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전도를 위한 글

by 러시아천사 posted Sep 0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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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랑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 글은 본인이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을 전도할 목적으로 93년 11월에 쓴 편지로, 다 완성되지 못하여 보내지는 못했다.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이 이 글을 읽게 되기를 희망한다.

( 1 ) 어느 친구를 위하여

늘 함께 하던 친구들을 고국에 두고 머나 먼 이국 땅에서 혼자 살아가다 보니까 그 그리움이 더 진한 것 같다. 오늘도 그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러한 글을 쓰고있는 것이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일말의 믿음 때문인지 잘 구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일이 그리움 때문에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하여 알려주고 싶고 이 일을 통하여 어느 친구 한 둘이라도 그것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나의 꼭 알게 하고 싶다는 열정으로나 치졸한 글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내 사랑하는 친구들 각인의 영혼을 사랑해 주셔야 되는 것을 고백하며 이 일을 위하여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하여 먼저나 나중이나 각인의 이름을 부르며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약속한다.

이 글의 내용이 신학적이나 과학적으로 이 사회에서 인정된 절대적인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나 개인의 신앙적 체험과 10여년의 믿음생활에서 얻어진 경험에 기준하여 쓴 것임을 말해두고 싶다. 나는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교리나 교회의 교육이나 과학적 증거 때문만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통으로 인한 체험에 의해서였기 때문이다.

글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1부에서는 나 개인의 신앙과 그 체험의 과정을 믿지 않는 친구들을 위하여 쓰는 바 본인의 감정과 주장을 최대한 배제하고 교회적 용어를 피하여 구체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서술적인 문체로 쓰도록 노력하며 2부에서는 기독교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기존의 기독교에 대하여서는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인의 주장도 일부 쓰고자 하였다.

특별히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을 읽을 때 전에 내가 그랬었던 것처럼 여느 예수쟁이들의 귀찮은 전도인 양 이 글의 내용을 따지고 반박하며 부정적인 마음부터 갖지 말고 - 20여년을 친구로 살아온,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의 입장에서, 저 친구가 어떻게 해서 예수쟁이가 되었을까? 미친것 같지는 않고 정말 무엇인가 있기는 있는가 본데 그것이 무엇일까? - 그냥 친구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친구의 의견으로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끝내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 글을 통하여 어느 친구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서 이 세상에서와 같이 저 세상에서도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바이다.

( 2 )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쟁이가 되었을까 ? 그러한 일을 말로서만 설명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너희들이 먼저 잘 알다시피 나는 자기 주장이 심한 사람이요 매사에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그림을 그리며 나만의 세계를 가지고 그 범주 안에서만 살아가기를 원했다. 남과의 타협은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본인 스스로가 절대자요 그 세계 자체가 신앙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날 예수라는 절대자에게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어떻게 그리 쉽게 자신의 모든 세계와 신앙을 포기하고 새로워 질 수가 있었을까 ? 그것은 '체험'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중학시절을 사랑의 열병 속에서 방황한 탓에 3차 시험까지 떨어진 후 재수를 하게 되었고 부끄러웠던 그 1년간의 재수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과 가장 큰 변화를 내게 주었다. 첫째로는 인생살이에서 실패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었으며 둘째로는 소년으로서 의미 없이 방황하던 사춘기를 끝내고 성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그러한 큰 경험과 변화는 나의 고교시절에 많은 영향을 미쳐서 나중에 대학입시에 필요한 합격선의 성적을 넘어 그이상의 성적에 매달렸으며 고교 3년간의 학창시절을 의미 있는 삶을 탐구하기 위하여 거의 한문공부에 심취하게 하였다. 특별히 한문공부를 통해 얻은 많은 유교적 사고방식은 유교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나의 세계를 갖게 하였으므로 절대자에게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더욱 많은 날들을 스스로 고뇌하며 방황하다가 끝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1학년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아주 혼란스런 심리상태에서 군대라는 특수한 세계로 현실을 도피하고야 말았다. 그러한 성격으로 자원 입대한 3년간의 군 복무는 그 특수 세계에 대한 부적응 때문에 몹시 고생하였으면서도 사색과 고뇌라는 병(?)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가 있었다.

