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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개론]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전개과정 그리고 결과


제2차 세계대전

=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종전 =

아마도 먼 훗날, 그 때에도 세계사 공부 혹은 사회 공부라는 과정이 있다면,
분명 세계사 흐름의 중대한 사건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은 반드시 공부되어질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오늘날에도 2천년 하고도 몇 백 년 더 전에 있었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공부하듯이 말이다.

경제대공황으로 인하여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은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 등의 나라들은 자기네 국가 혹은 자기네 민족의 이기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 즉 자신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심지어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면) (대화나 타협 혹은 수평적 관계에서의 협력 등을 모색해보기 보다도) 다른 국가의 국민들이나 민족쯤은 무시하고 더 나아가 말살해도 좋다는 생각에 바탕하여 - 여러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 나라들을 제재할 수 없었던 (단지 전쟁을 중단하고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호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국제연맹은 그 기세가 점점 저물어갈 수밖에 없었고, 또한 여러 나라들은 이미 또 하나의 세계대전을 대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부에서의 정치적 혼란들과 여러 의견들 등을 모두 “국가와 민족 전체의 이익”을 명분으로 일찌감치 탄압해버린 뒤, 국민들을 굶주림 등으로 내몰아가면서까지 군비확장에 노력하던 이들 나라들을 상대로 쉽게 싸울 수는 없었던 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들 나라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삼국동맹” 혹은 “삼국협상”과 비슷한 동맹관계를 체결하게 된다. 바로 이들 나라들의 수도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베를린 - 로마 - 도쿄 추축”이 이들의 사실상 정식 명칭으로서, 이로 인하여 이들 3개의 나라들은 “추축국”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와 반면에, 미국과 영국 등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연합국”이라고 불리게 된다.)

1939년 9월 1일 새벽을 기하여, 독일군의 전차부대와 폭격기부대들이 폴란드 국경을 돌파하여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던 그 시각, 막상 히틀러에게 만약 독일군이 폴란드를 공격할 경우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겠다던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본격적으로 독일과 전쟁을 벌일 것인가 혹은 말 것인가를 놓고 논쟁만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에 앞서 독일은 같은 게르만민족의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아주 평화적으로” 합병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라는 독일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병합하기 위하여 무솔리니의 주선으로 영국 및 프랑스와 함께 “뮌헨회담”이 벌어졌을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독일의 그 지역 병합을 허용하였던 것, 더 나아가 아예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병합했을 때에도 이들 국가들이 다시 한번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이를 그냥 넘어갔었던 점 때문에, 더 이상 겁을 낼 것도 그리고 망설일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주 순조롭게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은 그 다음에는 철광석과 철강제품을 많이 생산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약소국 노르웨이 및 그 길목에 있는 덴마크 등을 점령하더니, 급기야 1940년 5월에는 프랑스를 침공하여 다음달 말경에 이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뒤 한 달 후, 전투력을 재정비한 독일군은 급기야 바다 건너의 영국을 공군력을 사용해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막상 유럽대륙을 석권하는데 있어서 한편으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육군의 전차부대가 나설 수 없게 되면서, 영국과의 전쟁은 영국을 정복하는 것에서 영국이 유럽대륙으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 및 영국이 전쟁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제한잠수함작전 식으로 잠수함을 통한 해상봉쇄를 실시하는 것으로 그 목표가 변경되어지게 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달리 히틀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이기도 하였던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미국 배에 대해서는 공격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영국을 도와서 독일과 전쟁을 벌일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과 이러한 식으로 계속 전쟁을 하는 가운데, 히틀러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자원 등을 얻고 또한 영국과 손을 잡고 후방에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1941년 6월 22일 새벽을 기하여 소련을 침공하였다.

