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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페루 편
;페루에 인술을 펴는 한인의사 문장호 」 (이동훈)

문장오 1955년생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중대부속병원
고려대학병원
군병원 청평병원
서울에서 병원개업
강인순(부인) 1956년생
문영지(딸) 1980년생 현재 대학생
문영준(아들) 1983년생 외국인 학교 재학중

화려한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나라, 페루.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잉카제국의 후예 인디오들. 옛 제국의 영화는 뒤로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까야오 지역과 같은 빈민지역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모든 것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있을 리 만무하며 있다고 해도 이들의 생활수준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곳들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까야오 보건소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곳이다.

1992년 후지모리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 KOICA(한국국제 협력단)에서 첫 번째로 세운 이 병원은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환자들은 줄을 서기 시작한다.

이 곳에서 만난 한국인 의사 문장호 박사. 93년 KOICA로부터 파견된 그는 환자들을 까야오병원으로 오게 하는 또 한가지의 이유가 되고 있다. 태만하고 불친절한 현지 의사들과 비교하여 문박사의 진료는 누구보다도 정확하며 언제나 친절한 모습을 대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은 진료과목과 상관없이 문박사에게 진료를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비뇨기과 전문의지만 비뇨기과 진료보다는 외과수술이나 소아과 진료를 할 때가 적지 않다. 일단 그를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페루와의 친선을 위해 지어진 까야오 병원은 우리 교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곳이다. 언어의 장벽 앞에 병을 키우기 일쑤인 이민 1세대들. 그들에게 문박사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다. 문박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전화상담을 받으며 멀리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반갑게 맞는다. 늦은 밤 문박사 집의 식탁을 수술대로 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문박사는 그들의 주치의임을 자처한다.

1993년 안정된 서울생활을 접고 페루에 오기까지 가족들과의 마찰이 적지 않았다. 어렵게 가족들을 설득해 2년을 약속하고 도착한 곳 페루. 그러나 92년부터 계속된 테러와 강도들로 페루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동양인인 문박사도 결코 안전할 수 없었던 곳에서 2년 임기를 세 차례나 연기해 벌써 7년째를 맞고 있는 페루 생활. 한국에 가고싶다고 밤새 울고 투정하는 아이들의 물음에도 그가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의사로서 목표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KOICA는 92년 후지모리 방한 기념 원조사업으로 총 15개의 병원을 지어주기로 했었다. 까야오의 제 1 병원을 시작으로 꼬마스에 제 2 병원, 아마존 지역에 제 3병원, 안데스 지역에 제 4병원, 지금까지는 4개의 병원이 세워진 상태. 주로 까야오와 꼬마스 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문장호박사는 어느정도 페루 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누구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빈민촌의 순회진료.

우연히 알게된 선교사의 도움으로 히까마르까를 포함한 몇 개 빈민지역의 순회진료가 시작되었다. 전혀 의료혜택이 없고 철저하게 소외되어 사는 사람들. 가끔 진료를 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는 오히려 작은 일이 더욱더 그들에게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빈민지역 사람들의 반응도 너무나 좋았다. 히까마르까에서는 감사의 표시로 자신들이 필지를 제공하며 상주진료소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문박사는 자비를 들이고 부족한 부분은 후원을 받아 어렵게 어렵게 작은 진료소를 만들게 되었다. 약간의 진료비를 받고는 있지만 그것은 병원 유지비의 20%정도밖에 되지 않아 후원회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현실. 문박사의 목표는 자신과 후원회,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함께 세운 이 병원을 앞으로 입원,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까야오 제 1병원과 꼬마스 제 2병원의 진료, 그리고 하루에도 수통씩 걸려오는 교민들의 의료상담전화까지. 일주일이 짧기만한 문박사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그는 환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직접 환자를 찾아 나서는, 자신을 가장 의사다운 모습으로 가꾸어 가는 사람이다. 의술이 아닌 인술을 펴는 문장호 박사.

옛 잉카제국의 후예들은 그러한 한국인의 모습에서 희망과 사랑, 신뢰를 배운다.


(32) 10/23 : 가봉 편
「가봉에 한국얼 심는 태권왕 박상철」 (허백규)

머나먼 아프리카 가봉에 태권도의 불씨를 심는 박상철씨. 그는 국내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재직하던 84년, 태권도 협회에서 외국의 대통령을 경호할 요원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호원을 필요로 한 나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가봉. 그는 태권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고 교민들도 많은 사우디 아라비아 대신 미지의 나라 가봉을 택했다. 태권도 불모지에 도전해 뭔가 이뤄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100년의 프랑스 식민 지배를 겪은 뒤 불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나라 가봉. 대부분의 국토는 야생동물이 살아가는 원시의 상태 그대로고 프랑스의 직접 영향을 받은 도시들은 대서양을 바라보는 바닷가에 밀집돼있다. 처음에 박상철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혼자 가봉 땅을 밟았다.
170cm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 태권도 실력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유단자. 그러나 가봉 대통령궁의 경호원들은 현지 가봉인들과 프랑스인, 모로코인 등 체격이 건장한 사람들로 박상철씨는 눈에 띄기조차 힘든 존재였다. 더구나 경호원들의 필수 무술은 가라데. 경호팀 실장의 든든한 지원을 업은 가라데 사범이 실세였다. 태권도를 하는 그의 실력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 대통령의 측근 경호는 순간 순간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민첩성과 철두철미한 사명감으로 그는 곧 경호원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말이 어느 정도 통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그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달라는 동료 경호원들도 늘어났다. 태권도를 더 좋아하는 경호원이 늘어나면서 가라데 사범이 밀려나고 그는 경호팀 안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아내와 두 아들이 가봉으로 오고,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그는 대통령의 아들이자 국방장관인 알로 봉고의 경호실장으로 임명된다. 경호원 생활 17년째를 맞는 지금도 매일 24시간을 사선에서 보내듯 경호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박상철씨. 그는 작년에 국방장관의 강력한 지원 하에 전 군의 태권도 교육을 의무화하는 계획을 세웠고, 의회에서는 이를 승인했다. 다음 목표는 전 국민에게 태권도 교육을 실시하는 것. 그는 이미 자신이 길러낸 1세대 제자들을 통해 만 여명의 어린이 태권도 제자를 확보하고 있다.
한 국가의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신임을 얻기까지 그는 경호원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 국방장관은 비밀스러운 연락업무를 모두 그에게 일임할 정도가 됐다. 자신의 몸보다 경호대상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 박상철씨. 그는 자신의 경호철학과 근성을 모두 태권도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이제 그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태권도에 보답하기 위해 가봉에 태권도의 씨를 뿌린다.



(33) 10/30 : 필리핀 편
「필리핀 빈민촌의 침놓는 목사님」 (허백규)

연락처: 63-75-523-1923(다구판 한인교회)
63-73-523-9640(치료센터)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220km 떨어진 외진 시골 다구판.
그곳에 한국인 선교사 김맹렬 목사가 3년째 의료봉사를 하며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원래 그는 마닐라에서 1년간 생활하였지만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구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가 선교이외에 주력하는 사업은 의료봉사활동.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는 가장 한국적인 한방요법과 침술로써 치료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와 치대를 다니고 있는 딸, 그리고 한국에서 막 군대를 제대한 후 필리핀으로 와서 대학진학을 준비중인 아들등 전 가족도 틈틈히 그의 의료봉사를 도우며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의 의료봉사활동은 ‘메디칼 센터’라 불리는 진료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목회활동을 하는 일요일을 빼면 매일 그곳에서 무료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으며
교민, 한국유학생들이나 필리핀 현지의사들의 도움을 얻어 각 분야별 치료도 담당한다.
또한 매주 토요일이면 그는 주변의 마을들을 돌며 진료를 한다.
도로사정이 매우 열악해서 불편한 점이 많지만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찌뿌니라는 차로 매주 가능한 스텝들을 모아서 치료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고 이동할만한 여유가 없는 현지인들을 위한 그의 배려에서 나온 봉사활동이다.

봉사활동을 위한 자금이 부족한 실정이지만 한국쪽 교회와 현지 다구판 한인교회의 30여명의 신도들이 도움을 보내주고 있고 치료를 받은 현지인들이 정성껏 보내주는 한화 200, 300원정도의 성금은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된다고 한다.
그는 지금 부족한 치료기구 및 약품구입을 위해 10월에는 한국을 방문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34) 11/13 : 잠비아 편
「황무지에 희망심는 잠비아의 한국인 유근복 신부」 (허백규)
연락처: 001-873-761-984828(위성전화)

주요내용: 오랜기간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들어간 나라 잠비아.
그러나 그곳은 아직도 거의 불모의 땅으로 남아 국민들은 원시시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외침과 내전등으로 아주 피폐한 형편이다.
문명화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과 기아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에서 이곳으로 파견된 유근복(53세,
세례명: 빅토리노) 신부는 1996년 6개월간의 현지답사를
거친후 1997년부터 '땀뿌 성 김대건 안드레아 미션'이라는
이름아래 여러 가지 봉사 및 개척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가 이 '땀뿌미션'을 행하는 곳은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서 1000km나 떨어진 지역으로 앙골라와 콩고(자이르)의 국경지대이고 관할 범위는 우리나라 경기도(13.000평방 킬로미터)보다
넓다.

