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4:23~25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사역을 전개하는 내용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요약한 것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안)에서 활동하신 무대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고 활동하신 것이다.
갈릴리(Galilai,a 갈릴리아)라는 단어는 갈빗대(하첼라으 [l'Ceh)라는 단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고리”라는 의미로 “연결된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닌 인간들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하나님과 연결하기 위해 택하신 장소이다.
먼저 갈릴리 (안)에서 가르치셨다(디다스코 dida,skw)는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신 것일까? 바로 하나님과 연결하시기 위해 사람의 마음에 원래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깨끗하게 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옛 언약의 율법으로 찌들어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새 언약을 가르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바꾸어 깨끗하게 하는 것이 가르침의 목적 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 위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교육이나 가르침의 근본 핵심이 사라지고 유행을 따르거나 현재 환경이나 분위기에 동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시대에 맞아야 하며 아이들의 취향에 맞춰야 하는 둥 교육의 정신이나 이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주님과 같은 마음이 되기보다는 제자훈련을 받으면 되는 줄 알고 있으며 직분을 받으면 되는 줄 안다. 직분을 받거나 제자가 되는 궁극적인 목적과 본질에서 벗어나 있어 문제인 것이다. 사실 부활의 증인이 되어버린 사람은 직분이나 제자에 목적을 두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런 감투를 씌울 뿐이다.
둘째 복음을 전파(케륏소 khru,ssw)했는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식으로 전파하는 유치한 방법을 버려야 한다. 성경을 자세히 유추해보면 아예 예수나 하나님을 모르고 지옥 가는 개념이 아닌 것을 안다면 그렇게 전도하거나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런 존재들이 가는 지옥이란 개념과 예수를 믿다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형편없이 되어버리는 불신자들이 받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존재들이 가는 지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믿고 단순히 천국 가는 것이 아닌데 죽고 난 뒤에 천국만 가르치고 있으며 전파하고 있으니 너무나 한심하다. 이 땅에서 천국의 존재가 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가 되어 천국의 덩어리 그 자체를 만드는 복음의 존재가 되는 것을 전파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산상수훈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며 접한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내용도 모르면서 선교를 한다거나 단기 선교를 가고 있다면 중단하고 이것부터 알고 선교를 했으면 한다. 선교라는 단어도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음도 불구하고 선교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사람의 잘못을 멀리 보내버린다” 아니면 용서라는 본질과 의미를 멀리 있는 자들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 선교다.
용서라는 개념도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내 스스로 무엇 하나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건더기가 하나도 없으며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도 없는데 각기 제 길로 가는 우리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절대적인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양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온전히 죽게 하시고 우리와 함께 삼일동안 장사지냈으며 우리와 함께 부활하시어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보좌에 앉아 계심을 가르치며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순간, 아니 주님과 함께 뼈저리게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구원받았으며 용서받았다고 하는 표현일 뿐, 이 사실을 몸서리쳐지게 알고 나면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용서받을 일이 얼마나 많으며 구원받을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표현을 하면 본인을 향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과거에 깨닫지 못한 내용을 접하는 순간 과거에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비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보게 된다.
셋째 모든 사람의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심(qerapeu,w 떼라퓨오)은 “사환, 거두다, 추수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 되었다. 여기서 모든 병은 속이 부패해진 상태이며 모든 약한 것은 겉이 초라해져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거짓복음을 듣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이 일시적으로 반복되는 병임을 깨달아야 한다.
