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데이비드 엥겔스마 지음 이성호 옮김(낮은울타리,2000) 내용 요약
이 책은 참으로 풍부한 내용을 지녔다. 그런데 제목을 이혼이라고 지은 탓에
한국 번역판이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 듯- <성경적 결혼>등 좋은 이름으로
바꾸어서라도 널리 읽혀졌으면 한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하나님은 여자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창세기2장 22절에는 이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그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시니.”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엄숙하게 집례하신 최초의 혼인식이었다. 또한 이것은 혼인 제도가 인간의 영원한 규례로 제도화시키는 것이었다.
혼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다. 혼인이 갖는 평범하고도 근본이 되는 진리는 하나님이 혼인 제도를 만드셨다는 점이다. 최초로 있었던 혼인 예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만드신 혼인 예식이었다. 하나님은 이 점을 의도하셨고 최초로 두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예식에 예비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혼인 없이는 살 수 없게 하셨으며, 혼인의 끈으로 이들을 묶으셨다. 하나님은 맨 처음 혼인 제도를 만드실 때부터 인간 역시에 영원히 남을 제도로 만드셨다. 여섯째 되던 날 하나님은 혼인을 창조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규례를 세우신 것이다.
사람이 혼인을 더럽히는 근본 이유는 뭘까? 그것은 혼인이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세운 제도라 보기 때문이다. P38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혼인을 주 하나님의 제도라고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혼인이 단순히 상호간 조건이나 약속에 의한 인간적인 계약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이것을 지적으로 아는 것 이상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혼인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중한 명령을 내리실 때가 오기 때문이다. P39
남편으로서 크리스천 남성
기독 고용인은 주인이 까다롭든지, 선하고 친절하든지간에 그에게 복종함으로써 이 질서에 순종한다(벧전2:18). 혼인도 이와 같은 또 하나의 하나님이 세운 질서다. 크리스천 여성은 자신들의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이 질서를 지키게 된다(벧전3:1).
크리스천 남성 역시 혼인 질서를 지켜야만 한다.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혼인관계 안에서 남편 지위는 아내 지위와 동일하다. 성령께서 “이와 같이, 남편된 너희들아”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너희들도 혼인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너희들은 너희 마음대로 할 절대권이 없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남편들은 주님께 순복해야 한다. 그는 이것을 주님이 그에게 주시는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실천한다. 남편으로서 크리스천 남성이 갖는 이 소명은 세 가지 의무를 강조한다. 즉,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동거해야 한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축복해야 한다“이다.
남성의 독립
크리스천 남성들이 빠지기 쉬운 실수 중에 하나가 자신이 아내와 기본적으로 독립돼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야망, 자신의 관심, 자신의 여가를 가지면서 이것들을 자기 혼자 추구한다. 그 아내는 남편의 이러한 삶에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고 소외된다. 이 독립은 불가피하게 갈등 원인이 되고 심지어 별거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편은 결코 무책임하지 않았다. 항상 아내와 자녀들을 경제적으로 잘 돌보았다. 그는 왜 자기 아내가 비통하고 절망하는지, 왜 그들의 혼인이 위기에 처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원인은 바로 남편의 독선적인 생활에 있다. P46
하나님이 만든 혼인 제도는 남편의 독립성에 반대한다. 독립하려는 남편은 혼인 제도에 호소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남자는 하나님에 의해 아내의 머리로 창조되었다. 여자도 남편을 도우미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모르는 점이 자칫 간과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자 홀로는 불완전하므로 아내가 남편을 돕는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스스로 충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이 있다. 남자가 자신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남자 혼자서는 “좋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큰 실수이다. P 48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
남편이 아내와 동거하면서 따라야 할 표준은 지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아내의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남편은 그녀와 동거할 때 이것을 고려하게 된다.
본문은 남편들이 항상 고려해야 할 아내의 특징 중 특별히 한 가지를 언급한다. 바로 아내가 더 약한 그릇이라는 점이다. 흠정역 번역은 이 부분에서 정확하지 못하다. 흠정역엔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이라고 돼 있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번역할 수 있다. “지식을 따라 더 약한 그릇, 여성인 아내와 동거하고, 그들을 생명의 은혜의 공동 상속자와 같이 귀히 여기라 이 번역은 아내의 지위와 상태가 ”더 약한 그릇“임을 아는 것이 남편이 알아야 할 지식임을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가 평등하지 않음을 부인하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불신 여성들은 이 성경 구절이 말하는 가르침을 증오한다. 그녀들은 결코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간 불평등에 대한 이 가르침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자는 좀더 정확한 의미를 알려고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태초부터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아래에 있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그녀를 남자 뒤에서, 남자의 필요에 따라, 남자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혼인생활 안에 있는 여자의 지위가 복종, 의존, 도움의 위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자가 복종하는 위치에 있음을 나태내도록 그녀의 본성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보다 약하게 만드셨다. 그녀는 남자보다 육체적 힘이 약하다. 영혼의 힘에서도 더 약하다. 지성, 의지, 감성이 좀더 약한 것이다. 여성 해방을 옹호한ㄴ 자들이 이를 분노한다 해서 바꿀 순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cd조 “법칙”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연약함이 여자의 본성 안에 있다. 하나님이 정한 창조 법칙을 공격하는 것은 마지막 날 천성을 요란케 하는 적 그리스도가 이룬 도전 중 하나다. 그는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단 7:25).