유근복 신부가 행하는 '땀뿌미션'은 여러 가지 분야로 나뉘어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선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여 살아가기에 항상 기근과 영양실조로 시달리는 현지인들을 위해
농지조성과 농업개발 10개년 계획을 세워 미국에서 파견된 토지개발 전문가인 평신도 선교사 Oscar Padilla와 현지인 신부 Mwanze Guito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리고 평균수명이 38세일 정도로 열악한 보건환경에 대해서도 개선대책을 모색중이다. 간단한 치료정도는 유신부가 맡고 있지만 워낙에 인원이 적은 형편에 전문의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 잠비아로 파견된 한국인 간호수녀 세분과 함께 의료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신부는 현재 병원설립을 목표로 정부 허가를 받아둔 상태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교육이라는 것이 유신부의 생각이다. 교육의 부재로 인해 농업개발, 보건상식, 윤리문제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의 근본적인 개선책은 찾지 못한체 주먹구구식의 해결만을 반복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는 한국의 수녀님들을 초빙해 체계적인 교육환경을 모색하고 있다.

이외에도 생계, 건강, 교육등의 문제와 직결되는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건설사업에도 힘쓰고 있으며 농작물의 유통을 위한 시장을 개척하고 우편, 통신, 주택시설등 여러 가지 열악한 생활환경의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다.


(35) 11/20 : 러시아 편
「언땅을 녹이는 삶의 노래, 연해주의 고려인 김 뗄미르」 (장승욱)

'고려인' 이란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지역 국가들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만 우리 동포들을 일컫는 말이다.
19세기 초부터 기근을 피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일제 시대에는 가난과 수탈을 피해, 또는 독립 운동을 위해 이주 정착한 동포들이 약 20만에 달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무자비한 소수 민족 강제 이주 정책으로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살던 집과 농사 짓던 모든 것을 남겨 둔 채 간단한 가재 도구만 챙겨 무작정 대륙 횡단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40여 일을 달려 늦가을과 여름에는 영상 40도를 웃돌고, 겨울에는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중앙아시아의 황무지 벌판에 그들은 아무 대책 없이 버려졌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풀도 제대로 나지 않는 소금밭 황무지와 겨울이었다. 거기서 우리 동포들은 죽음보다 참혹한 길고 긴 겨울을 지내야만 했다. 집도 없어 땅을 파고 거적을 덮어 겨울을 나야만 했다.
겨울이 지나자,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각종 병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5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고려인들은 아무런 장비도 ,농기구도 없이 심지어는 맨손으로 물길을 만들어서 논을 만들고 황무지를 억척스럽게 개척하여 마침내는 그 황무지를 옥토의 대농장으로 만들어 내는 신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마침내 고려인들은 농업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역할들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 아시아 황야로 내팽개쳐졌던 이들의 기구한 삶은 이제 내전과 민족주의로 다시 위태로워진다.
91년 12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C.I.S 국가들이 독립하고, 독립 국가 고유의 언어를 쓰는 정책과 소수 민족에 대한 회교 민족주의로 인하여 상당수의 고려인이 C.I.S를 떠나고 있으며 대부분 원거주지였던 극동 러시아, 그중에서도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 (연해주의 인구는 230만 명이며 90% 이상이 러시아인이다.)

연해주 정부는 1990년 이후 약 3만 명 정도의 한인 동포가 중앙아시아로부터 연해주로 재이주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공식적인 주민 등록을 하지 않은 숫자를 포함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고려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으로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이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는 계속될 것이며 주로 연해주 지방으로 계속 재이주가 이뤄질 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전망이다. 재이주의 규모나 속도는 중앙아시아의 상황 변화와 연해주 지방의 고려인 정착 상황, 여건의 변화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연해주로 이동한 고려인들의 삶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것에 대해 같은 고려인이면서, 고려인 돕기 운동에 발벗고 나선 인물이 있는데, '러시아 한인 재생기금회'를 창립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김텔미르 ( 69세 ) 이다.

가. 러시아 한인(고려인) 재생 기금회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유일한 고려인 정착 지원 사업 법인으로서 공식 명칭은 연해주 고려인 재생 사회 자선 기금회(약칭, 기금회, 또는 '폰드'라 부른다.)로서 회장은 김텔미르(69) 씨이다.
이 기금회가 한 일들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93년 옐친 대통령령에 의해 '스탈린 시절 정치적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법'이 마련됐다. 이 보상법에 따르면 아파트 무상 지급, 국내선 비행기 왕복권 2년에 1회 지급, 기차 왕복권 1년에 1회 지급, 사후 장례비 전액 지급 등 15개의 특혜 조치를 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재소 한인들은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었다. 그러나 고려인 협회의 노력, 특히 [러시아 한인 재생 기금회(일명 '폰드')] 회장 김텔미르씨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러시아 정부로부터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 정책의 부당성을 인정 받고 그 보상으로 고려인의 정착을 위하여 러시아 정부의 정책이 결정되어졌다.

․1998. 1. 19. 연해주 고려인들이 상부 기관으로 결성한 연해주 고려인 재생 기금 앞으로 연해주 주지사로부터 공문이 도착하였다. 이것은 연해주 내에 있는 군사 시설에서 군인이 철수한 곳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지를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공문을 근거로 1차적으로 한인에게 내어 준 장소는 7개소이다.(보즈드비젠카, 라즈돌로노예, 포포브카, 플라토노브카, 오레호워, 크레모보, 노보네즈노 등)

<재생 기금회 소속 고려인 정착지의 정착 현황>
연해주 정부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이주해 오는 고려인의 수를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며 약 6-7만 명까지 내다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군부대 정착촌을 30~40군데 예정하고 있다. 한인 재생 기금회가 고려인 정착의 수용 능력에 따라 더욱 이양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상의 고려인 정착촌 이외의 재이주 고려인의 실태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연해주 거주 고려인들은 다양한 직업과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편이다.

<연해주 고려인 재생 기금회(일명 폰드) 조직>
주소 :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깔리니나 35번지(TEL) 241-211-46 (한인 재생 기금회 본부 회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루스까야 87번지
(TEL) 4232-33-92-39 (한인 재생 기금회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실)
명칭: 〔연해주 고려인 재생 사회 자선 기금회〕
회장: 김 텔미르 아파시스나(69세)
제네랄 디렉터: 박 웨라 하지놈나(50세)
회원수: 중앙아시아에서 217세대 850명에서 1,000여명(현재 농한기이므로 친인척을 찾아서 보따리 장사, 현재 400여 명 잔류)
기금회의 노력으로 연해주 내에 있는 철수한 곳의 군사기지에 한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사정이 어려운 곳이 ‘포포브카’이다. 그리고 이곳에 한국에서 간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나. 한국인 자원봉사자( 박상용. 송미정 )

위치-블라디보스톡에서 북서로 약 250키로(4시간 소요)
주소-연해주 호롤군 뽀뽀프카 까르니죤 63/23
고려인 정착 세대 및 인원-26세대 70명 러시아인 7가정
디렉터-한 아르까진 니꼴라이비치(46세)
경작 면적-40헥타
한글학교 교사-박상용.송미정 교사
생활여건-블라디보스톡에서 250키로 시간으로 4시간 소요되는 뽀보프카는 [고려인 재생기금회(폰드)]의 군막사 가운데 가장 단합이 잘 되고 특히 영농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 곳이다.
그러나 폰드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이므로 지난 겨울에도 난방이 없이 한 겨울을 보냈다. 더구나 물은 오래전부터 끓겨서 몇키로 떨어진 곳에서 탱크로 받아 트렉터로 옮겨 사용하고 있다.
물건의 4-5층은 이미 유리창이나 창틀의 시설물은 파괴되거나 러시아인들이 훔처갔고 1층에서 3층만 고려인이 살고 있지만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다. 비닐이나 나무판자로 창문을 막고 산다.
그러나 그들의 염려는 추위나 바람이 아니다. 오래된 러시아 군부대가 버려둔 막사를 사용하고 있다보니 점점 기초가 기울어져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려인의 소원인 농가주택을 구입하여 닭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고 아침 저녁으로 텃밭도 가꾸며 고려인의 농사꾼 기질되로 살고 싶어하지만 아무런 대안도 대책도 없이 어쩔 수 없이 살아 가고 있다.
한국의 여러 단체가 방문하여 주택문제를 해결하여 주겠다고 하였으나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올 겨울이 오면 당장 난방이 문제이다.
이른 봄, [한농]이 지원한 비닐, 종자, 트렉터 수리비로 목재로 하우스를 지어 작년에 하우스로 이용한 비닐과 종이로 포터를 만들어 도마토, 수박, 오이, 참외 모종을 심어 30키로 떨어진 150헥타의 농장에서 5월부터 천막과 비닐 막사를 치고 생활하고 있다.
방학이 되자마자 어린학생들까지 야외생활이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지만 어린아이부터 중년까지 무더위와 싸우며 농사짓고 있다. 그러나 연해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땅과 싸우는 고려인의 모습은 경이롭다.
성실한 고려인들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대단한 의욕에 비해. 의경제적 여건이 형편없다. 무더위 속에서도 하루에 14시간 일하고 있다. 올해 농사를 지어 빚을 갚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려 하고 있다. 다행히 [한농]과 [고려인 돕기 운동회]의 영농지원, 그리고 [우리 민족 서로 돕기]등에서 매달 가정당 500루불씩 자매결연 지원은 이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7월말부터 8월 초에 쏟아진 장마비로 이른봄부터 갈아엎은 땅, 추운 겨울부터 정성들여 가꾸어진 모종들과 이식작업등으로 갈꾸어진 농장이 하루 아침에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이 홍수로 연해주 7,000헥타가 물에 잠겼는데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텃밭 혹은 다차(겨울 월동을 위한 5-15평의 개인 농장) 정도의 소규모 농사를 짓지만 고려인들은 50 혹은 120헥터의 대규모 농사를 짓는다.

