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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역보고

러시아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市 사역 소개서


장창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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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장창수 선교사입니다. 저는 예장합신 선교부에 의해 1994년 2월 24일 러시아 시베리아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시에 러시아 연방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시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첫 3년은 문화 적응과 언어 훈련에 몰두했습니다. 저는 선교 초기부터 러시아 현지 교단과 협력 선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가 영속적으로 존재하려면 현지 교단과 협력 선교를 하여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러시아의 주력 교단은 공인된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 침례교단이었습니다.

제 선교원칙때문에 언어훈련을 받는 3년 동안 저는 현지 침례교회에 출석하며 현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배우도록 노력했습니다. 한편 러시아 침례교단 서시베리아 노회의 '노보시비르스크' 시찰회의 허락을 받고 한달 한번 모이는 목사들의 회합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며 현지인 목사님들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목사들은 처음에는 저를 냉대했습니다. 여기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선교 초기 자리를 잡기 위해 러시아 침례교단과 협력 선교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기반이 다져지면 침례 교단에서 이탈하여 선교사를 따르는 교인들과 함께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침례교회는 번번히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현지 침례교회가 다소 율법주의적 이어서 외국 선교사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 문제도 있었습니다. 나중 이 사실을 알았지만 저는 이들의 예배와 모임에 묵묵히 참석하며 노회장 그리고 일부 중진 목사님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 때 한국 교회에서 독창자로 활동한 경험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는 신부의 찬양으로 시작하여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런 전통이 러시아 침례교회에도 남아있어 목회자들이 성가대에서 활동합니다. 이를 안 저는 방문하는 교회의 예배 시간마다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현지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거의 매주일 곡중 독창을 맡아 불렀습니다. 이 결과 이곳 침례교단에서 열리는 대형집회, 예컨대 '130주년 침례교 전래 기념예배'나 이곳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햄 전도학교'에서도 특송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침례교인들의 사랑을 쉽게 얻을 수 있었고 러시아 목사님들의 관심과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어 훈련 3년이 끝나갈 때 저는 목회자가 없는 지교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노보시브르스크'시의 북서쪽에 위치한 '키롭스키'구(區)에는 많은 공장들이 있고 구내 '자툴린스크'지역에 이들 노동자들을 위해 세워진 아파트 단지가 있습니다. 이 단지에 약 5만명의 주민이 살고 바로 그곳에 '노보시비르스크'시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인 '스파세니아'교회가 미국남부침례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1994년 개척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노년 성도들을 위해 개척된 교회로 극장 '라스베트'의 홀을 임대하여 매주 두 번 60여명의 성도들이 회집했습니다. 교회의 입지조건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미남침례교 선교사와 러시아 침례교회 사이 교회 전통상 이견이 생겼고 그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개척된 지 얼마 안되어 선교사가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이후 평신도 설교자가 '라스베트'교회를 돌보았지만 교회 성장은 지지부진한 상태였습니다. 자연히 성도들은 목회자를 보내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저는 이 교회를 두 번 방문하고 찬양도 하고 서투른 노어지만 설교도 했습니다.