그녀는 혼인 안에서 남편보다 더 약한 그릇이며, 남자는 좀더 강한 존재이다. 이 말이 남편은 늘 지적으로 뛰어나고 정서적 안정감이 뛰어나다는 게 아니라 아내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 모든 본성인 몸과 영혼이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남편이 이 지식을 알 때, 비로소 자기 아내를 부드럽게 대한다. 더 약한 그릇을 깨지 않도록 남편은 조심하여 그녀를 대한다. 여자가 지닌 연약함은 불신 남편으로 하여금 짐승처럼 행동하게 하지만 크리스천 남성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여자가 지닌 연약함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소중히 돌본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에베소서 5장 29절에서 쓰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그 아내, 더 연약한 그릇인 교회를 대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아는 남자는 간혹 아내를 더 멸시할 위험이 있다. 특히 남편이 아내의 연약함을 경험할 때나 그녀의 의존성이 그를 성가시게 할 때, 그녀가 그를 못살게 굴고 실망시킬 때, 그는 여자의 연약함에 대한 지식을 경멸로 바꾸어 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다음과 같은 발을 덧붙임으로써 더 연약한 그릇에 대한 남편의 지식이 이렇게 바뀌어 버리는 것을 애초부터 막는다. 그들을 생명의 은혜의 공동 상속인과 같이 귀히 여기라.
첫째, 남편은 자신도 역시 하나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여 모든 교만이나 경멸에 바지지 않도록 경고 받는다.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은 남편이 “더 강한 그릇”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릇일 뿐이다. 그 아내와 같이 자신도 진흙에서 빚어진 피조물이므로 도공이 아니다.
둘째, 남편이 아내를 경멸하지 않고 귀히 여기라 말씀한 이유는 베드로가 표현하듯이 그녀 역시 생명의 은혜의 상속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신자로서 아내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수혜자,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을 받을 상속자이다. 이렇게 볼 때, 그녀는 자기 남편과 평등하다. 믿는 남자와 믿는 여자 사이에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ㄷ. 남자도 여자도 없고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갈 3:28). 생명의 상속자로서,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고귀하다. 남편은 아내를 경멸하기보다는 그녀를 하나님의 딸로 귀하게 여기고 자신이 한 행동 속에서 이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본문은 혼인 관계에 있는 크리스천 남성과 크리스천 여성의 영적인 하나됨을 다룬다. 혼인 속에서 남편과 아내는 영원한 생명의 은혜의 상속자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또한 남편들에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신자와 신자끼리 결혼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불신자와 결혼하기를 금한다. 고린도전서 7장39절에서 바울은 “오직 주안에서만 ” 결혼하라고 권한다. 혼인의 친밀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하나됨이다. 한 몸과 같이, 그들은 한 삶을 자연 함께 할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도 함께 한다. 그리고 이 영적인 삶의 공유는 그들이 함께 하고 있는 자연적인, 지상적인 삶의 중심이다. 그들의 영적인 연합은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 갈 때 하나가 되도록 한다.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영적 삶을 공유하는 일은 혼인한 자들이 나누는 교제의 본질이다. 이것 때문에 기독남성과 크리스천 여성은 혼인 제도를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깨닫는다. P53-57
아내로서 크리스천 여성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심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함이니라. 디도서 2:4-5
교회 안에서 연로한 여성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아내가 가져야 할 소명에 대하여 가르칠 의무가 잇다. 디도서 2장 4-5절은 혼인한 젊은 여자들이 가져야 할 소명에 대하여 기술한다. 그런데 이것을 젊은 여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쳐야 할 사람은 목사인 디도가 아니다. 목사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한다(디도서 2:1). P61
아내의 소명에 대한 신약성경의 두드러진 구절들을 살펴보라, 에베소서 5장 22-33절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권면한다. 골로새서 3장18절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고 권면한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포함한다. “아내 된 자들아,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느니라.” 고린도전서 11장 3절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은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한다. 하나님이 아내를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복하도록 부르셨고 이것이 아내의 기본적인 소명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디도서 2장 5절에서 이 덕목을 언급한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 본문에서 “복종”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경 다른 곳에서 “순종” 혹은 “순복”이라고 번역된다. 5절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하라”이다.
