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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한 성경의 입장

신명기 24장은 이혼을 바라보는 구약 율법이 아니다. 신명기 24장은 구약 율법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 24장이 이혼을 허용하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은 옳거나 선한 것이라 해서 무조건 허용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옳지 않은 것, 선하지 않은 것을 허용한다. 이것이 율법의 이탈이다.
잘못된 것을 허용함으로써 신명기 24장은 이스라엘의 많은 비참을 야기했다. 문제 많은 혼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문을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것을 종종 잊는다. 바로 신명기 24장의 규례에는 아주 수치스러운 일과 쓰라린 저주의 상자가 열릴지도 모른다. 모세의 경고가 들어 있다. P114

신명기 24장은 이혼에 대한 율법이 아닌 율법으로부터 이탈이다. 이혼에 대한 율법은 창세기 2장 하나님의 혼인 제도에 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마태복음 19장 8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지시킨 것이다. 신명기 24장은 모세가 율법의 이탈을 허용함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나서 예수님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에게 상기시킨다. 이혼에 대한 율법은 창세기 2장 18-24절, 하나님께서 최초에 혼인 제도를 세우시는 기사에 나타나다. 바로 이것이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도 적용되는 법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9:6). 하나님이 두 사람을 짝지으셨다. 그러므로 이혼은 금지된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셨다. 하나님은 말라기 2장 15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혼에 대한 구약 율법과 상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혼이 불가하다는 사실이 말하는 온전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혼은 사악하다.
예수님께서 이혼을 마태복음 5장 31-32절에서 다루신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죄하시고 금하셨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재혼이 아니라 이혼이다. 비록 교회 안에서 재혼은 우리에게 여전히 큰 충격으로 여겨진다. 이혼에 대해서는 점점 무감각해져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마치 이혼이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닌 것처럼, 오직 재혼의 가능성 때문에 이혼을 금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이혼이 발생할 때 재혼이 뒤따를 가능성을 지적하신다. 그러나 그는 이혼이 또 다른 악을 낳기 때문이 아니라 이혼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정죄하신다. 누구든지 그의 아내와 이혼하면 그녀와 이혼한다는 사실 때문에 죄를 짓는다.
비록 예수님은 남자가 그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정죄하시지만 여기에는 여자가 그의 남편과 이혼하는 것도 동일한 죄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남자가 주도권을 쥐기 때문에 모든 이혼은 남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이혼할 때, 여자도 주도권을 쥐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누가 이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 자체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이혼을 정죄함은 남편과 아내가 각기 온갖 형태로 분리됨을 정죄하는 것이라 이해돼야 한다. 그는 “버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것은 적법하고, 공식적인 이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우리가 아는 별거의 형태를 포괄한다. 이는 혼인한 상대에게서 단순히 떠나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버리는 것, 별거하는 것, 떠나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한 되게 하신 제도를 둘로 떼어내는 행동이다. P116
창세기 12장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이것에 대한 생생한 예를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안전 때문에 그의 아내를 “버렸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가 사라를 취하게 되고 사라는 그와 음행할 뻔하였다. 하나님은 그가 세우신 혼인 제도에 어떠한 어리석음도 보이시지 않는다. 물론 남편을 버리고 떠나는 아내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내 역시 남편이 음행하도록 만들어버린다. 비록 사악하게 이혼을 당하였다 할지도라도 그 이혼한 여자는 음행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녀가 한다면, 그녀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32절 마지막 부분이 이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혼의 주동자도 마찬가지로 비난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책임을 물으신다.
예수님이 이혼으로 인한 온갖 종류의 지극히 사악한 악, 즉 음행 때문에 이혼을 금하신다는 사실이 이혼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이혼이 상대방으로 재혼을 하게 하든지 안하든지 이혼은 그 결과와는 전혀 상관없이 죄다. 왜냐하면 사람이 교만의 반역에 빠져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묶은 것을 풀 수 없다. 혼인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다. 혼인을 통해 하나님은 둘을 하나로 만드신다. 하나가 다시 둘이 되는 게 가능한가의 여부를 떠나서 잘못이다. 나뉘어진 사람들이 새 끈들을 만들려고 노력하든지 말든지 어떠한 풀림도 있을 수 없다. 다음은 마태복음 19장 4-6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이혼에 대한 말씀이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 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5장 32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이 이혼을 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만약 잘못된 행실로 이혼한 여자가 재혼을 하더라도 그녀와 새 남편이 음행을 하는 거라는 사실을 덧붙여야만 한다. 왜? 혼인의 끈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이혼을 정죄하시면서 예수님은 혼인의 끈을 변호하신다. 하나님께서 혼인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이혼은 금지돼야 한다