사실 내가 처음 교회를 나가게 된 동기는 지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였다. 군을 제대한 후 마산에서 역곡으로, 역곡에서 인천으로 이사 다니면서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 졌고 나도 늦게나마 복학을 한 후라서 어떻게든지 학교를 다녀 볼 요양으로 인천 집에 있지 않고 종로 5가에 있는 큰집에서 숙식을 의지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인천 집에는 주말에나 한번 갈 정도였고 그때 세완이도 사진관에 취직하여 그곳에서 먹고 자며 일하였기 때문에 집에는 어머니 혼자서 계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인가 제호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자신은 "일요일에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가는데 믿음을 떠나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어머니와 함께 어디든지 간다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어서 나도 그렇게 한번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교회에 나가게 된 동기의 전부였다. 누군가가 나보고 교회에 한번 가보라고 말하였다면 내 성격상 거부감이 앞서서 더욱 더 교회를 멀리했겠지만 내 스스로 어머니께 대한 효도하는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고 내 성격상 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이상 어느 날인가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 집 근처에 있는 송림제일감리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가 1981년 12월이었다.

( 3 ) 하나님에 대한 체험

하나님께서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내 새로운 인생 길을 도우셨지만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니는 동안 장충동으로 이사하였으며 결국은 학교를 포기하고 직장을 잡게 되었다. 내 인생의 꿈이었으며 목표이기도 했던 학교를 그만 둔 후 직장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학문의 세계가 아닌 사회생활을 시작 할 바에야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어려운 상태에서 결혼을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숙을 만나게 하셨고 정말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세미의 출산을 돕기 위하여 미국에 계셨으며 아버지는 혼자가 되셔서 어디에 계신지 조차 모르고 살았다.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중퇴하고 열세살때부터 목수 일을 하신 정통 기능인으로 특별히 목공예를 전문으로 하셔서 큰돈은 못 버셨지만 그 계통에서는 상당히 인정받으셨는데 내가 고3 되던 해부터 사업에 손대시면서부터 우리 집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을 기술자로 사시던 분이 한 두 사람의 자본주들의 말을 믿고 시작하신 사업이 얼마 안 가서 실패하시게 되자 어머니는 물론 온 가족이 반대한 것을 아버지 혼자 우겨서 하신 일이라 결국은 그 일로 아버지께서는 가족들과 싸우고 어느 날 가출을 하시고 말았다. 그때 나는 군에서 제대를 6개월 정도 앞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면회 오셔서 그 일을 알게 되었으며 전후 사정을 자세히 판단할 겨를도 없이 어미니 말만 듣고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고 가출을 하셨으니 우리끼리 집을 팔아서 호주로 이민을 가기로 하였다. 그 후 집이 팔려서 이사하는 날을 전후하여 특별 휴가를 얻어 아버지께는 한마디 연락도 없이 정능으로 이사를 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제대를 한 후 마음이 바뀌어 호주이민을 포기하므로 큰돈만 날렸으며 아버지와는 그 일로 남남이 되어서 피차 연락조차 없이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앞두고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믿고 변화되셔서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새 사람이 되셨다는 데 어머니도 안 계신 상태에서 아버지께 인사조차 없이 결혼한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려서 어느 날 영숙이와 함께 아버지께 인사를 갔다. 아버지는 도봉산 어느 기도원에서 예수를 체험하신 후 그 기도원을 위하여 이런 저런 잡일을 하시면서 사시고 계셨다는데 우리가 인사드리러 간 그 시간에도 기도원의 임시 천막을 치신다고 삽으로 땅을 고르고 계셨다. 설마 했지만 내 눈으로 보고도 잠시 동안은 믿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는 한 내 아버지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으며 공장을 하신 까닦에 매달 고사를 지낸다던가 점을 본다던가 하는 그런 분이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철들기 전부터 우리 집 안방에는 신주단지 같은 항아리가 선반 위에 있었으며 부적이 항상 붙어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정말 그렇게 변화되셔서 술도 담배도 다 끊고 예수를 위한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난생 처음으로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고야 말았다.