이번 장마비로 대부분 고려인의 농장은 침수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흙탕물이 되어버린 농작물을 씻고 병충해를 예방하고 흩어진 가구들을 씻어내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소. 그래도 남은 것이라도 건져내야지 않소?. 우리 고려사람은 바쁘오(어렵소). 고려 사람에게는 농사밖에 없소]라며 깊게 주름진 얼굴을 펴며 일터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한국에서 간 자원봉사자 두명이 한글어 교육을 하고 있다. 박상용, 송미정 교사가 그들이다. 현재 고려인들중 10대와 30대까지는 전혀 한글을 모르며 40대는 몇 마디를 알아듣고 50대는 조금 더 알아듣고 60-70대는 기본 대화는 가능하다. 현재, 농장에 임시 비닐 막사 거처를 세우고 생활하면서 청소년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으며 이발과 천연치료를 하고 있다.


(36) 11/27 : 노르웨이 편
「노르웨이의 라면왕, 미스터 리 이야기」 (이동훈)

지난 11월 초, 노르웨이의 북부, 인구 1만 8천명의 작은도시 나르빅의 지방신문에는 그 전날 있었던 학생들의 무단 결석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연인 즉, 그 지역에 새롭게 문을 여는 백화점의 개업 시식행사에 참석한 “미스터 Lee”를 보기위해 일단의 학생들이 결석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 백화점의 라면 시식행사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바비인형같은 북구의 금발미녀들이 코믹한 외모의 이철호씨를 둘러싸고 “미스터 Lee"를 연호하며 미스터 Lee가 직접 끓인 ”미스터 Lee" 라면을 맛보기위해 줄을 서고, 사인을 받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미스터 Lee"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의 상표이자, ”라면“이라는 식품을 최초로 노르웨이에 퍼뜨린 이철호씨를 가르킨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말한다. 노르웨이에는 왕이 두 사람 이라고...
국왕과, 라면왕 미스터 Lee. "KING OF NOODLE"로 불리우며 노르웨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철호씨, 팬클럽까지 있는 그의 목소리와 모습은 영화, TV, 라디오 광고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인구 400만명의 노르웨이에 연간 800만개 이상의 매출을 올리면서 60%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는 라면 왕이 되기까지 그는 평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6․25 한국전쟁당시 13살이던 그는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다가 파편에 의해 허벅지에 큰부상을 입자 미군의 배려로 치료차 노르웨이 땅을 밟게 된다. 다리를 절기는 해도 7년간 수십차례에 걸친 수술로 어느정도 회복이 되자 그는 노르웨이에 남기로 결심한다. 구두닦이가 하나도 없는 노르웨이에서 구두닦이를 하면 성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두닦이를 할래도 허가를 받아야했고 그러려면 기초학력은 있어야했다. 고학을 시작한 그는, 청소, 접시닦이, 벨보이, 변소치기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구두닦이 대신 요리사가 되었다.
요리사로 일하면서 그는 건강식품인 인삼빵을 개발하여 성공을 거두기도했다. 그가 인삼빵을 개발한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인삼을 알리라는 명을 받든 결과였다.

그리고 라면 세박스로 시작한 라면사업의 성공으로 그는 자신의 브랜드를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키우는 성공을 했다. 현재 그는 초,중,고 학교나 기업체의 인기강사이기도 하다. 발로 뛰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그의 인생은 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한편 그는 25년 전부터 매년 11월 두 번째 금요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르웨이의 의료진들을 위한 만찬을 열어왔다. 처음 500명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100여명으로 그 숫자가 매년 줄어들고 있다.

이철호씨는 단 한 사람이 남을때까지 이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 행사야말로 이철호씨의 꿈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자신의 은인인 노르웨이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7) 12/11 : 러시아 편
「모스크바 한민족학교 교장 넬리 엄」 (장승욱)

엄넬리 교장. 한국식 이름은 엄복순
그녀는 지난 92년 러시아 정부의 승인 아래 러시아에서는 유일한, 고려인 자녀들을 위한 공립학교를 세웠다. 그들에게 뿌리가 무엇인지 일깨우고 당당한 러시아 시민으로 키워내는 것만이 한맺힌 고려인들의 설움을 풀어줄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동안 러시아인들에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받아왔던 인종차별에 대한 오기도 발동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모스트바 1086공립학교. 이곳은 러시아에서 한민족의 얼을 잇고 전파하는 요람이 됐을 뿐아니라 개교 5년만에 모스크바 제일의 명문이 됐다. 명문대학 진학률에서 모스크바 공립학교 중 최고의 성적을 보인 것이다. 러시아 TV와 신문들이 이 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해 일제히 다룰정도 이다. 그러다 보니, 신입생 경쟁률도 11대 1을 웃돌고 있다. 심지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고려인중 중에서 이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 가산을 정리하고 모스크바로 이주하는 사례도 있다.
98년도에 ‘한민족학교’로 개칭했다. 고려인 , 러시아인. 일본일, 유태인 등 50여 민족의 학생들의 다니는 다민족 혼성학교이다. 900여명의 전교생중, 500여명이 한국인 학생이다. 전교생이 주 3-5시간은 반드시 한글과 한국역사를 배운다. 태권도, 민속무용, 한국예절은 졸업할 때까지 배워야 하는 특별활동 과목이다.
교사는 전체 65명이다. 그중 22명이 한인. 그러나 한글 교사를 제외하곤 한국어를 전혀 못한다. 한글교재는 교육부등에서 공수하고 있다. ‘고국소식’에 실리는 동화도 큰역할을 하고 있다. 직접 교과서를 만들려고 준비중이다.

이 학교가 고려인들의 희망이 되기까지는 넬리 엄 교장의 인생역정이 있었다. 그의 삶은 또 불행했던 한민족 근대사의 편린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난 40년 우즈베키스탄의 헤르가나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00년대 말 강원도 영월에서 연해주로 넘어온 이주민의 후예인 부모역시 37년 강제 이주때 우수리 지역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해방과 함께 46년, 아버지가 북한에 들어가 평양, 신의주 등지에서 기술자로 근무해 북한의 러시아 학교에서 중학과정을 마쳤다. 이때 오빠의 친구이자 후에 남편이 된 박모씨(작고)를 만났으며, 시아버지인 박병률씨는 당시 강동 정치학원 원장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소련출신 고려인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자 그녀의 가족은 소련정부의 도움으로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조국(북한)을 탈출하다시피 떠나야 했다.
이때 그녀의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지 않고 모스크바로 왔다. 그녀는 어려운 가정형편속에서도 어렵사리 모스크바 국립 사범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도 인종차별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남학생들이 한 고려인 여학생을 화장실로 끌고가 옷을 벗기고 침을 뱉으며 놀리는 것을 보고 울화가 치민, 그녀는 그 날, 언젠간 고려인을 위한 학교를 세워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지난 90년 러시아 교육부 차관과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국어를 몰라 동포들과 대화를 나눌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렷다. 곁에서 보다못한 러시아 교육부 차관은 모스크바에서 고려인 학교를 세우면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후 그녀는 밤잠을 설쳐가면서 학교 설립을 착수했다. 검은 머리 놈들을 위한 학교가 웬말이냐며, 유리창을 깨고 벽돌을 부수는 주민들의 저항도 이겨냈다.

한국정부와 기업의 도움으로 지난 92년 9월 가까스로 학교를 개교 했다.
모스크바내에 한인가구는 92년 학교 설립당시만 해도 약 5000가구 정도였지만, 현재는 15000-18000 가구 정도로 증가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즈벡, 키르키스 등에서 언어문제와 지역사정악화로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왔다.
96년에는 교육자로서 최고영예인 러시아 연방 최우수 교장 훈장을 받았다. 부상으로 아파트 한채와 월급도 다른 교장들보다 3배나 더 받게 됐다. 학생선발과 독자적인 교사 임용 면직권도 부여 받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받는 월 600달러 가량의 월급은 고스란히 학교 재정에 들어가고 있다. 작년에 건물을 개보수 할 때는 사업을 하는 아들이 1만 5천 달러를 내놓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고려인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세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이룰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부지는 허가가 난 상태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공사를 미루고 있다.


(38) 12/18 : 동티모르 편
「동티모르에 심는 희망, 송혜란」 (허백규)

20세기 마지막 분쟁의 현장지였던 동티모르.
내전이 끝난 직후, 도시 곳곳은 처참했던 흔적과 함께 절망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 그 곳은 이제 더 이상 절망과 상처의 도시가 아니다. 도시 곳곳에는 희망과, 웃음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1년여만의 동티모르의 놀라운 변화... 그 중심에는 한국여성 송혜란이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된 뒤, 유엔의 지원을 받아, 독립국가 건설을 서두르고 있는 동티모르. 송혜란씨는 유엔평화유지군의 신분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되었다.
그녀는 한국인 유일의 유엔 평화유지(PKO)전문요원이다.
PKO전문요원이란, 세계 주요분쟁지역에 파견돼, 해당국가의 평화정착과 정치, 경제, 사회안정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특수직 유엔직원이다.