거짓 복음을 듣고 병든 존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장성하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고쳐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육신 병이 치료되면 신기한 일로 여기며 정신적인 병이 치료하기 위해 귀신들렸다고 몰아붙이며 안수가 아닌 안찰이라는 미명아래 사람을 구타하여 생명까지 앗아가는 일을 자행하는 것을 신유의 은사라고 하는 착각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사람들의 병들을 치료하실 때 몸을 만지셨다는 단어가 얼마나 다른 의미로 접근해 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게 안수하면 되는 줄 안다. 680 a-ptomai(하프토마이 : 만지다)에서도 "등불을 켜다" a-ptw(하프토)라는 동의어다. 잠 20:27에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는 말씀에서 등불을 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진리의 빛이 들어와 영혼이 살아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치료 때문에 육체적인 몸만 만지는 사건이 아니라 몸과 함께 여호와의 등불인 사람의 영혼을 만진다는 단어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안수의 본질이며 목적인데 불구하고 안수를 남발하고 있다면 이것부터 회개해야 할 것이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연등행사를 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인데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사를 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고침의 진리를 모르는 채 산상수훈을 읽고 외우며 묵상한다면 마 5:3의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의 것이라”는 의미마저 퇴색되어 버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5장에서 7장까지의 깊은 진리를 어떻게 깨달을 것인지 24절에 병든 자를 통칭하는 “모든 앓는 자”는 무엇 때문에 앓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상이 아닌 거짓 복음을 인해 병들어 있는 상태로 다른 정신적 영적 사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각색 병”이란 의미는 자기에 유익이 있어야만 믿는 존재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아 병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딤전 6:3~5)
고통에 걸린 자(basa,noij sunecome,nouj 바사노이스 순에코메노우스)는 sun(순 함께)+ecw(에코 소유하다)=함께 잡다는 의미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막고 세상의 말로 듣고 있는 상태를 고통에 걸린 자로 의미하고 있다. 옛 사람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오는데 그 진통을 못 느끼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산상수훈을 옛 사람의 상태에서 들으면 고통이 되며 세상의 말로 들으면 인간의 지식과 판단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음을 빨리 인식하고 새 사람으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원래 새 사람이었던 신분과 지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고침을 받는 것이다.
눅 16:24에 부자가 나사로에게 물 없는 고통을 호소하면서 한 방울의 생수를 요청했다. 생수의 말씀이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부자는 바로 누구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는 바로 세상의 생각이 많은 자, 옛 사람의 상태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자를 바로 부자라고 지칭하고 있다.
귀신들린 자(daimonizome,nouj 다이모니조메누스)는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 귀신들의 존재들로부터 사로잡혀 괴롭힘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생명의 복음을 구별을 못해 다른 거짓복음을 듣고 마음이 썩어가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외부인들로부터 섬김을 받고 대접받으려고 하며 도덕군자가 되어 훌륭한 존재로 변신하여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속으로 더러운 영으로 몽글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귀신들이나 마귀 사탄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 아무리 예수 이름으로 호통을 쳐도 물러가지 않음을 잘 알아야 한다. 욥이나 다니엘, 심지어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도 그들은 쉽사리 물러가지 않았음을 여러 군데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내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워져 있지 않으면 세 가지 악령들은 물러가지 않는다.
간질 하는 자(selhniazome,nou 셀레니아조메누스)는 유혹하는 달과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데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로 거짓 복음을 받아들이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와 아무리 진리의 빛을 비쳐도 빛을 반사할 수 있는 경우가 된다.(마 24:29)
내 안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비추게 되면 내 안에서 하늘의 전쟁,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주님과 함께 승리하게 되면 자동으로 귀신들이나 마귀 사탄의 존재들이 물러가게 되어 있다.
중풍병자(paralutikou,j 파라뤼티코우스)는 para(파라, 옆으로)+lu,w(뤼오 풀어지다)=약해진, 마비된 뜻으로 믿음의 단계로 올라서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며 사람의 육신적 생각으로 완전히 굳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상태를 갖고 산상수훈을 접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본문에는 없지만 혈루증 환자는 아무리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들어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현상이 일어나 반드시 고침을 받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서 나오는 병자들은 그 때 당시의 병자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육체적인 병자들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나도 이들과 같은 병을 갖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빨리 주님 앞에 나와 고침을 받아야 산상수훈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명심해라.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필자 이종남 목사
갈릴리(Galilai,a 갈릴리아)라는 단어는 갈빗대(하첼라으 [l'Ceh)라는 단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고리”라는 의미로 “연결된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닌 인간들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하나님과 연결하기 위해 택하신 장소이다.
