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by 이재섭 posted May 1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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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서 아굴라 라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는 영을 내리자 아굴라는 그의 아내인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 로마에서 고린도로 왔습니다.

성경은 이 부부가 먼저 바울을 찾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18:2). 바울과 아굴라 부 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 작은 만남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큰 교회를 세운 후 이들과 함께 에베소에 갔습니다. 후에 에베소에서의 교회는 이 브리스길라의 집에서 모였습니다(고전 16:19). 로마교회 역시 이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롬 16:3-5). 이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했습니다.

저희 가족이 한 겨울에 갑자기 선교지로 떠나게 되자 후원교회 목사님 한 분이 저희 집을 방문해 선교지에서 브리스길라와 아 굴라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전 답사도 없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추운 나라를 간다는 것은 엄 청난 모험이아닐 수 없었습니다.

엄동설한인 1997년 1월에 저희 가족은 구소련 카자흐스탄 수도인 알마타로 떠났습니다. 다시 약 3,000km 떨어진 우랄스크란 곳에 도착하자 그야말로 세상이 바뀐 것 같았습니다. 연일 내리는 눈은 백설의 나라 그대로였습니다. 왠만한 짐은 눈썰매로 끄는 데 심지어 갖난 아기까지 썰매에 실고 끌고 다녔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눈위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표현하는 편 이 옳을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교가 필요한 곳이면 사단도 따라와서 괴롭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이 어 느새 사단의 종이 된 듯 집요한 공세를 퍼부어 기진하고 있을 때 천사처럼 나타나 저희를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 있습니다. 그야 말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연상케하는 현지인들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그 디딤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던지 자신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 인간적인 방법에 몰두하다 보면 사단이 이를 기회로 삼아 자기 편으로 만들고 만듭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기 전에 먼저 잡초를 뽑거나 제초제를 뿌려야 하듯 선교지 또한 옥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는 말은 선교 사역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가난한 민족은 자칫하면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금력을 이용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 많습니다. 때론 현지인 가운데 좋은 마음으로 교회를 왔다가 그만 실족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 소자를 실족시키는 일은 분명히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 나라까지 와서 이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보냄을 받은 자나 보내는 자 모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 가족은 안내자의 말만 믿고 현지로 왔다가 마치 함정에 빠진 듯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시시각각 위기가 다가왔 지만 기도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희는 신자가 거의없는 도시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준비해 두신 것을 알고 놀랐 습니다.
먼저 알라와 블라지미르 부부와 그 가족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분들은 본래 현지 교회에서 일을 많이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3년전 교회 설립 단계에서 안내자로부터 큰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알라 선생님은 그 도시에서 가장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분이시기도 한데, 부친이 6.25 동란 이후 평양에 기술고문관으로 10년 간 머물게 되어 초중학교를 평양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대동강에서 물고기 잡던 이야기를 듣고 또 한강에서 고기잡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북의 벽도 허물어진 듯 정담이 오가곤 했습니다. 저희는 선교지에서 뜻하지 않는 위기가 고조되는 것을 보고 알라 선생님 댁을 찾아가 자녀들 가정교사로 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알라 선생님이 쾌히 수락함에 따라 다가오는 위험으로부터 적절한 대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선교지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많이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알라 선생님 가족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저희를 지켜주신 분들입니다. 결혼한 두 딸과 사위들도 착하고 친절해 마치 친척같이 느껴졌습니 다.
벨랴는 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내신 분이신데 드물게도 아들이 현지인 목사님이십니다. 멀리 알마타에서 한국인 선교사 교회 부 목사님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올케되는 율라와 함께 저희 집을 자주 방문해 주었습니다.

아리스 선생님은 본래 우랄스크 교회 설립 대표였는데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저희 가족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신 분이다. 7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입관리국과 관련 부서에 직접 다니시면서 저희를 변호하는데 앞장 서 주신 분이십니 다. 부인이신 리이사 아주머니도 친절하게 여러모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랄스크 교회는 한때 60명이 넘게 출석할 정도로 급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더욱이 러시아 사람이 절반이 넘는데다 남한만한 주에 유일한 목사로서 사역한 탓에 비중이 점차 커갔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급파한 듯 멀리서 온 악의 세력으로 인해 교회가 불 의의 세력에 장악되고 말았습니다.
출입관리국에서 고발이 됐다며 소환을 하자 아리스 선생님과 블라지미르 선생님, 알라 선생님이 모두 동원되어 변호에 나섰습 니다. 이분들은 측근 성도들 중심으로 법무부에 교회 허가를 신청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출입관리국 장이 앞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해 도울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마음이 놓였습니다.