연세대 2년을 수료한 후, 도미, 컬럼비아대 국제문제대학원에서 석사를 받고 뉴욕 한국일보기자로 있던 송혜란씨는, 93년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어릴때부터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한국인 최초로 유엔 PKO전문요원이 됐다.
그녀는 7년에 거쳐, 전 세계 내전지를 돌아다니며, 목숨을 내놓는 위험을 겪으면서도, 수많은 일을 해 냈다. 첫 근무지 소말리아에서는 현지 최초의 전국규모 일간지<만타>를 발행했고, 크로아티아에서는 이산가족 상봉과, 여성의 사회, 경제적 자립활동에 주력, 보스니아에서는 유엔 경찰과 함께 사법체계를 마련했다.

지난해 말, 송혜란씨는 동티모르로 이동, 필리핀군 주둔지역인 라우템에서 난민 구호활동을 전개해왔다. 라우템지역은 상록수부대가 평화유지활동을 관할하고 있는 지역으로 동티모르 전체인구의 약 6%인 5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500여명의 필리핀 자국적군과 국제경찰을 지휘하고, 지역을 재건하는 일이 송혜란씨의 임무였다.

그녀는 전쟁의 상처를 입은 아이들에게 학교를 돌려주는 작업과, 주민들에게 병원을 세우는 일 등을 직접 지휘하고, 내전피해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로를 해주며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지난 5월 그녀는 그 지역의 지방단체장이 되었다. 한국의 도지사급에 해당되는 지방행정관에 오른 송혜란씨. 그녀의 노력으로 죽음의 땅, 동티모르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녀가 관할하고 있는 동티모르 라우템 지역은 CNN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공적인 내전 재건지역으로, 선정되어, 며칠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표자가 이지역을 돌아볼 예정이다.
그리고, 그녀의 힘겨운 노력덕에, 동티모르인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낯선 국가가 아니다. 동티모르인들은 태권도를 배우고, 2002 한국의 월드컵에 대비해, 열심히 축구 연습중이다.

20-30일 동티모르 스케줄 :

1. 유엔안정보장이사회 대표(책임자)가, 라우템지역 (송혜란씨 관할지역) 방문 예정
2. 라우템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
* 어린이사생대회, 전시
* 젊은이들을 위한 컴퓨터 워크샵
*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위한 태권도
* 한국 2002 월드컵을 위한 동티모르 축구팀 준비.
3. 크리스마스와 신년준비
여성들의 전국적 바자행사
음악그룹사운드 결성, 공연, 환경, 등
캠페인 행사 등...



(39) 12/25 : 중국 연변 편
「연길에서 의술로 펼치는 동포애 노중기 박사 」 (이동훈)

영하 20도 혹한속의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延吉)시, 중국내 약 200여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중, 이 연변지역에만 85만명의 조선족이 모여살고 있는 곳이다.

연길시의 연변대학 복지병원 제 1 수술실.
성공적으로 심장 수술을 마쳤던 한 40대의 한족(漢族) 여자 환자에게 응급상황이 벌어졌다. 수술부위에서 심각해지기 시작한 과다출혈. 서둘러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한국인 노중기 박사와 조선족 수술팀은 재수술에 들어갔다.
심장을 열어 환부를 치료하는 흉부외과 수술. 수술 사망률 4~5%.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예기치 못할 상황속에 환자와 의사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숫자다.

재수술에 들어간지 두 시간째, 환자의 맥박은 점점 약해져 간다. 수술 중이던 의사들과 중국 연길의 작은 병원에 봉사차 온 한인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에게 수혈을 시작했다.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십 여명의 의료진이 두 시간 넘게 매달렸다.
하지만 끝내 심장박동은 멈춰 버렸다.
최선을 다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하지만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극복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그 생명의 최전선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노중기 박사(49)는 바로 이곳 연길(延吉)을 선택했다.

노중기 박사가 연길(延吉)로 간 것은 지난 94년이다. 한글과 한자를 동시에 사용하는 땅, 중국의 변두리에서 의료해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중국인들과 조선족들을 위해 병원을 세웠다. 연변대학의 작은 위생소(보건소)를 중심으로 흉부외과, 내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일반외과를 두루 갖춘 종합병원을 韓․中 합작의 연변대학 복지병원을 건설했다.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중국의 동북 삼성(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의 환자들은 기차를 타고 30시간 넘게 달려 북경으로 향해야 하는 수고를 덜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돈이 없어 심장병 수술을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이들에게 한국과 미국의 대륙복지회로 부터의 도움을 받아 무료 혹은 절반의 비용으로 수술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줬다.

96년 13세의 심장병 어린이를 한국의 고신의료원과 연계해 수술의 기회를 제공한 이후로 현재까지 121명의 심장병 환자를 치료했다.
그리고, 수술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갖게된 아이들과 새심회(新心會)라는 모임을 통해 앞으로 그들이 자라나서, 한국의 누군가로부터의 도움받은 은혜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고자 그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계속하고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연길대학복지병원의 한국인들.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하며 그들에게 다가서는 마음. 이들은 의술을 통해 중국인들과 조선족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새로 써내려 가고 있다.

30여시간의 기차를 타고 중국의 끝에서 끝을 달려온 환자들…. 수술이 끝나면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생명의 가치보다 더 소중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노중기 박사는 항상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남기 원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지금, 노중기 박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기대의 눈빛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락처 : 001-86-433-275-4421(병원)
001-86-1390-443-3477(H.P)
001-86-433-275-1934(집)
001-86-433-275-3947(펙스)


(40) 1/15 : 인도 편
「인도 빈민촌의 자립을 돕는 한국인 선교사 이영길」 (변영섭)

인도 북부에 위치한 비하르주. 인도 전역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이곳은 가난과 무지의 대물림이 반복되는 빈민지역이다. 세계 다우 지역인 네팔의 아샘지방과 접경해 있는 이곳은 거의 매년 홍수범람 피해를 입는다. 인도 정부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치된 이곳, 치안마저 부재해 항상 폭력과 시비가 그칠줄 모르는 빈민굴 판자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한국인 선교사들이 있다. 이영길씨와 몇 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의 바로 그들이다. 가난과 무지에 시달리는 비하르의 사회에 진정한 변화와 개발을 통한 자립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그들은 종합개발원을 세우고 인도 정부에 정식등록을 하였다.

판자촌 아이들을 위한 학교 운영과 문맹 퇴치 운동
힌두교 국가로 윤회사상에 젖어 있는 인도 사람의 대부분은 현실의 가난과 무지, 불평등한 신분 계급 등을 환생이라는 명분으로 외면하고 체념하며 살아간다. 문맹률이 70%나 되고 하루 하루 자신들 몸도 추스리기 힘든지라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신경 쓴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거리의 아이들과 노동 현장에서 착취당하는 아이들을 위해 이영길 선교사가 가장 먼저 실시한 사업은 교육사업이다. 학교를 세우고 판자촌에 방치된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 실시
현재 주는 빵 한 조각에 이들은 만족한다. 하지만 이영길 선교사는 이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고 이들의 의식을 깨우치지 못하는 이상 지금과 같은 빈곤의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키워주기 위한 일환으로 버섯재배, 가내 수공업 등 직업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특히 인도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한 곳이고 남편이 떠나고 홀로 애들을 키우는 여성에 특히 중점을 두는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주거환경, 수원지 개발, 산아 제한, 저축 캠페인
인도는현재 세계인구의 35%를 차지 할만큼 인구밀집지역이다. 하지만 인구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이영길 선교사는 매주 빈민촌 사람들을 모아 산아 제한 캠페인을 벌이고 무지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에 체념하고 살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한집 한집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탁아소를 운영하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는데 힘을 쏟고 있다.

의료 봉사활동
판자촌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은 그들과 함께 늘 공존하는 것으로 체념하며 살아간다. 쓰레기장을 누비며 얻은 병이 있어도 가난으로 치료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가가호호 찾아나선 한국의 선교사. 종교적 차이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으로 마음을 닫았던 빈민촌 사람들. 하지만 인도 정부의 하나의 지원도 없이 방치되고 외면 당하는 자신들을 위해 먼 이국에서 찾아와 돕고 있는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가고 있고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에 선교사들은 힘을 얻는다.

인도 빈민촌의 자립을 돕는 한국인 선교사 이영길
연락처:001-91-612-273-570(종합개발원) 001-91-612-588-768(아시아나 센타)



(41) 1/22 : 몽골 편
「몽골에 미래를 심는 한인 의사 전의철」 (장승욱)

영하 20도에서 30도를 오가는 강추위와 도시 전역을 덮고 석탄 스모그,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로의 모습이다. 이곳 거리는 표정없는 몽골인의 인파로 가득하다. 그들의 표정에선 어떤 희망도 읽을 수 없다.
저녁 거리에는 차들이 정체현상을 보일정도로 많아지고 화려한 불빛의 상점들이 거리를 밝히지만 도시 곳곳에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맨홀속에서 잠을 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곳의 실업률은 70-80%를 육박한다. 대학을 나와도 직업 걱정을 해야하는 나라가 이곳 몽골이다.
1994년 편안한 한국에서의 노후를 마다하고 몽고로 향했던 전의철(69), 김광신(67) 두 노부부... 의사였던 전박사와 그 아내는 이곳에 와서 갖은 병마와 가난과 싸우는 몽골인들 앞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전의철 박사는 한몽간 합작병원인 연세친선병원의 원장으로 의료봉사활동에 전념했다. 그 결과 몽골 최고의 친절하고 믿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내었다. 고정고객들이 6만명에 달할 정도다. 부인 김광신씨는 서울에서부터 있던 당뇨합병증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울란바트로 대학에서 한국예절과 한국어를 가르치며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
원장직에서 물러난 전박사는 현재 연세NGO란 복지재단을 운영하며 소년원과 거리의 아이들을 치료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또 몽골 청소년들의 미래를 위해 몽골YMCA를 창립준비중이다. 나태와 게으름속에서, 미래가 없던 청소년들이 조금이나마 미래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 것이다. 또한 두부부는 몽골에서 90년대 초반 독립운동가이자 몽골황제의 주치의를 지낸 이태준선생을 찾아내 그를 기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며 기념비를 세우기 까지에 이른다. 전의철박사는 몽고에서의 이러한 노고로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학창시절부터 오지에서의 봉사활동의 꿈을 간직해 왔던 한 의사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남편옆에서 함께 봉사의 길을 걷는 노부부의 사랑과 그들이 뿌린 희망을 취재했다.