먼저 갈릴리 (안)에서 가르치셨다(디다스코 dida,skw)는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신 것일까? 바로 하나님과 연결하시기 위해 사람의 마음에 원래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깨끗하게 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옛 언약의 율법으로 찌들어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새 언약을 가르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바꾸어 깨끗하게 하는 것이 가르침의 목적 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 위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교육이나 가르침의 근본 핵심이 사라지고 유행을 따르거나 현재 환경이나 분위기에 동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시대에 맞아야 하며 아이들의 취향에 맞춰야 하는 둥 교육의 정신이나 이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주님과 같은 마음이 되기보다는 제자훈련을 받으면 되는 줄 알고 있으며 직분을 받으면 되는 줄 안다. 직분을 받거나 제자가 되는 궁극적인 목적과 본질에서 벗어나 있어 문제인 것이다. 사실 부활의 증인이 되어버린 사람은 직분이나 제자에 목적을 두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런 감투를 씌울 뿐이다.
둘째 복음을 전파(케륏소 khru,ssw)했는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식으로 전파하는 유치한 방법을 버려야 한다. 성경을 자세히 유추해보면 아예 예수나 하나님을 모르고 지옥 가는 개념이 아닌 것을 안다면 그렇게 전도하거나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런 존재들이 가는 지옥이란 개념과 예수를 믿다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형편없이 되어버리는 불신자들이 받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존재들이 가는 지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믿고 단순히 천국 가는 것이 아닌데 죽고 난 뒤에 천국만 가르치고 있으며 전파하고 있으니 너무나 한심하다. 이 땅에서 천국의 존재가 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가 되어 천국의 덩어리 그 자체를 만드는 복음의 존재가 되는 것을 전파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산상수훈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며 접한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내용도 모르면서 선교를 한다거나 단기 선교를 가고 있다면 중단하고 이것부터 알고 선교를 했으면 한다. 선교라는 단어도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음도 불구하고 선교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사람의 잘못을 멀리 보내버린다” 아니면 용서라는 본질과 의미를 멀리 있는 자들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 선교다.
용서라는 개념도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내 스스로 무엇 하나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건더기가 하나도 없으며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도 없는데 각기 제 길로 가는 우리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절대적인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양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온전히 죽게 하시고 우리와 함께 삼일동안 장사지냈으며 우리와 함께 부활하시어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보좌에 앉아 계심을 가르치며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순간, 아니 주님과 함께 뼈저리게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구원받았으며 용서받았다고 하는 표현일 뿐, 이 사실을 몸서리쳐지게 알고 나면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용서받을 일이 얼마나 많으며 구원받을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표현을 하면 본인을 향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과거에 깨닫지 못한 내용을 접하는 순간 과거에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비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보게 된다.
셋째 모든 사람의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심(qerapeu,w 떼라퓨오)은 “사환, 거두다, 추수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 되었다. 여기서 모든 병은 속이 부패해진 상태이며 모든 약한 것은 겉이 초라해져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거짓복음을 듣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이 일시적으로 반복되는 병임을 깨달아야 한다.
