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개론(1 선교)
이광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제1주 : 선교
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곧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한 학문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태초 때 이미 원대한 구원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을 인간 역사를 통해 실현하셨다. 그 구원 계획과 실현이 선교이다. 따라서 신학은 선교에서 유래한다. 바꾸어서 말하면 선교는 신학의 모체(mother of theology)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초대 교회는 전도와 선교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교회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 교회 공동체의 선교 역사가 곧 교회 역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역사하심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선교 계획과 그 행적을 기록한 선교의 책이다.
목회의 첫 발을 내딛기 위해 훈련을 받는 우리는 이 시간에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어떻게 구원 계획을 펼치시는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원대한 선교 계획에 우리를 어떻게 동참하게 하실 것인지의 그 뜻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하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헌신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선교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겨서 이루는 것이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인간이나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며 하나님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몇 가지 함의를 가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며, 새 삶을 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주 되심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교의 주체가 되신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며, 그 계획의 실행도 하나님께서 하시며, 구원을 완수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다. 선교는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인간이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영향을 주고 바꿀 수 없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선교 사역의 대상이자 쓰이는 도구일 뿐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선교는 차별이 없으며 은혜로 모든 죄인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에 들어 있으며,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무차별적으로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나 펼쳐지며 인간의 어떤 착한 행실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은혜로 주어진다.
네째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지만 인간의 역할이 단지 수동적인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 계획에 인간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신다. 곧 하나님께서는 선교 계획을 인간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실현하신다. 인간은 단순히 하나님의 선교 사역의 대상만이 아니라 사역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그 계획을 이루어나간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과 교회 공동체를 선교의 도구와 기구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라는 명칭은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을 갖춘 사람에게 주어진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choosing), 둘째는 부르시고(calling), 세째는 보내심을 받은(sending) 사람이 선교사이다. 누가 선교사가 될 것인가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보내심에 대해 순종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선택권도 가지지 못한다. 인간이 자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며 교회나 사람들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자원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선교의 사명을 주어서 파송하는 것이 선교사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감사함으로써 응답할 뿐이다.
성경에는 선교사라는 명칭은 나오지 않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를 예언자와 사도라고 일컬었다. 구약의 예언자(나비)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선교사와 같은 뜻을 지니므로 구약의 예언자는 곧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신약의 사도(Apostle)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이것 역사 선교사와 같은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냄을 받은 자들로서 사도이자 선교사들이었다. 그런데 때로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보냄을 받은 자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예수의 증인으로 살았던 그들 역시 선교사들이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선교사들이다. 그러므로 부름받고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들로서 우리는 그러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0장 13-15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쓰여 있다. 이 구절은 우선 선교의 목적이 구원임을 분명히 한다. 다음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다섯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보여준다. 그것은 보냄, 전파, 들음, 믿음, 부름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자들을 삶의 현장으로 보내시는데, 누구든지 보냄을 받으면 복음을 전파하고, 전파하면 듣고, 들으면 믿고,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주님이라고 부르며,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방치해 두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하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선교사로 보내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보내시기 전에 성령을 부어주시고 복음의 신발을 신기어서 보내신다(엡6:15). 따라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되어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2. 성경의 주제는 선교이다.
성경의 주제는 선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과 그 역사하심을 기록한 책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자 선교가 된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대체로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선교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선교의 완성을 예시해준다. 이처럼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인간 세상에서 펼치고 실현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 완성을 예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며 선교이다. 동시에 성경은 구원과 선교의 지침서이자 교과서이다. 신구약 전체를 일관되게 흐르는 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선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구약은 오실 신약은 오신 계시록은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 메시야에 대한 증언 메시야에 대한 예언
성경은 선교라는 주제로 일관되게 엮어져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해서 (창1:1) 저주로 끝난다. 구약의 말라기 4장 6절은 미완을 보여주는데 반해서 신약의 마태복음 1장 1절은 족보로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풀어보면, 신약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시키려는 새 족보 즉 새로운 창조로 시작해서 주 예수의 은혜로 (계22:21) 끝난다. 이처럼 신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이며 선교이다.
구 약 신 약
창조(창1:1) 저주(말4:6) 족보(마1:1) 은혜(계22:21)
성경의 주제가 선교이듯이, 거꾸로 선교는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선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은 다음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1. 구약은 성부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은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 복음서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전 우주의 구세주이시다.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3. 사도행전은 성령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역사하신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은 선교하시는 성령이시다.
4. 서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이다.
5.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선교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가.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흔히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간주한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구출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시고, 자신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셨다. 이 모두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 진리에 불과하다. 구약은 언약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서부터 시작한다. 말하자면 구약은 아브라함과 모세의 언약으로부터가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약은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창조부터 시작한다. 야외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민족들과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고 그의 후손들도 함께 축복하셨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전 인류이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전 인류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그러므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약속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성경은 그 약속을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온 우주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온 우주에게 약속하신 것이며, 그 약속은 전 인류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게 약속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포함해서 전 인류를 대상으로 구원의 선교를 펼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다는 구절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대상을 명시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역사적으로 제한적인 약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통해 그 제한적인 약속은 포괄적인 것으로 변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포괄하게 되었다. 따라서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약속을 전 인류에게 확장한 셈이며 전 인류를 대상으로 선교하시는 분이다.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 중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 복음서에 담겨 있다. 물론 복음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그래서 줄거리는 주인공의 구원 활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의 탄생은 구약에서 약속한 구세주의 성육신이며, 예수의 생애와 사역은 구세주로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죽음과 부활은 그 구원 계획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며 선교를 하시고 계신다.
