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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학”이란 용어의 배경





어떤 학문의 한 분야에 대한 이름 선택은 중요하다. “선교학”에 관해 수년 동안 여러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구스타프 바르넥이 지금의 “선교학”(Missionslehre)이란 용어를 제안하여 통용되게 되었다. 카이퍼와 도드는 “증가학”(prosthet ics)이란  용어를 선호했다. 미국의 선교학자 도날드 맥가브란은 그의 학파를 “교회성장학파”라고 불렀다. 이 용어 또한 선교학과 관련을 맺으려 했으나 결코 함께 사용된 적이 없다.


  마굴은 『행위의 희망』이란 그의 책에서 “전도의 신학”이란 문구를 선택한다. 영국에서는 “선교의 신학” 혹은 “선교학”이란 문구가 점차 사용되고 있다. 불어로는 “선교의 과학”이라고 한다.





  “선교학” 이란 용어는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교회사가 시작된 이후로 헬라어 동사 “보내다”의 라틴어 번역으로부터 많은 파생어 -mittere, missio, missiones -가 나타났다. 예수회가(Jesuit)와 카르멜(Carmelite) 수도회가 수백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던 16세기에는 “선교”(missio)라는 파생어만 표면에 나타나서 쓰였다. 그밖의 단체들도 이 “선교”(missio)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말이 영어로 “선교학”(missiology) 용어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1952년 서독 빌링겐에서 열린 세계 선교사 협의회는 삼위일체 논쟁 시기에서 기인한 고대 용어 -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부활시켰다.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우리 선교” “바로 그” 선교센터 또는 활동 등 교회 중심적인 선교 용어의 용례가 이때의 결정으로 인해 “우리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란 말로 귀착되었다. 1952년의 빌링겐 회의의 최종 보고서로부터 발췌한 핵심 문장은 “우리가 담당하고 있는 선교 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 안에 근원한다”이다.


  죤 테일러나 요하네스 아꼬로 같은 사람은 성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체”(missioes Dei)로 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헤아릴 수 없는 단체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공동체가 될 때 선교가 가능할 것이다.





  선교학의 정의


  선교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재화시키는 것과 맞물려 있는 전 세상에 걸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구원 활동들에 관한 연구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보면, 선교학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수종들도록 온 세계의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임 명령에 대한 연구이다.성령에 의지하여 말과 행동으로 교회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 전체와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전달해야 한다.


  선교학은 과학의 도전 즉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어떠한 시도도 이를 명확히 분석 조사하여 그들에게 충고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즉 “교회는 언제나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하에서 그의 전통을 새롭게 해야 한다”.


  선교학은 결국 신학의 한 과목으로 다루어야 되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삼위일체적인 가르침이 따라야 선교학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학”이 신학 백과 사전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이러한 예는 신학이 교회 중심적 또는 인간 중심적이었을 때 나타난 현상이다.


 선교학의 정초와 쉴라이에르마허


 쉴라이에르마는 선교 과학의 위치를 광의의 신학영역 내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위대한 세기의 첫 신학자이다. 그는 어릴 때 모라비안 일파인 ‘헤른후트파’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는 “선교방법론”에 대해 기술한 바 있으며, “교회의 영역이나 근처에 살고 있는 종교 문외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의 사고는 철저히 역사와 문화에 의해 제한을 받아왔던 만큼 극히 단편적이었는데, 실제 그의 신학 사상 또한 왜곡된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선교학을 실천신학보다 윤리 항목에서 더 광범위하게 다룬다.





  아브라함 카이파와 바빙크 사상 내에서의 선교학


  카이퍼는 쉴라이에르마허의 발자취를 따라 선교학을 실천과목들, 또는 목회학적 부류 사이에 넣는다. 카이퍼는 선교학을 “증가학”이라 부르면서 설교자의 과목에 포함시킨다.


  바빙크도 역시 선교학을 실천 과목들에 넣는다. 하지만 그는 선교학을 다른 신학 과목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빙크는 이 독립된 과목을 목회학 부류에 넣고자 하였다. 그는 선교가 가르침뿐 아니라 봉사와도 연관됨을 바로 주목하였다.





 교회사의 부분으로서의 선교학


 유럽의 첫 “선교학” 창시자인 구스타프 바르넥은 1887년의 강연집 『학문으로서의 선교학』에서 선교학의 위치에 대해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선교의 역사를 폭넓은 교회사의 연구 내에,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성경 신학 과목들 내에, 선교에 관한 연구를 실천신학의 구조 내에 편입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교의학의 부분으로서의 선교학


  디엠(H. Diem)은 “선교학”을 조직신학 또는 삼위일체와 종말론의 교리들에 고나한 과목 내에 둘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선교학을 조직신학에 편입시키자는 주장은 결코 지지받지 못했다. 선교학은 사실상 모든 신학 과목과 연관이 있어서 어느 한 분야에 종속시킬 수가 없다.


