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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협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무술의 고수들이 만나기만 하면 실력을 겨루거나 아니면 자신의 무술의 경지가 얼마큼 되는지 우열을 가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요 근래 한국에서 신구약 성경을 히브리어로 전체 관통하는 두 분 목사님을 서로 대면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이렇게 자리를 배석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지만 만나시면 혹시나 탁상공론 이상으로 언성이 높아지고 싸움이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만남과 동시에 서로의 겸손과 서로의 존중함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서 한 번도 다툼이 없었으며 서로 배워야 하겠다며 연락처를 나누는 장면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이런 모습이 되었으면 한다.

성경 말씀 속에 표현되어 있는 단어 하나가 성경 전체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잡아 내지 못하고 있다. 구속사나 문화적,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성경의 단어와 구절을 해석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만 근접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성경의 핵심 줄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만다.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이 시작으로 알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된 신약성경이 있었음을 여러 신학자들이 발견하고 내놓았지만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한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아니 하나님의 본질과 핵심적인 의도와 사상을 기본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해 놓으면 영해로 아니면 알레 고리한 해석으로 치부하여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든 것이 교회 역사적인 횡포였음을 교회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해석이 나오면 이단, 삼단, 심지어 십 단으로 무슨 무술 심사자격증을 얻는 것처럼 못을 박아 이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 안에 이단이라고 지칭하는 단체 중 일부는 교회 안에서 생긴 정치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이단으로 뒤집어 씌어 아직까지 이단으로 여긴다.

아니면 어느 개인의 감정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하여 지금까지 그 고통을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단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마저 이단이 되어 버린 이 시점에서 무슨 얘기를 더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국교회 안에서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잣대가 어느 단체나 기관이나 개인이 규정할 정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외에는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신학과 교리, 아니면 어떠한 행동윤리에서 잡아내는 이단은 계속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어느 이단감별사는 법정에서 허위증거를 난발하여 신문지상에 거론된 적이 있듯이 자신의 주장과 사상에 맞지 않거나 교단의 전통적인 사상에 어긋나면 이단으로 지목하게 된다.

줄거리가 이상하게 빗나갔지만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단어로 되어 있지 않고 있다. 특히 히브리어는 어떻게 단어가 형성되었으며 그 원형과 어미를 찾아 분석하는 것이 기초이지만 알파벳 한 자, 한 자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원형 속이나 단어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태반이다.

창세기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명칭으로 ‘쉐모트’인데 “되새김질을 한다”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제목이 된 책인데도 불구하고 출애굽기로 되어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자유를 얻어 나오는 장면이 너무나 드라마틱한 내용이라 그것을 핵심 포인트를 잡아 제목이 된 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원래 제목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그대로 넘어가고 있다.

무엇을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 길래 두 번째 책으로 선정했는가? 측 창세기에 나오는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그 다음 두 번째 책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의미인데 창세기와 무관하게 성경을 대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출애굽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두 번째 언약을 주는 책으로서 되새김질을 하면서 보는 것”이란 의미인데 출애굽한 사건이 부각되었다고 출애굽이란 책명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을 뜻을 곡해한 것이다.

단어뿐만 아니라 구절 전체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않고 그 구절을 전통적으로 번역되어진 채, 읽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구절이 시편 22편에 등장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부르짖었던 말씀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원형분석으로 정확하게 한다면 아마 놀랠 것이다.

이 지면에는 거론하지 않지만 히브리어 사전을 펼쳐 놓고 밤새도록 파고 들어가 보라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지, 단어를 갖고 장난치는 것이라면 감히 함부로 전 세계가 보는 창골산 봉서방 카페가 놀이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사실은 이 글을 보고 자극이 되어 공부하기를 원했 것이었다.

눅 22:35~38에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한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공부해 보라. 마태복음 5:1에 산상보훈을 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는 구절에서 “산”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공부해 보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히브리어로 된 문자로 분석해 보심이 어떠실는지.......