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은 선교하시는 성령이시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들이지만 사실상 그 사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성령이다. 사도행전의 줄거리는 주인공인 사도들이 성령의 권능을 입고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복음을 전하는 활약상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유대의 수도를 복음으로 점령하고 더 나아가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점령한 것은 그들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령의 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령은 물론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고 또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나타나시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에게였다. 그러므로 성령이 강림하셔서 권능을 주고 사역을 펼친 것은 사도행전에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시작해서 성령의 선교 사역을 그 주된 줄거리로 삼고 있다. 바꾸어서 말하면 사도행전의 주인공들인 사도들 역시 크게 보면 성령의 선교 사역에서 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다. 선교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성령의 선교 사역에 사도들이 부름받고 쓰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표면적으로는 사도들의 선교 사역을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령의 선교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그런 뜻에서 선교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라. 서신서에 나타난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다.
신약 성경의 스물 한 통의 서신들은 교회의 본분을 명시하고 있다. 교회는 무엇이며 존재의 목적과 역할이 무엇이며 또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있다. 물론 서신 중에는 개인 서신도 있으며 교회가 수신자인 것도 있다. 개인 서신인 경우에도 교회 성원으로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지침을 제시하거나 권면과 권고를 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들은 목회자로서 디모데가 어떻게 처신하고 믿음을 어떻게 지키며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과 교훈들이 들어있다.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상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그러므로 서신들의 주된 내용은 대체로 교회의 양육과 성숙, 성도의 내적 삶, 교회의 예배와 연합 그리고 거룩함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세상에 침투해서 활동을 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교회는 홀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로 성스러운 곳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임을 명기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에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신들에서도 되풀이해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예배를 위해 모이고 다시 선교를 위해 흩어지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서신서에 나오는 교회들은 선교를 위해 설립되었고 선교를 하기 위해 존재한다. 서신서의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다.
마. 계시록은 선교의 절정이고 완성이다.
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 앞에 서 있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 자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또 그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하셨다. 그 축복이 실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포함해서 모든 민족과 족속 그리고 전 인류에게 구원의 복을 베푸셨다.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것은 바로 그 광경이었다. 하나님의 선교는 계시록에서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영광 중의 영광으로 실현되어서 그 절정에 이르며 완성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인간과 온 삼라만상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 영광스런 광경이 계시록을 장식하고 있다.
3. 교회는 선교에서 비롯된다.
교회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구약 성경의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함께 모여 예배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교회는 예배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에 신약의 교회는 단순한 예배 공동체가 아니었다. 신약의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 공동체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이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모여들었으며, 이들이 신약의 교회 공동체의 기원이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교회를 형성했으며,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선교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오순절 이후에 그리스도인들과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기 위해 모였다. 예수의 증인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고난과 핍박의 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했는 지 모른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힘을 얻고 다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다. 그들은 증거를 하기 위해 모였고, 그 모임을 통해 증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증인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는 증거를 하기 위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증거인 선교에서 비롯되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었으며, 교회와 선교는 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를 통해 형성되고 선교를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4. 선교는 기독교 역사의 근원이다
기독교 역사는 선교로 시작된다. 기독교 역사는 성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구원을 베푸셨는가를 기록하고 있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심과 삶 그리고 죽음과 부활, 더 나아가서 승천과 다시 오심을 통해 그리스도인들과 맺은 구원의 언약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교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면 신약은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었던 선교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역사가 선교 역사였다면 신약의 초기 기독교 역사도 선교 역사(mission history)였다. 특히 초기 기독교 역사는 제자들과 전도자들의 전도 활동과 선교 운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역사에서 선교 운동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기독교 역사는 선교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역사는 선교로 시작되었으며 선교 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선교는 신학의 모체이다
신학은 어디에서 나와서 발달해왔는가?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성경에서 기원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운 구원 계획과 그 실현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초한 신학이란 선교 신학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는 신학의 모체 또는 신학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ology)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신학은 기독교 선교와 함께 시작되고 발전해왔다. 아마도 선교 운동이 없었다면 신학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선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신학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인된 삶을 기록한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점차 확립되고 발전되고 체계화되어 왔다. 처음에는 사도들의 선교의 발자취를 따라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론적 틀과 체계를 만들어 나갔는데, 그것이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사도들의 선교 행적과 교회의 선교 활동을 연구한 것에서 출발한 신학은 점차 선교 역사(mission history)와 선교 신학(mission theology)으로 분화되고 발전했다.
사실상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학자도 아니었고 더욱이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전도자들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도자로서 선교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했을 뿐이며, 논리적인 분석이나 해석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감격함으로 기록했다. 그들이 전도자였기 때문에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한층 더 예리하게 볼 수 있었으며 또 실질적인 대처 방안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놀랍게도 선교 사역과 교회의 활동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록들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신학은 기독교 선교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약을 포괄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꼽으라면 그것은 선교일 것이다. 그만큼 선교라는 말은 신약 전체를 하나로 꿰뚫어서 묶어주는 말이다. 물론 신약의 저자들이 기록한 선교 사건들 및 사실들과 훗날의 신학자들이 해석한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신학적 이론의 기초를 다지고 체계를 세우는 데 그 근거가 된 것은 신약의 기록들이었고 기록된 선교적 사건과 사실들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교는 신학의 모체라는 주장이 상당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출처 : 이광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사진-노회 지도자 양성과정에 강의하시는 이반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