   물론 복음전파란 의미에서 선교학은 명백히 실천 과목에 소속한다. 그러나 선교학은 피 선교지의 사람과 관련된 학문이어서 어느 과목에서도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일면이 있다. 따라서 선교학은 선교적 차원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신학 과목들을 완전케 해야 하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과 목음을 전세계에 전달할 때 진정한 봉사를 하게 된다.





  선교학과 다른 과목들과의 관계





  신학과목들


  성경신학-특별히 주석과 해석학은 교회의 선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에 대한 바른 시각에 중요하다. 성경해석학 - 이것은 선교학에 매우 중요한 과목으로, 복음서들은 다양한 환경들의변화 내에서 어떻게 제시되었는지에 대한 실제 삶의 사진들이다. 특히 신약은 선교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조직신학의 과목들 즉 교의학, 교리사, 변증학은 선교학이 조직신학을 보완할 수 있는 것 만큼 선교학에 가치있다.


  윤리학 또한 개발도상국에서 배울 수 있는, 그리고 가까이 접하게 될 문제에 대해 다룬다. 모든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문제들의 핵심은 윤리적인 문제이다.


  교회사 분야에서 선교학은 서구 선교의 역사로부터 많은 점을 배운다. 또 ‘교회일치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종교학’은 매우 밀점한 관계에 있다. 특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비신학과목들


  문화인류학의 발견들은 신생교회드르이 전후 상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비서구사회학’ 방법들과 결과들은  선교학에 중요하다. 또한 ‘정치학’과 ‘논증학’ 두 과목 역시 선교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계 선교의 성경적 근거와 명령


  오늘날의 선교는 “최대한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며, 현 시대의 세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 사업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상 얼마전까지만 해도 선교는 “서구 문명의 확장”에 기반을 두었고, 그들의 방법은 “식민주의에 따랐으며”, 신권 전치 향태러 세속화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변명으로 퍙창되었다. 그러ㅏ나 이 모든 것이 반 선교적 소동을 좇아서 좌초되고 붕고되었고, 현재는 전세계를 통해 퇴색되고 있다.


  우리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왔던 베트남이 자유국가의 도움을 거부한 사실과 아프리카 대다수의 나라가 기독교보다 이슬람을 선택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그들 눈에는 ‘선교’가 곧 강대국의 식민정치의 수단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나마 기독교 국가라고 자처하는 나라들이 혹독한 탄압과 자국 우선주의의 정치를 편 탓에 기독교 자체를 불신하게 된 것이다.





  선교를 성경적 기초를 찾는다고 해서 이미 이루어 놓은 방법에다가 성경을 끼워 맞추는 식은 곤란하다. 성경 속에서 선교의 본질을 찾고 이에 따를 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교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조명할 필요가 있다. 바벨 사건 즉 민족 분리의 원리와 언어 영역,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택 배경과 그 역활, 그리고 유배 상황에서 나타난 보편적 동기의 진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 그분은 어느 민족 누구이던 자신을 찾고 섬기기 원하신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한때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기록된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곧 세계 선교의 가능성을 일찌기 열어 주신 엄청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관심이 유대로 제한된다면 굳이 이방언어인 헬라어를 택해 성경을 주실 이유가 없지 않는가.


  선교는 때때로 적대적인 나라에도 이루어져야 한다. 구약의 요나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방 구원에 어떤 관심이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여기서 한 사람(요나)의 타고난 본성이 어떻게 변화되고 선교에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해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요나는 사도적인 성향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강압적인 훈련을 통해 훌륭한 선교사가 된다.


  요나서에서 관심을 끄는 단어는 “가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요나가 가야할 곳은 니느웨 즉, 전체주의, 야만성 긜고 호전성의 중심지이며 수치스러운 박해, 악독한 고문, 제국주의자의 뻔뻔함으로 악명 높은 니느웨로 가야 했다.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해 니느에에 절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원하시고 니느웨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요나는 부르신을 받은 선교사임에도 ‘선교’에 마음이 없는 선교사였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이 이방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베드로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고 하신 것 처럼 하나님의 명령은 때때로 뜻밖의 명령이 주어진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때 새로운 역사가 창조된다.





   중간 시대의 기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시대에 관한 연구는 유대인들의 개종화 노력에 대한 많은 증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는 유대인의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의해서도 수행된 선교 사역을 분명히 입증해 준다. 70인역의 번역은 이미 이방 세계에 젖어 모국어 조차 상실한 디아스포라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이 70인역은 문명화된 온 세상에 받아들여졌고 유대 회당에서도 살명되어졌다. 디아스포라 유대주의의 선교 영향은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것보다 훨씬 컸다.  더욱 많은 것을 유대인들은 일찌기 기독교 정신에 끼쳤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 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도를 하고도 결국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예수와 바울은 유대인의 선교는 인정했으나 그 내용은 불신하였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들어 복음을 재해석하므로 바른 길을 제시하였다.