수일 후 다시 출입관리국으로부터 출두 명령이 내렸습니다. 통역으로 가기 위해 집을 찾아오신 알라 선생님과 출입관리국으로 가면서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목사님, 그럴 리 없어요. 그 저께 대장이 잘 봐 주기로 했잖아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담당 경찰이 여권을 내 놓으라고 하더니 다 짜고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상부 지시라고 하는 것을 보아 훨씬 높은 곳에서 뭔가 명령이 내린 모 양입니다. 한국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냐고 묻기에 2주일은 걸려야 할 것 같다 고 하자 그렇게는 안 된다며 난색을 표명했습니다 .
우리가 보기 안쓰러웠던지 "사실 상부에서 3일만 남겨두고 내보라고 했다. 하지만 딸이 아파서 한국까지 가서 치료받고 왔으니 그 핑계로 10일을 주겠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3일은 결국 불법체류자로 만들겠다는 속셈에서 나 온 것으로 보입니다. 담당 경찰도 어이가 없었던지 "혹 한국에 가거덜랑 저런 사람은 이 나라에 못오게 얘기 좀 해 달라 "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잘 몰랐습니다.
4개월 남은 거주허가가 갑자기 10일로 줄어든 탓에 모든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알라 선생님이 물었 다. "목사님, 목사님은 이 나라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나보다 무슨 일이 있을 지 더 잘 압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알라 선생님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고자 어젯밤 잠을 전혀 못잤는데 이런 일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은 결코 현지인들의 잘못이 아니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수일 후 애써 제출한 교회 허가 신청 서류가 갑자기 반려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알라 선생님은 너무 놀란 듯 다리가 떨려 걸을 수 조차 없다며 안타까와 했습니다.

알라 선생님은 "저 50 평생 살도록 이런 일은 처음입네다. 참 무섭습네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악할 수가 있나요." 하기에 "아마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위로하라고 저희를 보내셨나 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5일은 현지인들을 돌보는데 보내고 남은 5일 동안 철수하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경비가 부족하여 2,000km 떨어진 침켄트 까 지 기차로 여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라 선생님 가족과 사위들이 기차 역으로 나와 짐을 실어주고 석별의 정을 아쉬어 했습니 다. 또 측근 현지인들이 새벽 1시에 떠나는 기차인데도 역으로 전송을 나와주었습니다. 사라선교사와 알라 선생님은 부둥켜 안고 친정 엄마와 헤어지듯 울먹였습니다.

거주 허가 종료를 사흘 남겨 두고 침켄트 출입관리국으로부터 새로운 거주를 허가받아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침켄트 도착 직후 우랄스크로 전화하자 "목사님 교회가 이제 13명 남았대요. 저희는 그저 집에서 모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안타 까왔습니다.
침켄트 지역도 사단이 득세하고 있었지만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교회허가를 받아냄으로써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습 니다. 저희는 침켄트 지역에서 2년간 사역하던 중 계속되는 사단의 공세로 끝내 인해 여권마저 빼앗기고 추방을 강요당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출국관리국 경찰 간부와 영국선교부가 여러모로 도와주어서 적절히 마무리 하고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 다.

침켄트에는 알라 선생님 인척인 르두빌라, 미사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르두밀라는 "공산시절보다 훨씬 살기 힘들지만 교회 갈 자유가 있어 지금이 더 좋습니다."라며 신앙의 봄이 오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카자흐스탄을 떠나기 앞서 알라 선생님께 송별 전화를 하는 동안, 그 사이 신앙이 깊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목사님 가족을 잠시 한국으로 보내시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돌려 보내실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은 비자로 인해 선교지 복귀가 늦어지고 있었는데 그 사이 방해자가 이번엔 알마타로 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겸 새로운 사역지를 찾던 중 혹독한 추위와 여러 가지 환경의 장애로 인해 선교가 잘 이루어지 지 않고 있는 시베리아 지역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하고 비자를 신청 중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이달 말 안에 저희 가족 모두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시베리아의 한 도시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아래는 한국선교신문 2000년 6월 19일과 26일 자에 실렸던 글임)

<이때까지 불확실하던 시베리아 진출이 얼마후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혹독한 추위로 인해 카자흐스탄보다 지내기가 다소 불리한 면도 있지만 어떠한 난관이 주어지더라도 선교지 영혼들을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문제의 주역은 지금도 알마타에 있고 동생은 우리가 있던 도시에 현지 고려인 여자와 재혼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선교지 삶의 양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

사진설명- 영문도 모른 채 한 밤중에 살던 도시를 갑자기 떠나게 된 선교사 자녀들-
사진 왼쪽부터 여 성도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분들이다.
당시 이 지역에 교회가 둘 뿐이었는데 우리가 맡고 있던 교회와 신비주의 교회
였다. 마침 신비주의 교인들이 지나다가 함께 자리를 같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