기도중 이 교회를 선택하고 저는 노회장인 '겐리'목사에게 이 교회에서의 사역을 청원했고 노회 시찰회에서 러시아 목사님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지 교단과 본인 사이 선교 협약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처음 협약서에는 사역 기간동안 교회건물을 지을 것이란 문구를 넣었으나 나중 수정하여 이 문구를 삭제시켰습니다. 현지교인의 참여 없는 일방적인 교회 건축을 자제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나중 노회장도 이 점에서 양보해 주었습니다. 협약서에는 현지인 청년중 장래 교회 지도자가 될 사람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습니다. 사역 기간은 3년 6개월이었습니다. 3년 동안 현지인 청년을 양육하고 나머지 6개월 동안 그에게 현지 교회를 담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교 협약서의 주내용은 미조직 교회를 조직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997년 1월 모교회인 '스파세니아'교회의 공동의회에서 동의를 얻어 청빙이 결정되었고 지교회 '라스베트'교회의 공동 의회에서도 교인들의 전폭적인 찬성을 얻어 담임 목사로 청빙받았습니다. 한국서 온 조그만 목사가 이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한국인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러시아 침례교단의 목사 회원으로 정식 영입되었고 그리고 현지 지교회의 담임목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한국 선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칼빈주의 장로교에 속한 한국 목사가 웨슬리안 교단인 러시아 침례교단의 정식 회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이었습니다. 1997년 2월 첫주 성찬식에 참여하며 교회를 위임받았습니다. 이곳 러시아에 온지 약 3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현지 교회의 담임목사였기에 저는 그들의 예배와 신앙 전통을 그대로 유지시켰습니다. 그들의 신앙 정서를 존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어 장벽은 역시 러시아인의 자존심만큼 높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장 부러워한 것은 아프리카나 일본을 비롯한 동남 아시아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일년 정도만 현지 언어를 훈련하면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어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 언어가 서투룬 제가 현지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언어 훈련중 본인도 고려인 통역자의 도움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불신 고려인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내용을 통역할 때마다 영적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현상을 보았습니다. 설교 통역중 민망할 정도로 마른 기침을 아주 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통역자의 노어 번역이 '콩그리쉬'식으로 불완전했으며 그 결과 의사 전달율이 아주 낮았습니다. 또한 은연중 나타나는 민족주의 때문에 러시아 교인들은 러시아에서 출생한 고려인 통역자의 노어 발음과 그 표현을 불필요할 정도로 트집잡았습니다. 이를 간파한 저는 직접 노어 설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사역 개시 1년 전부터 창세기 강해 설교를 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노어 훈련의 지루함을 피하고 훈련 방법에 변화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전에 교회 용어와 표현에 익숙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사역 초기부터현지 언어 설교에 대한 걱정을 덜었습니다. 지금은 창세기와 에베소서에 대한 강해 설교들을 비롯해 약 150여 편의 노어 설교문들이 저의 자랑스런 무형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까다로운 노어의 발음 때문에 유창하게 설교문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이해한 한 성도가 저에게 천천히 읽어달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면 발음이 틀려도 전후좌우의 문맥에 의해 설교 내용을 100%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유익한 충고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노어를 하나하나 정복해 나갔습니다. 거의 3년이 지난 지금 감정과 악센트를 주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어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는 조국 교회에서 배운대로 선교지에서 사역하게 됩니다. 한국 목회자인 저도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3월부터 5월까지 교인들을 심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아직 조력자가 없었습니다. 저는 임 월조선교사와 함께 순번을 정해 라스베트교회 설교자들과 매일 성도들을 심방했습니다. 그러나 심방하는 집마다 본문을 달리하여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14:1-6절을 한 본문으로 택해 줄기차게 설교했습니다.

이 때 제 마음을 담대하게 만든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조국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미국 선교사들이 틀리게 말해도 한국인들을 모두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노어를 못해도 러시아인들은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노어가 서투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같이 심방하던 러시아 형제들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저와 함께 심방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심방하는 집마다 서투른 노어로 같은 본문의 설교를 들어주는 그들의 인내력에 한계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라스베트' 교인들이 이상하게도 우리들의 심방을 원했고 제 서투른 노어를 잘 이해하며 우리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심방온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마치 한국의 인심 좋은 시골 교인들을 심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들이 가끔 생겼습니다. 침례교 목회자들은 자신의 생업 때문에 교인들을 정규적으로 심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처음으로 심방을 계획하자 '라스베트'교인들은 그 동안 전도하고 싶었던 대상들인 불신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이웃을 초청하였습니다. 사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참 당황했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전도의 내용보다도 저의 서투른 노어를 트집잡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외국인 담임목사의 노어가 어눌한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을 대신해 전도하라고 간접적인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한국인 목사를 신뢰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저에게 용기를 주셨고 서투른 노어지만 담대하게 전도할 때 불신자들은 순한 양처럼 들으며 순종해 주었습니다.

심방이 끝나갈 때 한 본문으로 저는 노어 설교를 약 50여번 했으며 그 결과 한 시간 이상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매주일 약 60여명 모이던 교인들이 120여명까지 늘었습니다. 그 동안 나오지 못한 성도들을 심방하며 말씀으로 위로할 때 이들은 교회에 다시 출석할 새힘을 얻었고 그리고 새신자들이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본인에게 기적을 허락하셔서 위로하고 힘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도 한국식 심방이 큰 사역적 효과를 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러시아 사회가 사람들을 바쁘게 만드는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에 아직도 접어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시아 침례교회에서는 주일 예배가 2시간 이상 진행되며 이 때마다 3번의 설교와 3번 이상의 성가대 특송이 있습니다. 이것이 러시아 침례교의 예배 전통입니다.