  신약성경: 세계 선교의 책


  처음부터 끝까지 신약은 선교의 책이다. 신약의 존재는 초대교들회의 성교사역에서 비롯되었다. 그 복음서들은 사실상 선교를 전파하는 “살아있는 기록들”이다.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 모든 다양한 구약의 동기들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한다. 특히 변화 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계신 예수님은 선교의 중심임을 드러내 준다. 사마리아인들은 요 4:42에서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고 고백하였다.


  이사야 61장의 적용은 예수의 복음 선포로 시작되었다. 마가복음 1:15에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결국  선교는 예수에 대한 증거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선교란 예수의 복음이 온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복음은 이스라엘부터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행 1:8참조).


  마태복음 28장에 세계선교에 대한 명령을 실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의 결론이 아니라 전 성경의 결론이다. 예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곧 전인류를 선교 대상으로 포함시킬 것을 가리킨다. 그들의 변화된 삶의 출발은 ‘성부와 상자와 상령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것’으로 표시했다. 세례를 받은 노예인은 자유인이 되었다. 이말은 삼위일체의 중요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은 지상명령과 더불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덧붙였다. 그리스도는 전 시대를 통해 자기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예수님의 선교에 대해 사복음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성경적 선교관과 바울의 비중


  성경에 나타난 선교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을 그의 부르심이 유대인, 자신의 백성(롬10:1)에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지만 그는 특별히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앗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주요한 목적은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백성들에게 다양하게 구별을 두어 능력있게 말하고 있다. 그는 팔레스타인 유대인 개념, 헬라적 유대인 개념, 그리고 헬라적 이방인 개념들을 맞추어 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울의 개념 중 다음 두 가지는 모든 선교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그는 성령의 부르심에  항상 열려있었다는 점과 둘째, 그가 의식적으로 그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사역한 것 위에 추가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 개척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사역의 장에서는 기꺼이 협력자가 되기 원했다.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그의 마지막 삶의 위대함은 복음으로 인한 수난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전력을 다해 헌신하였음에도 그의 마지막은 순교로 끝마쳤다. 누가는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독자가 바울에게 지나치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피하려는 듯 이 사실을 제외한 채, 사도행전의 막을 내렸다.





   교회와 유대 민족간의 복음의 교통


  오늘날의 선교는 여섯 대륙을 두루 감당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복음의 진원지인 이스라엘 선교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바울의 할동 무대였던 터어키, 이라크 등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관심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유대 민족은 신비로운 민족이다. 한때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자 복음의 발살지이면서도 정작 오늘날 기독교 인구는 극히 미미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하기 까지 민족이 당한 수난도 적지 않다. 1973년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유대인은 14,236,000이었다. 그중 2,632,000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고 국외 유대인의 절반 이상이 남북 아메리카에 살고 있다. 소련에 2백 50만명, 서구 유럽에 약 100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


  유대인 선교를 위해 우리는 흩어진 유대인에 대한 접근을 개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1:8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란 말로 복음의 최초 대상이 유대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유대인이 비록 예수님을 죽인 자들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피해선 안될 대상임을 보여준다.


  신약 시대로부터 콘스탄틴 시대 까지만 해도 유대주의와 기독교는 그리 적대 관계가 아니었다. 특히 콘스탄틴 이전 시대에 유대주의는 공인된 종교였고, 금지된 종교를 믿고 있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호소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 종교가 되자 교회 교부들 가운데 유대인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졌다.


  예로 암브로스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에게 타버린 유대인의 회당을 건설하지 말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유대인을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 신학 - 지금까지도 전래되어 옴-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더우기 십자군 시대에 유대인들은 사냥 대상이 되어 심지어 성지 순례를 가다가 십자군에 의해 희생되기 일쑤였다.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뒤따랐다. 결국 유대인들은 구약에 대한 기독교의 시각을 공작하였고 예수의 인성을 저주하였고 심지어 신약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주석을 쓰기도 하였다.


  루터는 개혁 초기 유대인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나 그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그의 유대인에 대한 사랑은 결렬한 거절로 전환하였다.


 칼빈도 때때로 남을 잘 매도하는 경향이 있어 유대인들을 형편없이 비판하였다. 결국 개혁 신학자들이 유대인에 대해 갖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유대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그들을 대치하였다.


  (2) 신약의 교회는 이제 소수 유대인들이 접목된 주된 줄기가 되었고 이는 로마서 11:17에서 명백히 말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지 않는다.


  유대인에 대한 거부와 핍박은 독일 나찌에게 전가되었고 그 결과 수 백만의 인명이 살상되었다. 어린 아이를 포함한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그것도 문화가 앞선 나라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역사의 수치로 보아야 한다.