(42) 1/29 : 프랑스 편
「고문서에서 찾은 자존의 역사 - 박병선 박사」 (허백규)

기획의도 및 내용

직지심경을 발굴하고 그것이 세계최초의 금속활자임을 입증해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로 손꼽히는 외규장각 도서 다수가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을 알린 박병선 여사.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9회 KBS 해외동포상 사회봉사부문을 수상했다.
박 여사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55년. 한국전쟁 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땅을 밟은 여성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당시 파리에서 공부하는 한국유학생이라고 해봤자 겨우 50여명. 그만큼 한국에 대한 인식도 낮았고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도 컸다. 종교와 언어학을 전공한 박 여사는 공부를 마친 후, 국립도서관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1968년 직지심경의 원본을 발굴해냈고, 꾸준한 연구 끝에 직지심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는 구텐베르그가 만든 금속활자라는 기록도 수정해야만 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박병선 여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프랑스가 병인양요때 우리나라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간 사실을 최초로 밝혀내, 우리나라로 하여금 프랑스에 이 문서들에 대한 반환을 요청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같은 박병선 여사의 활약은 유럽에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내의 우리 문화재의 존재를 한국에 알리는 역할도 함께 했다.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프랑스 내의 한국 고문서들을 바탕으로 구한말부터 해방 전까지 프랑스에서의 한국인의 활동을 정리하는 교포사를 쓰는 등, 정열적인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있는 박병선 여사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43) 2/12 : 독일 편
「세계를 감동시킨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 (허백규)

기획의도 및 내용

발레리나 강수진은 세계 5대 메이저 발레단인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약하며 연 250회 이상 공연하는 월드스타. 99년엔 발레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99 브노아 드 라 당스’에서 베스트 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98년의 뉴욕공연에서는 ‘오네긴’, ‘로미오와 줄리엣’ 두 작품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여 뉴욕 관객들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뉴욕타임즈에 이같은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거리에는 강수진이 등장하는 공익광고가 커다랗게 붙은 전차도 달렸을 만큼 그는 슈투트가르트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또 시가 개발한 서양난에 강수진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댄스잡지인 댄스 매거진의 표지모델로 등장하는가하면 페르가모의 모델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제는 세계 수준급의 발레리나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강수진이지만 그러나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다. 우선 동양인, 그것도 발레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발레리나에게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강수진은 1년에 250켤레의 발레슈즈를 신을 만큼 지독한 연습벌레.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이 오늘의 강수진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9회 KBS 해외동포상 예술부문’의 수상자로 선정된 배경이기도 하다.

(44) 2/19 : 독일 편
「재독 핵화학자 김재일 박사」 (장승욱)

기획의도 및 내용
독일, 김재일 박사 (1936년 2월 7일생)
195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교육과 입학.
1965년 벨기에 겐트 대학교 핵화학 박사학위
1977년 독일 뮌헨 공과대학교 방사화학 박사학위

김재일 박사. 현재 독일 핵폐기물처리공학 국책연구소의 소장직과 뮌헨 공과대학 교수직을 겸임하고 있다. 방사성핵폐기물 처리 안전에 관한 기초적인 문제를 연구해 온 김박사는 1980년대부터 레이저 분광학적 측정 방법을 이에 접목시켜 종전의 방법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했던 나노수준의 극미량 농도 방사능을 측정 가능하게 하였다.

김박사는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1990년에는 독일 원자력 학회가 주는 “Günther- Wirth-Preis”賞을 수상하였고, 1985년에는 독일 화학학회가 주는 “Fritz-Straßmann- Preis”賞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의 새로운 연구영역의 개척은 국제 핵화학계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1987년에는 그의 주도로 독일 정부와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아 세계각국의 핵화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학술회의, MIGRATION을 결성하였다. 매 2년마다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이 학회를 통해 매년 핵화학과 관련한 300여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이밖에도 김재일 박사는 1982년에서 1983년에 걸쳐 “MIRAGE”이라는 대형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하여 유럽연합(EU)의 공동연구 프로젝트로 제안한 바 있으며, 1984년에 동 프로젝트는 EU의 공식 프로젝트로 채택되었다. 현재 동 프로젝트에는 EU 역내국가의 많은 연구소와 연구원들이 참여하고 있고 김박사는 동 프로젝트의 자문위원 겸 과제심사위원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1995년에는 “JETDEM”이라는 프로젝트를 EU에 제안하여 1996년에 EU의 공식 프로젝트로 채택되게 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김박사는 국제적인 대형 연구 프로젝트의 자문위원 겸 과제심사위원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22개 연구소의 연구소장으로 구성되어진 독일연방 원자력 안전위원회의 위원과, 18명으로 구성된 독일연방 과학기술 자문위원회의 위원으로 에너지부문을 담당하고 있으며, EC(European Commission)의 연구개발과제 (R&DProgrammes) 심의 위원으로 활동 중에 있다.


(45) 2/26 : 연변 편
「중국땅에 민족얼을 심는 연변대 박문일 교수」 (지혜원)

기획의도 및 내용
연변대학교 역사학 박사 박문일 교수(69세)
박문일 교수는 중국 연변대학교 개교 1기생으로 입학한 역사학 박사로서, 연변대학을 중국내의 유일한 조선민족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민족의 민족교육에 혼신의 열정을 다 한 사람이다. 16년간 총장직을 맡아 재직하면서 조선문학과 역사관련 학부 및 석,박사과정을 설치하였으며, 한국학을 비롯해 한,중,일 삼국관계에 대한 연구면에서 중국의 대학중 최고의 학술성과를 이뤄내게 한 장본인이다.
연변대학은 중국내 55개 소수민족대학중의 하나로써, 지난 96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중국의 100대 집중육성대학으로 지정됨으로써, 명실공히 중국의 명문대학 대열로 진입했다. 이것은 박문일 교수가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이뤄냈던 가장 큰 성과였다.
중국 동포들이 우리의 언어와 글을 그대로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연변대학의 영향력이며, 이는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이기도 하다.
지난 98년 총장직을 그만 둔 박문일 교수는, 현재 연변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역사학 강의를 하고 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고대 한,중,일 삼국관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학력 및 경력
32년 중국 용정 출생
49년 용정시립인민중학교 졸업
52년 연변대학교 역사학과 졸업
52년-현재 연변대학교 역사과 교수
70년-82년 연변대학교 교무장, 어학연구소장, 조선연구소장, 민족연구소장
82년-98년 연변대학교 총장
80년-현재 중국조선역사 연구회장
84년-현재 중국 국제교육교류협회 길림성분회 부회장
98년-현재 연변대학 길림성 동북아연구 기지 주임


(46) 3/12 : 말레이지아 편
「말레이지아의 스타, 배드민턴 감독 박주봉」 (지혜원)

기획의도 및 내용

출연자: 박주봉(36)
전주 농림고-한국체육대 졸업
前 배드민턴 국가대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복식 금메달,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복식 은메달
97년 영국 국가대표팀 코치역임, 99년부터 말레이시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재임중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80년대 중, 후반 ‘주봉버거’와 ‘주봉아이스크림’이라는 햄버거와 아이스크림이 날개 돋힌듯 팔린 적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큰 인기가 없었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인기 스포츠로 군림하고 있는 배드민턴의 세계 최고스타 박주봉의 이름을 딴 음식이었다. 배드민턴에 열광하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박주봉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주봉버거’와 ‘주봉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그의 현란한 묘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으로 몰려 들었고 경기가 끝나면 숙소까지 쫓아다니는 소동을 벌였다.

박주봉은 1982년 덴마크 오픈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입상한 뒤, 각종 국제대회를 휩쓸어 <셔틀콕의 황제> <셔틀콕의 귀재>로 불리며 이름을 떨쳤다. 올림픽에서만 두 개의 금메달을 거머쥐는 등 70여회에 걸쳐 국제대회를 석권, 기네스북에 올랐고 당대엔 적수가 없었을 만큼 한국이 낳은 배드민턴의 최고 스타였다.