사역을 시작한지 4개월이 지났지만 제가 요청한 젊은이를 노회에서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노회장이 청년 몇 사람을 만나 면접했지만 생활비를 보장해 주지 않는 목회를 위해 직장을 사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직접 사람을 찾기로 결심하고 큰 교회 저녁 예배마다 출석하여 젊은 청년들의 설교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이 때 지금의 조력자 '사폐예브 알렉세이'가 눈에 띠었고 그 당시 25살의 기혼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 성경 말씀을 잘못 인용했지만 성경을 많이 연구한다는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와 그 부인을 만나 면접할 때 그들은 기꺼히 직장을 사퇴하고 전적으로 목회에 헌신하겠다고 했습니다. 노회장도 그와의 동역을 기꺼히 동의했습니다.

이렇게 1997년 8월부터 잘 생긴 러시아 청년 '알렉세이'가 저의 조력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생활비는 선교 협약서대로 사역 첫해 70%는 제가 그리고 나머지 30%는 현지 교회가 부담했습니다. 사역 둘째 해에는 선교사가 30%를 그리고 현지 교회가 70%를 부담할 것이며 사역 셋째 해에는 현지 교회에서 전액 보조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선교 협약서는 선교사가 사역하는 동안 지교회의 성장을 전제하였습니다.

그러나 1997년말 한국에 다가온 IMF사태로 저는 협약서대로 재정적으로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원화의 가치 하락으로 달라 베이스로 받는 생활비가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루블은 상대적으로 인상되어 받은 후원금으로 생활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노회장의 동의를 얻어 교회에서 그의 생활비를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이 때 깨달은 사실은 조국의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안정이 선교 현장에 직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경제적인 사태가 러시아인들 앞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그 만큼 추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생활비 문제로 철수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 위해서는 안됐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배푸셨습니다. 1998년 여름 러시아도 모라토리움을 당해 루블이 폭락하면서 달라의 구매력이 되살아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99년부터 한국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며 받는 생활비도 조금씩 인상되었습니다. 이렇게 선교에서 최전방도 중요하지만 후방의 역할도 중요함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후방은 병참기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민족 복음화는 물론 세계 선교를 항구적으로 감당하려면 교인들이 자신의 사회에 안정적으로 공헌할 수 있도록 신앙 교육을 잘 시켜야 합니다.

조력자의 존재는 제 사역에 큰 힘을 주었습니다. 저의 언어 장벽이 조력자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목회 지도겸 사전에 그에게 모든 지시를 하고 그로 하여금 일이 진행되도록 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의 노어가 어눌해도 그가 저를 잘 아는 만큼 언어장벽을 뛰어넘어 그는 저를 잘 이해했습니다.

조력자가 있기 전 현지인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언어가 서툴러도 제가 교회의 모든 행사에 앞장 서야 한다는 것이 항상 부담을 주었습니다. 교회 용어와 표현을 모르는 저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물론 통역자를 사용하면 쉽게 해결되지만 민족주의가 강한 러시아인 앞에 고려인 통역자를 세우는 것도 선교의 효과를 위해 좋은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노보시비르스크'시에서 한국말을 하는 신앙인 고려인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한국 교회로 하면 제직회인 형제 모임에서 저는 사회와 설교를 하여야 했습니다. 이 형제 모임에는 외국인의 목회를 비웃는 형제들이 일부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조력자의 존재는 이 스트레스를 경감시켰습니다. 그가 모세를 대신한 아론처럼 나의 대변자로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저에게 들은 회의 일정을 잘 이해하였기에 나의 부족한 설명을 잘 보충해 주었습니다. 사실적으로 그는 나의 조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지도하는 것이 처음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침례교에서 자란 그는 칼빈주의자인 저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교리적으로 침례교를 사수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저와 자주 논쟁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 문제는 가능하면 피하고 대신 목회 방법을 가르쳐 주기에 힘썼습니다.