어머니와 우리와 아버지 사이의 불편함은 지금까지도 간혹 느껴 질 때가 있다. 인간으로서야 어찌 그러한 인간적인 배신과 아픔을 쉽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 정말 남남이 되어 피차 미움과 증오함으로 서로간에 만나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적인 문제는 피차간에 이해와 용서 없이는 다시 모여 살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 사랑 안으로 부르사 피차간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셨으며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주신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으로 하나 둘씩 부르셔서 온 가족이 피차간에 사랑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그런 변화를 보고도 나는 교회를 어떤 체험 없이 다니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갓 입사한 현장기사가 일요일까지 정상 근무하는 현장을 두고 교회에 가기 위하여 회사를 빠질 수도 없어서 특별히 시간이 나면 교회를 가끔씩 다니고 있었다. 영숙이도 모태 신앙자였으면서도 교회 생활에 그렇게 열성적이질 않았다. 결혼 전에도 예수를 믿기는 하였지만 혼자서 교회를 출석하거나 하지는 못했고 다니던 회사가 기독교를 믿어서 매주 한번씩 사내 합동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 미국에서 돌아오셔서 어머니와 세완이와 함께 살기 위하여 합정동에서 성산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자 교회 생활에 다시 적극적이게 되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교회를 정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무척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어서 신앙이 점점 자라게 되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설교를 듣거나 찬송을 부르는 중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리고 눈물이 흐르곤 하더니 내 마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우선 교회에 십일조를 해야겠는데 한달 내 벌어도 세완이까지 방위근무를 하게 된 통에 전혀 그럴 여유가 없었으며 다른 한가지로는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두 가지 신앙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하여 술과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십일조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진정 큰 문제는 모자라는 돈이 아니고 담배를 끊는 일이었다. 술은 마시긴 해도 그렇게 못 끊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담배야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두 세갑씩 피워대던 골초중의 골초였으니 그것이 정말 문제였던 것이었다. 나나 너희들 모두가 믿지 않았지만 나는 어느 날 술과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십일조를 하게 되었다.

십일조란 자신이 번 소득 중에서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받치는, 교인으로서는 의무이며 교회로서는 운영자금인 것으로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과 그 기관이 필요로 하는 물질을 조달하기 위하여 인간이 집단을 이룬 후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이다. 그 근거로는 구약성경에 여러 번 나오지만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말라기서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라고 하신 까닭에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 반대로 우리에게 몇 배로 갚아 주신다는 규칙을 정하신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믿고 어려운 중에서도 십일조를 시작하여 220만원의 전세 보증금으로부터 시작하여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에게 빚지지 않고 살 수 있는 부자(?)가 되어 있다.

성산동 그 비좁은 7평짜리 연립주택의 2층으로 이사하면서 은석이를 낳게 되는 까닦에 큰방을 우리가 차지하였고 누나마저 병원에서 수술하고 나니 우리 집에서 몸조리를 해야겠는데 나머지 작은방의 크기란 장 때문에 키가 큰 세완이는 발도 쭉 뻗지 못하고 자는 상황이라서 결국 큰방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야만 되었다. 그렇게 불편하게 생활하는 가운데 돈 잘 못 버는 것만이 서럽고 예전에 호주로 이민 가기 위하여 집 판 돈에서 1000만원이나 건네 준 것이 더욱 아쉽고 속상하였다. 호주 이민을 포기 한 후 그 돈 중에서 반이라도 되돌려 주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 일이 사촌 누나를 통하여 이루어 진 일이라서 그때까지도 그냥 처분만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 일을 들으시고 먼저 계시던 도봉산의 기도원장께 그러한 사정을 우연히 얘기하시게 되었는데 그 분 말씀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받을 돈의 10의 1을 기도원에 먼저 기부한다면 그 돈을 곧 받게 될 것이란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체험을 해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그 기도원을 통하여 변화 되신 것을 보고서 그 기도원장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변화는 내게 큰 충격이요 간접적인 체험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없는 중에 정말 30만원을 마련하여 기도원에 기부를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정말 호주 이민 건으로 건네주었던 돈 중에서 400만원을 돌려 받게 되었으며 그 돈으로 좀 더 큰집으로 이사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후로는 지금까지 십일조를 어겨 본적이 없으며 내가 미국 이민을 위하여 개포동 아파트를 팔았을 때 내가 그간에 아파트를 팔고 삼으로서 얻어진 불로소득중 10의 1인 300만원을 개척교회에 기부하였으며 오히려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하여 내 돈 중에서 300만원을 더 교회를 위하여 썼다.