그는 97년 은퇴 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배드민턴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11회 연속 국제대회 우승과 국제대회 51연승을 질주하던 세계최강 김동문-라경민 조의 연승 기록을 저지한 팀이 바로 박코치가 지도한 영국 국가대표팀의 사이몬 아처-조안 구드 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 배드민턴계의 전설로 남아있는 박주봉에게 말레이시아는 국빈에 준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며 계속해서 국가대표팀을 맡아달라는 러브콜을 보냈고 결국 그도 이를 수락, 99년 9월부터 말레이시아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사실 그의 부임이 말레이시아팀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남자복식의 대표선수 치순킷-얍킴 조는 박감독에게 지도를 받기 위해 은퇴를 번복했을 정도이고, 부임 후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99아시안컵 대회에서는 친정팀인 한국을 누르기도 했다. 박주봉이라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영입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국들이 긴장하고 말레이시아 선수들의 자신감이 높아지는 ‘박주봉’효과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국민에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스포츠의 전설인 박주봉은 이제 자신을 믿고 극진히 대접해준 말레이시아 국민들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자신이 최선을 다함으로써 팬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자신감과 성취감일 것이다.


(47) 3/19 : 남태평양 편
「남태평양을 깨우는 한인 선교사 이건호」 (변영섭)

기획의도 및 내용
남태평양 원주민의 친구 한국인 선교사 이건호(48)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한 폴리네시안 원주민교회 담임목사는 특이하게도 한국인 이건호목사다. 서구열강에게 짓밟혀온 역사로 인해 외부인에게는 배타적이기만 한 원주민들이 한국인 목사를 자신들의 영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원주민들의 지도자가 된 한국인
이들 뉴질랜드의 폴리네시안들은 물질문명을 동경하여 무작정 뉴질랜드로 밀항해온 불법체류자들이다. 그러나 거의 원시적인 삶을 살던 원주민들에게 뉴질랜드는 그들이 떠나온 밀림보다도 더욱 살기 힘든 적자생존의 세계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 폴리네시안 원주민들은 뉴질랜드 사회의 밑바닥에서 마약과 폭력등 범죄에 연루되거나, 힘은 들고 벌이는 시원찮은 막노동으로 연명하는 고단한 삶 속에 던져져 있다.
뉴질랜드 정부나 사회단체로부터도 외면 당하고있는 원주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건호목사는 8년전부터 이들을 위한 일들을 시작했다. 직장을 알선하고 야학을 운영하고...그러자 자신들의 공동체에 뛰어든 유일한 외부인 이건호목사를 원주민들은 진정한 친구로, 의논 상대로,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멸종위기에 놓인 솔로몬 군도의 원주민을 위하여
이건호목사는 이들 원주민들의 고향 솔로몬 군도에 까지 관심을 넓혔다. 이들은 왜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가.
솔로몬 군도의 원주민들은 학교도, 병원도 전기도 없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평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솔로몬 군도는 오랜 내전에 시달려 왔으며, 물도 식량도 부족한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다. 그리고 생명의 터전인 바다는 핵실험의 무대로 전락해 오염되어가고 있었다.
이건호목사가 보기에 이들 원주민들이 지구상에서 멸종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구촌의 한 형제로서 이들을 깨우쳐 자립할수있게 돕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힘으로는 너무나 미약하지만 이건호목사는 7년전부터 솔로몬 군도의 원주민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원주민 지도자를 교육시켰다.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가 동족들을 깨우칠수 있도록...그나마 지난 2년동안은 내전이 악화되어 솔로몬 군도로 갈수가 없었다. 비행기도 배도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건호 목사는 그동안 교육시킨 원주민 간호사 까사를 솔로몬 군도에 파견하기위해 2년만에 솔로몬군도로 갔다. 지난 2년간 배만 오면 이목사인줄 알고 기다렸다는 원주민들과의 반가운 해후, 이목사는 이번에도 입고간 옷까지 벗어주고 왔다.


(48) 3/26 : 미국 편
「아리랑 아라리요, 시애틀의 샛별들」 (허백규)

기획의도 및 내용
미국 시애틀에서, 한국문화를 알리는 샛별전통예술단과 최지연 단장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는 우리의 가락과 춤으로 한국을 알리는 “샛별전통예술단”이 있다. 크고 작은 지역행사와 미주지역, 유럽과 아시아에 이르는 샛별전통예술단의 총 공연 횟수는 지금까지 750여회. 1985년 이 예술단을 만들어, 현재까지 감독 겸 단장을 맡고 있는 이가 최지연 단장이다.
1983년, 목사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최지연 단장은, 남편으로부터 무용과 국악을 공부한 전공을 살려 아이들을 가르쳐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남편의 교회에서 소수의 아이들을 가르치던 최지연 단장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은 입양아들과의 인연이었다.

샛별전통예술단의 창단멤버, 입양아들과 최지연 단장의 인연
1950년 이후, 국내입양기관을 통해 해외에 입양된 어린이는 모두 14만 2천여명, 이 중 미국에만 8만 7천여명의 아이들이 입양되었다. 최지연 단장과 입양아의 인연은 1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입양아 대상 한국문화캠프에 무용교사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입양아들을 보면서, 그리고 입양아들이 미국의 문화와 현실에 부딪치며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최단장은 입양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입양아들을 중심으로 한 전통예술단이 시작된 것은 입양아 부모들의 역할이 컸다. 자신들이 입양한 아이들에게 조국의 문화를 가르치겠다는 부모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시작된 것이 샛별전통예술단이다. 입양아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정체성의 혼란이다. 샛별전통예술단의 입양아 단원들은 한국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것에 크게 감사한다. 입양아 아이들과 교포 2세들에게 한국 문화를 가르친다는 취지로 시작된 샛별전통예술단은 이제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 어엿한 미국 내 한국전통예술공연단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입양아 가정의 또 다른 가족으로...
최지연 단장과 한국 입양아 가족의 관계는 각별하다. 입양아들의 또 다른 어머니로, 아이를 입양한 부모들에겐 훌륭한 조언자의 역할을 해왔다. 특히 창단 멤버인 케일리의 어머니 수와 미아의 어머니인 애비, 미아 CK의 어머니인 제리는 자신들까지 나서서 한국음악을 배우는 열성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국 어머니 사물놀이팀이다.
입양아가족을 위한 샛별전통예술단의 정기공연. 이제는 대학생이 된 선배들과 후배 어린이들, 미국어머니 사물놀이팀의 공연이 펼쳐지고, 입양아 1세대인 신호범 상원의원에서부터 이제 미국에 온지 한 달된 입양아가 함께 관객으로 참여한 공연이다. 입양아들에게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이를 통해 꿈과 희망을 심어준 최지연 단장, 샛별전통예술단의 공연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49) 4/9 : 미국 편
「텍사스 빈민촌 거지왕초 목사님」 (허백규)

기획의도 및 내용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 근교에 한인 거지왕초가 있다.
이름은 황철회. 나이는 47세. 사람들은 그를 도넛맨, 치킨맨이라고도 부른다.
하루 지나서 팔수 없는 도넛과 치킨을 수거해 다시 한번 튀겨 텍사스 길거리에서 8년째 무료급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친해진 거리의 사람들, 노숙자, 창녀, 알콜중독자, 걸인들 등등 어느새 그는 이들의 왕초가 되어 아무런 삶의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들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중산층 미국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어 인근 대학에서는 단편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은 미국의 원조로 살았던 시절이 있고, 아직도 한국 고아들 중 상당수가 미국 가정으로 입양되어 자라나고 있지만 미국인들도 어쩔 수 없는 미국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외롭고 병든 미국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한국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 언어장애가 있었던 까닭에 소외된 이웃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황철회. 그는 고교시절 이곳에 이민을 와서 명문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에서 유능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다시 신학공부를 한 후 목사가 되었다. 현재 달라스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지만 그가 가장 정렬을 쏟는 일은 바로 소외된 거리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친구가 되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 그의 아내 전미성 역시 고교시절 이민간 1.5세대로 제약회사 간부로 일하면서 주말에는 거지왕초의 아내로서 헌신적으로 무료급식 일을 돕고 있다.


(50) 4/16 : 프랑스 편
「파리 패션가의 한국바람, 김지해」 (이동훈)

기획의도 및 내용

크리스챤 디오르와 루이비통 등을 거느린 거대한 패션 그룹인 LVMH(Louis Vuitton-Moet Hennessy)는 파리의 오뜨꾸뜨르를 이어갈, 갠조와 파코 라반의 공백을 메울 차세대 신인 디자이너로 한국의 김지해 등 일곱명을 선정해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김지해, 그녀는 이 일곱명중 가장 주목받는 디자이너로 지난 2000년 9월 8일부터 17일까지 파리 의상박물관에서 열린 다음 세대를 이어갈 신인 디자이너를 선정하여 전시한 전시회에 참가했고 같은달 25일부터 27일까지 리용에서 열린 무용 비엔날레의 의상을 제작하는 등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 번의 오뜨꾸뜨르 컬렉션을 한 그녀는 본인도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잘 나가고’ 있다.

‘오뜨꾸뜨르’는 문자 그대로 ‘고급옷’이라는 뜻. 크리스챤 디올, 입생로랑, 지방시 등 전통과 명성의 패션 명가들이 참가하는 패션쇼로 가격이 수천만원대에 달하는 ‘옷 이상의 옷’을 선보이는 자리다.

90년 파리로 간 그는 프리랜서로 일하다 ‘지해’를 만들었다. 99년 7월 비로서 오뜨꾸뜨르에 데뷔했고 올 1월 두 번째 컬랙션에서 그는 단추도 장식도 없는 ‘천의무봉’을 만들어냈다. “모시 고유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깨끼바느질을 했습니다. 바늘이 어디로 들어왔다 어디로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모두 감탄하더군요.”