성경적으로 이혼이 가능한 유일한 경우
“이혼 불가”라는 원칙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이 예외는 배우자가 음행을 행한 경욷. “음행의 연고를 제외하고”(마5:32). 만약 어떤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신실하지 못하거나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고서도 혹은 교회의 권징을 받지 않고서도 아내를 버릴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도 합당하게 이혼한 유일한 이유가 된다. 남편은 아내의 음행 때문에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그 반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혼읗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음행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두 사람이 혼인 안에서 여전히 하나로 남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하지 못한 아내가 자신의 음행을 회개한다면 크리스천 남편은 그녀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음행을 결코 가볍게 다루시지 않는다. 오직 음행만이 하나님께서 짝지으신 것을 분리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이 조가 무섭도록 심각함을 목도한다. 본질상 음행은 혼인의 중심부, 즉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되는 놀라운 친밀성을 위협한다.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하셨을 때, 오직 한 이유만 대셨다. “음행의 연고 외에는.” 오직 음행만이 남편과 아내를 혼인의 끈을 끊어서 남편과 아내를 서로 떨어뜨려 한 집, 한 식탁, 한 침대로 이루어지는 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다른 어떤 것도 이혼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다. P117-120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영적 교제는 혼인 안에 있는 부부간 교제의 중심이다. 아무리 좋아도 신자와 불신자의 혼인은 신자에게는 문제의 삶, 가슴 아픈 삶이다. 이 문제를 당한 신자들이 이 혼인 문제 및 각자 소명에 대해 바울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효한 혼인
바울이 한 답변은 이와 같은 혼인이라 할지라도 유효하고 참된 혼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 신자에게 혼인의 유대 속에서 불신자와 함께 살라고 명한다. “그 (신자인 남편)로 하여금 그녀(불신자인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2). “그녀(신자인 아내)로 하여금 그 남편(불신자)을 버리지 말라”(13절). 이 명령에 대한 단순한 이유는 신자와 불신자의 혼인도 참된 혼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비록 그 남자가 불신자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신자의 아내이다(12절). 만약 그들이 참으로 혼인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함께 살라고 한 사도의 명령은 사악한 명령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혼인한 사람들만이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혼인이 창조 영역에 속하는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라는 사실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의 혼인도 유효성을 갖는다. 우리는 혼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표상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혼인이 오직 은혜의 영역,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만 유효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남편과 아내 모드에게 있어야 진정한 혼인이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 사람이 혼인의 이상을 이루거나 남편과 아내가 지님 소명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하더라도 혼인은 창조 영역에 속하는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에 유효한 혼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타락 이전에 구속된 교회 이전에,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이전에 낙원에서 혼인 제도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은혜 밖에서 혼인하더라도 그들의 혼인은 정부 관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유효하다. 만약 불신자들이 음행을 한다면 참된 혼인을 어겼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떨어질 것이다. 또한 진정한 혼인을 위해서 두 사람이 교회당에서, 예배를 통하여, 목사의 집례하는 신령한 예배시간에 혼인을 하라고 강권하지만 그 이유가 그렇게 해야만 유효한 혼인이 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혼인은 창조 영역에 속한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혼인을 할 때마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의 불경건하고 불의한 동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노하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두 사람을 짝지으시고 한 몸을 만드신다. 이것은 두 사람이 혼인식을 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혼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짝지으시고 혼인시킨다. P131-133
이 모든 것은 고린도전서7장 12-16절, 바울이 불신자와 혼인한 신자들에게 준 교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이 불신자로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혼인을 통하여 하나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한 사람이 신자가 되고 다른 사람은 여전히 불신자로 남아 있더라도, 그들의 혼인은 유효하며 남편과 애로서 함께 살아야 한다. 비록 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불신앙 가운데 죽어서 버림받은 자라는 것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들의 혼인은 합당한 혼인이다.
그러나 오직 신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만이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기 때문이다. 혼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한 부분이 불신 배우자를 가진 신자를 향한 명령으로 주어졌다. 혼인을 유지하라! 불신 배우자와 살고 있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저를 버리지 말라”이다. 이 명령 안에 든 기본적인 생각은 두 사람이 혼인을 했으며 혼인은 평생의 끈이라는 사실이다. 사도는 고린도전서7장 39절에서 혼인에 대한 모든 교훈의 기본을 보여준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지만 이도 주안에서 할 것이니라.” P134