매주 4-5회 그와 함께 신자들을 병원으로 그리고 집으로 심방했고 매월 첫주 노약자를 심방하여 성찬식을 집례했습니다. 심방을 통해 목회자와 교인사이 정신적 유대감이 깊어짐을 보며 그는 심방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중요한 행사마다 그를 내세워 생생하고도 풍부한 현장 경험을 쌓도록 했습니다. 매년 수세자를 위한 학습이 있을 때마다 그가 맡아 가르쳤습니다. 차츰 그는 가르치기에 능해졌습니다. 2달에 한번 있는 공동의회에서도 함께 주관했습니다. 교회 재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일년간 회계를 맡기고 지도했으며 형제 모임이나 공동의회에서 서기로 일하게 하여 주먹구구식의 교회 행정도 바로 잡아 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 교회에서 배운 목회 경험을 구체적으로 그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점차 그가 저를 이해하는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본인의 창세기 강해 설교를 통해 본문 해석을 새롭게 하는 방법도 그는 차츰 깨달았습니다. 지금 그는 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이 때 깨달은 것은 현지인 젊은이를 지도자로 세우는 일이란 예수님이 앞장 서서 제자들을 양육한 것처럼 선교사의 인격과 교양 그리고 영적 능력에 바탕하여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선교사는 단지 교회 건물을 세우는 기능인이 아닌 전인격적인 목회자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선교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제 조력자 '사폐예브 알렉세이'는 2년 6개월 동안 저와 함께 동역한 후 노회의 인준을 받고 2000년 1월 9일 마침내 '라스베트'교회의 안수 집사로 장립되었습니다. 이 때 본인이 사역을 시작한지 약 3년이 지났습니다. 선교 협약서대로 이제 제가 후퇴할 때가 되었고 이를 위해 조력자이며 안수 집사인 그에게 모든 전권을 맡길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했습니다. 침례교회에서는 안수 집사도 목사 장로처럼 교회의 지도자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전과 달리 매주 만나는 횟수를 대폭 줄이고 그가 스스로 교회를 돌보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충고자로 남았습니다. 매주일 4회 이상 하던 설교도 2000년 2월부터 한 번으로 줄였고 대신 현지인 설교자들이 순번으로 돌아가며 봉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현지인 체제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이를 위해 선교사는 큰 양보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도 자리에 연연하면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떠날 때 교회의 현황은 저의 사역 초기에 비해 확 달라졌습니다. 3년전 60 여명하던 세례 교인이 약 120명으로 늘었으며 예배 출석도 매주일 약 60여명에서 주일학교 출석 아동 20여명을 포함하여 150명으로 그리고 삼일 저녁은 30여명에서 70여명으로 늘었습니다. 지금은 이곳 침례교회에서는 처음으로 4 곳의 구역예배와 2 곳의 기도 모임이 금요일마다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년부가 생겼으며 교회 지도자가 없는 시골 교회 '발로트노에'에 매주일 설교자를 파송하여 돕고 있으며 라스베트교회가 개척한 '미츄린스크'지역에서 어린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라스베트'교회는 목회자 일인의 생활비를 책임질 정도로 재정적으로 자립했습니다. 아직도 극장 홀을 임대하여 회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헌금 5천불과 현지인 교인들의 헌금 9천불을 모아 교육관겸 사무실용으로 방 4개의 아파트를 구입했습니다. 러시아의 경제를 생각하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과 청년들이 회집하고 각종 교육이 이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아파트는 앞으로 교회 건축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본인의 조력자였던 '사폐예브 알렉세이'의 장래 사역으로 제가 받게 될 상급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쁘듯해집니다. 한국 목사에게서 배운대로 그가 신실한 종으로 주의 재림 때 나타나기만을 소원합니다. 선교의 원칙을 알려주는 성경 구절 고린도 전서 9장 19절을 읽으며 사역보고를 마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들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절)

장 선교사님은 저희가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늘 친절하고 열정적인 분이라 인상이 깊습니다.
이제 노보시비르스크를 떠나 서쪽 소치 부근 도시로 사역지를
옮기게 됩니다.
이번 기회에 사모님이신 장월조 선교사님 건강도 회복되시길 기원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사진- 목사님 꽃다발 한아름 선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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