형제가 많은 김지해의 어린 시절, 풍족하지 못한 가정에 태어난 그는 항상 손위 형제들의 닳고 닳은, 유행도 지난 옷을 물려 입어야 했다. 어쩌다가 설빔으로 받는 새 옷의 그 느낌을 잊지 못했던 그 때 김지해는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 고교졸업 후 일본 유학을 결심, 동경에 있는 문화복장학원에 입학 디자이너로서의 재능과 열정을 다듬었고 졸업 후 동양 그룹이라는 일본 기업에 들어가 수년간 일본과 파리를 오가며 프리랜서로 일을 하였다. 8년을 그렇게 보내고 파리에 머무르던 어느 날 그녀는 그동안 생각해 온 자신의 꿈을 실행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파리 프레따포르테의 진출이다. 여기서 김지해는 ‘ 이 옷들은 오뜨꾸뜨르를 위한 옷’ 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 디자이너들의 신선을 집중시킨 것이다.

그녀의 의상들을 살펴보면 정말 오뜨꾸뜨르에 걸맞는 재단과 디자인이면서도 한국의 흙냄새가 난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즐겨 쓰는 디자인 소재와 원단 때문이다. 그녀는 주름과 대나무를 모티브로 옷을 디자인하고 한국산 모시를 사용하길 좋아한다. 한국의 모시는 폭이 왜채 1미터가 되지 않는지에 대해 의아해하는 프랑스인에게 그것은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담기위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가장 알맞은 폭이라고 그녀는 자신있게 말한다.


(51) 4/23 : 중국 편
「중국에 사랑의 기적을 일으킨 이관숙 선생」 (변영섭)

1년에 한번, 13억 중국 인구 중 단 한 명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훈장, 유자우장. 1992년, 그 유자우장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 바로 한국인 이관숙 선생이다.
북경의 성림가지창 (의수족 공장) 대표인 이관숙 선생은(79) 한중 수교가 되기도 전인 1988년부터 중국 북경을 비롯해 12개의 성을 돌며, 선진 의수족 제작 기술을 전하고, 성림가지창을 세워 중국의 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의수족 및 전신 보조기구들을 제작해 주었다. 그가 의수족을 만들어 준 장애인만 3천여명. 이 선생은 이 공로로 유자우장을 받게 된 것이다.
이관숙 선생은 한국 전쟁 당시,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중 지뢰 사고로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다. 월남한 외로운 처지에 다리까지 잃고 좌절과 실의에 잠겼던 그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의수족 전문가 토리 박사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에 변화가 왔다. 세브란스에서 치료를 받고 의족을 하게 된 그는, 의수족 기술자로, 물리치료사와 재활치료사로 12년간을 세브란스에서 일하게 된다.
66년 미국 의수족 회사의 초청으로, 도미한 이관숙 선생은 미국에서 목사와 의수족 기술자로 22년간 활동한다. 그 후 87년 은퇴를 앞두고, 이관숙 선생은 부인과 함께 동남아를 돌아본다. 은퇴후 자신의 기술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에서 쓰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관숙 선생 부부는 6천만명의 장애인들이 있는 중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88년 중국으로 간 이관숙 선생은 5년 동안 정부와 계약, 중국에 의수족 제작의 선진 기술을 전한다. 그 후 미국의 재산을 정리하고 후원금을 모금하여 중국에 의수족 공장을 세우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관숙 선생은 공산당 간부들과의 연회석상에서 자신의 의족을 보여 주며 같은 장애인으로 중국의 장애인들을 돕고 싶다는 뜻을 전해 그들을 감동시켰다.
은퇴후의 안락한 삶 대신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일과 인생에 도전한 이관숙 선생. 자신이 의족을 하고 있는 장애인으로서, 노구를 이끌고 그가 실천하는 사랑과 봉사는 기적보다 더한 감동으로 13억 중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관숙 양력
1924년생
단국대 사학과 학사,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
대한 신학원 졸업, 연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재활의학 수련
미국 밀워키 로울리연구소에서 의수족 기술자로 일함
미국 한인교회 목회
1988년부터 중국 북경에 의수족 공장을 설립하여 6500여명의 중국인들에게 의수족을 보급함.


(52) 5/7 : 독일 편
「쾰른의 한국호랑이, 독일 유도 감독 한호산」 (지혜원)

기획의도 및 내용

독일유도의 대부, 독일유도대표팀의 한호산 총감독
현 독일 유도 대표팀의 총감독, 한호산(63) 감독은 올해로 독일팀 코칭스태프 생활 36년째다. 그 동안 독일에 총 60개가 넘는 메달을 안겼고, 그 동안의 성과와 능력을 인정받아 90년 통독 이후 최초로 외국인의 신분으로 통일된 독일 유도 대표팀의 총감독에 오르는 영광도 안았다. 유도 종주국도 아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실력으로 승부할 것을 다짐했고, 이제 명실상부한 독일 유도의 대부가 되었다.

독일과의 인연, 3년 예정이 30년으로
7살 때부터 유도를 시작한 그는 한국 유도선수권을 수 차례 석권하는 등 한국에서도 인정받는 선수였다. 그런 그가 처음 독일 유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한국대표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61년 세계유도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유도는 일본’이라는 공식을 떠올리던 서방 사람들에게 한선수의 활약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그의 활약을 지켜본 프랑스, 미국, 독일 등에서 한선수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 3년 정도를 예상하며 독일로 간 것이 그의 30년 유도인생을 결정지었다. 64년 동경올림픽에서 독일팀이 은메달을 따는 등 선방하자, 64년 독일은 본격적으로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고, 65년 정식으로 감독으로 발탁되어 지금까지 최장수 븐데스 트레이너를 역임하고 있다.

분단의 나라에서 온 통일감독
89년 통독 후, 독일 유도인들은 한호산 감독에게 총감독을 제의했다. 통일 후 첫감독이라는 중대한 자리를 외국인인 그에게 제의한 것은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그는 무엇보다 동서독 선수들의 정신적 통합을 위해 노력한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원한 유도인 한호산
이제 그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일선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 지금 그는 독일 대표팀의 총감독이면서 차기 대표팀을 위해 6세부터 20세까지 선수들의 후진양성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 게다가 쾰른 유도센터에서 한 주일에 두 차례씩 인근 마을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유도강습을 하는 자원봉사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53) 5/21 : 이태리 편
「로마의 피자 아줌마 오수지」 (지혜원)

기획의도 및 내용

이태리 로마의 명물이 된 한국인 아줌마의 피자가게
로마에 간다면 꼭 한번 들러 볼 곳이 있다. 이태리에 그 흔한 피자집 가운데에서도 로마의 명물로 자리잡은 트레비 분수 옆의 ‘피자 플래닛’이 그곳이다. 이 피자집이 유명한 이유는 신선한 재료를 듬뿍 넣은 총 100여종이 넘는 피자의 뛰어난 맛과 피자의 본고장 이태리에서 피자의 진수를 선보인 장본인이 한국인 아줌마라는 점이다.
점심시간이면 길게 줄을 서서 피자를 기다리는 단골손님들. 이탈리아인은 자국의 음식문화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한데, 이런 풍토에서 한국인 아줌마, 오수지씨가 그만의 방법으로 성공한 것이다. 콩가루를 넣어 반죽한 피자빵, 돌화덕에 구워내 기름기를 뺀 담백한 맛, 아낌없이 사용한 신선한 재료가 한국인 아줌마의 맛의 비결이다. 불고기 피자, 잡채 피자 등 한국과 동양의 맛을 응용한 피자를 선보여 조국의 맛을 알리는 데도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

오수지씨의 소원... 피자 한 조각으로 나누는 사랑
현재 오수지씨의 가게에는 직원이 3명 있다. 페루 남자, 알바니아 여자, 이탈리아 남자. 가게를 경영하는 데는 이탈리아 직원을 쓰는 것이 유리한 일이었지만, 오수지씨가 페루와 알바니아 직원들 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려운 본국 사정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였다. 설거지를 담당했던 페루출신 직원은 이제 오수지씨에게 요리법을 전수 받아 어엿하게 요리사로 승격되었고, 난민생활로 전전긍긍 살아가던 알바니아 출신 직원도 이곳의 카운터를 맡아보면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피자가게 운영으로 오수지씨가 돕고 있는 사람들은 직원들 외에도, 로마 뒷골목에 집 한 칸 없이 노숙생활을 하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난민들과 걸인, 노인들이 있다. 매일 팔고 남은 피자를 수도원, 고아원 등으로 보내고 있는 오수지 씨. 우크라이나에서 온 가난한 고학생 신부의 학비를 도와주며 그를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공평하게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 그것이 로마의 피자 아줌마 오수지씨의 소원이다.


(54) 6/11 : 터어키 편
「터어키인들의 사부님 이효주 감독」 (허백규)

기획의도 및 내용

유럽과 중동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나라, 터키. 터키의 인기 스포츠 종목이태권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장 3000여개, 태권도학과가 개설된 종합대학만도 세 곳. 이 곳에서 태권도는 축구 다음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 곳에 종주국 한국에서 온 태권도 사범은 단 한 명, 국가대표팀의 이효주 (40)감독 뿐이다.