그 신자를 향한 독려
불신 배우자와 함께 사는 신자가 자신의 혼인을 계속 유지하라고 명령할 때, 바울은 두 가지 고려 사항을 덧붙인다. 그 중, 첫 번째는 고린도전서 7장 14절에 나와 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이 말을 통하여, 바울은 신자가 불신 아내를 통하여 자신이 더렵혀질지라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다룬다. 이 두려움은 이해가 간다. 보통 신자와 불신자가 교제 하면 신자가 더렵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과 교제하지 말 것을 항상 경고하셨다. 불신자와 혼인한 신자가, 자신이 더렵혀지지 않기 위해 그 혼인을 깨야만 하는지, 그냔 있어도 되는지 몹시 궁금해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움을 안심으로 바꾼다. 비록 대개의 경우에 신자와 불신자의 교제는 신자를 더럽히지만, 신자와 불신자의 혼인 생활은 그 반대가 된다. 즉 불신자가 신자를 통하여 거룩하게 도니다. 이것은 불신자가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헌신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ㄷ.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불신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오직 신자의 혼인 상대자라는 지위에서만 거룩하게 되었다. 신자와 불신자의 혼인 생활을 지배하는 원칙은 불신자의 불결이 아니라 신자의 거룩이다. 물론 이것은 불신자가 믿는 아내와 연합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런 특별한 거룩은 그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 혼인한 아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인격이나 혼인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신자가 불신자에 의하여 더렵히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기를 원하신다.

언약의 자녀
혼인 관계를 맺은 신자와 불신자간 이뤄진 교제가 거룩함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연합으로 생긴 자녀들의 거룩함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고전 7:14). 자녀의 거룩함은 불신자의 사악함이 아니라 신자의 거룩함이 혼인의 영적 특성을 결정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P135-136

그 불신자의 구원
신자가 불신자와 혼인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두 번째 동기는 고린도전서7장 16절에 나와 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자여, 네가 아내를 구원할 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사도는 성령이 신자의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불신 배우지를 구원할 가능성을 신자에게 열어둔다. 불신자가 신자로 말미암아 정말 온넌한 의미에서 거룩할 때가 있을 것이다. 베드로도 신자와 불신자의 혼인 생활에 있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말한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나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베드로전서 3:1-2). 하나님이 신자에게 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절대적인 보장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신다. 그리고 이 소망은 그 신자가 죽는 날까지 불신 배우자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항상 가지고 그와 함께 살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저버림
그러나 불신자가 믿는 아내나 믿는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신자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이 불신자를 노엽게 하고 그를 충동하여 떠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서 다룬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이 본문에서 이혼에 대한 또 다른 근거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여기에서 재혼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그들은 이 근거를 “고의적인 버림”(willful deser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15절에서 혼인이나 재혼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주 심각하고 어리석은 실수이다.
먼저, 우리는 신자가 결코 떠나거나 버림으로 불신자와의 혼인을 먼저 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는 15절을 그런 식으로 읽어서 신자에게 불신자와 이혼하지 말라고 명하는 바울의 분명한 교훈에 역행해서는 란 된다. 15절은 신자의 편에서 취할 행동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떠나는 것은 불신자이지 신자가 아니다. 신자가 할 일은 불신자가 떠나려고 할 때 동의 하는 것뿐이다. “떠나게 하라.”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이혼이나 재혼에 대한 새로운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는 매우 빈약하고 어리석다. 이 본문은 재혼은 고사하고 이혼에 대한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다.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의도적 버림”이 이혼에 대한 근거라든지, 신자로 하여금 혼인의 끈을 끊고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반대로 성경은 다른 곳에서 이혼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근거, 즉 배우지가 저지른 음행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마 5:32 ; 19:9). 만약 바울이 여기서 이혼에 대한 다른 근거를 덧붙인다면 성경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성경은 오직 죽음만이 혼인의 끈을 끊을 수 있으며 그 결과가 우리가 다시 혼인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로마서 7장 1-3절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7장 39절에 나오는 바울이 주는 교훈이다. 만약 바울이 언급하는 15절의 그 버림이 혼인을 끊고 재혼하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된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 재하여 모순읻.
불신자의 버림이 이혼에 대한 근거라는 것은 본문의 가르침이 아니다. 불신 배우자로 하여금 떠나도록 내보려두는 것과 그와 이혼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비록 그 본문이, 버림이 이혼에 대한 근거가 된다고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본문에는 이혼이 허용된다고 하는 어떠한 암시도 찾을 수 없다. 사도는 자기 남편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는 여자에게 “그냥 지내든지 아니면 전 남편과 합하라”고 이미 가르쳤다. 그리고 39절에서 혼인한 사람들은 평생 묶여 있으며 오직 죽음만이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고 가르친다. P13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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