, 011-383-5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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