비록 전쟁 전에 중공업 및 군수공업 우선정책을 실시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지만, 독일군의 주도면밀하고 갑작스러웠던 기습공격 및 모든 일에 의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그 어떠한 정보에도 귀를 열어놓지 않았었던 스탈린의 실수 등이 겹쳐져서 소련군은 순식간에 공군의 경우 2/3가 궤멸되었으며, 기타 상당수의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심지어 상당수의 병기들이 제대로 사용도 되어보지 못하고서 독일군의 손에 넘어갔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개 대부대들(집단군들)로 나누어진 독일군은 각각 북쪽의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 페트로그라드), 중앙의 (수도인) 모스크바, 그리고 남방의 우크라이나의 중심도시 키예프(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및 (석유가 많이 난다는) 카프카즈 산맥 너머의 바쿠 유전 콤비나트 일대 등으로 쳐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 양동이의 물을 널찍한 바닥에 뿌려놓은 듯한 상황” 혹은 “3마리의 통통한 쥐새끼들을 널찍한 홀에 풀어놓은 것 같은 형국”이라는 독일군의 소련 내륙 진격 상황은 급기야 아군의 급속한 진격을 따라잡기 힘들어지는 (전투부대에 비하여 기계화가 덜 되어졌던) 보급지원부대의 상황 및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졌다고 평가되어져 왔었음에도) 교통망이 아직도 엉망이고 그나마 있는 것마저도 소련교통망의 핵심인 철도의 경우 서유럽의 철도와 그 궤도가 다르다는 이유 등 때문에 애로사항에 부딪치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독일군이 보기에 초반에는 붕괴되어져가는 듯 했으나, 이 당시의 어느 러시아여인의 말 대로 “싸우다 죽을 사람들이 대단히 많은 소련 땅”에서는 붕괴되어버린 각 부대들을 재빨리 보충 및 증대를 시켜나감으로서, 그리고 서쪽에 있는 공장들을 거의 모두 뜯어내어 기차로 동쪽의 우랄산맥 일대 혹은 그 동쪽 너머로 수송하여 새로운 공장을 차려서 그 병사들이 사용할 무기들을 생산해냄으로서 독일군에 대한 항전을 계속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군에게는 드디어 심각한 상황이 닥쳐왔다.
1941년 10월 초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서 대지를 온통 진흙탕 혹은 뻘밭으로 만들어서 가뜩이나 더디어져 가는 독일군대의 진격을 더더욱 더디어지게 만들던 비는 드디어 눈이 되어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량의 눈과 그에 따른 추위는 독일군을 말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보급의 지연으로 인하여 당장 필요한 방한복은 도착하지도 못한 채 독일군 병사들은 6월말에 소련에 쳐들어 올 때 입고 있었던 여름군복을 그대로 입고서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게다가, 혹독한 추위로 인하여 무기들의 정밀한 부품 사이사이에 얼음이 끼어서 작동을 할 수 없거나 혹은 냉각수나 기계유까지도 얼어붙는 사태가 벌어졌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이때서부터 겨울의 추위가 물러가게 될 다음 해 봄까지 독일군은 총과 대포를 담요로 싸서 녹이고, 자신들의 몸에는 소련의 민가에서 빼앗은 옷을 아무거나 둘둘 말아 입고서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독일과 비슷한 위도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과 달리 멕시코해안에서부터 흘러오는 따뜻한 해류와 편서풍의 은혜를 수천 년간 입을 수 없었던 소련 사람들은 이미 그 조상 때부터 추위에 익숙해져 있거나 혹은 추위를 나는 방법을 터득해놓고 있었다.

독일군의 것보다는 우수하지는 못하지만 그보다도 덜 정밀하기에 (원래는 예산과 기술력 부족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그렇게 얼어붙을 걱정이 없는 총과 대포들, 그리고 냉각수나 기계유 등을 러시아인들 및 러시아 주변의 국가들의 사람들이 겨울의 추위를 견디는데 사용하던 전통 티포트 “사모바르”로 충분히 녹여두어서 씀으로서, 그리고 그들 자신들도 이미 오래전부터 항상 준비되어져왔었던 방한복을 입고 거기에 이 사모바르로 끓인 물 등을 마심으로서 추위를 견디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이 해 겨울에 이미 겨울이 오기 전에 획득한 소련 땅의 일부를 적에게 돌려주거나 혹은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해져서 봄이 올 때까지 점령한 곳이나 지키면서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쟁은 또 한편으로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된다.
1937년에 중국 전체를 정복하기 위하여 시작한 중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내전을 잠시 중단한 국민당군대와 공산당군대가 단결하여 - 심지어 이미 일본군대가 점령한 지역 내부에서까지 게릴라식으로 - 공격해 오는 전쟁을 실시해옴에 있어서 점차 전쟁 수행 자체가 고되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쟁 전에 예측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군수물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하지만, 일본이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혹은 전차나 항공기 및 전함 등의 주요 군사 장비의 운용에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석유 등의 중요물자들을 미국이 - 당시의 국제연맹의 결의를 받아들여서 일본뿐만이 아니라 독일 및 이탈리아 등에도 - 수출을 거부하면서 이를 확보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 나왔었던 것이 동남아시아에 있었던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석유자원 등을 빼앗는 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이미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은 독일에 정복되어진 상황이었고, 영국도 독일과 유럽에서 그리고 이 때 즈음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이 동아시아의 식민지를 지키는데 병력을 보내기가 힘이 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들 식민지들을 지키는 군대는 사실상 이들 식민지들에서 일어나는 반제국주의 겸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 주요임무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규군과 싸울 경우 그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군대였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동남아시아로 쳐들어가더라도 일본은 거의 이렇다 할 저항이 없이 이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들을 모조리 탈취하여 여기서 나오는 자원들 모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이었다.
동남아시아에 식민지였던 필리핀- 이 때 즈음에는 “독립된 국가”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였다 -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 이외에도 미국은 어차피 일본이 커지는 것을 그다지 좋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다.

즉, 자신들과 맞설 또 하나의 거대 강대국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는 것이 썩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한 이상, 미국은 일본이 이들 유럽 제국주의국가들의 식민지들을 탈취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낼 경우, 이를 막기 위하여 태평양의 가장 중요한 미국 요새인 하와이에 배치해놓은 거대한 함대를 보내게 될 것임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급기야 일본은 미국이 태평양에 배치해 둔 함대를 궤멸시킨 다음, 미국과 유리한 조건에서 조기에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서 미국의 발목을 붙잡아 둘 생각을 하였고, 그 결과 내려진 결정이 미국이 하와이 섬의 진주만 기지에 배치해 놓은 거대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한동안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태평양 상에서 일본해군에 의하여 압도당하게 되었다.)