그 무렵 나는 첫 직장을 떠나 새 직장을 잡게 되었는데 이미 술과 담배를 끊은지라 새 직장에서는 진짜(?) 예수장이로 양해가 되어서 아예 처음부터 일요일에는 출근을 않거나 부득이 한 경우에는 교회를 갔다가 출근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렇게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며 교회 생활에 충실하게 되니까 믿음은 더욱 더 자라게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는 설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듣는 것을 넘어서 성경에 관심을 갖고 직접 성경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신앙적 체험의 기회가 찾아왔다. 교회 안에서 남전도회를 중심으로 40일간의 철야 예배를 시작한다 하면서 내게도 같이 해보자고 어느 집사님이 권유하는 것이었다. 마침 그 때에 그 간에 다니던 새 직장을 그만 두고 먼저 직장으로 다시 가기로 협의 중이었으므로 얼마간의 시간을 내어서 그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때 누나가 매형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아예 우리 집으로 살림을 가지고 들어와 있었을 때라서 어머니와 함께 그 철야 예배에 셋이서 다녔다. 철야 예배란 저녁먹고 10시경부터 교회에 모여서 찬송을 부르며 밤을 새워 기도하다가 새벽6시에 시작되는 새벽 예배를 끝으로 파하는 힘든 훈련이었다. 그렇게 십여일을 철야 예배하던 중 어느 날인가 누나가 방언을 하게 되었다. 방언이란 하나님을 믿을 때 받는 여러 가지 체험 중의 하나로 본인이나 남이 들어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외국어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본인과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방법으로서 대체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드러나게 받을 수 있는 체험의 하나이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받기를 간구하는 그런 것이었다. 누나의 체험은 내게 또 다시 커다란 간접적인 체험을 하게 했으며 나도 그러한 종류의 체험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를 다 보내고 그날 밤 철야 예배에서 나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던 중 나도 방언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그러한 직접적인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그 동안에 잠재되어 있던 내 신앙에 기폭제가 되어서 나의 뜨겁고 열정적이며 아무 조건이 없는 참 신앙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이런 저런 말로는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체험들을 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체험들이 내 신앙의 뿌리가 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믿기는 믿으면서도 다 믿지 못하였고 때로는 의심을 하였기도 하였으며 어떤 부분은 인간적인 나의 상식으로 성경을 적당히 이해하던 나 중심의 신앙에서 나는 완전히 돌아서 버렸다. 먼저,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에 관하여서는 내 고집과 사상과 상식을 버리고 그 모든 것을 순수하게, 어린아이와 같이 새롭게, 다 받아들이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변화는 수천년 동안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들 중의 하나 일 뿐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나 스스로도 한동안 믿지 못 할 크나 큰 변화였다. 누가 나를 말로나 이론으로서나 이렇게 바뀌도록 설득 할 수가 있겠으며 누가 나를 이렇게 절대적으로 승복하도록 이길 수가 있을까 ?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내가 그리도 오랜 시간을 고민하며 방황하여도 풀지 못한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느 날 한번에 끝내신 것이다. 그 후로 나는 한번도 내가 왜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방황하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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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인공이신 오 집사님은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분으로 러시아 선교에 동참하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