성경공부는 자신의 사상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것으로 도구가 되는 책이 전혀 아님을 알면서도 여러 문헌에 나오는 내용과 짜깁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인생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이때까지 가르쳐 온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공든 탑이 폭삭 주저 않는 기가 막히는 성경의 비밀이 아직도 묘연한데도 뜬 구름을 잡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남이 공부한 것을 털도 안 뽑고 잡아먹거나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인생들이 주위에서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본인의 글이 카페나 홈페이지에서 보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것 없다. 그러나 말씀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갈 사람을 찾고 있는 일은 계속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이 나의 삶의 현장에서 세워져나가는 것이 바로 거룩한 고난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밑에 완전히 자리 잡고 거하기까지가 역경으로 느껴지지만,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자리가 잡혀지고 정착되어지기만 하면 너무나 쉽고 가벼운 멍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멍에는 지기 쉽고 가볍다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단어 하나가 구절 하나가 성경 전체를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십 번을 반복해서 읽는다고 뜻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단어 속에 구절 속에 그리고 줄과 줄 사이에, 단어와 단어 사이에 감춰져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자료를 준다고 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며, 그 자료가 있다고 해서 그 분의 내용을 전부 다 가진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상과 의도를 발견하여 내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갈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감에 따라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동사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역사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역사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용사는 단어로 해석하면 “벌목꾼”이란 의미인데 자신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를 것은 자르고 다시 심어서 세울 것은 다시 세우는 사람이 바로 기드온의 용사인데 이것을 어떻게 번역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어느 부족이 사는 곳에 선교사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 일부분이라도 해석하려고 그 부족이 사용하는 “사랑”이란 단어를 해석하려고 그 부족의 표현 방법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족에서 사랑이란 의미를 설명하고 설명하여 찾은 단어가 어느 동물을 잡아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갖고 귀한 손님에서 주는 행동이 그 부족들이 사용하는 사랑이란 의미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나라와 그 문화에 맞추어서 해석하거나 번역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하시고 지금도 계시하시는 그 분의 뜻을 아무렇게 단어를 취사선택하거나 “이거다”라고 내놓을 수 없는데 ‘이거 겠지’라고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문장이라고 함부로 번역을 잘못해 놓은 것을 어느 분의 표현으로 반역이라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면서까지 함부로 설명하는 죄를 과감히 지으려고 하겠는가? 삿 6:15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말씀 중에서 므낫세는 “빌리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극히 약하다”라는 의미는 신체나 정신적으로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모든 힘을 다하여 매달려 있기 때문에 약한 것을 의미하는 뜻이다.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빌려서 그 안에서 매달려 배워나가는 상태로서 전혀 다른 데에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약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이며 읽는 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또한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을 목표하는 안에서 깨달아가며 적용하고 배워나가는 바탕을 만들어 나가는(소알 땅)에서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초두에서 거론되어 두 분 목사님들이 바로 이런 분들이다.

본인 그 분들의 발가락에 때만큼도 되지 않는다. 이런 표현을 했다고 겸손이란 의미가 아니다. 겸손은 내가 생긴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변장을 하고 치장을 하더라도 겸손이 나오지 않는다. 내 안에 계신 그 분이 겸손으로 등장할 뿐이다. 내가 다녔던 신학교나 교단이 중요하지 않는데도 거론하는 것이 난감하다. 이때까지 글로 표현했던 내용이 신학교나 교단에서 배웠다면 아마 거드름을 피웠을 것이다.

위에서 거명된 두 분 목사님도 신학교에서 그리고 교단에서, 아니면 큐티나 연구를 해서 이런 내용들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 동행하다가 얻어진 것에 불과하다.

성경의 한 단어가 얼마나 비중을 자치하고 있으며 한 구절이 내 인생을 좌우할 만큼 생명력이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데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꼴이 되고 있다.그동안 필자의 글을 애독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창골산 봉서방에서 카페지기는 아니지만 칼럼리스트로 글을 쓰게 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 칼 럼 필 자 이종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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