순복과 복종은 서로 다르다.
첫째, 성경에서도 이 두말은 서로 다른 단어이다. 베드로전서 3장 5-6절에서 두 단어는 함게 발견된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복종한 것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느니라.” 구약의 거룩한 부녀들은 순복함으로 복종하였다.
둘째, 이 두 다른 단어들은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순복은 마음의 내적 태도와 관련돼 있다. 아내가 이 말씀을 따라 남편의 권위가 자기보다 위에 있음을 알고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순복 혹ㅇㄴ 순종은 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에 속한 것이다. 모든 중요한 것이 그렇듯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베드로전서 3장 4절에서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라고 베드로가 부르는 이유이다. 순복하는 아내는 마음으로부터 의식적이며 능동적으로 자기 인격과 전 삶을 남편의 권위 아래에 둔다. 순복과 구별되는 복종은 외적행동을 지칭한다. 복종하는 아내는 남편이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상을 한다. 그녀는 전 삶을 남편의 뜻에 맞추어 살아간다.
순복과 복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순복은 복종의 근원이자 원인이다. 복종은 순복의 열매이며, 이것이 결과이다. 만약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녀는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만약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순복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관계가 베드로전서 3:4-5절에 나타나 있다. 이전의 거룩한 부녀들은 자기들의 남편에게 순복하였다. 그러므로 사라와 같은 이들은 그들 남편에게 복종하였다.
순복은 기본이다. 그러므로 비록 복종이 순복을 따라야 하지만 성경은 아내들에게 순복의 소명을 강조한다. 이것이 디도서 2장 5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문자적인 의미이다. 젊은 아내들은 그들 남편에게 순복하여야 한다. 이 소명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이 소명을 무시하도록 허용하는 어떤
상황도 존재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5장 24절은 분명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순복하라.” 성령이 아내들에게 요구하는 범사에 순복하라는 것에는 남편과 아내의 공동의 삶)예를 들면, 그들 관계, 가정 운영, 자녀 양육)뿐만 아니라 아내의 사적인 삶에 속한 모든 것도 포함된다.
이 명령에는 아내가 항상 순복해야 한다는 강요도 포함돼 있다. 그녀는 남편이 마땅히 해야할 일 즉,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함에 순복해야 한다. 또 남편이 이 소명을 거부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거친 태도를 보일 때에도 순복해야 한다. 비록 복종할 수 없고 복종하지 말아야 할 때에라도 충분히 순복할 수 있고 마땅히 순복해야 한다.
반항
아내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이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명령을 어기는 죄를 범할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의 주됨(Lordship)에 철저하게 반항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녀는 남편에 맞서고 반대한다. 남편에게 불순종하고 남편 위에 군림하려 든다. 두 개의 머리가 생겼기 때문에 가정은 지옥과 같은 혼동과 전쟁터로 바뀐다. 질서는 없고 오직 혼란만이 있다. 만약 여자가 근질지게 반항한다면 로마서 13장 2절의 경고가 그녀에게 적용될 것이다.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아내로서 불복종하는 또 한 형태는 남편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신만의 삶을 다로 사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디모데전서2:12). 이 경우에 아내는 단순히 남편 권위 아래에 있지 않다. 그녀 자신이 곧 자기 법이므오 마음대로 길을 간다. 고린도전서 11장 12절이 말하는 “남자로부터” 나온 자신의 삶을 살기를 거부한다. 고린도전서7장 34절이 가르치는 대로 남자를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그녀는 남편을 돕는 자로 살아가지 않고 자신의 일을 주구하는 독립된 인격으로 살아간다.
이 두가지 경우, 아내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인 혼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왜냐하면 순복하고 복종하라는 아내가 지녀야 할 소명의 근거가 하나님이 세우신 원래 혼인 제도에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여자를 나중에 창조하셨다. 그분은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남자 옆에 있는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그를 돕는 배필로 지어졌다. P66-67
아내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아내의 소명에 적용된다. 남편은 하나님의 원위로 덧입혀 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을 “주” 라고 부를 것인가는 하나님을 “주”라고 부를 것인가와 같은 문제이다. 주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면 아내로서 가지는 소명을 잘 수행하도록 돕는다. 그녀는 남편이나 자녀들, 심지어 자신이 아닌 주님을 위해서 소명을 다함으로써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그린다. 하나님은 그녀로 인해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행동이 그녀의 혼인 생활에 나타남을 인해 찬양 받으신다. 혹은 부린 남편이라도 크리스천 아내는 신실하고도 기쁘게 자신의 소명을 끝가지 감당한다.
여기에는 신앙을 가진 젊은 남자가 신부를 구할 때 그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난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내포돼 있다.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