거짓 복음을 듣고 병든 존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장성하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고쳐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육신 병이 치료되면 신기한 일로 여기며 정신적인 병이 치료하기 위해 귀신들렸다고 몰아붙이며 안수가 아닌 안찰이라는 미명아래 사람을 구타하여 생명까지 앗아가는 일을 자행하는 것을 신유의 은사라고 하는 착각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사람들의 병들을 치료하실 때 몸을 만지셨다는 단어가 얼마나 다른 의미로 접근해 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게 안수하면 되는 줄 안다. 680 a-ptomai(하프토마이 : 만지다)에서도 "등불을 켜다" a-ptw(하프토)라는 동의어다. 잠 20:27에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는 말씀에서 등불을 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진리의 빛이 들어와 영혼이 살아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치료 때문에 육체적인 몸만 만지는 사건이 아니라 몸과 함께 여호와의 등불인 사람의 영혼을 만진다는 단어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안수의 본질이며 목적인데 불구하고 안수를 남발하고 있다면 이것부터 회개해야 할 것이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연등행사를 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인데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사를 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고침의 진리를 모르는 채 산상수훈을 읽고 외우며 묵상한다면 마 5:3의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의 것이라”는 의미마저 퇴색되어 버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5장에서 7장까지의 깊은 진리를 어떻게 깨달을 것인지 24절에 병든 자를 통칭하는 “모든 앓는 자”는 무엇 때문에 앓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상이 아닌 거짓 복음을 인해 병들어 있는 상태로 다른 정신적 영적 사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각색 병”이란 의미는 자기에 유익이 있어야만 믿는 존재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아 병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딤전 6:3~5)
고통에 걸린 자(basa,noij sunecome,nouj 바사노이스 순에코메노우스)는 sun(순 함께)+ecw(에코 소유하다)=함께 잡다는 의미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막고 세상의 말로 듣고 있는 상태를 고통에 걸린 자로 의미하고 있다. 옛 사람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오는데 그 진통을 못 느끼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산상수훈을 옛 사람의 상태에서 들으면 고통이 되며 세상의 말로 들으면 인간의 지식과 판단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음을 빨리 인식하고 새 사람으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원래 새 사람이었던 신분과 지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고침을 받는 것이다.
눅 16:24에 부자가 나사로에게 물 없는 고통을 호소하면서 한 방울의 생수를 요청했다. 생수의 말씀이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부자는 바로 누구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는 바로 세상의 생각이 많은 자, 옛 사람의 상태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자를 바로 부자라고 지칭하고 있다.
귀신들린 자(daimonizome,nouj 다이모니조메누스)는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 귀신들의 존재들로부터 사로잡혀 괴롭힘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생명의 복음을 구별을 못해 다른 거짓복음을 듣고 마음이 썩어가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외부인들로부터 섬김을 받고 대접받으려고 하며 도덕군자가 되어 훌륭한 존재로 변신하여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속으로 더러운 영으로 몽글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귀신들이나 마귀 사탄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 아무리 예수 이름으로 호통을 쳐도 물러가지 않음을 잘 알아야 한다. 욥이나 다니엘, 심지어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도 그들은 쉽사리 물러가지 않았음을 여러 군데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내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워져 있지 않으면 세 가지 악령들은 물러가지 않는다.
간질 하는 자(selhniazome,nou 셀레니아조메누스)는 유혹하는 달과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데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로 거짓 복음을 받아들이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와 아무리 진리의 빛을 비쳐도 빛을 반사할 수 있는 경우가 된다.(마 24:29)
내 안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비추게 되면 내 안에서 하늘의 전쟁,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주님과 함께 승리하게 되면 자동으로 귀신들이나 마귀 사탄의 존재들이 물러가게 되어 있다.
중풍병자(paralutikou,j 파라뤼티코우스)는 para(파라, 옆으로)+lu,w(뤼오 풀어지다)=약해진, 마비된 뜻으로 믿음의 단계로 올라서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며 사람의 육신적 생각으로 완전히 굳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상태를 갖고 산상수훈을 접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본문에는 없지만 혈루증 환자는 아무리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들어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현상이 일어나 반드시 고침을 받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서 나오는 병자들은 그 때 당시의 병자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육체적인 병자들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나도 이들과 같은 병을 갖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빨리 주님 앞에 나와 고침을 받아야 산상수훈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명심해라.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필자 이종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