  동부 유럽, 특히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극심한 고난을 견디어 왔다. 유태인 “학살”(pogrom)이란 단어는 러시아 말이다. 러시아 황제의 지배 동안 유대인들은 끊임없는 차별과 박해의 표적이었다.





  WCC와 이스라엘


  WCC내에 이 문제에 대한 기구로 “교회와 유대민족에 관한 위원회”(CCJP)가 생겨났고 1974년 이후, 이 위원회는 동시대 종교와 사상들의 대표자와의 대화(DRCRI)라고 불리우는 WCC분과의 하나가 되었다.


  이 단체에서 교회, 선교 조직, 그리고 협회들이 서로 연구하는데 지원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증거와 본질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과 협력한다.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에 화해와 대활ㄹ 진전시킨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로마  카토릭에서는 비교적 정직한 교황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요한 23세가 유대인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최근들어 유대인과 기독교의 화해에 대해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니이버와 틸리히 등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상호 보완을 주장한 바 있다. 특히 니이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에게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누가 유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베드로와 동료 사도들은 본래 일차 전도 목표를 자국민인 유대인에게 두었다가 성령의 조정을 받고 이방 전도를 시작하였다. 오늘날은 유대인 기도교인들이 자국민 전도에 애를 쓰고 있지만 역시 선교의 관심이 필요한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사는 동안 다양한 문화와 관습 그리고 종교에 젖어들었다. 따라서 그들의 이해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으로는 먼저 개인적인 우정의 수단이 제일 유리하다. 유대인은 일단 차별 의식이나 선입관이 없이 접근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상호 존경하는 대화 체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문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특히 메시아의 고대 사상은 대화의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종종 왕국이 메시아 자체보다 우월하다는 다른 극단으로 가곤한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은 메시야와 그의 왕국이 이미 왔고 또한 궁극적 완성을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을 선퍼하고 있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일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평화 협정을 통해 화해 무드가 깊어가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거대한 하나님의 시계 바늘이 돌아가고 있다. 역사의 흐름을 성경으로 답을 찾는 것도 모순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사랑과 화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선교 임무 수행을 위한 동기들

  선교에 앞서 선교 임무의 동기에 대해 철저히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순수한 동기들


  선교의 동기로 먼저 (1) “순종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 (2)사랑, 자비 그리고 동정의 동기가 따라야 한다.(3) 영광의 동기 즉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돌리는 것은 신약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동기이다. (4) 종말론적 동기. 선교의 열정에는 종말론적 동기가 중요하다. 모든 대륙에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달려가는 선교사에 종말 문제는 미룰 수 없는  사고이다. (5) 긴급함. 긴급함의 동기는 하나님 나라의 기대라는 동기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6) 개인적 동기. 바울은 고전 9:23에서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말했다. 어떠한 외부적인 동기 보다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개인적 동기가 더 중요하다.


 

  불순한 동기들


  제국주의적 동기- 선교사역, 특별히 서구가 행한 선교에 대해 가해진 비판들 중 하나는 그것이 제국주의적 동기들 때문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문화적 동기 - 19세기 동안 문화적 동기가 선교를 위한 참된 본질인 양 간주되었으며, 선교 사역은 선교사의 문화 의식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이것은 피선교지의 문화를 송두리채 바꾸려는 노력으로 대체될 수 있는데 그 만큼 무모하고 어려운 계산이다. 어느 정도까지 상대 문화를 이해하고 근접하려는 노력들이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전근대적인 방식이다.

 


  상업적인 동기 - 선교지의 개척과 무역을 통한 실리적 태도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도 이런 유형이 자주 목격이 되고 있는데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만큼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교회 식민주의 -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이 이른바 교회식민주의로 부르는 선교 태도이다. 선교사가 자기 모(母) 교회의 상을 선교지에 심어 버리는 태도이다. 실제로 스페인 권 선교지의 한 교회를 출석하다가 돌아온 자매는 헌금 종류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어 물어보았더니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가 세운 교회였다. 이렇듯 한국 교회의 복사판을 만들기 보다 현지 실정에 맞는 교회 설립이 필요하다.  선교지 교회의 주인은 곧 현지인이다.

 





  세계 선교와 국내 선교가 항상 병행할 때 그만큼 뻗어가게 된다. 어떤 교회는 국내에 있는 어려운 교회보다  먼 나라에 선교비를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반대로 선교에 무관심한 교회도 적지 않다. 두 가지 모두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아직 한국은 기독교 신자가 30%를 넘어서지 못한 채 정체 현상을 빚고 있다. 따라서 선교와 병행해서 국내 전도와 개 교회를 돌보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면서 세계 선교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사진- 러시아 에반젤리칼 교회 성가 연습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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