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봉사대 납치사건 -----------------
엡 4:21-24 (새 사람을 입으라)
중동의 나라에 가면 대부분의 중소도시나 대도시의 서민층 마을에 가면 골목 한 가운데를
지나는 약간 깊은 홈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수가 흐르는 길이다.
별로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라 그게 큰 해로움은 없겠지만 그 나름대로 기묘한 악취를 풍기면서 흘러간다. 그야말로 가난의 상징 같은 장면이다.
-- 어찌 보면(유물사관주의 입장) 세상의 많은 전쟁들은 생존본능 보다는 더 차지하기 위한 빈부간의 갈등으로의 양상이 되어가고 있다. ---
이런 나라가 그 뿌리는 같지만 구원해석이 다른 종교가 되어 이제는 서구와 뿌리 깊은 원한관계를 계속형성하고 있다. 우리국민과는 크게 원한 질 일이 없겠지만 중동패권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미국과 동질의 나라라고 간주되어 때로는 공격을 받는 일이 있다.
그런 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분당 S교회 봉사대의 납치사건이다.
아랍권은 천성적으로 기독교 국가와는 대적관계로 형성되어 왔다.
구약성경의 장자 가문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다 이런 족보에 속한다고 보면 옳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느니라.”
탈레반 1 --
피랍 봉사대의 영적 지주였던 배목사와 일건의 선교전단을 소지했던 심 청년의 살해가 진행되자 많은 교회를 비판했던 네티즌들의 글들이 뚝 그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피랍사건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 가, 에 대해서 여기 말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의 순교자가 나오면서 미움의 첫 번째 對象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가족들의 애끓는 모습들을 보는 국민들은 미움의 대상이 당장 바뀌어서 군대를 일으켜 싹쓸이를 하라는 데 로 여론이 모아졌다. 사람들의 마음은 무한하고 그래서 가상설정의 범위도 무한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도 審判의 잣대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교인은 과연 누구인가?
진정한 판단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과연 眞理를 所有하고 있는가?
탈레반 사건은 이 시대에 내려주신 새로운 轉換點인 것이며 교회의 새로운 디딤돌이 되었다. 이 나라 교계와 모든 그리도 공동체에게 귀한 소망이 되시고자 찾아오신 恩賜이다.
지금 이 나라 空中에 그리스도께서 再臨하신 사건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새롭게 판단하며 해석해야 하는 準據이다.
얼마 전 파푸아뉴기니아의 한 나라 원수가 영국에 대하여 감사장을 보내왔다. 오래전에 한 선교사가 그 나라에 들어왔다 그의 동역자 들을 원주민이 잡아먹는 사건이 있었다. 너무나 분노한 그 선교사는 그 마을을 습격해 몇 십 명의 원주민을 피의 보복물로 삼은 사건이 있었다. 그 선교사는 교계로부터 제명당했지만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기독교국가다 된 것에 대한 감사표시를 보낸 것이다.
批判이나 徵戒가 없으면 과연 眞理도 不在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질문이 있다. 왜 죽어도 좋다고 하며 나가더니 살려 달라 하는가?
왜 基督敎만 傳播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威脅에 屈한다기 보다 주님 앞에서 自身을 낮추는 마음, 그리고 저들에게- 탈레반들- 矜恤을 심기 위한 하나의 모양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죽음을 不辭하는 永遠으로 通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를 찾는 길이다. 아니 이것만이 진리이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 도다.”
이제는 順序를 정할 때가 되었다. 명성(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단체도 있다)만 위해서 불 맞은 짐승처럼 뛰어다니는 지도자들은 없는가? 그리고 재산증식만을 위해서(지성전 못 만들어 몸살 나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열심 내는 종교재단은 없는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그러한 作態(주님께서 명하신 小子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자들) 를 여러분들은 스스로 容納하는가, 에 대한 것을 살펴라! 아프간에서도 율법을 지극히 숭상하는 두 단체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 교계는 아직도 잠들고 있다. 개들은 신령한 예배를 모른다. 찬송하는 돼지들을 본 일이 있는가? 신령이 회중에게 없으면 그것들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는 선한 일을 하라” (엡 4:28)
탈레반 2 --
하나님께서도 이 세대에 그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을 예비하셨다.
창세기 천지 창조 시 어둠을 만드신 것처럼 ---
그 들로 하여금 빛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음을 照明하셨던 것이다.