이 결정에 의거, 1941년12월7일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총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나구모 제독 휘하의 일본함대는 기존의 전함 대 전함의 전투 방식 대신에 -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러면서도 그 당시 생각으로는 대단히 획기적인 공격방법이기도 했던 - 폭탄과 어뢰로 무장한 항공모함 탑재 전투기부대들 및 폭격기부대들을 동원, 진주만을 폭격하여 미국에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미국이 다시 한번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는 원인(혹은 명분)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1942년 미국은 1941년 12월의 선전포고 이후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어느 정도 축소 및 약화되어졌던 - 전투력을 재정비하여 본격적으로 일본 및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등을 비롯한 추축국의 여러 냉철한 사람들이 이미 인식하고 있었고 또한 그에 앞서 그들이 피하기를 원하였던 상황이기도 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공장의 역할을 해왔던 미국이 바야흐로 추축국들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일념 하에 본격적으로 무기와 기타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무기들은 당시 막 징집되어지기 시작한 미국군대의 병사들에게 뿐만 아니라, 추축국들과의 전쟁으로 연합국의 관계에 놓여졌던 영국, 소련, 그리고 중국 등에도 지원되어짐으로서, 당시 미국에 비하여 공업능력이 떨어지거나 거의 없다시피 하던 이들 나라들이 추축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함에 있어서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 결과, 일본육군은 중국 대륙 및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중국군 및 영국군과의 전쟁으로 계속 소모되어지게 된다.
한 때,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켰던 것으로 평가되어졌던 일본 해군은 - 그들이 미국의 전함들 등을 거의 모두 부셔주었던 덕에 - (당시 일본해군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면하였던) 항공모함과 잠수함 등을 주력으로 하게 된 미국해군에 의하여 1942년 6월에 태평양 북쪽 미드웨이 섬 근해에서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 주력이 궤멸되어지면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서유럽 및 소련 서부지역의 상당부분, 그리고 더 나아가 남유럽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함께 바다건너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하였던 독일은 아프리카 전선 주둔 군대의 사령관인 롬멜 장군의 군대가 미국군대와 미국제 물자들의 지원을 받은 영국육군 몽고메리 장군의 군대와의 (이집트 지중해연안 지역인) “[엘 알라메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고 패한 뒤, 결국 북아프리카를 포기하고 전선을 이탈리아 본토까지로 후퇴 및 축소시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물론, 이로 인하여 연합군도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가게 됨으로서 이탈리아 및 독일 군대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동쪽에서도 소련군대가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이자 그 옛날 적-백 내전 당시에 레닌의 부하였던 스탈린이 큰 공을 세운 도시이기도 했었던 지역이기도 한) “[스탈린그라드]”에서 1943년 2월에 결정적인 대승리(당시 이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이후 소련에게 있어서는 대승리였고, 독일에게 있어서는 대패배였던)를 함으로서 독일군대는 드디어 소련군대에 의해서 밀리는 (그리고 나중에는 쫓기는) 입장에 서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44년 6월 6일을 기하여, 동쪽에서 밀고 오는 소련군에 호응하여 미국과 영국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전부터, 미국과 영국은 계속 독일 및 독일의 서부유럽 점령지역들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폭격을 함으로서 전쟁을 위한 무기 및 필요한 물자들의 생산에 장애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독일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서 히틀러 및 나치당의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심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1943년에 이탈리아에서도 이러한 문제 때문에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원들이 이탈리아 국민들의 반발로 쫓겨나 북부 이탈리아를 이 즈음에는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상황이었음), 더 나아가 프랑스 등의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사람들 등의 사기는 더더욱 높여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의 해안지역이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 중 하나인 노르망디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 군대의 압도적인 전투력과 프랑스 등지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적극적인 방해공작 - 다리나 철도 등을 끊어놓거나 혹은 도로 평지 등으로 이동 중이던 독일군 부대에 대한 매복 기습 등 - 덕에 독일군은 빠르게 무너져 갔고, 이미 1945년 정월에는 독일군은 - 히틀러를 제외한 - 모든 정치지도자들이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5년 5월, 동쪽에서부터 먼저 쳐들어왔던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을 점령당한 독일은 미국, 영국, 그리고 소련 등의 모든 연합국들에 항복하였다.

그 뒤, 3개월이 지난 다음, 태평양에서의 미군의 계속되어가는 공격, 중국에서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한 계속되고 또한 줄기찬 공격, 더 나아가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은 이후 시베리아로 병력을 이동시켜 중국 서북부의 만주지역 및 한반도 북부지역 등의 일본 점령지로 진격하기위한 시간만 결정내리면 되는 소련으로부터의 보이지 않는 압력, 급기야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에 일본 본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등 때문에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결정한다.

이로서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개시되었고,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의 미국 진주만 기습으로 본격화되어졌던 이 제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끝이 나게 된다

집필자 네이버(spartacus2 ) 자유로운글 200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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