서울체고와 한국체대를 졸업한 이효주 감독이 처음 터키와 인연을 맺은 때는 1989년. 태권도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터키엔 한 명의 한국인 태권도 사범도 없었다. 해외로 진출한 한국인 사범들이 가난한 나라 터키보다는 선진국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터키 태권도협회의 요청에 따라 세계태권도협회의 추천으로, 89년 이효주 감독이 처음 터키를 찾았을 때는 벌써 10여 년간 한국인 사범이 없는 상태였다. 누가 가도 가야할 곳이라는 생각, 이효주 감독이 월급 1000불의 박봉에도 터키라는 나라를 선택한 이유다.

터키에서 이효주의 공식직함은 국가대표팀 감독. 개인 도장을 여는 것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지만, 이효주 감독은 89년부터 지금까지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국가대표팀의 총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터키가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스포츠 종목은 세 가지다. 역도, 레슬링, 테권도. 이 중 태권도의 인기가 가장 높다.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국가에서 아파트에서 자동차까지 후한 상금을 걸고 있을 정도다.

터키 전역을 통틀어 유일한 한국인 사범, 이효주. 그래서 그의 일정은 늘 바쁘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는 국가대표팀의 연습, 각종 국제대회에 대표팀은 인솔하는 일, 선발전을 통해 새로운 국가대표 선수를 발굴하는 일이 모두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월 천불이라는 박봉에도 한국의 국기를 세계에 알린다는 사명감으로 살아온 이효주 감독. 외국인 코치는 무조건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터키에서 그는 벌써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구두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다.

연락처 : TEL) 90-532-549-6638 터키 앙카라 (-6시간)


(55) 7/2 : 스페인 편
「스페인 합창단의 ‘어절씨구 옹헤야’-지휘자 임재식」 (허백규)

기획의도 및 내용

클래식의 고향. 유럽에서 한국 음악이란 너무도 낯선 이름이다. 고작해야 중국예술의 변방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을 뿐. 그런 유럽인들의 인식을 바꾸려, 한국가곡을 부르는 합창단을 창단한 이가 있다. 테너 임재식(39)과 그가 창단한 밀레니엄 합창단이 스페인에 한국가곡을 알리고 있다.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성악과에 재학 중이던 83년 임재식은 무작정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난다. 잡안 에선 학비를 대줄 형편이 안됐고, 먼저 유학 온 누님 부부가 있었지만, 가난한 유학생의 신분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피눈물 나는 연습을 해야했던 젊은 날. 임재식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립음악원을 최고점수로 졸업하기에 이른다.

현재 임재식은 스페인의 국영방송국인 RTVE의 합창단에 소속되어, 그 중 테너 파트장을 맡고 있다. 올해로 51주년을 맞은 합창단은, 짧은 역사에도 스페인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임재식이 RTVE 합창단보다 더 신경을 쓰는 일은 99년 그가 창단한 합창단 밀레니엄이다. RTVE 합창단에서 선출한 최고의 가수, 17명의 단원으로 이뤄진 밀레니엄 합창단의 주요 목적은 스페인에 한국의 가곡을 알리고 보급하는 일이다. 유럽에 한국 가곡을 알리는 것은, 처음 유학을 올 때부터 그의 꿈이었다. 스페인 최고의 가수들이 최고의 극장에서 스페인 노래와 한국 노래를 한 무대에서 부른다는 꿈의 실현을 위해, 몇 년을 준비해야 했다. 99년 창단과 더불어 스페인의 국립극장에서 두 번의 공연을 가졌다. 올 1월에는 1200명 관객들의 환호 속에 무대에 올랐다. 2001년 1월에 열린 이 공연에서는 스페인 가수들 모두가 한복을 입고 나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공연은 곧 TV를 통해 스페인 전역에 방송될 예정이다.

밀레니엄 합창단의 성공은 비단 관객들의 환호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음악이 유럽무대에 인정을 받게 되고, 한국 가곡이 스페인의 다른 합창단의 레퍼토리에 오르게 된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성과중 하나이다. RTVE 합창단의 테너장으로 밀레니엄 합창단의 지휘자로, 그리고 틈틈이 유서 깊은 스페인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성악 지도까지 맡고 있는 테너, 임재식. 그의 꿈은 스페인, 나아가 유럽에 한국음악을 알리는 것이다.


(57) 7/30 : 그리스 편
「마도로스 황과 물방개 여사 - 아테네의 황헌 부부」 (지혜원)

그리스 해운업계의 유일한 한국인, 황헌
세계적인 해운 강국, 그리스. 황헌 씨(48세)는 그리스 해운업계에 종사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가 몸담고 있는 직장은, LPG선박을 30여 척 소유하고 있으며 전세계 LPG물동량의 40%를 거래하고 있는 그리스 굴지의 회사, ‘나프토마 (Naftomar Shipping & Co.)'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배가 제대로 운항 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부서의 감독, 즉 선박수리, 자재보급, 선원 수급, 선박 보험 등에 관련된 업무이다. 그는 한국에서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10년을 기관장으로 배를 탔다. 그가 그리스로 건너간 때는 11년 전, 그리스 선박회사에서 스카웃제의를 받으면서. 그리스 생활 11년째, 이제는 특유의 성실성과 꼼꼼한 일처리로 그리스의 해운업계에서 당당히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리스와 한국의 교량역할을 담당
‘나프토마’가 소유하고 있는 30여 척의 선박 중, 전원 한국선원이 승선한 선박은 두 척이다. 2년 반마다 한번씩은 정기점검을 위해 한국선원들이 승선한 배가 아테네로 오는데, 이때가 황헌 씨가 가장 바빠지는 때다. 선박 수리뿐만 아니라, 때때로 한국선원들이 불미스런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하면, 해결사 역할까지 하곤 한다. 조선, 해운업 관계로 이곳에 오게 된 한국 기업의 주재원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현대중공업이 ‘나프토마’회사로부터 LPG선박을 수주 받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와 한국의 해운 조선업계에서 이제 그는 튼튼한 교량이 되고 있는 셈이다.

‘글리화다’ 민박집의 안주인, 문유경씨
그리스를 다녀온 한국인에게 ‘인상적인 곳’을 물어보면, 고대 유적지를 제치고 ‘글리화다 민박집’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황헌 씨의 부인 문유경 씨(47세)가 3년 전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민박집이다. 그리스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겨오던 문유경 씨는 뭔가 생산적이면서도 보람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딸을 파리로 유학보낸 후, 남는 방 세 개로 98년 민박집을 시작했다. 돈보다는 소일 삼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민박집이 아테네 전역에 널리 알려져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투숙객들이 찾아온다. 영화배우, 기업인, 교수 등 촬영이나 출장, 학회 등으로 그리스를 찾은 사람들이 이 민박집을 거쳐갔다. 특히 그리스를 방문한 한국인들에게 이 민박집은 최고의 숙소가 되고 있다.

“한국인의 훈훈한 인정을 아테네에 심고 싶어요”
문유경 씨가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도움이 필요한 한국인들에게 힘이 되어줄 때다. 비행기표를 잃어버리고, 문유경 씨의 도움을 받았던 한 한국인 관광객으로부터는 아직까지도 가끔 연락이 오곤 한다. 가장 신경을 쓰는 손님은 출장으로 그리스를 찾은 한국의 비즈니스맨들. 와이셔츠 다림질에다, 늦게 귀가한 사람들에게는 야참까지 꼭 챙겨준다. 남편 황헌 씨도 11년 동안 그리스 해운 업계에서 일하면서 얻은 정보를 그들에게 전해주고, 그리스 사람들과의 대화에 필요한 것들을 조언해준다. 민박집 분위기가 가족 같다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밤새는 줄도 모르게 된다.
그리스에서 사는 동안 한국인 특유의 훈훈한 인정을 베풀고 싶다는 문유경씨. 그는 남편 황헌 씨와 함께 아테네에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58) 8/6 : 미국 편
「할렘가의 또순이, 베티박」 (이석훈)

기획의도 및 내용

할렘에 정착한 한국 아줌마. 흑인 음식전문점을 하는 그녀는 단순한 장사치에 머물지 않고 할렘 흑인들의 친구이자 어머니가 되어 주었다.

‘흑인 전통음식 전문점’ 운영, ‘여성기업인상’ 수상
지난 84년부터 뉴욕 할렘의 중심가 125 스트릿에서 흑인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매나스 소울푸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베티 박씨(48). 그녀는 올해 3월 28일, 할렘상공회의소가 여성의 달을 맞아 제정한 ‘여성 기업인상’을 수상했다.
처음엔 바베큐 숯불구이로 시작한 식당이었으나, 흑인 중심의 할렘가에서 흑인들의 전통 음식 50여가지를 익혀, 마침내 흑인 전통음식 레스토랑을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 17년전의 일이다. 이제는 할렘가의 흑인들 뿐만 아니라, 뉴욕 전지역에서 흑인 음식을 맛보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할렘가 일대의 명소가 되었다. 뉴욕에만 2개의 식당을 갖고 있는 그는, 앞으로 세 번째 식당을 오픈할 예정이다. 치안 부재로 백인은 물론이고 동양인들도 거주하기를 꺼려하는 할렘가에서 그가 이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흑인들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애정 때문이었다.

흑인과 한국인과의 갈등 해소 노력, 전 종업원을 흑인으로 채용
현재 할렘상인 번영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박씨가 할렘에서 비즈니스의 기반을 잡기까지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처음 뉴욕으로 이주해온 84년, 한인 식료품상점에서 발단이 된 한․흑 갈등이 심화되어 한인상점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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