-- 여름 수련회, 성지순례, 중국 선교여행, 추석사랑나라, 성경통독 등 네가 참석하는 이
event 가 마지막이니 이를 통해서 거듭나라 라고 명하셨다. 납치사건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event 이다.
“이 영광의 광채를 위하여 쓰임 받았으니 그 어둠까지도 사랑하라!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사랑하라.” 광채는 비출수록 그 광원은 앞으로 나갈 것이나 어둠은 그가 영광을 받던 버려지던 그 다음은 주님의 권세 안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그 들을 너희에게 붙이시리로다.” (삼상 17:47) 가인과 함의 자손들이 그랬으며, 에서가 그랬고 이스마엘이 그랬으며 북이스라엘 거민이 그랬다.
전쟁터는 육신의 죽음을 겨눈다. 그러나 죄악과 불의는 영혼을 노리고 달려온다.
이 영적 전쟁마당에 누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겸손, 온유, 인내,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그리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주님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이제 말을 맺으려 한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택하셨다. 이제 우리민족들을 세계 각국에 보내시고 거기서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하늘의 메신저들로 우리나라도 헐버트, 언더우드 선교사들을 통하여 새롭게 변해왔다. 세계 역사상 이런 민족은 없었다. 그래서 피랍된 저들의 시련과 눈물 그리고 석방된 두 자매들의 가슴에 북 받히는 원통한 사연을 막아버리셨을 뿐 아니라 그 위에 두 귀한 죽음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탈레반을 통하여 아프간을, 아프간을 통하여 중동국가들을, 그 위에 세계 모든 모슬렘 민족들까지도 선택하셨음을 알게 해 주셨다.
좀 이기적 같지만 왜 하필 우리 민족인가?
여기에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밀하신 비밀을 엿볼 수 가 있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 모슬렘과 기독교, 양대 대 세력사이에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를 두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분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역사를 새로 기록하게 하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도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거니와 그래서 우리 민족은 이제 죽든지 살든지 우리에게 맡기신 그 사명만을 위해서 앞만 보고 나가야 할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부끄러운 곳), 害도 傷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노숙자 선교를 하시는 유 목사님이 보내온 글 가운데 일부를 삭제하고 올린 글입니다.
러시아 방송에서 미셔나리(선교사) 피납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간 분들임을 공인받은 것 같아 더욱 감동적입니다.
남은 분들의 무사 귀환을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엡 4:21-24 (새 사람을 입으라)
중동의 나라에 가면 대부분의 중소도시나 대도시의 서민층 마을에 가면 골목 한 가운데를
지나는 약간 깊은 홈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수가 흐르는 길이다.
별로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라 그게 큰 해로움은 없겠지만 그 나름대로 기묘한 악취를 풍기면서 흘러간다. 그야말로 가난의 상징 같은 장면이다.
-- 어찌 보면(유물사관주의 입장) 세상의 많은 전쟁들은 생존본능 보다는 더 차지하기 위한 빈부간의 갈등으로의 양상이 되어가고 있다. ---
이런 나라가 그 뿌리는 같지만 구원해석이 다른 종교가 되어 이제는 서구와 뿌리 깊은 원한관계를 계속형성하고 있다. 우리국민과는 크게 원한 질 일이 없겠지만 중동패권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미국과 동질의 나라라고 간주되어 때로는 공격을 받는 일이 있다.
그런 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분당 S교회 봉사대의 납치사건이다.
아랍권은 천성적으로 기독교 국가와는 대적관계로 형성되어 왔다.
구약성경의 장자 가문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다 이런 족보에 속한다고 보면 옳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느니라.”
탈레반 1 --
피랍 봉사대의 영적 지주였던 배목사와 일건의 선교전단을 소지했던 심 청년의 살해가 진행되자 많은 교회를 비판했던 네티즌들의 글들이 뚝 그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피랍사건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 가, 에 대해서 여기 말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의 순교자가 나오면서 미움의 첫 번째 對象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가족들의 애끓는 모습들을 보는 국민들은 미움의 대상이 당장 바뀌어서 군대를 일으켜 싹쓸이를 하라는 데 로 여론이 모아졌다. 사람들의 마음은 무한하고 그래서 가상설정의 범위도 무한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도 審判의 잣대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교인은 과연 누구인가?
진정한 판단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과연 眞理를 所有하고 있는가?
탈레반 사건은 이 시대에 내려주신 새로운 轉換點인 것이며 교회의 새로운 디딤돌이 되었다. 이 나라 교계와 모든 그리도 공동체에게 귀한 소망이 되시고자 찾아오신 恩賜이다.
지금 이 나라 空中에 그리스도께서 再臨하신 사건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새롭게 판단하며 해석해야 하는 準據이다.
얼마 전 파푸아뉴기니아의 한 나라 원수가 영국에 대하여 감사장을 보내왔다. 오래전에 한 선교사가 그 나라에 들어왔다 그의 동역자 들을 원주민이 잡아먹는 사건이 있었다. 너무나 분노한 그 선교사는 그 마을을 습격해 몇 십 명의 원주민을 피의 보복물로 삼은 사건이 있었다. 그 선교사는 교계로부터 제명당했지만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기독교국가다 된 것에 대한 감사표시를 보낸 것이다.
批判이나 徵戒가 없으면 과연 眞理도 不在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질문이 있다. 왜 죽어도 좋다고 하며 나가더니 살려 달라 하는가?
왜 基督敎만 傳播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威脅에 屈한다기 보다 주님 앞에서 自身을 낮추는 마음, 그리고 저들에게- 탈레반들- 矜恤을 심기 위한 하나의 모양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죽음을 不辭하는 永遠으로 通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를 찾는 길이다. 아니 이것만이 진리이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 도다.”
이제는 順序를 정할 때가 되었다. 명성(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단체도 있다)만 위해서 불 맞은 짐승처럼 뛰어다니는 지도자들은 없는가? 그리고 재산증식만을 위해서(지성전 못 만들어 몸살 나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열심 내는 종교재단은 없는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그러한 作態(주님께서 명하신 小子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자들) 를 여러분들은 스스로 容納하는가, 에 대한 것을 살펴라! 아프간에서도 율법을 지극히 숭상하는 두 단체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 교계는 아직도 잠들고 있다. 개들은 신령한 예배를 모른다. 찬송하는 돼지들을 본 일이 있는가? 신령이 회중에게 없으면 그것들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는 선한 일을 하라” (엡 4:28)
탈레반 2 --
하나님께서도 이 세대에 그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을 예비하셨다.
창세기 천지 창조 시 어둠을 만드신 것처럼 ---
그 들로 하여금 빛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음을 照明하셨던 것이다.
-- 여름 수련회, 성지순례, 중국 선교여행, 추석사랑나라, 성경통독 등 네가 참석하는 이
event 가 마지막이니 이를 통해서 거듭나라 라고 명하셨다. 납치사건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event 이다.
“이 영광의 광채를 위하여 쓰임 받았으니 그 어둠까지도 사랑하라!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사랑하라.” 광채는 비출수록 그 광원은 앞으로 나갈 것이나 어둠은 그가 영광을 받던 버려지던 그 다음은 주님의 권세 안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그 들을 너희에게 붙이시리로다.” (삼상 17:47) 가인과 함의 자손들이 그랬으며, 에서가 그랬고 이스마엘이 그랬으며 북이스라엘 거민이 그랬다.
전쟁터는 육신의 죽음을 겨눈다. 그러나 죄악과 불의는 영혼을 노리고 달려온다.
이 영적 전쟁마당에 누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겸손, 온유, 인내,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그리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주님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이제 말을 맺으려 한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택하셨다. 이제 우리민족들을 세계 각국에 보내시고 거기서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하늘의 메신저들로 우리나라도 헐버트, 언더우드 선교사들을 통하여 새롭게 변해왔다. 세계 역사상 이런 민족은 없었다. 그래서 피랍된 저들의 시련과 눈물 그리고 석방된 두 자매들의 가슴에 북 받히는 원통한 사연을 막아버리셨을 뿐 아니라 그 위에 두 귀한 죽음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탈레반을 통하여 아프간을, 아프간을 통하여 중동국가들을, 그 위에 세계 모든 모슬렘 민족들까지도 선택하셨음을 알게 해 주셨다.
좀 이기적 같지만 왜 하필 우리 민족인가?
여기에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밀하신 비밀을 엿볼 수 가 있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 모슬렘과 기독교, 양대 대 세력사이에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를 두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분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역사를 새로 기록하게 하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도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거니와 그래서 우리 민족은 이제 죽든지 살든지 우리에게 맡기신 그 사명만을 위해서 앞만 보고 나가야 할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부끄러운 곳), 害도 傷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노숙자 선교를 하시는 유 목사님이 보내온 글 가운데 일부를 삭제하고 올린 글입니다.
러시아 방송에서 미셔나리(선교사) 피납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간 분들임을 공인받은 것 같아 더욱 감동적입니다.
남은 분들의 무사 귀환을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